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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들이 보는 ‘북핵’] “망명 후회… 이민가고 싶다”

 


[탈북자들이 보는 ‘북핵’] “망명 후회… 이민가고 싶다”

“차라리 미국이나 일본에 가서 살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다.”

탈북자 윤정식(49ㆍ가명)씨는 최근 북한의 핵(核) 개발 재개 결정과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에 대한 한국 정부의 미온적 대응에 실망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인민군 장교 출신으로 한국에 온 지 2년째인 윤씨는 “그동안 지켜본 김대중 정부의 대북(對北) 정책은 북한에 줄 의무만 지키려 할 뿐 북한의 잘못을 말할 권리는 행사하지 않으려는 정책으로 비쳐지기에 충분했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북한의 민주화에 일조하고자 험난한 탈북 과정을 거쳐 대한민국에 망명한 나로선 이젠 대한민국에 살게 됐다는 긍지도 재미도 없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라고 그는 털어놓았다.

▲ 작년 11월15일 오전 서울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자유시민연대와 '시민과 함께하는 대학생연대'회원들이 북한 핵개발에 반대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하고 있다.
북핵 사태는 이처럼 탈북자들로 하여금 한국 망명을 후회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고 있다. 그 전까지만 해도 탈북자들은 김대중 정부가 ‘북한에 돈을 주고서라도 평화를 사야 한다’는 논리로 대북 지원을 하는 것에 불만이긴 했으나 한국 정착을 후회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북핵 사태로 한미(韓美) 동맹이 흔들리고 남북한 ‘민족 공조’가 이루어지는 듯한 양상이 빚어지자 ‘두려움’을 느끼고 제 3국행을 꿈꾸는 탈북자들도 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한 대외(對外)기관 출신으로 1997년에 입국한 김인성(40ㆍ가명)씨도 북핵 사태를 계기로 괜히 한국에 정착했다고 후회하고 있다. 김씨는 “2000년 6월 평양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된 이후 김정일 정권의 독재적이고 반인권적인 본질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 부담스럽게 여겨지면서 처음으로 한국에 망명한 것을 다시금 생각하긴 했으나 후회까지는 하지 않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대선 전후로 반미(反美)정서가 확산된 결과 북핵 사태 직후 상당수 한국 사람들이 ‘북한의 핵무기는 남한이 아닌 미국이나 일본을 겨냥한 것이기 때문에 문제되지 않는다’고 한 여론조사 결과가 나온 것을 보고 갑자기 한국에서 살기가 싫어졌다고 그는 털어놓았다.

북한 정무원의 간부 출신인 신영완(51ㆍ가명)씨는 이번 대선과 북한 핵 사태를 계기로 한국에 망명한 것이 잘못이었다는 생각을 더욱 굳힌 경우이다. 신씨는 “1998년 말 한국에 왔을 때 당시 정보 당국이 내게서 고급 정보를 전부 빼내고 난 뒤 냉대하는 것을 보고 그 때 이미 한국 망명을 후회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내가 갖고 왔던 정보 정도면 충분히 미국에 망명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1990년대 초 한국에 망명, 탈북 1세대 중 한 명인 김한종(35ㆍ가명)씨는 “탈북자들이 한국 망명을 후회하게 된 데는 북핵 사태에 대한 한국의 ‘이상한’ 대응보다는 지난해 12월 대선 결과가 더 큰 작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대선 직후 이민가고 싶다는 탈북자들이 급격히 늘었다”고 전했다.

이제 와서 이들 탈북자들이 한국 망명을 후회하는 것은 단지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새 정부의 대북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만은 아니다. 그들로서는 한국이 아닌 다른 자유민주국가에 망명했더라면 김정일 정권의 반인권적 본질을 좀 더 효과적으로 세계에 알릴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최종 정착지를 한국에서 미국이나 일본 등 제 3국으로 옮기는 꿈을 꾸고 있다.


▲ 탈북자 25명이 작년3월14일 중국 베이징 중심부 외교가에 있는 스페인 대사관 건물 안으로 들어간 뒤 손을 머리 위로 흔들며 기쁨을 표하고 있다.
윤정식씨는 “나 같은 정치적 난민자들이 한국에 온 것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북한의 개혁ㆍ개방을 위해 싸우기 위해서”라며 “이제 한국의 정치 환경이 그 같은 투쟁에 불리해진 만큼 미국에 가서 좀더 북한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한종씨도 “미국의 경우 인권의식이 우리보다 높아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탈북자들의 목소리들이 한국에서보다 존중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민 원하면 국정원 허가 받아야

그러나 이들의 꿈은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대다수 탈북자들의 여권은 국가정보원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이 때문에 탈북자들로서는 외국 여행뿐만 아니라 이민을 원할 경우 정부의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한다.

문제는 2000년 가을 황장엽(黃長燁)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미국행이 좌절된 데서 확인되듯이 정부가 조금이라도 대북 정책에 부담을 줄 소지가 있다고 판단되는 탈북자들의 해외 여행이나 이주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윤정식씨는 “최근 미국을 방문하려고 했으나 정부가 승인해주지 않는 등 힘들어서 포기했다”고 말했다. 이상섭씨는 “정부 승인 없이도 미국을 방문하거나 이민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찾고 있다”고 했다.

더군다나 일반 주민 출신의 탈북자들로서는 미국이나 일본 정부가 원하는 북한 정보는 물론이고 돈도 없기 때문에 제 3국으로의 재망명은 ‘그림의 떡’이다. 북한에서 당ㆍ정ㆍ군 간부를 지낸 탈북자들도 마찬가지다. 한국에 들어와서 자신들이 갖고 있던 고급 정보를 모두 털어놓아 달리 갖고 있는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최종 정착지를 미국 등 제 3국으로 옮기려다가 이같은 어려움에 봉착한 일부 탈북자들은 요즘 여행을 다니거나 집에서 두문불출하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있다. 김인성씨는 가족과 함께 전국일주 여행을 떠났다. 그는 “비자 받기도 어렵고 정치 문제만 생각하면 골치가 아파 서해안에서 시작해 전국 여행 중”이라고 했다.

북핵 사태에 대한 탈북자들의 또 다른 반응은 정보 수집을 통해 사태 전개를 예의 주시하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탈북자들은 중국 동북 3성에 거주하고 있는 친척이나 지인(知人)들을 통해 북한 사정을 수시로 파악, 북한이 핵개발 재개 결정과 핵확산금지조약 탈퇴 선언을 내린 배경에 대해 분석하면서 북핵 사태와 관련해 자신들의 태도를 정하고 있다.

북한 기업소 지배인 출신의 김중식(56ㆍ가명)씨는 “북한과 교역하는 중국 기업인들을 통해 북한의 최근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주민들 분위기가 험악해졌다는 사례들을 입수했다”고 말했다. 이같은 정보를 바탕으로 그는 “북한이 핵문제로 대미 관계를 긴장시키고 있는 목적은 심각한 경제난으로 인해 주민들의 반정부 의식이 확산돼 자칫 체제가 불안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내부 불만을 반미로 돌리려는 것”이라면서 “아직까진 위기 상황은 아니라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영남(43ㆍ가명)씨는 아예 북한 핵 위기가 본격화하던 지난해 12월 말 친척 방문 목적으로 승인을 받아 중국을 방문해 북한 국경 근처까지 다녀왔다. 그는 “당시 신의주가 바라다 보이는 단둥에서 북한의 경제난이 최악이라던 1996·1997년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그는 요즘 북한의 핵카드는 ‘주민 불만의 외부 돌리기용’이라고 분석하면서 조심스럽게 사태 추이를 관망하고 있다.

제 3국으로의 재망명을 꿈꾸는 탈북자들이나 조용히 정세 분석에 열중하는 탈북자들 모두 요즘 입에 달고 사는 말은 ‘안타깝다’이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막기 위해선 한국과 미국이 공조를 강화해야 하는데 한국에서 북한과 미국을 중재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북한의 핵위협이 먹혀드는 것 같아 안타깝다는 것이 탈북자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김대중 정부의 정책 결정자들은 자신들이 그동안 ‘햇볕정책’만으로 북한을 변화시키겠다고 노력해 온 것이 북핵 사태로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지 깨달아야 하는데 아직도 그것을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탈북자들은 답답해했다.

탈북자들은 자신들의 이같은 심사를 어떻게 표현하든 간에 북핵 사태를 놓고 한ㆍ미 간 갈등이 빚어지고 남북한이 공조하는 듯한 양상이 나타나자 애초부터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온 듯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윤정식씨는 “마치 바늘 방석에 앉아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일부 탈북자는 남북한이 이러다 나중에 정말 ‘민족 공조’ 하겠다고 나서면 최악의 경우 북한이 한국에 살고 있는 탈북자들을 돌려 보내달라는 요구를 해오는 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이교관 조선일보 통한문제연구소 기자 haedang@chosun.com)


밀려오네
2003-02-06 03:3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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