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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셔널리그

 

NL의 2대 회장으로 선출되는 시카고 화이트 스타킹스 구단주 윌리엄 허버트(William A. Hulbert)는 내셔널 어소시에이션에 대한 쿠데타를 주도한 인물이었다. NA의 마지막 시즌이었던 1875년 겨울,



내셔널리그의 건설자 윌리엄 허버트

시카고 팀의 전력강화를 위해 허버트는 보스턴에서 투수 앨 스폴딩을 비롯하여 로스 반스, 짐 화이트, 칼 멕베이 등을 영입했다. 허버트는 또한 애틀랜틱스로부터 애드리안 앤슨(Adrian Anson)을 데려오는데, 후일 오랫동안 시카고 팀의 감독 겸 선수로 활약한 앤슨은 메이저리그 사상 최초로 3,000안타를 돌파한 타자가 되었다.

이 조치는 선수들이 주도하던 NA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허버트는 경영 감각을 가진 투자가들이 이끄는 새로운 리그를 창설하려 함으로써 이에 대항했다. 세인트루이스, 루이빌, 신시내티 클럽의 지지를 등에 업은 허버트는 1876년 2월, 뉴욕, 필라델피아, 보스턴, 하트포드 등 동부 지역 클럽 대표들까지를 불러 모은다. 이 여덟개 구단의 회합에서 마침내 내셔널리그(the National League of Professional Base Ball Clubs)가 탄생하게 된다. 내셔널리그는 오늘날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메이저리그로 남게된다.


내셔널리그는 허버트가 주창한 13개 항목의 조직 계획을 승인했다. '프로 구단들의 리그'라는 명칭에서 알 수


1884년 간행된 스폴딩 가이드의 표지


있듯이 새로운 리그는 선수들보다는 리그에 참가하는 클럽들의 이익을 강조했다. 재정 상태가 양호하고 공동 출자 방식을 채택한 클럽에게만 리그 참여가 허용되었다. 각 클럽은 매년 100달러씩을 리그 운영을 위해 부담해야 했다. 이 돈은 분쟁 조절, 경기 기록, 전담 직원 고용, 심판 고용 등의 용도로 지출되어졌다. 심판들은 매 경기당 5달러 씩의 수당을 지급받았다.


내셔널리그의 8개 구단은 지역적으로는 동-서부라는 기준 하에 편성되어 있었다. 각 구단은 자기 본거지 내에서는 독점적 권한을 행사했다. 1876년의 첫 시즌을 위해 8개 구단은 상대팀당 10게임씩 총 70게임을 치르며, 이를 어긴 구단은 리그에서 축출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도덕적으로도 엄격한 기준을 마련해 도박 행위 금지, 구장 내 주류 판매 금지, 일요일 경기 금지 등의 규율을 마련했으며 선수들의 자유 계약에도 제약을 가했다. NA 시절처럼 선수가 이 구단 저 구단 마음대로 적을 옮기는 행위는 이제 인정되지 않았다.





'내셔널리그의 아버지' 허버트는 1877년에서 1882년 사망할 때까지 리그 회장으로 재임하면서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가 강력한 권위를 행사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던 인물은 수석 부관 격이었던 앨 스폴딩이었다. 현역에서 은퇴한 후 스폴딩은 신생 내셔널리그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이자 든든한 보호벽이 되었다. 그에 대한 보상으로 스폴딩이 설립한 스포츠 용구 회사는 내셔널리그 공인구를 독점 공급하며 매년 가이드북을 출판하는 권리를 획득했다. 1877년 스폴딩의 절친한 친구였던 헨리 채드윅이 이 가이드북, 즉 스폴딩 가이드(Spalding Guide)의 종신 편집자가 되었다.


성공적인 데뷔에도 불구하고 내셔널리그의 첫 4년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이윤 하락, 대형 스캔들, 인터내셔널



프로비던스 그레이스(1882년)

어소시에이션(the International Association)의 도전 등은 내셔널리그를 위협하는 요소였다. 1876년 원년 리그의 승자는 앨 스폴딩이 감독 겸 선수로 활약한 시카고 화이트 스타킹스였다. 시카고 팀은 52승 14패의 기록으로 2위를 여섯 경기 차로 따돌리며 첫 우승을 차지한다. 시카고 팀의 독주로 관중이 감소 추세를 보이자, 불만을 품은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와 뉴욕 뮤추얼스는 서부 지구에 할당된 마지막 주 경기를 치르지 않았다. 이는 당초의 합의 사항, 즉 팀네 할당된 모든 경기를 치르기로 한다는 약속을 어긴 것이었다. 이에 대한 응징으로 허버트는 즉각 두 구단을 내셔널리그에서 제명했다. 이 조치로 인해 1883년까지 대도시인 뉴욕과 필라델피아에 내셔널리그 프랜차이스는 없어지게 되었다. 어슬레틱스와 뮤추얼스를 축출한 허버트가 이 지역에 새로운 클럽을 유치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내셔널리그가 공식 스케줄을 처음 채택한 1877년에는 여섯 개 구단만이 경기를 치렀다. 그 해 앨 스폴딩은 현역 선수 생활을 마감하기로 결정했다.


시카고 팀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찬물을 끼얹는 소리였지만 라이벌 루이빌에게는 희소식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1877년 시즌에서 우승한 팀은 후반 역전에 성공한 보스턴 레드 스타킹스였다. 레즈는 루이빌을 일곱 경기 차로 눌렀다. 그러나 이내 스캔들이 터져 나왔다. 보스턴 팀에 돈을 건 도박사들이 루이빌 소속의 선수 네 명을 매수하여 중요한 게임에서 지도록 수를 쓴 일이 폭로된 것이다. 허버트는 혐의를 받은 네 명의 선수, 짐 데블린, 조지 홀, 윌리엄 크레이버, 알 니콜스를 영구 제명함으로써 이 위기에 대응해나갔다. 스캔들의 여파로 루이빌은 리그에서 탈퇴했으며 이어 하트포드와 세인트루이스 팀도 뒤를 따랐다. 이들의 빈자리는 인디애나폴리스, 밀워키, 프로비든스 클럽이 가입함으로써 메워졌다.


그러던 와중에 NL은 인터내셔널 어소시에이션의 도전을 받았다. 인터내셔널 어소시에이션은 입장 수익을



조지 홀

공동 분배받는 구단들의 느슨한 조합이라는 조직상의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위협을 느낀 NL 측은 '리그 동맹(League Alliance)'을 결성해서 인터내셔널 어소시에이션을 고사시키고자 했다. 리그 동맹이란 어느 리그에도 속해있지 않은 독립 구단들에게 매년 10 달러의 권리금을 받고 내셔널리그 팀과 시범 경기를 가질 수 있는 권리를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리그 동맹에 참여한 팀은 NL 구단의 지역적 권리와 선수 계약을 존중해야 했다.


보스턴이 신시내티를 네 게임 차로 꺾고 우승을 차지한 1878년 역시 NL의 시련기였다. 클럽들은 이윤 감소로 고통을 받았다. 리그 간 경쟁이 치열해져서 비용이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인터내셔널 어소시에이션에 대항하기 위해 NL은 어소시에이션의 선수와 '구단 자체'를 빼돌림으로써 보복을 감행했다. 1878년 말과 1879년 초에 시라큐스와 버팔로 팀은 어소시에이션을 탈퇴해 NL로 적을 옮겼다. 한편 NL 측에서는 밀워키와 인디애나폴리스가 떨어져 나갔다. 대신 트로이와 클리블랜드가 가입해 NL의 구단 수는 1876년 이후 처음으로 다시 8개로 회복되었다. NL의 전술은 주효해 마침내 1879년이 되자 인터내셔널 어소시에이션은 마이너 리그의 지위로 추락해서 명칭을 내셔널 어소시에이션(National Association)으로 변경하게 된다
.




다시 8개 구단 체제로 바뀐 1879년, NL 구단들은 강력한 내핍 정책을 택한다. 선수들의 연봉은 대폭 삭감되었 다. 선수들은 유니폼을 자비로 구입해야 했으며 심지어 식대를 부담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변화가 생겼다. 선수들의 이적이 계약서 상의 보류 조항 (reserve clause)에 의해 제한된 것이다. 1879년에는 한 구단이 보류권을 주장할 수 있는 선수는 다섯 명으로 한정되었지만 1883년 경에 이르러서는 거의 대부분의 선 수가 이 보류권 조항에 묶이게 된다.




존 몽고메리 워드





이후 보류권 조항은 오랜 세월 동안 구단주들과 선수들 사이에서 핵심적인 논쟁거리가 되었다. 어쨌든 1879년 시즌의 우승팀은 조지 라이트가 이끈 프로비던스 클럽이었다. 존 워드 (John Ward)의 호투에 힘입어 프로비던스는 해리 라이트의 보스턴 레드스타킹스를 다섯 경기 차로 누르고 우승기를 안았다.








babuangel
2001-08-14 17:13:15
962 번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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