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가 아닌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지역 몰표 현상이 나타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87년 김대중이 미국에서 돌아와 평민당을 창당하기 전에는 대한민국에 특정 지역을 대표하는 정당이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평민당이란 지역 정당이 출현하기 전인 87년까지 있었던 일곱 번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호남에서 여당이 진 적이 없었다.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호남에서도 집권당은 항상 과반수 이상을 당선시켰다. 호남에서의 여당 당선율은 전국의 평균율에서 과히 벗어나지 않았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김대중의 평민당 출현 이전에는 선거에서의 지역감정에 의한 몰표라는 것이 있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선거에 지역감정을 이용한다거나 유권자들이 지역감정에만 매달린 맹목적이고 무조건이고 감정적인 투표를 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때문에 과거 선거에서의 투표 형태나 정당별, 지역별 득표율로 볼 때에 한국의 정치역학 관계에 지역감정이라는 것이 결정적인 변수로 등장하게 된 최초의 계기는 바로 김대중의 평민당 창당에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평민당은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로 등장한 지역 정당이었다. 왜 평민당이 만들어질 때부터 지역정당이며 순전한 호남정당에 지나지 않았느냐 하면 창당의 목적이 김대중의 출마를 위한 것이었고 그 토대는 바로 호남의 무조건적인 지지를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김대중은 호남의 무조건적 맹목적 지지라는 특수 조건 한가지를 보고 대통령 출마를 결심했고, 평민당을 만들었기 때문에 평민당에 끌어올 수 있었던 대부분의 지지세력이 오직 호남인들 뿐이었다. 김대중이 새로 만든 평민당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거나 김대중의 출마에 반대하는 호남 출신의 정치인은 그것으로 정치생명이 끝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호남출신의 국회의원 또는 정치 지망생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김대중이 호남출신 정치인들의 생사여탈지권을 가질만큼 원래 카리스마가 강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87년의 김대중에게는 호남출신의 국회의원들을 죽이고 살릴 정도의 힘이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7년전에 있었던 광주사태였다. 광주사태를 통해 응축된 호남의 한이 김대중에게 기대와 희망으로 집중된 탓이고 이것은 거의 신앙적인 염원이 되어 있었다. 이런 한의 상징으로서의 김대중의 행보에 방해가 되거나 협조하지 않는 인물은 호남에서 용납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그러한 정서가 전국적으로 공유되지 못하고 오직 호남인들에게만 통하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김대중을 통한 염원의 실현 - 호남 차별과 전라도 기피의 설움을 해소하는 것 - 은 전라도인만의 비원이었지 타 지방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정서적 합일이나 공감대가 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호남 외에는 김대중의 출마에 대해 극도로 비판적인 분위기였다. 후보단일화가 전국민적 요구요 염원이었고, 그 단일화의 주류는 김대중의 사퇴와 김영삼으로의 단일화였다. 이 후보단일화와 김대중 출마의 염원은 바로 대한민국 전체와 호남의 염원이 서로 대립하여 충돌하는 것을 의미했다. 김대중은 629 선언 이전의 출마포기 선언을 뒤집고 평민당을 창당하고 대통령에 출마함으로써 자신의 지지 기반인 호남을 나라의 나머지 전체와 대립시킨 것이었다. 이것이 처절한 호남대 대한민국간 전쟁의 시발이었다. 아직도 그 내전은 현재진행형이다.
나는 그 모든 책임이 김대중 한사람에게 있다고 본다.
산업화 과정에서 자연발생적으로(거의 불가피하게) 확산된 전라도 혐오증과 광주사태로 응축된 호남인의 한을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달성하는 자산으로 확보하여 철저하게 이용한 끝에 결국 목적을 달성한 사람이 김대중이다. 그러나 그는 그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그가 했던 약속들을 하나도 지키지 않았다. 그는 호남의 한을 풀어주지도 않았고, 당선만 되면 1년 안에 해결하겠다고 큰소리 쳤던 지역감정 문제, 동서갈등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않았다.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돌이킬 수 없이 악화시키고 심화시켜서 이제는 해결이 불가능한 망국적 병폐로 만들어놓고야 말았다.
김대중은 호남을 철저하고 이용하고 잔인하게 배신했다. 김대중은 호남의 공적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