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의 황금기
1880년대 초반 무렵만 해도 메이저리그 야구는 대중적인 인기를 끌지 못했다.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1888년)
1880년 NL은 유일한 메이저리그였지만 재정 상태는 나빴다. 그때까지 NL의 어느 구단도 1875년 해리 라이트의 보스턴 레드스타킹스가 기록한 이익을 넘어서지 못했으며, 대다수 선수들의 연봉은 1869년 신시내티 레즈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거의 매년 탈퇴하거나 새로 가입하는 구단이 생겨 리그의 안정성은 저해되었으며, 야구가 가장 성행하던 대도시 뉴욕과 필라델피아에는 NL 팀이 없었다.
그러나 1880년대의 경제 성장과 도시 인구 급증으로 인해 프로 야구는 확장일로를 걷는다. 처음 그 혜택을 입은 쪽은 NL이었으며, NL의 성공에 고무된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AA)이 라이벌 리그로 탄생했다. 1883년의 협약으로 인해 AA역시 메이저리그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듬해에는 또다른 라이벌 유니언 어소시에이션(UA)이 메이저리그의 지위에 도전했다. 그러나 NL과 AA는 협력하여 UA를 붕괴시켰으며 이후 양대 리그 체제를 유지하게 된다. 양대 리그는 1883년에 시작되어 1891년까지 지속되었으며, AA의 몰락 이후에는 다시 단일 메이저리그 시스템으로 복귀한다. 그러나 전성기 무렵의 양대 리그는 관중 동원과 이윤 면에서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 매년 개최된 월드시리즈는 그 촉매제였다. 1889년이 되자 양대 리그의 우승 팀의 연간 이윤은 100,000달러를 상회하게 되었다.
선수들의 연봉도 증가했지만 대부분의 이윤은 구단주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갔다. 시즌 평균 연봉은 2,000달러 수준이었으며 극히 소수의 스타들만이 5,000달러 이상을 벌 수 있었다. 그 정도 금액은 적절한 수준이었으나 구단주들은 연봉을 깎기 위해 혈안이었다. 1885년 구단주들이 연봉 상한선을 설정하자 선수들은 '프로야구 선수 동맹(Brotherhood of Professional Base Ball Players - 이하 브러드후드)'를 결성해 대항했다. 이 모임은 계약서에 명기되지 않은 보류권의 거부, 불합리한 벌금제도 철폐, 선수 동의없는 트레이드 금지 등을 내걸고 투쟁했으나 별 성과는 없었다. 1880년대에 시카고 팀은 킹 켈리와 존 크락슨을 보스턴에 각각 10,000달러에 팔아넘긴 적이 있다.
메이저리그가 부유해지게 된 것은 경기 일정의 확대를 통해서도 증명된다. 1880년 팀당 연간 경기 수는 84게

마이크 킹 켈리
임이었으나 1889년에는 132게임으로 늘어났다. 같은 해 AA의 스케줄에 명기된 팀 당 경기수는 140게임이었다. 이 해 프로 야구 경기를 찾은 총 관중수는 200만에 달했으며 각 클럽은 이에 발맞추어 2층 스탠드의 목조 구장을 지었다. 해리 스티븐스(Harry M. Stevens) 같은 사람은 구장 내 영업권을 따내 핫도그, 소다수, 땅콩 등 이제는 고전적인 야구장용 점심거리가 되어버린 간식들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야구 소식에 굶주린 대중들을 위해 일간지들은 야구에 지면을 더 많이 할당했으며 스포팅 라이프(Sporting Life), 더 스포팅뉴스(The Sporting News) 등의 야구 전문 주간지가 창간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888년과 1889년에는 스폴딩의 주도로 미국의 야구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월드 투어를 감행하기도 했다.
해외 시장을 향한 스폴딩의 열망은 보잘 것 없는 결과로 끝이 났지만 적어도 미국에서 야구는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다. 1889년에는 15개의 마이너리그가 운영되고 있었다. 1882년의 내셔널 어그리먼트 및 후속 협약 사항에 따라 마이너리그는 공식 야구(organized baseball)의 일부로 받아들여졌다. 각 마이너리그 팀은 메이저리그로부터 연고지 권리와 선수들을 보호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흑인 선수들과 구단들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다. 야구에서 흑인들의 참여는 과거 아마추어 내셔널 어소시에이션과 프로페셔널 내셔널 어소시에이션 시절부터 신사 협정(gentlemen's agreements)을 통해 가로막혀 있었다. 극히 소수의 흑인 선수들이 메이저리 그였던 AA와 일부 마이너리그에서 뛰기도 했다. 그러나 1889년 펜실베니아 주에서 설립된 니그로 리그와 순수 흑인들로 구성된 독립 구단들은 공식 야구로부터 흑인 야구가 격리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 인종 장벽은 1946년까지 굳건하게 남아 있었다.
야구의 황금기였던 1880년대 많은 룰 개정이 이어짐으로써 야구는 보다 성숙한 필드 스포츠로 자리매김했다.

AA에서 40승을 두 번 기록한 밥 캐루서스
1884년 오버핸드 피칭이 공인되었으며 1887년 스트라이크 존의 규격이 마련되었다. 1888년 스리 스트라이크면 무조건 아웃이라는 규칙이 추가되었으며 1889년 포 볼에 의한 출루가 확정되었다. 이런 규칙 상의 변화는 메이저리그 규칙 위원회의 실용적인 노력의 결과이다. 위원회의 부단한 노력으로 말미암아 야구는 보다 활기차고 동적인 스포츠로 변화해 나갔다. 위원회에서 마련한 새로운 규칙 중에는 단명으로 끝난 것들도 있다. 1887년 도입된 베이스 온 볼스를 안타로 인정한 규정과 변형 4 스트라이크 제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투타 간의 균형을 맞춘다는 취지에서 도입되었으나 엄청난 타율 인플레를 야기함으로써 -1887년 4할 이상을 기록한 타자는 모두 16명이었다- 1년 만에 폐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