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가 여러 매체에서 접하는 초기 해킹의 발전사 내지 변천사에 관해 끄적거려놓은 것들은 죄다 이 책에서 훔쳐 쓴 것이라 보면 십중팔구 맞다. 출처를 표시 안했다면 말이다. 무심코 인용하는 해커 윤리강령도 이 책에서 유래했음을 아는지. 이 책을 다 읽기 전엔 해킹과 해커에 관해 함부로 논하지 말지어다. 해킹의 역사에 관해 글로든 말로든 끄적거릴 땐 반드시 이 책에서 퍼왔음을 밝힐지어다. -/서평 중에서."
작가: 스티븐 레비
원서: 1984년(초판) 펭귄사
번역판: "해커, 그 광기와 비밀의 기록"이라는 제목으로 1991년 사민서각에서 출판. 현재 절판됨
해킹이란 말의 유래는? 해킹은 어디서 누구에 의해 최초로 이루어졌을까? 해킹이 1950년대 말, 혹은 1960년대 초 미 MIT 대학에서 처음 시작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정설이 되어버렸다시피 되었는데 그 정설은 어디서 근거한 걸까?
해킹은 그 역사가 짧은 만큼 자세한 기록 역시 찾아보기 힘들다. 스티븐 레비의 "해커, 그 광기와 비밀의 기록"은 위의 모든 의문에 대한 해답을 주는 현존하는 유일한 책으로, 자칫 왜곡되거나 잊혀질 수도 있었을 해킹의 역사와 문화의 발전과정을 기록한 유일무이한 해커의 비사(秘史)다. 우리가 오늘날 여러 매체에서 접하는 1959년 말부 터 1980년대 까지 해킹의 발전사 내지는 변천사에 관한 모든 정보는 십중팔구, 출처를 인용했든 안했든 죄다 이 책에서 퍼다, 혹은 훔쳐다 쓴 것이라 보면 맞다.
작가 스티븐 레비는 롤링스톤지의 편집을 역임한 과학분야의 저널리스트이자 해커 연구가로 에스콰이어 하퍼스 맥월드 등 해커 관련 잡지에 고정 컬럼을 연재했다. 그는 다년간 초기 해커들을 철저하게 추적하고 직접 인터뷰하면서 수집한 방대한 자료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다소 장황하다 느껴질 만큼 자세하게 전개되어가는 스토리만 봐도 그가 얼마나 철두철미하게 자료를 수집했는지 느낄 수 있다.
1부: 진정한 해커들 , 2부: 하드웨어 해커들 , 3부: 게임 해커들 3부로 나뉘어 있는 스토리는 아래와 같이 시작된다.
"피터 샘슨에게 왜 한밤중에 26호 빌딩 주위를 어슬렁거렸는지를 설명하라고 한다면 그는 퍽 난처했을 것이다."
1부의 주인공은 작가가 진정한 해커라 지칭한 MIT대 학내 동아리 TMRC 멤버들. 너무도 유명한 해커의 전형이자 원조 그린 블러트와 고스퍼 이야기도 등장한다.
TMRC 멤버들은 컴퓨터를 통해 철도설계 지형 밑에 깔려있는 복잡한 스위치의 원리를 파악하고 작동시킴으로써 전자기계식 계산기가 할 수 있는 능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학내의 컴퓨터에 접근한다. 하지만 사물의 작동 원리에 대한 타고난 호기심은 이내 컴퓨터에 대한 광적인 집착으로 발전, 이때부터 컴퓨터는 이들의 삶의 모든 것이 되어버린다. 버들은 금요일 밤마다 세계 최초로 트랜지스터를 채택한 컴퓨터 중 하나인 TX-0가 설치된 26호 빌딩 2층 전자 연구소에 잠입, 번갈아 가면서 컴퓨터를 사용했다.
1960년대 초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컴퓨터는 엄청나게 비싸고 가동하는데 엄청난 전력과 비용이 소비되기 때문에 컴퓨터로 쉬운 일을 하는 것은 소중한 컴퓨터 시 간을 터무니없이 낭비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예를 들어 계산기나 타자기보다 수천 배 값이 비싼 컴퓨터로 계산이나 워드작업을 하는 것은 낭비다.
계산기나 컴퓨터 시간은 너무도 소중한 것이어서 컴퓨터에게는 방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의 수학자들이 며칠이나 걸려 풀어내는 수학 계산 같이 그 이익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일만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 그래서 다양한 작업을 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가 그리 많지 않았다.
해커들의 생각은 달랐다. 무엇이든 재미난 일이면 컴퓨터에게 주어야 되는 일거리라고 생각했다. 학생들은 컴퓨터로 계산 프로그램, 워드 프로그램, 체스 프로그램, 스피커에 나오는 음으로 멜로디를 연주, 컴퓨터 언어, 게임을 개발하는 등, 컴퓨터의 가능성을 온갖 방향에서 검토하고 실행했다. 작성한 프로그램은 누구든 수정할 수 있도록 소스를 공개했기 때문에 프로그램은 여러 학생들의 노력을 거쳐 더 좋은 프로그램으로 탄생했다. 이같은 노력은 아무런 대가가 없는 것으로, 자신이 만든 소프트웨어를 돈을 받고 판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었다.
해커 윤리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탄생한다. 너무도 유명한 해커 윤리도 이 책에서 최초로 정리된다. 이 해커윤리는 나중에 리처드 스톨만, 에릭 레이몬드 를 비롯한 다른 해커들의 손을 거치며 조금씩 수정되었지만. 아무튼 해커 윤리의 원조 내지 원형은 아래와 같다.
1. 컴퓨터에 대한 접근과 사물의 원리에 대해 가르쳐주는 모든 것에 대한 접근은 여하한 이유로도 방해 받아서 안되고 완전히 보장되어야 한다.
2. 모든 정보는 개방되어야 한다.
3. 권력을 믿지 말라(정보를 분산시켜야 한다)
4. 해커는 해킹에 의해서만 평가 받아야 한다. 학력이나 나이 지위 같은 주관적 판단에 의해 평가 받아서는 안된다.
5. 컴퓨터를 통해 예술과 아름다움을 창조할 수 있다.
6. 컴퓨터는 인간의 생활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1항만큼 당시 해커 마인드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대목은 없는것 같다:
"불완전한 시스템은 해커들로 하여금 분노를 자아낸다. 불완전한 시스템을 고치는 것은 해커의 본능이다. 해커가 자동차 운전을 싫어하는 이유도 이중 하나 다. 임의적으로 프로그램된 빨간 등과 괴상망칙한 방식으로 설계된 일방통행로는 전혀 필요 없는 교통체증을 초래한다. 그래서 해커는 당장 신호등에 뛰어 올라가 신호등을 바꾸고 신호 제어박스 뚜껑을 열어 교통신호체계 전체를 재설계하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해커 세상에서는 누구 든 신호등 가까이 있는 제어박스를 열수 있고 좀 더 잘 작동하도록 만들기 위해 그 박스를 분해할 수 있다... 테크모델 회원들은 시스템 개조를 위해 부품이 필요하면 부품이 있을만한 곳을 찾아 나섰다. 다른 문제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양심적인 해커들이었지만 아무도 이런 일을 절도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은 고의적인 맹목성이었다."
1부에서는 해커와 해킹이라는 용어의 탄생과 발생지에 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작가는 해커가 최초로 1950년대말에서 1960년대 초 MIT 대학의 취미 동아리인 MIT TMRC(테크모델 철도클럽) 인공지능연구소에서 탄생했고, 해커와 해킹이라는 용어는 이 시기 MIT 학생들 사이에 널리 통용되던 은어라고 주장한다. 즉 핵 (hack)이라는 용어는 아주 오래 전부터 MIT에서 전해지던, MIT 학생들이 주기적으로 만들어 내던 대학 내 고약한 농담을 지칭하는 단어였는데 MIT 철도모형클럽 (TMRC) 회원들은 이 hack이란 단어를 다른 의미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 이 핵이라는 용어는 아주 오래전부터 MIT에서 구전되던 은어였다. 이 말은 MIT 학생들이 무슨 법칙이라도 되듯 주기적으로 정성껏 만들어내던 대학내의 짖궂은 농담을 가리키는 것이었는데 … (중략) … 그러나 이 용어를 TMRC 회원들이 썼을 때 거기에는 매우 의미심장한 경외심이 함축되었다 … (중략) … 작업과정 그 자체에서 느껴지는 순수한 즐거움 이외에 어떠한 목표도 갖지 않는 프로젝트나 그에 따른 결과물을 hack이라 불렀다.
신호기와 동력분과에서 활약하던 뛰어난 멤버들은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스스로를 해커라 불렀다. ... 아래 글은 동아리 회지에 실린 피터 샘슨의 시다: ...해 킹! 신통치 않고 다루기 어렵고 보기도 흉한 너의 젊음을 해킹하라. 전선이 배열되지 않은 작은 다이오드여. 스위치를 넣는 이들이여. 개척자들이여, 철로의 장인이여, 시스템의 달인이여, 자부심을 가질지어다."
2부는 개인용 컴퓨터를 만든 1970년대 말 해커들의 이야기. 2부의 무대인 1970년대는 반전 시위를 비롯한 반체제 사회운동이 시작되어 해커들은 반체제 운동의 일환으로 이플이나 TAP 등을 통해 폰프레킹을 널리 알린 시기이기도 하지만 이 책은 하드웨어와 연관된 스토리를 주로 다루었다.
"이제까지 컴퓨터는 국민을 위해서 쓰이지 않고 국민에게 해를 끼치는데 사용되어왓다. 국민을 해방하기 위해서가 아닌, 국민을 통제하는데 사용되어왔다. 이제 이 모든 것을 변화시킬 때가 왔다…"
컴퓨터를 좋아하는 젊은이들이 모여 결성한 그룹 PCC가 내건 슬로건이다. 하드웨어 해커들은 개인이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컴퓨터를 개발해야 한다는 꿈을 키워갔다.
개인용 컴퓨터의 구체적 형태는 MITS사의 알테어였다. 1975년 파퓰러 일레트로닉스지에 MITS사의 알테어 8800 조립키트를 단돈 397달러에 판매하겠다는 광고를 실었다. 책은 당시 광고를 아래와 같이 묘사한다:
"기사를 읽은 사람들은 이 컴퓨터가 256바이트의 메모리밖에 가지고 있지 않으며 입출력 장치도 없고 전면에 부착된 몇 개의 스위치 이외에는 외부로 정보를 출력하거나 입력하는 어떤 장치도 내장하고 있지 않아서 … 힘겨운 작업이 필요한 컴퓨터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기계가 사용자에게 내용을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전면의 불빛을 깜빡 거리게 하는 동작뿐 … 실제적인 모든 용도에 비추어 본다면 이 기계는 장님이자 벙어리요 귀머거리였다. 하지만 모 든 신체기능이 마비되었을지언정 뇌는 살아있는 사람처럼 이 기계는 비록 교신불능이라는 외피를 지니고 있었지만 컴퓨터 두뇌는 살아서 안에서 작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쨌거나 컴퓨터였다. 해커들이 이 기계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전적으로 해커들의 상상력에 달려있었다.
그런데 MITS사 전화통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 전화벨을 멈출 줄 몰랐다. 전화뿐 아니라 우편주문도 쏟아졌다. 이들은 바로 해커들이었다. 이들도 MIT 해커들처럼 시 스템에 대한 호기심에 가득 찼지만 컴퓨터에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컴퓨터가 필요한 해커들이었다
인류 최초의 데스크탑 컴퓨터인 솔 컴퓨터는 그 다음 순간에 리 펠젠스타인에 의해 탄생했다. 그리고 드디어 1976년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이 애플 컴퓨터를 개발한다.
대가 없이 정보를 주고받던 종전의 방식은 한계에 이르게 되었다. 작가는 소프트웨어가 더 이상 공유하는 산물이 아니라 상품으로 변모했기 때문에 해커의 황금기는 석양을 맞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는 당시 19세이던 빌 게이츠가 자신이 만든 베이직이 대량 복사되어 유통되는 것을 보고 엄청나게 화가 나서 당시 컴퓨터 관련 소식지와 클럽 회자, 잡지 등에 "호사가들에게 보낸 공개 서한" 이라는 제목으로 실은 항의서 내용도 소개되어 있다.
"왜 그래야만 합니가? 여러분은 소프트웨어를 서로 훔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드웨어는 돈을 주고 사면서 소프트웨어는 공짜로 나누어 가집니다. 그렇다면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사람은 어디서 대가를 찾아야 합니까? 이 같은 소프트웨어 도둑질 때문에 능력 있는 프로그래머들은 소프트웨어 제작 을 망서리게 되는 겁니다."
될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보면 안다는 옛 말이 있듯이, 빌 게이츠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저작권에 대한 철두철미한 의식을 갖고 있었던 듯 싶다.
제 3세대 해커라 부르는 1980년대의 게임 해커로 끝을 맺는 이 책을 통해 작가가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하나다. 작가는 해커를
1. 1세대 해커(진정한 해커): 1960년대와 1970년대 초에 등장, 대형 컴퓨터를 보다 많은 사람들이 폭넓게 사용할 수 있도록 소프트웨어와 시분할 기술을 개발했던 해커들
2. 2세대 해커: 1970년대 말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었던 해커들
3. 3세대 해커: 1980년대 초 소프트웨어 해커로 개인용 컴퓨터를 위한 응용 프로그램이나 교육용 오락용 프로그램을 만든 해커들
로 분류, 이들이야말로 컴퓨터 혁명을 가능하게 만든 주역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컴퓨터의 발전과 그 역사를 함께 해온 해커들의 꿈과 희망이 너무 아름다웠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도 여기 있는것 같다. 초기 해커들이 세운 해커 윤리와 1960, 1970년대 하드웨어 해커들이 품었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해커들의 공동노력의 산물인 애플 컴퓨터는 컴퓨터를 일반의 손에 돌려주자는 꿈을 현실로 바꾸어놓았다.
내가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아마도 피터 샘슨처럼 한밤중에 26호 빌딩을 어슬렁거리지 않을까? 알테어 광고를 보고 뛸 듯이 기뻐 당장 주문하고 도착할때까지 가슴 설레며 밤을 여러날 꼬박 새우지 않았을까? 이 책은 해킹과 해커의 진정한 의미, 컴퓨터가 어떻게 발전해 오늘날에 이르렀는지를 알고 싶은 사람을 위한 필독서다. 이 책을 다 읽기 전에는 해킹과 해커에 관해 함부로 논하지 말지어다. 해킹의 역사, 유래에 관해 논할 땐 반드시 이 책이 출처임을 밝힐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