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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벌 리그

 

라이벌 리그 AA와 UA

19세기 내셔널리그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American Association of Base Ball Clubs)은 NL의 독점에 반대한 흥행가들에 의해 조직되었다. NL의 성공 이후 독립

선수 시절의 찰스 코미스키

상태에 놓여있던 많은 클럽들은 메이저리그에 가입하기를 원했으며, AA의 흥행가들은 여기에서 새로운 리그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포착했다. 당시 뉴욕, 필라델피아, 신시내티, 세인트루이스 등은 야구경기가 활발하게 열렸지만 NL 팀을 유치하지 못했던 대도시였다. AA 측은 경기 입장료를 25센트로 내렸으며, 일요일 경기와 경기장 내 주류 판매를 허용함으로써 관중들을 끌어모으려 했다. 우수 선수들을 영입하기 위해 AA는 NL의 선수 보류권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경기 수준을 높이기 위해 전담 심판제를 도입했다. 이 전담 심판제는 곧 NL에서도 채택하게 된다.


이런 조치들 덕분에 1882년 신시내티, 루이빌, 세인트루이스, 피츠버그, 필라델피아, 볼티모어 등 여섯 개 AA 구단은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다. 6개 구단은 시즌 도중 한 팀도 탈락하지 않고 전 경기를 소화해냈다. 첫 해의 우승팀은 필라델피아를 11.5게임 차로 따돌린 신시내티였다. 신생 AA의 스타 선수로는 신시내티의 투수 윌 화이트와 2루수 비드 맥피, 세인트루이스의 1루수 찰스 코미스키(Charles Comiskey), 루이빌의 외야수 피트 브라우닝, 투수 토니 멀레인 등을 들 수 있다. 1883년 AA는 콜럼부스와 뉴욕 메츠를 받아들임으로써 8개 구단으로 확장되었다. NL의 선수 보류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전략은 성공이었다. 구단주들의 처사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NL 선수들은 대거 AA로 적을 옮겼으며, 그 결과 AA는 보다 수준높은 경기를 치를 수 있었다. 관중들도 대폭 늘어났고 1883년 재정은 흑자였다. 우승팀은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를 한 게임 차로 물리친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였다.


AA가 성공을 거두자 NL은 라이벌과 화해하는 길을 택했다. NL 회장 밀스와 AA의 회장 데니 맥나이트(Denny McKnight)는 1883년 내셔널 어그리먼트를 체결했다. 이 협정에 따라 AA는 메이저리그의 지위를 얻게 되었으며, 포스트 시즌에는 양대 리그 간에 월드시리즈가 열리게 되었다. AA 측에서는 그 대가로 그간 무시했던 선수 보류권 조항을 채택했다. NL과 AA 사이에 가까스로 평화가 이루어진 배경에는 새로운 라이벌 리그 유니언 어소시에이션 (Union Associatuon)의 등장이 큰 몫을 차지한다. 1883년 가을 피츠버그에서 조직된 UA는 기존 메이저리그에 적을 두고 있던 선수들을 빼오기 위해 선수 보류권 조항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실제 UA로 적을 옮긴 선수들의 수는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AA와 NL에 남았다. 불확실한 신생 리그로 옮기기에는 블랙 리스트의 위협이 더 컸고, 때맞춰 리그 전쟁의 여파로 연봉이 인상되었기 때문이었다.

1884년 UA는 무명 선수들로 첫 시즌을 시작했다. 한 팀 당 128경기를 치르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UA는 팀 간

1884년 유니언리그 수위타자프레드 던랩.

재정 상태 및 선수 수준의 불균형으로 고통받았다. 리그의 최대 후원자인 헨리 루카스(Henry V. Lucas)가 돈을 쏟아부은 탓으로 그의 세인트루이스 마룬스 팀은 개막 이후 21연승을 기록하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시즌이 끝날 무렵 살아남은 구단은 겨우 다섯 개에 불과했다. 그 와중에서도 UA는 기존 메이저리그의 선수들을 빼오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이런 처사는 결국 상대방의 증오심과 복수만을 야기했을 따름이다. 1884년 가을 루카스의 마룬스 팀이 NL에 편입되는 대가로 UA는 1년 만에 해체되고 만다.


UA의 붕괴로 메이저리그는 다시 양대 리그 시스템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NL과 AA 사이의 긴장은 여전히 팽팽했다. AA의 리더들은 NL 측의 이중성에 대해 비난했다. NL은 UA의 위협에 맞서 AA가 12개 구단 체제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 조치는 AA 구단들의 재정부담을 가중시켰다. 뉴욕 메츠가 콜럼버스를 6.5 게임차로 따돌린 1884년 AA는 막대한 재정 손실을 기록했다. 엎친데 덮친 격이랄까, 메츠는 사상 최초의 공식적인 월드시리즈에서 NL의 프로비던스에 패하고 만다. 하지만 더 지독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뉴욕 메츠의 소유권이 실질적으로 NL의 뉴욕 자이언츠에 귀속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발각된 것이다.


AA 측의 의구심은 NL이 UA를 해체하는 대가로 세인트루이스 마룬스를 멤버로 받아들이자 더 증폭되어졌다. 세인트루이스에는 이미 AA의 브라운스가 둥지를 틀고 있었기 때문이다. AA의 구단주들은 이 조치를 NL의 견제 정도로 해석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나자 마룬스는 브라운즈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값싼 입장료와 구장내 주류 판매, 막간의 여흥거리, 일요일 경기 등은 여전히 AA의 비교 우위 요소였다. 게다가 브라운스는 강팀이었다. 1885년부터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는 감독 겸 선수 찰스 코미스키의 지휘 하에 4년 연속 리그 우승을 차지한다. 그것도 1885년에는 신시내티에 16게임 차, 1886년에는 피츠버그에 12게임 차, 1887년에는 신시내티에 14게임 차, 1888년에는 막강 브루클린에 6.5게임 차라는 압도적인 승리였다. 이 기간을 풍미한 브라운스의 스타 플레이어로는 내야수 알리 래섬, 외야수 팁 오닐(Tip O'Neill), 투수 데이브 포츠와 밥 카루서스 등을 들 수 있으며, 구단 사장 크리스 본 더 아히(Chris Von der Ahe)는 세인트루이스 시의 영웅이나 다름없다.


1888년 반 더 아히와 카루서스가 브루클린으로 적을 옮기자 코미스키는 투수 실버 킹을 영입했다. 1888년의 우승은 45승을 거둔 킹의 활약에 힘입은 것이다. 1885년 월드시리즈에서 브라운스는 캡 앤슨이 이끄는 시카고와 타이를 이룬다. 이듬해 다시 만난 시카고를 물리치고 첫 패권을 차지하지만 다음 2년은 각각 디트로이트와 자이언츠에 발목을 잡힌다.




AA에서 1889년 시즌은 브라운스와 브루클린 브리지그룸스의 라이벌 전으로 진행되었다. 페넌트레이스의 승자는 브라운스를 2경기 차로 제친 브리지그룸스였다. 하지만 월드시리즈에서 브리지그룸스는 자이언츠에 2경기

세인트루이스 마룬스

차로 패한다. 그해 겨울 세인트루이스와 브루클린은 공석이 된 AA의 회장 자리를 놓고 다툼을 벌였으며 그 여파로 브루클린과 신시내티는 NL로 적을 옮긴다. 소속 클럽이 빠져나가고 일부 스타 선수들도 신생 플레이어스 리그 Players' League로 적을 옮기자 AA는 반신불수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1890년 AA는 명백히 NL과 PL에 이은 제 3의 리그에 불과했다. AA는 약체 팀들간의 경연장이 되어버렸다. 마지막 시즌 우승팀인 루이빌의 바로 전해 성적이 27승 111패였다는 사실은 그 방증이 될 것이다.




babuangel
2001-08-24 16:3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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