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어스 리그
1890년 플레이어스 리그(The Players League)의 탄생은 선수들과 구단주들 사이의 오래

플레이어스리그의 보스턴 레즈
된 적개심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연원을 따지자면 내셔널리그 구단주들이 선수들이 누려왔던 권리들을 빼앗은 187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NL의 통제 하에서 선수들은 금전전 손실을 강요당했으며, 자유로이 이적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했다. 또한 선수들은 엄한 규율에 복종해야 했으며, 그렇지 않을 경우 방출되거나 블랙리스트에 오를 수 밖에 없었다. 불평을 한 선수들은 계약서 상의 보류 조항에 묶이게 되었다. 선수들은 보류 조항을 연봉의 깎아내리고, 더 나은 보수를 제시하는 구단에 자신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도구로 인식했다. 하지만, 구단주들에게 보류 조항은 팀을 안정시키고 이윤을 늘여주는 수단이었다. 선수들은 제한된 범위 내에서 합법적인 투쟁을 계속했지만 이미 자리잡은 보류권 조항을 무효화할 수는 없었다. 선수들은 더 이상 다른 리그에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이미 AA는 보류 조항을 규약에 삽입했으며, UA는 소멸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처지에 분개한 선수들은 1885년 '프로야구 선수 동맹(Brotherhood of Professional Base Ball Players)'를 조직해 집단 행동을 취했다. 처음에 이 모임은 자선단체로 출발했지만 1887년 경에 이르러서는 단체 교섭 기구로 발전했다. 선수 동맹을 이끈 인물은 선수 겸 변호사로 활동했던 존 워드(John Ward)였다. 친목회는 구단주들의 보류권 조항, 선수 매각 행위, 그리고 브러시 분류 계획(the Brush classification plan)으로 알려진 연봉 상한선 설정 기도 등에 대항했다.
1888년 NL의 구단주들과 선수들 사이의 장기간에 걸친 협상은 구단주들이 연봉 상한선 설정 의사를 철회하지 않음에 따라 결국 파국을 맞았다. 내셔널 어그리먼트에 따라 이미 AA에서는 최고 연봉제를 실시하고 있었다. 구단주들이 워너의 최후통첩을 거부하자 선수 동맹은 새로운 라이벌 리그를 결성하는 강경 노선을 취했다. 대부분의 스타급 선수들이 이에 동조했기 때문에 이들이 만든 플레이어스 리그(Players' League)는 투자가들의 관심을 끌 수 있었다. 그들은 선수들에게 이익과 권한을 배분해야 한다는 워너의 계획을 받아들였다. 1890년 PL은 첫 시즌을 맞이했다. 각 구단의 재정은 튼튼했으며, 8개 구단은 신시내티를 제외한 NL의 모든 대도시 프랜차이스에 적을 두었다.
PL에 대항하기 위해 NL은 강력한 수단을 동원했다. 앨 스폴딩이 이끈 소위 '전쟁 위원회( war committee)'가

장년기의 사이 영
그 중심에 있었다. 스폴딩은 PL을 고사시키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했다. 경기 시간을 PL의 일정에 맞춰 잡았으며, PL 소속 선수들을 매수하여 끌어들였다. 그리고 보류권 조항에 대한 법률 소송을 제기했다. 비용이 많이 들어간 이 소송 제기는 신생 PL의 재정을 악화시키려는 의도에서였다. 또한 스폴징은 NL의 입장료를 낮추었으며 여차하면 광고를 빼버리겠다고 위협해 언론을 조종했고, AA와 마이너리그에 속해있는 선수들을 무차별적으로 끌어들였다. 캡 앤슨, 라이트, 빌 맥거니글, 짐 머트리(Jim Mutrie) 같은 명감독들도 우수 선수들에게 NL에 남을 것을 종용했다., 선수 이동 덕분에 AA에 있던 빌리 해밀턴 (Billy Hamilton), 토미 터커(Tommy Tucker) 같은 선수들은 스타덤에 오르게 되었다. 또한 당시까지 유망주에 불과했던 투수 키드 니콜스(Kid Nichols), 사이 영(Cy Young), 내야수 바비 로우, 외야수 제스 버킷 등은 예정보다 일찍 NL에서 데뷔할 수 있었다.
법정 투쟁과 관중 동원 양면에서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PL은 첫 시즌을 무사히 마칠 수는 있었다. 첫 해의 우승팀은 워드의 브루클린 팀을 6.5게임 차로 누른 보스턴이었다. 당시 보스턴의 감독은 마이크 켈리였다. 하지만 재정 손실은 투자가들에게 있어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1890년 가을 투자가들은 평화를 종용했다. 승리감에 도취된 스폴딩은 PL의 선수들에게 어떤 복수도 행하지 않으리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는 PL 설립의 원인이 되었던 이슈, 즉 연봉 상한선에 대해서는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다. 연봉 상한선 계획은 1891년 AA가 멸망한 후 비로소 철회되었다.

젊은날의 코니 맥
PL은 소멸했지만 이미 쇠잔해져가던 AA에게는 그다지 큰 희망이 되지 못했다. 1891년 이적했던 선수들이 NL로 돌아오고 프랜차이스 재조정이 단행되자 NL과 AA의 오랜 전쟁은 마침내 파국으로 향했다. AA의 신시내티 팀이 해체되자 인기 감독 마이크 켈리는 같은 리그의 보스턴 팀으로 이적했다. 하지만 며칠 후 켈리는 다시 NL의 보스턴 내셔널스로 적을 옮겼다. 켈리에게 버림받은 AA의 보스턴 팀은 그해 리그에서 브라운스를 8.5 게임 차로 제치고 우승을 차지하지만 보스턴 팬들은 켈리의 내셔널스가 NL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차지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었다.
1891년은 AA의 마지막 시즌이 되고 말았다. 그해 가을 AA의 세인트루이스와 루이빌, 볼티모어, 워싱턴은 가망 없는 리그를 포기하고 12개 구단으로 확장된 NL로 적을 옮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