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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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티셔츠'가 분쟁을 조장하는 복장?
[미국 현지보고] 한 쇼핑몰서 쫓겨난 '평화' 그리고 시민의 권리
최진숙 기자
얼마 전 미국 뉴욕주의 주도 알바니에서 스테판 다운스라는 변호사가 '평화' 메시지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걸어다닌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아들과 함께 티셔츠 가게에서 '평화에 기회를'과 '지구에 평화를'이란 구호가 적힌 티셔츠를 사 입고 걸어다니던 중 쇼핑몰 내 경찰에게서 그 옷을 벗거나 건물에서 나갈 것을 요구받았다고 한다. 그의 아들은 옷을 벗었고, 그는 끝끝내 버티다가 결국 쇼핑몰 측이 부른 외부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왜 미국의 쇼핑몰 내에서 단지 '평화에 기회를' (Give Peace a Chance)이라는 구호가 적힌 티셔츠를 입었다고 체포되어야만 하는가?
이 질문을 대답하려면 두 가지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째, 미국에서 쇼핑몰이란 과연 무엇이기에? 둘째, 왜 현재 미국에서 '평화'를 말해선 안되는가? 이 자리를 빌어 나의 소견을 표현함과 동시에 3월 9일(일요일)에 있었던 두 번째 쇼핑몰 평화 운동의 모습을 전해드리고자 한다.
미국에 한 번이라도 다녀온 사람이라면, 아니 그저 미국의 할리우드 영화나 TV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미국의 거대한 쇼핑몰을 구경해본 적 있을 것이다.
쇼핑몰은 한 마디로 거대한 백화점, 상점의 복합체이다. 여러 건물들이 방대한 공간에 걸쳐 분산되어 있는 곳도 있지만, 알바니의 '크로스게이트' 쇼핑몰은 길게 연결된 큰 건물 내에 230개의 상점이 위치해 있고, 밖으로는 약 7800개의 차를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을 설비해 놓은 약 25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쇼핑몰이다.
겨울에는 이곳 실내에서 걷기 운동을 하려는 노인들이 아침부터 붐비고, 방학이나 주말에는 어린이와 대학생들이 각종 오락 시설을 즐기는 걸 볼 수 있다. 공휴일이나 대목의 쇼핑몰의 모습은 마치 명동 거리를 한 눈에 보는 듯하다고나 할까. 다만 지붕이 있는 실내라서 눈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럼 기왕 명동 얘기가 나왔으니 비교를 해보자. 내가 한국의 명동 거리에서 '지구에 평화를'이나 '평화에 기회를'이라는 구호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다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 몇몇 사람들은 쳐다보겠지만 그 누구도 나를 '소란법석을 피우는 인간'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설사 '전쟁 반대'라고 써 붙이고 다닌다 해도 말이다.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미국엔 워낙 자동차 오너가 많다보니 자기 차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정치적 견해를 나타내는 사람들이 꽤 많다. '지구에 평화를'은 아무 것도 아니다. 아마 내 차에 '석유를 위한 전쟁 반대'라고 써 붙인다 해도 경찰이 나를 잡아갈 아무런 이유가 없으리라. 그런데 이번에 이 사건이 터지자 생각을 다시 해야 했다. 왜 쇼핑몰에서 한 선량한 시민이 잡혀간 것일까? 여기엔 다음의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쇼핑몰은 명동과 달리 '공공 장소'가 아니다. 거리를 활보하거나 차를 몰고 다니는 것과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크로스게이트 쇼핑몰은 소유주가 있는 하나의 거대한 건물일 뿐이다. 그러므로 건물주가 허용하지 않는 행동을 했을 시에는 건물 내 경찰을 동원하여 '범죄자'를 축출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는 것이다.
그 쇼핑몰의 입구에 써 있는 문구를 보면, "소란과 분쟁을 조장하는 복장 금지"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 '사유지'에서는 소유주의 요구 사항, 허용 사항을 반드시 지켜야 함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그 '소란과 분쟁을 조장하는 복장'을 결정짓는 기준이 바로 무엇인가. '평화'라는 문구가 타인에게 의혹, 불쾌감 및 혐오를 주었다는 것인가? 부시나 각종 우익 인사들이 밤낮 외쳐되는 게 '평화' 아니던가?
그러나 누가 '평화'를 말하느냐에 '평화'는 '반전'이 될 수도 있고, '전쟁'이 될 수도 있다. 전쟁에 혈안이 되어 있는 미국 정부에게 '반전'이란 '반미'나 '비애국주적'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더 나아가 '반전'을 외치는 사람은 '친이라크'이므로 '국가 전복 테러리스트'와 거의 동일시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을 잡아간 두 번째. 그리고 더 중요한 이유가 된다.
벌건 대낮에 '평화'를 말했다는 이유로 선량한 시민을 체포할 수 있는 사회. 이게 바로 부시 정권하 미국의 현실이다. 어째 좀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은지? 예전에 5공화국 때 대학을 다니던 이들은 기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 저작은 절대로 들고 다니거나 집에 놔두어도 안 되는 시절이었다. 대학 교문에는 늘 전경이 지키고 있었으며, 재수 없어서 가방 검사 당하는 날 하필 '통일로 가는 길' 이나 '자주 민주주의' 등의 문구가 있는 책을 들고 있었다면 '주체 사상'에 관련된 '좌경' 조직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 당시 '통일', '자주', '민주'는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국가만이 사용할 수 있는 단어였고, 혹시나 그 어휘를 사용하면 '친북'으로 몰릴 수도 있었다. 이제 미국도 예전의 냉전 시대로 돌아가는 것 같다. '평화'는 이제 아무나 사용할 수 없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쇼핑몰 사건, 그 이후
스테판 다운스씨는 체포된 지 이틀만에 풀려 나왔다. 그러나 3월 9일에 알바니 내의 반전 운동가들은 그 쇼핑몰에 다시 모여 크로스게이트 몰의 어처구니 없는 처리에 다시 항의함과 동시에 반전의 목소리를 전했다.
그날은 다행히도 약 100여명 정도 되는 참가자들이 쇼핑몰 내에 들어가는 데 그리 큰 어려움이 없었다. '지구 상에 평화를'만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직접적인 표현들을 써 붙인 티셔츠도 꽤 보였다.
약 12명 정도의 변호사들 및 법률 감시자(legal observer)들이 와서 경찰과의 타협에 성공했던 것 같다. 약 3시간에 걸쳐 참가자들은 식당에서 점심도 사먹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토론도 하는 등 아주 평화로운 시위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참가자들 중 한 30대 중반의 백인 남자와 얘기를 할 기회를 가졌다. 나는 물었다. 왜 이 시위에 참가하며, 전쟁이 일어나면 그에게 어떠한 변화가 생길 것인지.
그는 "전쟁 때문에 우리의 기본적 권리를 박탈당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 나오게 되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미군과 이라크인들 모두 죽는다. 미국 경기도 나빠질 것이다. 그러나 정말 무서운 것은 '전쟁'을 이유로 미국이 전체주의 국가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면 시민의 기본적인 권리인 '표현의 자유'도 사라질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미국 내에는 아직도 침묵하는 다수가 있다. 그들은 전쟁을 그리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반대하고 나서지도 않는다. 그들은 '전쟁이 나도 미국에 별 미치는 영향이 없겠지'라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이미 석유값이 오르고, 실직이 늘어나고, 교육 지원이 줄어드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전쟁이 가져오는 효과는 수두룩한데도 말이다.
그러나 이들이 정말 무시하고 있는 것은 미국의 군사 전체주의 하의 폭압이 아닐까. 미국인들은 이제껏 자유와 민주주의를 너무나 쉽게 얻고 누려오지 않았나 싶다. 제국주의의 떡고물을 얻어먹으며 편안하게 살아왔던 미국인들인데. 이제는 미국인들도 가장 기본적인 시민의 권리조차 싸워서 얻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신세로 전락해버렸다.
2003/03/11 오전 11:57
ⓒ 2003 OhmyNews
최진숙 기자는 현재 뉴욕 주립대(알바니)에서 인류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