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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셔널리그 1882~1889

 

내셔널리그 1882-1889

1982년에서 1899년까지의 8년 동안 보스턴, 볼티모어, 브루클린이 빅리그를 주름잡았다. 프랭크 실리(Frank Selee)가 감독을 맡고 있던 보스턴 비니터스는 1892년과 1893년, 1897년과 1898년 두 번에

2071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조 켈리

걸쳐 2년 연속으로 페넌트레이스에서 우승했다. 에이스 키드 니콜스는 8년간 통산 297승을 기록하며 팀을 이끌었다. 1892년은 시즌이 전후기로 분할되어 치러진 해였다. 비니터스는 전반기를 쉽게 따냈지만 후반기에서는 팻 티뷰(Pat Tebeau)가 이끈 클리블랜드 스파이더스에게 3게임 차로 뒤져 2위에 머무른다. 당시 클리블랜드 팀의 에이스는 사이 영이었다. 전후기 우승팀이 맞붙은 포스트 시즌에서 비니터스와 스파이더스는 첫 경기 0-0 무승부를 기록한다. 그러나 비니터스는 남은 게임을 모두 이기고 시즌 패권을 거머쥐었다.


이내 전후기 분할 시즌 제도는 구단과 리그의 이익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래서 1893년부터 빅리그는 단일 시즌으로 회귀했다. 그리고 이해 투포수간 거리가 60피트 6인치로 늘어났다. 그로인해 1893년 시즌은 '타자들의 해'가 되었다. 이 해의 승자는 피츠버그를 다섯 경기 차로 제치고 다시 우승을 차지한 보스턴이었다. 피츠버그의 프랭크 킬렌은 34승으로 다승 1위를 차지했으며 외야수 빌리 해밀턴은 타율 .380을 기록했다.


이듬해에는 전년도 8위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팀 사상 최초로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차지한다. 볼티모어의 투수진은 형편없었지만 타격만큼은 가공할만했다. 1894년 오리올스의 팀 타율은 .343이었으며 레귤러 멤버 전원은 3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했다. 볼티모어의 스타선수들, 댄 브러더스, 휴이 제닝스(Hughie Jennings), 존 맥그로(John McGraw), 조 켈리(Joe Kelley), 위 윌리 킬러(Wee Willie Keeler), 윌버 로빈슨(Wilbert Robinson)은 후일 모두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다. 볼티모어는 페넌트레이스에서 존 워드 감독의 자이언츠에 3게임 앞섰다. 그러나 포스트 시즌, 즉 제 2회 템플컵시리즈(Temple Cup Series)에서는 거꾸로 4연패로 무릎을 꿇는다.


이듬해 감독 네드 핸런(Ned Hanlon)의 오리올스는 다시 NL 페넌트레이스 정상에 오른다. 3게임 차로 뒤진 클리

14년 연속 3할타자 댄 브러더스

블랜드 스파이더스가 2위를 차지했다. 팀타율 .324와 과 54승 14패라는 경이적인 홈 승률이 1895년 성공의 원인이었다. 하지만 오리올스는 그해에도 스파이더스에 1승 4패로 져 템플컵을 차지하는데 실패한다. 두 번의 실패 후인 1896년 오리올스는 마침내 템플컵시리즈에서 우승했다. 그해 3년 연속 페넌트레이스를 제패한 뒤 오리올스는 다시 만난 호적수 스파이더스에 전승을 기록하며 첫 포스트시즌 우승의 영광을 만끽한다.


1897년과 1898년은 절치부심 끝에 화려하게 정상으로 복귀한 보스턴의 해였다. 보스턴은 우승을 위해 빌리 해밀턴, 칙 스탈(Chick Stahl), 지미 콜린스(Jimmy Collins) 등을 영입했다. 에이스 키드 니콜스도 30승을 올리며 오리올스를 두 게임 차로 제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하지만 템플컵의 임자는 다섯 게임만에 시리즈를 끝낸 2위 팀 오리올스였다. 1897년은 또한 템플컵시리즈의 마지막 해이기도 했다. 템플컵시리즈는 관중들을 불러 모으는데 실패했으며 선수들의 플레이에도 성의가 없는 '초라한 볼거리'였다. 혹자는 템플컵시리즈를 예전 NL과 AA 사이의 월드시리즈에 견주어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는군.이라고 혹평했다.


1898년에도 보스턴은 오리올스를 6게임 차로 제치고 우승을 차지한다. 하지만 이해 발발한 미서전쟁(美西戰爭)으로 빅 리그는 세인들이 관심에서 멀어졌다. 메이저리그의 재정은 리그 간 전쟁 이후 최악의 상태로 떨어졌다. 리그는 무질서해졌으며 어떤 팀들은 신디케이트 형태로 운영되기도 했다. 1899년의 우승팀 브루클린 수퍼버스(Brooklyn Superbas)가 그 예이다. 네드 헨런이 감독을 맡았던 브루클린 수퍼버스는 브루클린과 볼티모어의 스타급 선수들이 총망라되다시피했다.





로빈슨이 소유한 세인트루이스-클리블랜드 신디케이트도 이와 유사한 경우였다. 브라운은 클리블랜드의 우수 선수들을 세인트루이스에 몰아 주었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세인트루이스가 5위로 시즌을 마감한 것이다. 그리고 알짜가 모조리 빠져나간 클리블랜드 팀은 20승 134패라는 참담한 기록을 남겼다. 1899년에 세워진 이 기록은 154경기 스케줄 하에서 단일팀이 남긴 최악의 시즌 승률 기록으로 남아있다.


젊은 날의 존 맥그로




1899년 시즌이 실패로 끝나자 구단주들은 마침내 12개 구단 체제를 포기한다. 구단주들은 볼티모어, 클리블랜드, 워싱턴, 루이빌의 4개 구단 지분을 10만 달러에 사들이는 대가로 이 구단들을 메이저리그 지위에서 떨어뜨렸다. 애초 빚으로 시작한 독점 메이저리그는 결국 빚으로 종막을 고한 셈이었다. 그러나 다가올 20세기에 메이저리그는 다시금 양대 리그 시스템 하에서 번창하게 된다.







babuangel
2001-09-03 16:59:14
671 번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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