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게 게시물을 올릴수있는 게시판입니다.
  • 유년추억
  • 학교생활
  • 입시준비
  • 대학생활
  • 군생활
  • 알바생활
  • 취업준비
  • 직장생활
  • 원룸생활
  • 연애중
  • 결혼준비
  • 집안살림
  • 자녀교육
  • 창업준비
  • 이민유학
  • 노후생활
  • 전체보기


아메리칸 리그 전쟁

 

아메리칸 리그 전쟁

1900년, 메이저리그로서의 지위를 인정받기 위한 아메리칸리그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아메리칸리그의 입장에서는 1900년은 그야말로 적절한 시점이었다. NL이 4개 구단을 리그에서 탈락시켰기 때문에 많은 선수들이 일자리를 잃었으며 장사가 될만한 도시들이 무주공산으로 남아 있었다. 또한 NL의 구단주들은 라이벌 AA를 부활시키려는 기도에 정신을 빼앗긴 상태였다. NL이 아메리칸리그의 대두에 크게 신경을 기울이지 않은 데에는 1900년이 실로 오랜만에 찾아온 야구 호황기였던 탓도 있다. 그해 미국 경제는 오랜 불황에서 벗어나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으며, 그에 힘입어 대부분의 NL 구단은 흑자를 기록할 수 있었다. 1900년 내셔널리그의 우승팀은 피츠버그를 4.5게임차로 따돌린 브루클린 수퍼버스였다.



아메리칸리그의 회장 밴 존슨

아메리칸리그의 설립자들은 이 틈을 노렸다. 아메리칸리그의 전신인 웨스턴 리그(Western League)는 1900년 이전에 중서부를 기반으로 한 마이너리그로 설립되었다. 비록 마이너리그였지만 웨스턴 리그는 흥행 및 경기 수준 면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유능한 수완가였지만 독재자이자 술고래이기도 했던 리그 회장 밴 존슨은 이미 1894년부터 웨스턴 리그를 메이저리그로 격상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존슨은 그때부터 리그의 선수들과 연고지에 대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 NL의 구단주들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1899년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NL이 8개 구단으로 축소된 것이다. 찰스 코미스키, 코니 맥 등의 지원에 힘입어 존슨은 웨스턴 리그를 '아메리칸리그'로 개명했다. 아울러 구단 로스터에 NL에서 쫓겨난 메이저리거들을 채워넣었으며, 코미스키의 팀을 시카고로 이동시켰다. 시카고는 이미 NL의 컵스가 자리잡고 있던 대도시였다. 전직 메이저 리거들과 우수 유망주들로 구성된 코미스키의 화이트스타킹스 클럽은 AL 첫해 원년 우승의 영광을 차지한다. 첫해 AL의 관중동원은 성공적이었다.



사이 영

성공적인 데뷔에 고무된 존슨은 AA의 소멸로 자연히 사문화되어 있던 내셔널 어그리먼트를 검토하기 시작했다.그런 후 존슨은 아메리칸리그가 메이저리그임을 일방적으로 선언해버렸다. 1901년의 이 선언으로 소위 '아메리칸리그 전쟁'이 시작된다. 존슨 편에 선 투자가들은 NL의 예전 프랜차이스였던 볼티모어, 워싱턴, 클리블랜드, 디트로이트, 그리고 이미 NL 클럽이 연고지로 하고 있던 필라델피아와 보스턴에 새 구단을 설립하거나, 기존 구단을 옮김으로써 NL에 대한 적대를 공공연히 드러냈다. 그리고 구단 로스터에 높은 연봉을 미끼로 데려온 NL 선수들을 채워넣었다. 당시 리그를 옮긴 스타 선수들로는 사이 영, 클락 그리피스(Clark Griffith), 지미 콜린스, 나폴레옹 라조이(Nap Lajoie) 등이 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1901년 시즌 아메리칸리그 구단들은 어느 한 팀의 독주없이 활발한 경쟁을 펼칠 수 있었다. 이익을 기록한 것은 물론이다. 코미스키의 시카고는 보스턴을 4게임 차로 누르고 원년에 이어 2년 연속 우승기를 안는다.


AL이 공격을 개시한 시점은 절묘했다. 1901년에서 1902년 사이 NL은 리더십의 부재로 우왕좌왕했으며 구단주들은 신임 회장 자리를 놓고 내분 상태에 빠져있었다. 자이언츠의 구단주 앤드루 프리드먼 파와 앨 스폴딩 파로 갈라진 이 싸움은 AL에 대항하기 위해 휴전할 때까지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1902년 NL은 중재 위원회를 소집하여 헨리 클레이 풀리엄(Henry Clay Pulliam)을 신임 회장으로 선출했다. 1903년 AL에 대해 가장 호전적이었던 프리드먼이 소유하고 있던 자이언츠의 지분 125,000달러를 매각하는데 동의하자, 두 리그는 화해를 향한 일보를 내디뎠다. 반대급부로 AL의 뉴욕에 새 프랜차이스를 설립할 권리는 프리드먼의 친구에게 주어졌다. NL이 내홍을 겪고 있었던 반면 AL은 또다른 성공적인 시즌을 보내고 있었다. 더 많은 NL 선수들이 AL로 합류했으며, 코니 맥의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는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를 다섯 게임 차로 누르고 1902년 시즌 우승팀이 되었다.


세네터스 구단주 클락 그리피스의 선수 시절

1902년 가을 오랜 싸움에 싫증이 난 NL 구단주들은 양대 리그 체제로 복귀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NL은AL에 공식적으로 화해를 요청한다. AL 측의 존슨과 코미스키, NL 측의 풀리엄과 신시내티 구단주 오거스트 허만(August Garry Herrmann)은 1903년 초엽에 회동하여 새로운 내셔널 어그리먼트에 합의했다. 이 협약에 따라 NL과 AL은 상호 독립적이지만 동등한 메이저리그로 운영되게 되었다. 양 리그는 경기 규칙을 통일했으며 경기 스케줄을 조정했다. 또한 상호 선수 계약과 연고지 권리는 존중하기로 약속했다. AL이 선수빼오기를 중단하기로 약속함에 따라 선수 보류권 조항은 복원되었다. NL 측은 뉴욕에 AL의 새 연고지를 설립하는데 동의했다. 존슨이 당시 재정상태가 취약했던 볼티모어 팀을 뉴욕의 맨하탄으로 옮기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이 팀은 후일 뉴욕 양키스로 알려지게 된다. 어그리먼트에 포함된 다른 내용들로는 마이너리그를 재분류하고 마이너리그 선수 드래프트 규칙을 새로이 마련했던 것 등을 들 수 있다. 이 시기 마이너리그는 사상 최대의 호황을 구가하고 있었다. 마이너리그 역사상 가장 많은 팀이 활동했던 1913년, 미 전역에서 46개의 마이너리그가 경기를 치르고 있었다. 내셔널 어그리먼트는 조직화된 프로야구의 성장에 촉매제가 되었다.


그러나 선수들의 입장에서는 남의 얘기나 다름없었다. 프로야구의 활성화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의 권한은 제한되었으며, AL과 NL 대표로 구성된 내셔널 커미션 National Commission은 선수 대표를 멤버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1902년에서 1913년 사이 선수 노조를 결성하려는 시도가 두 번 있었지만 번번히 구단주 측에 의해 저지되었다. 내셔널 어그리먼트에 선수 연봉을 제한한 내용은 없었다. 하지만 선수 보류권 조항은 관습적으로 인정되고 있었다. 그리고 내셔널 커미션은 자체 규약에 의해 프로야구를 조정하며, 이 권한은 외부의 법률이나 권력에 의존함이 없이 스스로 권한을 가진다.(National Commission has right to control baseball by its own decrees.... enforcing them without the aid of law, and making it answerable to no power outside its own.)라고 지나치게 포괄적으로 정의되었다.


나폴레옹 라조이, 일명 냅.

3인으로 구성된 내셔널 커미션은 야구 규약을 집행하는 최고의 권력 기구이자 내셔널 어그리먼트를 실효화하고양대 메이저리그 사이의 평화를 유지하는 기구였다. 1880년 대에도 NL과 AA 사이에 이와 유사한 기구가 있었지만 새로이 구성된 내셔널 커미션은 이후 7년간 독립적인 양 리그 사이의 중재 역할을보다 훌륭히 수행했다. 내셔널 커미션의 멤버는 AL 회장 존슨과 NL 회장 풀리엄, 그리고 신시내티의 구단주 개리 허만이었다. 허만은 커미션의 종신 회장직을 맡았다. 결국 커미션 내에서 NL은 두 장의 투표권을 쥐게 된 셈이었지만 실제로 존슨과 허만은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내셔널 커미션이 해체되기까지 이 멤버는 변하지 않았다. 이전까지 NL에서 네 명의 회장이 거쳐갔던 것과 비교해서 리더십의 강화를 엿볼 수 있다. 과거 NL의 구단주들은 회장의 권한이 너무 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반면 존슨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강력한 회장이었다. AL의 짜르라고 불린 존슨은 NL의 공격으로부터 AL을 수호했으며, 그 과정에서 프랜차이스 계약, 구단주 교체, 게임 스케줄 확정, 기본 입장료 책정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관여했다. 선수들과 구단주들은 존슨이 마련한 기준에 충실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존슨의 권력 독점은 필연적으로 AL 구단주들 사이에서 적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1919년 블랙 삭스 스캔들이 터지기까지 존슨의 지배력은 확고한 것이었다.


필라델피아 시절의 지미 콜린스

1903년에서 1920년 사이의 기간 동안 존슨은 허만의 지원에 힘입어 내셔널 커미션을 실질적으로 지배했다.내셔널 커미션은 야구계의 대법원과 같은 존재였다. 커미션은 구단 간의 갈등을 조절했으며, 클럽의 재정 지원, 선수 징계, 심판 보호, 페더럴리그(Federal League)의 침입 저지, 선수 노조 설립 기도 저지, 마이너리그와의 관계 정립 등의 일을 수행했다. 내셔널 커미션의 가장 큰 업적은 1903년 월드시리즈를 부활시킨 것이다. 1903년 공식적으로 부활되었을 때만 해도 월드시리즈의 위상은 보잘 것 없었다. 1904년 NL 우승팀 자이언츠는 AL의 팀과 경기를 갖는 것을 거부했다. 하지만 1905년 양대 리그는 월드시리즈를 내셔널 커미션의 주관 하에서 치러지는 권위있는 대회로 격상시키는데 동의했다. 월드시리즈 수익의 10%는 내셔널 커미션의 재정으로 귀속되었다. 존슨이 이끈 커미션의 뛰어난 행정력에 힘입어 이내 월드시리즈는 메이저리그 시즌에서 영구적인 부분으로 자리잡았다. 수익성이 늘어난 것은 물론이다. 1910년 월드시리즈의 총 수익은 1905년에 비해 무려 10배나 증가했다. 하지만 내셔널 커미션은 월드시리즈 운영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져야했다. 그리하여 1919년 월드시리즈에서 발생한 농간 때문에 내셔널 커미션은 해체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









babuangel
2001-09-06 01:59:03
917 번 읽음
☞ 로그인 후 의견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캐시선물





365ch.com 128bit Valid HTML 4.01 Transitional and Valid CSS!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