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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타살인가?

 
'김두한의 여인' 박정인씨
"그분은 살해당했습니다." '김두한의 여인' 박정인씨(69)가 청천벽력 같은 증언을 했다. 협객 김두한(1918∼1972)이 타살됐다는 것이다. 김두한은 30년 전인 1972년 11월21일 사망했다. 당시 공식적인 사인은 뇌출혈. 약속장소에 나갔다 갑자기 쓰러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씨는 이를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부인했다. "그분은 아침에 '임자, 오늘 예쁘게 하고 있어. 오후에 전화하면 나와요. 나와 영화나 봅시다' 하고 호탕하게 웃으며 나가셨어요. 그리고 몇 시간 후 쓰러졌고, 나흘 간 혼수상태에서 말 한마디 못한 채 떠나셨습니다." 김두한의 돌연한 사망은 오랫동안 미스터리였다. 시대의 협객이자 소문난 강골인 그가 왜 환갑을 한참 앞둔 54세 한창 나이에 쓰러졌는가. 김두한은 왜 전혀 발길을 하지 않던 센추럴호텔에서 그날 약속을 했고, 누구를 만난 것일까. 그의 사망을 알린 미지의 목소리는 누구인가. 시대를 풍미했던 이 사나이는 왜 하필 그 시기에 "무섭다" "나를 지켜 달라"고 측근들에게 긴밀히 말했던 것일까. 김두한의 당시 주치의였던 권도원씨(82·제선한의원 원장)조차 '뇌출혈설'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김두한의 사인이 의문시된다는 점은 박정인씨와 '후계자' 조일환씨(65) 등 최측근들끼리만 쉬쉬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TV드라마 를 계기로 김두한의 면모가 새롭게 조명되면서 그의 사인에 대해서도 '이제 밝힐 때'라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 박정인씨의 무거운 입을 열게 만들었다. 서울 명성여고 영어교사이던 인텔리 여성 박씨는 법적인 결혼은 하지 않았으나 김두한이 사망할 때까지 15년 동안 동고동락한 사실상의 부부였다. 김두한의 감옥살이를 수발하고 임종을 한 것도 그녀다. 박씨는 "이제 꼭 밝혀야 할 때"라며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며칠 후면 김두한의 사망 30주기다. 의학적으로 뇌출혈은 뇌의 혈관이 파괴돼 출혈한 상태다. 그러나 김두한이 뇌출혈로 사망할 만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 박씨의 주장이다. 일각에서는 김두한은 평소 고혈압이었기 때문에 뇌출혈로 사망했다고 하지만, 박씨에 따르면 김두한은 혈압이 그렇게 높지 않았다. 그가 혈압이 높다고 소문난 것은 교도소에서 병보석으로 풀려나기 위해 일부러 소금을 먹었기 때문이다. 의학계에서 '혈압과 소금은 상극'이라고 말한다. 실제 1966년 9월 국회 오물투척 파동으로 구속된 김두한은 소금을 먹고 혈압을 높이는 방법으로 병보석 처분을 받아냈다. ■ 중정요원 일주일전 찾아와 협박…사망일 21일 유신헌법 선포일 박씨의 증언은 김두한 사망 3일 전인 1972년 11월18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일 오전 9시쯤 김두한은 모 기관원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전화를 받고 10시쯤 정릉 집을 나섰다. 그가 '영화 약속'을 하고 나간 후 오후 5시쯤 전화벨이 울렸다. 박씨는 '남편'의 전화인 줄 알고 기쁜 마음에 받았다. 청계천3가 센추럴호텔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신원을 밝히지 않은 낮은 목소리가 다짜고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다. "김두한씨가 갑자기 쓰러져 호텔 302호에 누워 있다"는 것이었다. 박씨는 곧장 센추럴호텔로 정신없이 달려갔다. 그러나 김두한은 보이지 않았다. 호텔측은 몸상태가 좋지 않아 이미 서울 서대문 고려병원(현 삼성제일병원) 응급실로 옮겼다고 전했다.박씨가 고려병원에 도착했을 때 김두한은 이미 혼수상태였다. 산소호흡기에 의존한 채 가쁜 숨만 몰아쉬었다. 그때가 오후 6시쯤이었다. 토요일 오후라 의사들은 모두 퇴근했다. 19일 일요일도 그렇게 병원에서 보냈다. 20일 월요일 오전 9시20분에서야 내과의사의 진료를 받았다. 혼수상태인 김두한의 몸을 엎드리게 한 후 큰 주삿바늘을 머리 뒤쪽에 쿡 꽂은 후 피를 뽑았다. 선지 같은 붉은 핏덩어리가 왈칼왈칵 쏟아졌다. 의사는 머리를 흔들었다. 가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김두한은 응급차에 실려 정릉 집에 도착했다. 여전히 혼수상태로 하루를 집에서 보낸 김두한은 21일 오전 9시5분 한많은 인생을 뒤로 한 채 눈을 감았다. 박씨는 김두한이 18일 외출하면서 21일 싸늘한 시신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김두한이 사망하기 1주일 전 정릉 집으로 찾아온 모 기관 직원 2명을 미스터리 인물로 떠올렸다. 그들이 김두한 죽음의 배후라고 섣불리 단정할 수 없지만 박씨는 "그들이 영감님을 협박했다. 영감님은 '왜 나를 못살게 구느냐. 나는 편히 살고 싶다'면서 그들과 심한 말싸움을 벌였다"고 회상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당시의 상황이다. 1970년도로 접어들면서 박정희 정권은 유신체제에 관한 구상을 확고히 했다. 여당 인물이라도 유신에 회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으면 가차없이 보복했다. 79년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된 전중앙정보부장 김형욱과 1975년 경기도 포천군 약사봉에서 의문사한 재야지도자 장준하 선생 사건도 그 와중에서 터져나왔다. 1966년 국회 오물투척사건에서 보듯 김두한 역시 박정희 정권의 눈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은 존재였다. 박정희 정권의 발꿈치를 물고늘어지는 김두한은 분명 눈엣가시가 아닐 수 없었다. 김두한의 타살 흔적은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박씨는 김두한 사망 2개월 전 "그분은 무교동 맘모스호텔에서 누군가로부터 뒤통수를 가격당한 후 피를 흘린 채 집으로 들어왔다"고 밝혔다. 조일환씨도 이와 비슷한 증언을 했다. 조씨는 "형님은 수차례 뒤통수만 맞는 테러를 당했다"면서 "형님은 내게 '조동지, 사람들이 무서워. 나를 테러해. 곁에서 지켜주게'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조씨는 "누가 형님의 뒤통수를 때렸는지 알지만 지금은 입을 다물겠다"고 덧붙였다. 김두한은 여러차례 뒤통수를 가격당한 후유증으로 72년 6월에도 성모병원에 입원했다. 이런 과정에서 김두한은 죽음의 그림자를 예견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박씨는 "그분은 '유명인사 중 제명대로 산 사람은 없다. 조병옥 박사는 약을 먹여 죽였고, 김구 선생은 암살됐다. 나도 그렇게 죽을 수 있다'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박씨는 김두한이 집에 있을 때는 물 한모금이라도 남편보다 먼저 마셔 그를 안심시켰다. 그는 '독살' 등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었다는 것이다. 박씨는 "그분은 평소 센추럴호텔은 싫어해 가지 않는다. 왜 그날 그곳을 약속장소로 정했는지 이상하다"고 말했다. 또 "18일 응급실에 도착했는데 건장한 사람 서너명이 응급실 주변을 배회하며 영감님의 상태를 지켜보았다"고 회고했다. 그들은 누구였을까? 김두한이 사망했던 72년 11월21일에는 박정희 정권의 '유신헌법안'이 확정, 공표됐다. 그것이 어떤 연관선상에 있을까. '김두한 의문사'에 관한 질문은 이제 시작됐다. 김두한의 주치의였던 한의사 권도원씨는 이렇게 말했다. "김두한씨는 병으로 돌아가신 게 아닌 것 같다. 만약 병이 있었다면 당시 주치의인 내게 연락을 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출처speedmovie

다반향초™
2003-03-23 16:53:21
7658 번 읽음
  총 3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1. 청향초 '03.3.24 7:04 AM 신고
  2. 2. 나르크 '03.4.19 11:02 PM 신고
    :-D*귀차니즘;; ↓댓글에댓글
  3. 3. 납떙 '03.3.23 7:31 PM 신고
    :-S*에고.....읽기가 힘들당...;; ↓댓글에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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