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은 유난히 비가 많았던 해로 기억되네요. 유럽뿐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이 물난리를 겪기도 했구요. 제가 사는 동프랑스도 예외는 아니어서 작년에 해를 본 날이 손에 꼽을 정도더니 올해는 희안하게도 이제 겨우 3월인데 날이 따뜻해 졌답니다. 지난 3주간 비도 거의 없었구요, 매일 매일 화창하게 뜨는 해가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주말이면 산책나온 가족들이 동네 호수에서 백조와 거위에게 먹다남은 빵조각을 주고 있구요. 저희 동네는 제가 매번 촌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스위스 국경을 접한, 프랑스내에서도 자연과 참 가까운 동네랍니다. 야생 백조나 거위를 보는게 별로 특별한 일이 아니지요. 그 외에도 롤러스케이트나 블레이드를 연습하는 젊은이들, 딱 달라붙는 전문 스포츠 셔츠와 반바지를 갖추고 자전거를 타는 할아버지 그룹, 느긋하게 햇볕을 즐기는 노년 부부들, 주변의 시선을 끌며 보트스키를 타는 이들... 따뜻해진 날씨덕에 이곳 저곳이 한결 소란스러워 졌답니다.
저희 시아버지는 이미 뒷뜰 농사 준비를 마치셨구요 제 남편도 겨울에 심은 튜울립과 수선화 봉오리가 올라오기 시작해서 저에게 큰소리를 치고 있답니다. 화초에 별로 관심이 없는 저는 이왕 물주고 키울거면 피고 져 버릴 꽃보다 뭔가 먹을 수 있는 걸 키우자는 쪽이거든요. 뭐 하다못해 파슬리나 대파, 아니면 당근이라도...
제 남편은 꽃이나 나무를 참 좋아해서(남자가
저희 집 구석 구석은 제가 이름도 모르는 나무들이 무성하답니다. 욕실에는 저의 구박을 무릅쓰고 사들인, 형태가 제각각인 선인장이 빼곡하구요. 반면 저에게는 자잘한 장식품은 일일이 먼지를 털어 주어야 하는 애물단지 목록 1번, 매번 물을 주고 햇볕을 쬐어 주어야 하는, 먹을 수도 없는(
화초나 수목들이 애물단지 목록 2번이지요.
이런 취향의 차이는 집안일을 할 때 국민성의 차이로 까지 연결되게 됩니다. 미국이나 프랑스나 왠만한 집 고치는 일들을 남자들이 하는데요, 사람 쓰는게 비싸기 때문이기도 하고 일정을 맞춰서 오래 기다리느니 DIY(Do It Yourself) 전문 상가에서 공구를 사다가 스스로 알아서 고치고 만드는게 일반화되어 있지요. 저희 집 거실과 방에 깔린 마루바닥이나 욕실과 부엌의 타일, 부엌의 찬장과 씽크대 설치도 다 남편과 시아버지 작품입니다.
어쨌든 작년에 집도배를 새로 할 때입니다. 저의 경우 뭔가 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바로 실행, 끝을 봅니다. 확실하고 빠르지요. 역시 한국인 답습니다. 반면 느긋한 제 남편은 마음 먹기까지 일주일, 재료 고르는데 일주일, 일 시작하기 전에 확인해야 하다면서 다시 일주일, 하루 일 하고 나면 다음 하루는 쉬고, 급한 게 없더군요.
거실 도배만 가지고 남편이 달을 넘기자 참을만큼 참았던 저의 성질이 발동합니다. 거실 물건들을 방마다 쌓아놓고 한달을 기다렸으니 제 딴에는 오래 참은 거지요. 우리 말도 있잖습니까, 앓느니 죽지... 뭔가 보여 준다는 맘으로 손을 붙였지요.
태어나서 처음 도배 해봤습니다. 남편이 하는거 어깨 너머로 본 것도 있고 나름대로 손재주 있다고 자신도 했구요. 욕실 도배 하루만에 완성, 화장실, 부엌, 각각 하루만에 다 끝내 버렸지요. 남편과 시아버지 입이 딱 벌어지더군요. 한국사람의 기개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도배를 끝내고 일년을 살아보니 남편이 도배한 곳과 제가 도배한 곳이 차이가 나기 시작하더군요. 남편이 도배한 곳은 비가 많은 해를 지내고도 멀쩡한데 제가 손을 댔던 곳들은 조금씩 천정에 얼룩이 지고 벽지 끝부분들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힘의 차이일까요? 아님 경험의 차이일까요? 둘 다 아니더군요.
도배를 새로 하려면 먼저 붙어있는 벽지에 물을 축여 벗겨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천장을 칠하고 벽에 새 벽지를 붙이면 되지요. 이론상으론 간단합니다. 제 남편의 경우 이전 벽지를 벗겨낸 후 하루나 이틀 이상 벽에 스며든 물이 마르길 기다립니다. 물기가 완전히 마른 후 천장을 칠하고 다시 또 하루나 이틀 이상 페인트가 마르면 기다린 후 다시 한번 더 칠합니다. 두 겹으로 칠한 페인트니 깔끔하지요. 다시 페인트를 완전히 말린 후 새 벽지를 바르지요. 저는 급한 마음에 이 '마르는 시간'을 주질 않았거든요. 같은 날 벽지를 벗겨내고 천정을 칠하고 새 벽지를 발랐으니 벽에 스며있던 물기가 마르면서 종이가 떨어지고 벽과 이어진 천장의 페인트에 얼룩이 지는 거지요. 참을성과 여유의 차이라는 걸 한 수 배웠답니다.
프랑스에서는 집을 지을 때 백 년 후를 생각하고 짓는 다고 하더군요. 우리는 어디 그런가요? 빨리 지어서 당장 살고 싶은 마음에 서두르게 되지요. 도배 하나 가지고 과장하는 것 같지만 제 딴에는 이래서 우리나라에서 다리가 무너지고 백화점이 무너졌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답니다. 오히려 옛날에 지은 고궁이나 고가들은 아직도 튼튼한데 말이죠.
늘 바쁘고 정신없이 살았는데 요즘은 중간 중간 쉬어가는 여유를 배우고 있답니다. 한 일없이 휙휙 지나가 버리는 시간에 뒤쳐지는 것 같아 불안해 했던 마음도 좀 비웠구요, 주말이면 문을 닫아 버리는 상가들을 얄궂어 하거나 쫓기는 시간에 지쳐하던 맘을 접고 주변을 걷고 있습니다. 마치 나이든 노년부부처럼 햇볕을 쪼이면서요.
그럼 또.
p.s 정말 오랜만에 글을 실으셔서 저도 이제야 글을 퍼왔습니다.
출처: 프랑스 한인 신문 " 한위클리" 에서 퍼온 글입니다.
(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