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는 디지털 시대의 신세대를 위한 장난감이자 요술방망이다. 최근 디카(디지털 카메라)가 급속히 파급되면서 대화도, 유머도, 정보도 사진으로 주고받는 ‘찍자족’들이 거리를 점령하고 있다. 디카를 휴대하고 다니며 시시콜콜한 일상까지 찍어대는 ‘디카족’이 주류를 이루지만, 반대로 디카의 가벼움을 비판하며 재래식(아날로그) 사진기만을 고집하는 ‘아카족’도 공존한다. 그러나 인터넷에 사진을 올려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것은 마찬가지. 인터넷에는 이들이 사진과 동영상을 올리는 사이트·홈페이지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디카족 조현경씨(30·프리랜서·사진 왼쪽)와 아카족 김경일씨(23·학생)를 통해 신세대 ‘찍자족’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나는 ‘디카족’조현경
토요일 오전 9시30분, 집:눈을 뜨자마자 디카의 배터리 양부터 확인한다. 부스스한 얼굴, 이를 닦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둔다. 방심한 모습들 하나하나도 나의 일부.
오전 10시10분:어떤 옷을 입고 나갈까. 디카로 찍어놓은 옷장 속의 옷과 신발들을 불러와 하나하나씩 코디해본다. 회색 요가 팬츠에 후드 달린 트레이닝복 상의, 편안한 검정 스니커즈를 골랐다.
오전 10시25분, 집앞 골목:갖고 있는 7개의 디카 중 소니 사이버샷 U10, 후지필름 파인픽스 50i, 디카가 내장된 휴대폰을 챙겨 집을 나선다. 하루 200∼300장 정도 사진을 찍으려면 3개는 기본이다. 날씨가 참 좋다. 화창한 하늘, 화사한 꽃덤불도 한 컷.
오후 12시13분, 시내 헬스클럽:어제 트레이너가 가르쳐준 운동 동작을 디카에 담아두고 보면서 따라 한다. 옆구리 사진 찍는 것도 잊지 않는다. 두달 전 사진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허리가 단단해졌다.
오후 1시, 새로 생긴 파스타집:꽃무늬가 들어간 예쁜 그릇이 마음에 든다. 카메라로 찍어두고 다음에 백화점에서 찾아봐야겠다. 메뉴판도 담아놓으면 다음에 오기 전에 미리 가격을 계산할 수 있다. 식사를 마치고 난 뒤 디카로 얼굴을 찍어 이빨에 뭐가 끼였나 살펴본다. 거울이 따로 필요없다, ㅎㅎ.
오후 2시35분, 광화문 서점:책을 뒤적이다 일과 관련된 내용을 발견. 수첩에다 받아적기엔 양이 많지만 사진 한장만 찍어놓으면 스크랩 OK. 프로필 사진이 필요하다는 거래처에 내 사진을 찍어 휴대폰으로 전송했다.
저녁 7시40분, 신촌 술집:간만에 만난 친구들의 손금을 찍는다. 요즘 사람들의 손금 사진 찍어 모으는 데 재미를 들였다. 벌써 300명 정도쯤 모였으니 1,000명 정도는 쉽게 채울 듯.
저녁 10시31분, 홍대 앞 클럽:사진촬영을 못하게 돼있지만 휴대폰으로 몰래 찍으면 들키지 않는다. 현란한 불빛 아래서 춤추는 내 모습이 조금 낯설게 느껴진다.
새벽 1시12분, 집:하룻동안 찍어놓은 사진을 정리해서 홈페이지에 올린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진도 버리지 않고 CD에 차곡차곡 담아놓는다. 지금까지 모아놓은 사진만 CD로 20장이 넘는다. 잠시 디카 사이트에 들어가 다른 사람들이 올려놓은 엽기사진들을 훑어보며 한참을 낄낄댄다.
오늘 하루도 디카로 시작해 디카로 마감한다. 일상의 소소한 부분들까지 모두 디카로 담기 때문에 내 개인사 기록을 만들어가는 느낌이다. 필름의 제한이 없기 때문에 내키는 대로 마음껏 찍을 수 있고, 다양한 실험도 해볼 수 있다. 생각을 하고 준비를 한 뒤 찍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 된다’고 판단되면 일단 찍고 본다. 찍어서 바로 볼 수 있고 다양한 변형이 가능하다는 점도 디카의 매력이다.
/이호승기자 jbravo@kyunghyang.com/
▲나는‘아카족’김경일
현상소 앞에 앉아 기다리는 이 시간이 즐겁다. 잘 나왔을까, 어떻게 나올까. 로모와 홀가야 워낙에 손에 익었지만, 이제 두번째 롤을 현상하는 아가트가 걱정이다. 지난번처럼 아가트 녀석이 투정을 부려 온통 새카맣게 나올지도 모른다.
처음 로모를 들고 현상소에 갔던 날, 주인은 빛이 들어가고 초점 없는 사진이라며 한장도 뽑아주지 않았다. “무조건 한장씩 뽑아주세요”라고 떼를 쓰면서 현상소 주인과 싸우기도 여러번. 이제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주인이 먼저 씽긋 웃는다. “무조건 한장?”
옛소련 KGB가 첩보용으로 썼다는 로모를 구입한 것이 3년 전 일이다. 찍으면 찍히는 자동카메라가 아니었다. 눈으로 일일이 거리를 맞추고, 노출을 설정해야 했다. 플래시가 없으니 어두운 곳에서는 흔들리지 않도록 꽉 잡아줘야 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받아든 첫 사진들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테두리 부분이 어두워지는 로모 특유의 아련한 느낌. 그때부터였다, 카메라의 세계에 빠져든 것은.
렌즈 4개가 달린 슈퍼샘플러, 플라스틱 몸체지만 조리개부터 셔터 스피드까지 일일이 맞춰줘야 하는 스메나, 한장에 두 컷의 사진이 한꺼번에 찍히는 펜 EE-3, 120㎜ 필름으로 정사각형 사진을 뽑아내는 러시아제 홀가…. 인터넷과 황학동 시장을 헤집고 다니며 모은 카메라가 모두 11개. 서너개의 카메라와 예비 필름은 가방 속의 필수품이다.
아침부터 밤까지 사진을 찍는다. 지하철에서 졸고 있는 아저씨, 구깃구깃 쓰레기통 속에 버려진 휴지조각, 비 오는 풍경을 찍는다. 한동안 노란색만 찍기도 했다. 노란 자동차, 노란 풍선, 노란 우산…. 경찰차와 소방차를 줄기차게 찍은 적도 있었다.
같은 구도라도 카메라에 따라 느낌은 확 달라진다. 파란색을 좋아하는 로모, 맑고 선명하게 표현해내는 아가트. 홀가는 흐릿한 초점으로 시시한 일상을 환상적인 분위기로 찍어낸다. 하도 많이 찍어 셔터스프링이 느슨해진 내 로모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물건. 녀석이 찍어낸 사진도 세상에 하나뿐이다. 빛이 들어갔거나 초점이 맞지 않아도, 어둡게 나왔거나 너무 밝더라도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 모두는 나만의 카메라로, 나만의 구도로, 나만의 생각으로 찍어낸 ‘작품들’이다.
오늘은 그동안 찍은 사진을 스캔하는 날. 스캐너로 인터넷 갤러리에 ‘작품’을 올린다. 품평부터 카메라 구입, 사용법까지 모두 인터넷으로 해결한다. 아가트도 인터넷 공동구매로 구입했다. 요즘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카메라 개조를 배우고 있다. 나사를 끼워 조리개 속도를 조절하거나 렌즈를 바꿔 끼우는 정도지만, 사진의 느낌은 확실히 다르다. 언젠가는 ‘고수’들처럼 직접 현상을 해보고도 싶다.
LP판의 긁히는 소리가 없으면 음악이 아니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 카메라도 마찬가지다. 아날로그 카메라는 촬영부터 현상까지 ‘나만의 작품’을 고민하게 만든다. 순간포착의 기다림은 그리움을 부른다. 그리움이 없으면 사진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찍는다, 아날로그 카메라로.
/최명애기자 glaukus@kyunghyang.com/
-[취재수첩]온라인 인화서비스 활짝, 일반 사진관‘캄캄’-
디카의 인기로 명암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업종들도 생겨났다. 디지털 업체들은 즐거운 비명을 지르지만 아날로그 사진과 관련된 업종들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뜨고
온라인 사진관은 디카로 찍은 사진을 인화해주는 서비스로 디카의 인기와 더불어 뜨고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포털 및 커뮤니티 사이트, 이동통신회사들도 최근 앞다퉈 온라인 인화서비스에 뛰어들고 있다.
포토프린터도 온라인 사진관을 통하지 않고 가정에서 손쉽게 디카 사진을 인화할 수 있어 인기를 끌고 있다.
디카의 메모리 카드에 사용되는 반도체 산업 등도 호황이며, 서울 압구정동에는 디카족을 위한 카페까지 생겨났다.
▶지고
일반 사진관은 최근들어 매출감소로 울상을 짓고 있다. 필름 현상 주문이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 필름 제조 업체 역시 디카 보급으로 매출액이 줄어 타격을 받고 있는 업종. 1990년대 후반 젊은 층을 중심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스티커 사진 역시 디카로 수요층이 이동하면서 어느새 자취를 감춰버렸다.
찍어서 바로 사진을 볼 수 있다는 매력 때문에 꾸준히 인기를 누리며 마니아층까지 형성돼 있었던 폴라로이드 역시 디카에 밀려 쓸쓸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유원지나 입학·졸업식에서 자주 볼 수 있던 사진사들도 이젠 빛바랜 기억속의 풍경이 되어가고 있다.
/이호승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