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한 집단양민학살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당시 참전장교의 증언이 처음으로 나왔다.
해병 청룡여단 제2대대 7중대장으로 베트남전에 참가했던 김기태(65·예비역 대령)씨는 4월18일 발행된 시사주간지 및 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66년 11월14일 베트남 중부지역 쿠앙응아이 선틴현 지역에서 베트콩 탐색소탕작전을 수행하던 중 20∼35살 정도의 비무장 청년 29명을 후송 과정에서 폭탄구덩이에 넣고 모두 사살하는 등 집단학살이 이뤄졌다”고 증언했다.
김씨는 “이 사건은 66년 11월9일부터 14일까지 선틴현 지역을 중심으로 이뤄진 베트콩 소탕작전(일명 ‘용안작전’) 과정에서 일어났다”며 “같은 달 10일 민간인 촌락에 진입하던 중 경미한 사격이 날아오자 그곳에 거주하던 부녀자와 노인들 수십명을 사살하고 가옥을 모두 불태운 사건도 있었다”고 밝혔다.
김씨는 비무장 베트남인 29명 집단사살과 관련해 “산굴 수색 과정에서 이들을 체포했으나 무기를 발견하지 못해 애초 남베트남군 포로심문소에 넘길 계획이었다”며 “그러나 대대로부터 월맹군 매복조에게 당한 인접 6중대를 구출하라는 긴급지시가 떨어져 더 이상 데려가지 않고 모두 사살했다”고 덧붙였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한 양민학살에 대해서는 그동안 베트남 현지 피해자와 가족들의 증언이 잇따랐으나, 한국군 참전군인의 증언에 의해 구체적으로 확인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김씨는 또 “한 마을에서 40∼50명 정도의 주민을 모아놓았다가 모두 집단사살한 사건도 있었다”며 “당시 나는 중대원들에게 ‘살려주라’고 명령했으나 뒤에 남아 있던 부대원들이 이 지시를 듣지 않았다”고 밝혔다.
김씨는 이런 살상내용을 상부에 전혀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한편 은 김씨의 증언에 따라 베트남 현지취재를 한 결과, 당시 양민들이 피해를 입은 지역이 쿠앙응아이성 선틴현 푹빈촌 일대이며, 이곳 주민들의 증언과 김씨의 고백이 일치하는 것을 확인했다.
김씨는 해사 14기 출신으로 66년 10월부터 67년 11월까지 1년간 베트남전에 참가했으며, 그 뒤 해병 제1사단 파월특수교육대 교관, 김포보안부대장, 해군첩보부대장, 국방부 대간첩본부 정보과장 등을 지내고 지난 82년 대령으로 전역했다. 전종휘 기자symbio@hani.co.kr
[베트남인학살] 베트남전 참전 중대장의 ``고백``...04/18 22:08
[베트남인학살] 김기태씨, ``정부 차원 보상 필요``...04/18 20:12
[베트남인학살] 피해 베트남주민들의 증언...04/18 20:02
[베트남인학살] 한국군, 베트남 민간인 학살은 사실...04/18 19:04
편집시각 2000년04월18일20시12분 KST 한겨레/사회
[베트남인학살] 김기태씨, ``정부 차원 보상 필요``
김기태(65)씨는 18일 취재진과 만나 “용안작전 이틀째 있었던 푹빈촌 사건의 피해자들 대부분이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이라 죄책감이 든다”며 “전쟁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와 보상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씨는 “비무장 베트남 청년들을 폭탄구덩이에 넣고 집단 사살한 것은 당시 작전상황에서 불가피했다”고 주장했다.
-무기도 없는 베트남 청년들을 꼭 폭탄구덩이에 넣고 죽여야 했나.
=모두 남자들인데다 무기는 감춰놓았을 수도 있어 충분히 전투병력화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끌고 올 때 산 위에서 베트콩들이 저격을 하기도 했다.
-작전양상이 너무 심한 것 아니었나.
=베트남전은 게릴라전이다. 적 통치 지역에서는 베트콩이든 베트콩이 아니든 식별이 안된다. 모든 베트남작전의 양상이 다 그랬다. 베트콩 마을을 그냥 통과하면 베트콩한테 연락해서 우리의 뒤통수를 갈겼다.
-베트콩 용의자로 생각되는 사람들을 어떻게 했나.
=젊은 사람들은 일단 베트콩이라고 생각해 끌고 다니다가 다행히 작전이 일찍 끝나면 포로로 후송했다. 그러나 작전이 일찍 끝나지 않고 아군이 피해를 받으면 사살했다.
-아이들과 여성, 노인들을 죽인 까닭은.
=젊은 사람들은 도망가 숨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자신들은 안 죽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을에 남아있던 어린아이들과 부녀자들, 노약자들이 오히려 피해를 많이 봤다.
-한국군이 귀를 자르고 코를 잘랐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실제로 그런 일 있었다. 중대원 가운데 한명은 죽은 사람의 눈알만 파서 알코올병에 담가두는 병사가 있었다. 또 한명은 한쪽 귀만 잘라 모아 철사로 꿰어 막사 앞에 걸어놓기도 했다. 귀국할 때 기념으로 가져가겠다고 했다.
-심정이 어떤지.
=나는 살인 교사자이자 살인 집행관이었다.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다. 비록 부하들이 죽였지만 내가 죽인 거나 마찬가지였다.
전종휘 기자symbio@hani.co.kr
편집시각 2000년04월18일20시02분 KST 한겨레/사회
[베트남인학살] 피해 베트남주민들의 증언
“음력 9월27일이야. 아침 7시께 한국군이 럼럭촌쪽에서 들어왔어. 집을 불태우고 닥치는 대로 쏘아죽였어. 도망가다 총에 맞아죽고….”(레 티 티엣·65)
“한국군이 집에 들이닥쳐 그 때 24살이던 시동생 부인을 끌고 갔어. 살결도 하얗고, 마을에서 제일 예뻤지.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마가 찢어져 바늘로 꿰매져 있었어. 까만 옷을 입고 있었는데 옷도 갈가리 찢기고….”(하 티 호이·76)
김기태씨가 무수한 주검을 봤다는 안뚜엣마을. 마을 중간쯤 공터엔 이런 비문이 새겨진 비석이 우뚝 서 있다. `푹빈 양민학살 유적. 1966년 10월9일 남조선 군인들이 양민 68명을 학살하다.`` 이 마을 사람들은 모두 같은날 `따이한 제사``를 지낸다.
티엣은 그날 아이 2명을 안은 채 한국군에게 끌려 갔으나 아기를 보여주면서 살려달라고 정신없이 빈 탓에 살아났다고 했다.
그러나 호이의 동서는 일부 주민들과 함께 마을 한켠으로 끌려갔다가 “주민 여러분! 날 좀 구해줘요!”라는 애타는 호소에도 불구하고 여러 명의 한국군에게 강간당했다고 마을 사람들은 증언했다. 이어 한국군은 모여있던 주민 가운데 마을 남자 2명도 끌고 갔다. 나중에 보니 그들은 귀가 잘린 채 죽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사건 현장에 여전히 살고 있는 응웬 리(75) 할아버지는 가족을 잃은 이야기를 하며 울음을 쏟아냈다.
“아버지는 밥그릇을 들고, 입 안에 밥이 든 채 돌아가셨어. 조카들이 엎드려 있어서 기어다니는 줄 알았는데 들어보니 죽어 있었어. 고통스러워 방바닥을 파다 죽은 거야.” 그가 집 뒤의 땅굴에 갔을 때 어머니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웅크리고 있었다고 한다. 무서워서 그러는가보다 생각하고 손을 내리자 얼굴이 피범벅이었다. 외조카는 한달된 젖먹이를 앉고 죽어 있었다. 젖을 먹이려 했는지 한쪽 가슴을 열어젖힌 채…. 마을 사람들은 이날 한국군에 죽인 사람이 100명이 넘을 것이라고 했다.
학살현장에서 살아난 생존자 팜 티 퐁(54·여)은 “한국군이 우리 가족을 모두 체포해 당시 푹빈촌 학교운동장 자리로 끌고 갔어. 도착해보니 (푹빈촌의) 빈쭝마을에서 끌고온 여성과 노인, 아이들이 앉아 기다리고 있었지. 얼마 있다가 (한국군이) 갑자기 다연발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어. 우리는 고함치고 비명을 지르고…. 나도 피투성이가 됐지만 죽은 사람들 밑에 깔려 있었어. 그래서 한국군이 그냥 지나갔어.”
베트남 푸앙응아이/황상철 한겨레21 기자
편집시각 2000년04월18일22시08분 KST 한겨레/사회
[베트남인학살] 베트남전 참전 중대장의 ``고백``
66년 11월9일부터 같은달 27일까지 한국군 청룡여단 1,2,3대대는 번갈아가며 쿠앙응아이성 선틴현에서 `용안작전``이란 베트콩 탐색 소탕작전을 벌였다. 당시 청룡여단 제2대대 7중대(중대장 김기태 대위)는 용안 제1단계 작전(11월9∼14일)을 수행했고 이 과정에서 세 차례의 민간인 집단학살이 있었다.
66년 11월14일 오후 2시께 베트남의 중부지역인 쿠앙응아이성 선틴현의 서부지역 야산 아래 논바닥에서 소대장은 “이놈들을 어떻게 할까요?”라고 중대장에게 물었다. 눈앞에는 20∼35살 가량의 청년 29명이 탄약줄에 두손을 묶여 굴비처럼 엮여 있었다. 무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 때 갑자기 대대 상황실에서 남쪽 2∼3㎞ 지점에서 6중대가 월맹군 매복조에게 당했으니 빨리 가 구출하라는 긴급무전 지시가 떨어졌다. 중대장은 짤막하게 지시했다. “처치 곤란, 저리 끌고 가.”
베트남 젊은이들은 차례로 폭탄구덩이에 던져졌고 자동화기와 수류탄 세례가 가해졌다. 그리곤 대원들의 확인사살이 이어졌다.
이에 앞서 11월10일 7중대는 공격목표 14 안투엣1 마을에 도착했다. 집이 30~40채 정도인 이 마을에서는 경미한 저항이 있었으나, 공격받아 부상당하거나 숨진 부하는 없었다.
그러나 앞서가는 2·3소대의 뒤를 이어 중대본부가 불타는 마을에 들어서자 길바닥엔 아이들과 여자들, 노인들의 주검이 널브러져 있었다. 머리가 깨지고, 팔이 떨어져 나가고…. 주검이 무더기로 있는 곳도 보였다.
중대장은 무전으로 앞서가는 소대장들에게 고함을 쳤다. “야 이 ***들아 그만 좀 죽여!” 이 마을에서 대략 몇명이 죽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지만, 주검을 밟고 가야 할 정도로 많은 주검이 널부러져 있었다.
이날 오후 7중대는 서쪽에 있는 마을 하나를 더 공격했다. 앞서가던 2소대와 3소대원들이 이번에는 주민들을 모아 앉혀놓았다. 40∼50명쯤 됐을까. 대부분 아이들과 여자들, 노인들이었다. “야, 그냥 보내!” 중대장은 중대본부를 뒤따라오던 화기소대에 주민들을 살려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는 소대들을 지휘하며 전진했다. 몇 걸음이나 옮겼을까. 뒤에서 총성이 요란했다. “야, 뭐야!” 중대장이 고개를 돌리며 고함쳤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 사병의 외침이 들렸다. 그러나 총성은 계속됐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냥 갈 수 없었다. 누군가 살아 남아서 증언하게 되면 골치아프니까. 중대장으로선 전쟁터에서 민간인학살이 벌어지면 알려지지 않도록 ‘확실히 (확인사살을) 하라’고 지시할 수 밖에 없었다.” 김씨의 말이다. 정리=황상철
기자rosebud@hani.co.kr
★아래는 정부 신문인 대한매일의 기사
대한매일>사회
2000.4.18(화) 편집 23:36
“한국군 베트남전 양민학살”첫 증언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한 집단 양민학살이 있었다는 당시 참전장교의 증언이 처음으로 나왔다.
해병 청룡여단 제2대대 7중대장으로 베트남전에 참가했던 김기태씨(65·예 비역 대령)는 18일 발행된 시사주간지 ‘한겨레21’과의 인터뷰를 통해 “지 난 66년 11월 베트남중부지역 쿠앙응아이성(省) 선틴현(縣)에서 베트콩 탐색 소탕작전중 비무장 청년 29명과 부녀자및 노인등 40∼50명을 집단 사살한 일이 있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같은해 11월14일에는 산굴 수색과정에서 20∼35살 정도의 비무장 청년 29명을 체포,모두 사살했다”면서 “이들을 남베트남군 포로심문소에 넘길 계획이었으나 대대로부터 월맹군 매복조에게 포위당한 인접 6중대를 구출하라는 긴급 지시가 떨어져 더 이상 데려가지 않고 모두 사살했다”고 말 했다.
김씨는 해사 14기 출신으로 66년 10월부터 67년 11월까지 베트남전에 참가 했으며,그 뒤 해병 1사단 파월특수교육대교관,김포보안부대장,해군첩보부대 장,국방부 대간첩본부정보과장 등을 지내고 지난 82년 대령으로 예편했다.
국방부 고위관계자는 비공식 논평을 통해 “당시 작전상황일지 등의 자료를 통해 김씨 주장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라면서 “그러나 베트남참전장병들의 명예와 인권이 심각하게 훼손당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매우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노주석기자 joo@k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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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돌아가며 강간한 뒤 살해" 산모건 사정없이…
몸서리쳐지는 한국군!
아, 몸서리쳐지는 한국군!
양민학살 증언
●아이건 산모건 사정없이…
●"여성 돌아가며 강간한 뒤 살해"
☆생존자들 증언 토대- 한국군들 양민학살 방식 몇 가지 공통된 유형☆
-주민들(대부분이 여성과 노인, 어린이들)을 한데 끌어모은 뒤 다시 몇 개 그룹으로 나눈 다음 기관총을 난사해 몰살시킨다.
-주민들을 한집에 몰아넣고 총을 난사한 뒤 집과 함께 죽은 자와 산 자를 통째로 불태운다.
-아이들의 머리를 깨뜨리거나 목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거나 사지를 절단해 불에 던져넣는다.
-여성들을 돌아가며 강간한 뒤 살해하고, 임산부의 배를 태아가 빠져나올 때까지 군화발로 짓밟는다.
-주민들을 마을의 땅굴로 몰아넣고 독가스를 분사해 질식사시킨다.
* 1960년대에 미국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출신 켈리중위의 밀라이촌 학살 사건이 세계적 화제가 되어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엄벌에 처해지지는 않았다.
6.25 때 백만 중국인민해방군(中國人民解放軍)은 이북에 진주하여 민폐가 없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상해에 진주했을 때도 건물에 들어가지 않고 거리에 누워잤다.
남한에서도 인해전술만을 비난할 따름이질 않는가? 한껀만 찾아냈어도 동네방네 떠들었을 것인데. 심지어 그런 점에선 군사독재 정권하에서도 칭찬까지 하기도 했었다. 이러한 점들에서도 벌써 승패가 갈렸을 것은 뻔한 일이다.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 조국의 이름으로 님들은 뽑혔으니 그 이름 XX부대! XX부대 용사들아! 가시는 곳 월남땅 하늘은 멀더라도 한결같은 겨레마음 님의 뛰를 따르리라!"♬♪
위 노래를 60년대 중고교 다니시던 분들은 많이들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월남땅에서 한 게 아래같단 말인가?
고엽제로 한국에서 고생하는 1만명의 파월장병이 있는데 그간 테레비에서도 몇번 보도 된 바가 있고 엊그제는 광화문에선가 데모하는 사진이 신문에 실렸었다. 그 자식들도 기형이 되어 고생하고 그 휴유증은 길이 남을 것이다.
오죽하면 박통의 직계 ``친위중의 친위`` 차지철 의원조차도 월남 파병을 반대 했겠는가? 그렇게 까지 안했으면 경제성장이 안되는 건가?
오직 정도만을 걸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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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아, 몸서리쳐지는 한국군!
베트남전 24돌에 돌아보는 우리의 치부, 베트남 전범조사위의 끔찍한 기록들
//www.hani.co.kr/h21/data/L990426/image/56-1.jpg
(사진/베트남전에서 베트공의 진지를 수색·파괴한다는 작전상의 명분은 대량학살을 정당화시켜 주었다.)
전쟁은 이런 곳에서도 일어났을까. 둥근 어깨의 산등성이 그리고 초록의 들판, 그 위로 하얗게 부서져 내리는 햇살, 야자수와 망고와 파파야, 바나나 나무들…. 창 밖을 흐르는 풍경엔 나른한 열대의 평화로움만이 펼쳐진다. 태양이 작열하는 들녘에는 허리를 땅에 엎디어 논밭을 일구는 베트남 여인네들의 삿갓모자만이 드문드문 섬처럼 떠간다. 한낮의 태양에 달구어져 엿가락처럼 휘어버릴 듯한 거리엔 허리를 곧추세우고 자전거를 달리는 여학생들의 하얀 아오자이 자락이 무거운 바람 속을 구름처럼 떠돌기도 한다. 과연 우리는 저토록 가녀린 몸피의 여인들에게까지 총부리를 들이댔을까. 이성은 간데없고 광기만이 오롯이 남은 인간들이 저지른 살육의 현장, 그 아픔의 속살을 헤집으려 나서는 한 ‘남추틴’(남조선)의 심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버스는 중앙선도 없는 아스팔트 위를 끝도없이 달렸다.
살아남은 노스님의 증언
"1969년 10월14일, 베트남 남부 판랑지역에서 남한 군인들이 린선(Linh Son)사 스님들을 향해 총기를 휘두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이공의 보고에 따르면 남한군 한명이 린선사에서 베트남 여성을 희롱하다 주지승에게 쫓겨나자 이에 격분, 동료들을 몰고 와 총기를 난사한 것으로 알려진다. 은 이 사건으로 71살의 주지승, 69살의 노승, 41살의 여승, 15살의 행자승 등 4명이 사망한 사실을 베트남 정부가 공식 인정했다고
보도했다.(지 1969. 10. 24)"
//www.hani.co.kr/h21/data/L990426/image/57-1.jpg
(사진/당시 린선사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푸 스님.)
필자는 2년 전, 베트남 정치국에서 나온 ‘전쟁범죄조사보고서- 남베트남에서의 남조선 군대의
죄악’이라는 자료의 일부를 어렵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나는 이 자료를 아직은 검증되지 않은 베트남쪽의 일방적인 보고서, 그러나 언젠가는 풀어야 할 숙제로 책상서랍 안에 묵혀두고 있었다. 그리고는 ‘아버지 세대에 저질러진 잘못이지만’ 한국과 베트남간의 서로 죽고 죽여야 했던 ‘아픈 역사의 매듭을 풀기 위한’ 작은 노력의 일환으로 베트남을 방문한 한국 시민단체 ‘나와 우리’ 일행에게 처음으로 이 자료를 공개했다. ‘나와 우리’는 지난해에도 일본 시민단체가 띄운 피스보트(Peace Boat)에 올라 한국군의 베트남 양민학살 현장을 돌아보며 증언을 채록한 바 있다.
“일본인의 도움을 빌려 한국인의 문제를 되돌아본다는 사실이 가슴아팠다”는 그들은 이제 ‘한국인의 힘으로’ 부딪쳐보자는 의지를 모아 또다시 긴 여정에 오른 것이다. 필자는 첫 기착지인 판랑까지 동행하기로 했다.
베트남 남부 해안가에 위치한 판랑은 관광안내 책자에도 나오지 않는 조그만 고장이다. 가장 번화가임이 분명한 버스정류장에는 택시 한대 보이지 않고, 걸어서 찾아간 호텔에도 그 흔한 냉장고 한대가 없었다. 다만 ‘늑맘(베트남 생선소스)의 고장’이라는 명성답게 비릿한 소금기가 대기를 가득 메우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 일행은 먼전 린선사를 찾아나섰다. 그러나 자료 속에 나와 있는 린선사는 전쟁통에 사라지고 없었다. 찜통 같은 더위와 너털거리는 버스에 시달리며 8시간이나 달려온 발걸음이 허탕이나 치게 되는 건 아닌가 조바심이 나면서도, 한편으론 왠지 모를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다음날 아침, 우리 일행을 판랑까지 안내했던 베트남 학생에게서 급한 전갈이 왔다. 원래 호치민에서 판랑으로 들어서는 길목에 서 있던 린선사는 전쟁중에 폭파됐고, 판랑에서 나창으로 가는 길에 같은 이름의 절이 다시 세워졌다는 것이다. 우리는 한달음에 그 절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당시 유일한 생존자인 푸(78) 스님과 현장 목격자인 응웬티유엔한(45)을 만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내내 필자를 짓누르곤 했던 불안이, 부인하고만 싶었던 이야기가 눈앞에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아이건 산모건 사정없이…
//www.hani.co.kr/h21/data/L990426/image/58-1.jpg
(사진/``잊고싶은 전쟁``. 한국군에 죽은 베트남인의 숫자는 공식통계로만 4만1450명이다.)
“따이한 군인들이 먼저 스님들을 향해 총을 쏘았어요. 이어서 살려달라며 달아나는 여자 보살님에게도 총을 쏘았지요. 그리고는 시체를 모두 불태웠어요.” 유엔한의 증언이다. 당시 겨우 15살이던 그는 두려움에 질려 고함도 지르지 못하고 숨어만 있었다고 고백한다. 린선사는 모두 다섯 스님이 거처하는 자그마한 절이었다. 그때 푸스님은 주지스님보다 먼저 마을에 내려가 초상집에서 독경을 읽고 있었다. 증언의 대부분은 유엔한을 통해 이뤄졌고, 그 절의 유일한 생존자인 푸 스님은 말이 없다. 당시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사람들은 그때 그 학살의 주인공인 따이한의 후예들을 살뜰히 배려한다. 시원한 차를 내오고, 과일을 깎아 권하고, 파파야를 먹느라 지저분해진 입을 닦으라고 물까지 받아다 줄 때는 울컥 눈물이 솟았다.
푸 스님이 마을에서 돌아왔을 때 절은 이미 난장판이 돼 있었다. 푸 스님은 불에 그을린 다섯 스님의 시신을 인근의 아오방 절로 옮겼다. 시신탈취에 대한 불안에서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판랑지역 전역의 학교가 휴학을 결의했고, 학생들과 불교도들이 일제히 봉기에 나섰다. “베트남 정부는 양민학살을 즉각 중단하라!” “따이한은 베트남을 떠나라” 등등 피맺힌 함성이 온통 판랑을 휩쓸었고, 스님들의 시신은 12일이 지나서야 화장할 수 있었다.
“화장을 하고도 스님들을 안식시켜드리지는 못했어요. 스님들을 모실 절이 사라졌기 때문이지요. 스님들의 뼈를 항아리에 고이 담아 모셔오다가 지난해에야 이 절에 안치해 드렸지요.” 푸 스님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남한 군인들의 총기난사 사건으로 폐허가 된 절은 그뒤 또다시 폭격을 맞아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는 지난해 불교도인 재미 베트남 동포의 도움으로 다시 절이 서게 됐다. 푸 스님은 30년 만에야 주지승으로 이 절에 돌아올 수 있었다. 절 옆으로 당시 죽음을 당했던 스님들의 유골이 모셔진 3층탑이 있다. 우리 일행은 그 앞에 고개를 숙이고 스님들의 명복을 빌었다.
어쩌면 우리가 린선사에서 들어야 했던 이야기는 지금부터 만나야 하는 수많은 증언들 중에서 가장 듣기 편안한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대웅보전 자리에서 내려다보면, 하늘과 바다와 들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어디에 눈길을 주어도 한없이 평화롭기만 한, 한없이 정겹기만 한 풍경들, 그러나 그 속엔 또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는 걸까. ‘나와 우리’ 일행은 한국군의 군사작전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됐던 중부지방으로 또다시 길을 떠나고, 필자는 연신 린선사를 뒤돌아보며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걸음을 되돌려 호치민으로 돌아왔다.
"여성 돌아가며 강간한 뒤 살해"
한국군은 잔혹한 대량학살을 일삼아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조차 가급적 직접적인 교전은 피하려 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전선도 없고 적이 누군지도 모르는 베트남전에서 베트콩의 근거지를 수색, 파괴한다는 작전상의 명분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학살행위를 정당화시켜 주었다. 필자가 가지고 있는 기록은 그 내용이 워낙 끔찍해 자세히 밝히기에 부담이 없지 않았지만, 그 일부를 여기에 소개한다.
1965년 12월22일, 한국군 작전병력 2개 대대가 빈딘 성, 퀴년시에 있는 투이프ㄱ 군, 프ㄱ호아 사(使), 턴지앙 촌에 500여발의 대포를 발사한 뒤 “깨끗이 죽이고, 깨끗이 불태우고, 깨끗이 파괴한다”는 구호 아래 수색소탕작전을 펼쳤다. 그들은 이 마을에서 12살 이하 22명의 어린이, 22명의 여성, 3명의 임산부, 70살 이상 6명의 노인을 포함, 50여명이 넘는 양민을 학살했다.
"… 랑은 아이를 출산한 지 이틀 만에 총에 맞아 숨졌다. 그의 아이는 군화발에 짓이겨진 채 피가 낭자한 어머니의 가슴 위에 던져져 있었다. 임신 8개월에 이른 축은 총알이 관통해 숨졌으며, 자궁이 밖으로 들어내져 있었다. 남한 병사는 한살배기 어린아이를 업고 있던 찬도 총을 쏘아 죽였고, 아이의 머리를 잘라 땅에 내동댕이쳤으며, 남은 물통은 여러 조각으로 잘라내 먼지구덩이에 버렸다.
그들은 또한 두살배기 아이의 목을 꺾어 죽였고, 한 아이의 몸을 들어올려 나무에 던져 숨지게 한 뒤 불에 태웠다. 그리고는 12살 난 융의 다리를 쏘아 넘어뜨린 뒤 산 채로 불구덩이에 던져넣었다…"
판랑에서 헤어진 지 이틀 만에 퀴년시를 조사중인 ‘나와 우리’ 일행에게서 전화가 왔다. “찾았어요! 당시 따이선 현 인민위원회 주석 말이에요.” 1966년 3월19일과 20일 이틀간에 걸친 ‘베트남 중부 각 성의 전쟁범죄조사회의’에서 남한 군대의 죄악상을 낱낱이 밝혔던 응웬탄퐁을 이르는 말이다. “손에 들고 있는 이 자료가 점점 두려워지는군요. 어쩌면 우리는 이 자료를 더 보충해야 할지도 몰라요. 빈딘성을 중심으로 이 자료에 소개된 네 지역말고도 한국군의 학살현장이 더 있다고 하는군요.” 당시 응웬탄퐁의 보고에 따르면 66년 1월23일부터 2월26일까지 약 한달 동안 맹호부대 3개 소대, 2개 보안대대, 3개 민간자위대에 의해 이 지역에서만 모두 1200명의 주민이 학살됐고, 그중에는 한명도 남김없이 몰살당한 가족이 8가구나 됐다. 또한 1535채의 가옥과 850만t에 이르는 양식이 불태워졌고, 649마리에 이르는 물소가 총탄에 맞아 죽거나 불태워졌다.
이러한 수색소탕작전은 일차적으로 융단폭격 등으로 작전지역을 공개하고, 한국군 등 지상군이 현장에 투입되어 마을에 남아 있는 주민들을 즉결처분한 뒤 집을 불사르고 불도저 등으로 마을 전체를 밀어버리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생존자들의 한국군에 대한 증언에서 공통되는 점은, 무차별 기관총 난사, 대량살육, 임산부 난자살해, 여자들에 대한 강간살해, 가옥 불지르기 등이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한국군들의 양민학살 방식을 정리해보면 몇 가지 공통된 유형이 나타난다.
-주민들(대부분이 여성과 노인, 어린이들)을 한데 끌어모은 뒤 다시 몇 개 그룹으로 나눈 다음 기관총을 난사해 몰살시킨다.
-주민들을 한집에 몰아넣고 총을 난사한 뒤 집과 함께 죽은 자와 산 자를 통째로 불태운다.
-아이들의 머리를 깨뜨리거나 목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거나 사지를 절단해 불에 던져넣는다.
-여성들을 돌아가며 강간한 뒤 살해하고, 임산부의 배를 태아가 빠져나올 때까지 군화발로 짓밟는다.
-주민들을 마을의 땅굴로 몰아넣고 독가스를 분사해 질식사시킨다.
한국군의 대량학살이 자행된 곳에는 아이들의 입에 캔디나 케이크가 물려 있었다. 노인들의 입에는 담배가 물려 있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도 마을사람들을 안심시키면서 한곳으로 모으는 한 수단이었던 듯하다.
과연 그대들에게 진정한 반성은 있는가
우리에게도 베트남전은 잊고 싶은 전쟁이다. 한국은 1964년 의료지원단과 태권도 교관 등 270여명을 사이공 남쪽 붕타우에 파견함으로써 베트남전에 군사적인 개입을 시작했다. 이후 65년에서 73년까지 약 30만명의 전투부대를 ‘베트남 정부의 요청’이라는 미명 아래 베트남전선에 투입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군들도 4960여명이 전사했고 10여만명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한국군은 또한 적군인 베트남인을 4만1450명이나 죽이는 전승(?)을 거두기도 했다. 아군 사망자수의 10배에 이르는 적군을 전사시킨 것이다. 그것도 공식적인 통계상으로만!
이제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종전 24년을 맞는 이 순간에도 지구상의 한켠에서는 새로운 총성이 울려온다. 한국에서는 코소보에서의 인권을 외치는 목소리도 높다. 20세기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21세기의 또다른 상처 하나를 낳고 있는 것이다. 가해자이든 피해자이든 상처받은 ‘오늘’을 치유하는 과정이 없이는 우리에게 미래가 없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양심에 칼을 대는 아픔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할지라도.
역사는 우리에게 의문부호 하나를 던져놓는다. 과연 그대들에게 진정한 반성은 있는가.
호치민·판랑=구수정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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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1999년 05월 06일 제256호
특집Ⅰ
"전쟁 뒤 한국인 한번도 안왔다"
보상 요구할 생각 없지만 고통이 아직도 깊다는 것만은 꼭 알아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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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전쟁 당시 유격대장 팜반쿡
팜반쿡(67)은 빈호아 양민학살사건이 일어난 66년부터 70년까지 이 지역의 유격대장으로 활약했다. 그는 발목지뢰에 왼쪽 다리를 잃어 의족을 착용하고 있는 불편한 몸이었지만, 전형적인 베트콩의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깡말랐으면서도 다부지고,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만 같은. 그러나 눈빛만은 부드러웠다.
쿡은 전쟁 당시 꼼꼼히 기록한 전투일지를 소중한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한국군의 양민학살에 관한 기록도 담겨 있다. 그는 쭈옹딘 폭탄구덩이에서 바로 100여m 떨어진 수풀 뒤에 숨어 여동생, 장모와 처형, 처조카 등 자신의 가족과 마을 주민들이 학살당하는 과정을 망원경으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계속 한국군의 뒤를 쫓아 빈호아 사 양민학살 현장을 모두 목격했다.
국가로부터 일급 저항훈장을 수여받기도 한 그는 빈호아 사 당서기장, 인민위원회 주석 등을 지냈으며 현재는 빈호아 사 퇴역군인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한국군의 양민학살을 직접 목격했다는데….
= 그랬다. 롱빈마을에서는 한국군들이 주민들을 폭탄구덩이에 몰아넣고는 빙 둘러서서 아래를 향해 총을 쏘았다. 그리고는 수류탄을 던졌다. 안마을과 커우마을에서는 한국군들이 주민들을 모아놓고 군용배낭에서 빵과 사탕 등을 꺼내 나눠주었다. 아마도 주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오후 4시쯤 갑자기 다연발총을 갈기고 수류탄을 던져 주민들을 모두 학살했다.
- 그렇다면 한국군에 원한이 깊을 것 같은데….
= 이곳 빈호아 사에서만 모두 430명이 집단학살로 목숨을 잃었다. 이곳저곳에서 흩어져 죽은 사람들까지 합하면 모두 553명이 희생됐다. 양쪽이 서로 교전중에 죽고죽임을 당했다면 새삼 얘기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학살의 대상이 무고한 양민이었다는 데 있다.
- 베트남 정부의 보상이나 지원은 있는가.
= 군인 신분으로 목숨을 잃은 경우에는 열사로 책봉해서 300만동(30만원)을 지급한다. 그러나 양민이 학살당한 경우에는 생활보호대상자에 한해 67만동을 1회 일시불로 지급한다. 그나마도 절차가 까다로워 수령이 쉽지 않다. 우리 정부는 너무 가난하다.
- 한국 정부의 보상이나 공식적 사과를 원하는가.
= 한국군은 단지 미국의 용병일 뿐이었다. 게다가 이 지역은 베트남 해방군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잘못은 미제국주의에 있다. 그렇지만 학살로 인한 주민들의 상처가 너무 깊고, 그 고통이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한국인들이 꼭 알았으면 한다. 그러나 학살이 일어난 지 30년이 지나도록 단 한명의 한국인도 이 지역을 방문한 사실이 없다. 화해와 친선의 의미에서 이 지역에 작은 병원을 하나 지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겨레21 1999년 09월 02일 제273호
윈비비에 있는글을 읽고나서 좀 충격적이라서 퍼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