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한 청년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20여년전 우리 곁에 잠시 머물다 떠난, 영원히 아름다운 청년의 이야기를. 그는 한평생 음악과 한 여인을 끔찍히도 사랑했던, 그래서 그 삶이 더욱 서럽고 그리운, 지독히도 몹쓸 사람이었다. 그리고 단 한장의 앨범만으로 대중음악사를 다시 쓰게 만든 위대한 아티스트였다. 유재하. 그를 추억하기 위해서는 사랑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 왜냐면 그의 사랑은 바로 그의 음악이자 인생이었기 때문이다.
유재하는 어느날 밤 사랑하는 여인에게서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일부러 그랬는지 잊어버렸는지/가방 안 깊숙히 넣어두었다가/헤어지려고 할때 그제서야/내게 주려고 쓴 편지를 꺼냈네(중략)/나를 바라볼때 눈물 짓나요/마주친 두 눈이 눈물겹나요/그럼 아무 말도 필요없이 서로를 믿어요/어리숙하다 해도 나약하다 해도 강인하다 해도 지혜롭다 해도/그대는 아는가요 아는가요/내겐 아무 관계 없다는 것을/우울한 편진 이젠…’
그는 그날 밤 집에 돌아와 ‘우울한 편지’를 꺼내 본 느낌을 노래로 만들었다. 그가 편지를 받은 사연은 이렇게 노랫말이 되어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유재하는 대학 1학년 때 만난 이 여인에게 첫눈에 반하고 만다. 첫사랑이란 게 보통 그렇듯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지만 퇴짜는 계속됐다. 그러나 열정과 순수로 가득한 청년의 눈은 이미 멀어있었다. 2년에 걸친 구애 끝에 마침내 여인은 그를 받아들인다. 편지는 그녀가 그를 향해 마음을 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건네진 것이었다. 그녀는 이미 그 슬픈 사랑의 끝을 예감했던 것일까. 편지에는 그에 대한 연민과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담겨 있다. 하지만 유재하는 노래 ‘우울한 편지’에서 흔들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를 다독거린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겠다는 그의 답장이었다.
그의 노래들은 늘 이런 식이었지만 그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녀와의 첫 만남부터 몇번의 헤어짐, 재회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가 마치 일기처럼 음악에 담겨 있다. ‘그대 내품에’는 그녀에게 구애하던 무렵의 심경을, ‘우리들의 사랑’은 그의 사랑이 받아들여질 당시의 가슴벅찬 기쁨을 표현하고 있다. ‘지난날’은 짧은 이별의 서글픔을 그렸고, ‘사랑하기 때문에’는 다시 돌아온 그녀를 위한 곡이었다. 최근 한 영화제작사가 그의 일대기를 영화화할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아직 유족들의 허락도 나지 않은 상황이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는 ‘우울한 편지’가 등장한다. 부녀자 연쇄살인의 유력한 용의자 박현규(박해일)는 비가 오는 날이면 라디오에 이 노래를 신청한다. 이 노래는 박이 범인일 가능성을 시사해주는 결정적인 정황 증거로 사용된다. ‘살인의 추억’이 소위 대박을 내면서 새삼 유재하와 ‘우울한 편지’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이 노래를 사랑했던 이들은 “왜 살인범의 노래로 둔갑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투덜거리고 처음 듣는 이들은 “이토록 가슴 저린 노래가 있는 줄 몰랐다”고 찬사를 보낸다.
돌이켜보면 ‘1987년’은 향후 대중음악사의 판도를 바꾼 두 사건이 일어난 한 해였다. 그 첫번째 사건은 그 해 3월 유재하가 솔로 데뷔 앨범을 발표한 일이었다. 이 앨범은 대중음악계의 수준을 몇단계 업그레이드시켰고 이를 계기로 대중의 관심이 팝송에서 가요로 넘어왔다는 평가까지 있을 정도다. 유재하의 앨범을 프로듀싱했던 한봉근 MBC PD는 “재하가 떠난 뒤 수많은 가수가 그의 노래를 리메이크했지만 원곡을 능가하는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다”고 단언했다. ‘우울한 편지’도 이 앨범에 수록된 곡이다. 당시로서는 처음 시도됐던 재즈풍이 가미된, 고급스러운 멜로디는 ‘최신 발라드 제조법’으로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깊은 맛을 담고 있다. 여기에다 유재하의 솔직한 목소리와 세련된 연주는 왜 이 노래가 우리 대중음악사에서 손꼽히는 명곡으로 남아 있는지를 깨닫게 한다.
대중음악사의 큰 물줄기를 바꾼 또다른 사건은 그해 11월1일 벌어졌다. 그날 아침 유재하는 허망하게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가 스물다섯되던 해였다. 아직도 많은 팬과 가수들은 그 날의 비극에 대해 안타까워한다. 그리고 궁금해한다. “그가 만약 살아 있었더라면 우리 대중음악계는 어떻게 변했을까”하고. 이에 대해 싱어송 라이터인 강현민의 대답은 지극히 간단하고 단호하다.
“엄청나게 달라졌겠죠. 한가지 확실한 건 그가 영국의 엘튼 존이나 미국의 밥 딜런을 능가하는 뮤지션이 됐을 거라는 점입니다.” 그 유재하가 세상을 떠난지 15년이 지난 지금 ‘우울한 편지’란 노래로 우리에게 다시 다가오고 있다.
이승형기자 /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