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에는 근대에 비하여 기록이 빈약하기에 몇몇 자료들에 근거할 수 밖에 없지만, 고대에 있어 식인은 보다 일반적이었고 광범위한 현상이었다.
수많은 이야기들은 식인종에 관해 증언하고 있다. 네안데르탈인의 경우 구멍 뚫린 두개골을 찾아 볼 수 있는 바 이는 사람을 죽인 후 골수를 빼내 먹은 자국으로 추측되고 있다. 식인이 일반적이던 지역들을 찾아보면 대체로 가축이나 사냥감이 모자라 그 단체 사람들이 만성적인 단백질 부족에 시달리던 경우가 많다. 이는 식인이 비효율적인 행위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일찍부터 전쟁 포로를 잡아 먹는 것 보다는 노예로 부리는 편이 보다 경제적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식인이 반드시 적대적인 분위기에서 행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람이 죽으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시체를 요리해 먹음으로서 조상의 영혼과 하나되는 의식을 했다는 어느 부족들의 사례는 식인 풍습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춘추 전국 시대엔 흉흉해진 인심과 비참한 생활상이 결합하여 식인 풍습이 만연하였다. 공자조차 사람 고기를 말리거나 절여 만든 고기를 매우 즐겨 이것이 상에 올라오지 않으면 식사를 꺼릴 정도였다고 한다. 조양자가 큰 위기에 처했을 때 조양자의 성에 살던 백성들은 아이를 각 집에 1명 씩만 남기고 서로 돌려 요리해서 먹었다고 한다. 이때 자기 아이는 차마 죽이지 못 했기에 서로 돌려 먹은 것이라 한다.
헤로도토스의 페르시아 전쟁사에서도 식인은 아니지만, 이와 유사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뒷날 알렉산더 대왕에게 망하는 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영걸인 다리우스 1세에게 바빌론은 반란을 일으켰다. 바빌론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바빌론 시민들이 가장 먼저 취한 조치 중 하나는 각 가정에서 어머니와 여자 1명만 빼고 모든 여자를 한 군데 모은 다음 살해한 것이었다. 조양자의 경우와 이 바빌론의 경우가 다른 것은 조양자는 성공했지만 바빌론은 패배했다는 점이다. 다리우스 1세는 바빌론의 반란을 관대하게 처리했다. 다시는 반란하기 어렵도록 바빌론의 성을 허물어 버리긴 했지만, 전국에서 수많은 여자들을 모아서 바빌론 사람들과 결혼시켜 주었던 것이다.
또한 페르시아 전쟁사에는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의 2대 군주인 캄비세스가 무리하게 리비아로 원정하다 큰 위기에 몰렸을 때 병사들이 취한 행동이 기록되어 있다. 군량이 떨어지자 병사들은 5명을 1조로 삼아 제비를 뽑고 제비에서 뽑힌 1명을 잡아 먹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