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익스피어의 생애
잉글랜드의 중부지방 유서깊은 워릭성(Warwickshire) 남쪽 외곽에 있는 소읍 스트라트포드-어폰-에이번(Stratford-upon-Avon)에 서 중상류 상공인의 아들로 태어난 세익스피어의 출생년도는 1564년인데, 세례받은 날이 4월 26일로 만 문헌상에 남아 있을 뿐이므로 당시의 관례로 미루어 4월 23일을 출생일로 추정하여 기념한 다. 4살 때에 아버지가 읍장을 지내기도 했으니 어린 시절은 구김살 없이 보낸듯하고 스트라포드 그래 머 스클(grammar school)에 다닐 수 있는 행운도 누렸다. 14살 때부터 가세가 기울어 대학진학은 포기해야했으나 당대 교육기관으로서는 특수층 자제만이 다닐 수 있는 그래머 스쿨에서 라틴어를 익혀 서양의 고전을 섭렵할 능력을 갖춘 것만도 그의 천재성을 싹틔우는 데 큰 몫을 했다.
18세 때 8세 연상의 여인 헤서웨이(Anne Hathaway)와 결혼하여 딸을 낳고, 곧 이어 쌍둥이 남매를 낳게 되지 만 아내와 다정한 삶을 누린 흔적은 없고, 그 후 런던의 극장에서 허드레 일꾼으로 출발하기까지 의 8년간의 행적에서 시골학교 교사, 귀족의 심부름꾼 등으로 전전하며 방황한 삶의 흔적이 있다. 30 세가 된 1594년부터 의전장관(Lord Chamberlain) 극단에 소속되어 극작가로서 승승장구할 계기를 맞게 된다. 그후 20여년간 전속극작가 겸 극단 공동경영자로, 때로는 무대에서 직접 배역까지 맡았는데, 이 동안에 40여편의 희곡과 시집을 펴냈다. 가세가 기운 후 신분격하된 아버지를 신분 상승시키려고 가쇄(가문의 인장)사용허가를 당국에서 얻어내기도 하고, 쌍둥이로 태어난 외동아들의 죽음이라는 슬픔도 딛고 일어서 나머지 자녀들을 고향에 안주시켜 뒷날 자기가 은퇴하여 합세 한 일 등으로 보아 생활인으로서 착실함이 엿보인다.
성공적인 극작활동으로 모은 상당한 재산을 착실히 관리하였는데 재산관계의 소송에서 관대하 게 대처하여 재산상의 손해를 감수하며 명예를 지키려 애쓴 일도 있고, 거액의 돈을 빌려 달라 는 궁한 친구의 간청도 뿌리치지 않아 후일에 양가 자손들이 혼사를 맺은 미담도 남긴다. 생이 끝나기 한 달 전에 작성한 유언장에 유산에 대한 세목을 작성했는데, 대부분의 재산을 맡딸에게서 난 외손자에게 물려주고, 아내에게는 자기 소유의 침대 중에서도 두번째로 좋은 것만 물려준다고 명 기하여 구구한 해석을 낳게 했다. 62세 때인 1616년에 타계했는데 그 날짜가 묘하게도 생일과 같 은 날인 4월 23일이었다. 스트라포드-어폰-에이본 교회묘역에 묻힌 그의 묘석에는 이름은 없고 자작인 듯한 짤막한 글이 이렇게 새겨져 있다.
친구여, 제발 여기에 뭍힌 흙을
파내지 말아주오.
이 묘석을 아껴주는 이에게는 축복이,
나의 유골을 건드리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지니라.
Shakespeare의 시대배경
서양에서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변방에 불과했던 16세기의 영국에서 인류사상 최고의 대문호가 탄생한 데는 세익스피어 개인의 천재성만으로 돌릴 수 없는 시대배경적 호조건이 뒤따랐다. 장구한 세월동안 위세를 떨친 로마제국의 영향하에 기독교세에 의한 정, 교유착으로 유럽통치중심은 이태리였는데, 이 세력의 휘하에 있는 불란서, 스페인, 독일 등 대륙 국가들의 눈치를 살피며 섬 안의 세 갈래 적(스콧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즈)을 평정하는 데 급급해 온 잉글랜드가 세익스피어가 탄생한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정치세력의 중원국으로 자리잡을 기틀을 마련한다. 세익스피어가 태어나기 6년 전에 등극한 엘리자베스 여왕이 섬의 왕가 간의 끊임없는 분란으로 단명했던 그전 왕과는 달리 전후 후 무한 45년간의 장수 왕좌를 누리며 영특하고 희생적인 구국의 일념으로 섬을 통일하고 국력을 길러 대륙의 힘에 맞서 세계를 주름 잡는 대영 제국의 긍지를 영국민에게 불어넣게 되었다.
16세기 전반까지 정치적으로 대륙에 추종했다고 한다면 문화적으로는 대륙을 모방했던 16세기의 영국에서 세익스피어가 갑자기 돌출했다고 보기보다는 국세의 확장에 힘입어 국민의 고양된 자긍심이 문화의 독창력으로 승화된 계기를 맞은 결과로 봄이 마땅하다. 15세기에 이태리에서 시작된 문예부흥운동이 대륙을 거쳐 토마스 모어의 의해 영국에 점화된 때가 대륙보다 한 세기 늦은 16세기 전반이었다. 그러나 대륙문화의 영향을 받은 에드먼드 스펜서가 고전문학의 단순모방 차원을 넘어 모국어문학의 지평을 넓힌 것이나, 대학재사들이 신극운동으로 고전극의 답습에 머 물지 않고 영국토착극을 발전시켜 독창성을 발휘할 가능성을 암시해 준 것 등이 세익스피어의 문학세계를 풍성하게 한 밑거름이 되었다. 어쨌든 문화의 변방에서 그렇게 단시간에 수입된 문화를 독창적으로 재창조하여 전세계에 역수출한 데는 여러 방향에서 불어주는 순풍을 잘 이용한 작가 개인의 천재성과 합일을 이룬 결과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세익스피어의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현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미숙하게 보이는 연극대본을 쓴 데는 당대의 극장조건이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극장구조는 지붕이 뚫린 반 옥외 극장인데다 무대가 개방형이어서 앞면의 막이 없었으며 장치, 조명 등은 사용되지 않았다. 연기자에게는 각자 맡은 대사만 주어졌으며 여성 역은 변성기 이전의 소년배우가 맡아야 하는 등 특수 사정을 감안하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