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대생·탤런트 유괴극 잇따라…강남 부모들 비상
지난 10일 저녁6시쯤 서울 강남경찰서 강력4반에 초조한 표정으로 뭔가를 기다리는 한 남자와 두 여자가 있었다. 4반장이 들어오자 이들은 벌떡 일어나 “잡았어요?”라고 외치듯 물었다. “확실히 잡았습니다.” “애는 어디 있어요 ?”. (잠시 망설이며) “죽었습니다.” (흠칫) “죽어요 ?”. “목을 졸라 죽였더라구요. 시신을 버리기 직전 겨우 잡았죠. 조금만 늦었으면 미궁 속에 빠질 뻔 했어요.”
잠시 주위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 터져나오는 한숨만이 정적을 갈랐다. 한 남자는 납치됐던 김모양 아버지. 두 여자는 어머니와 이모였다. 이모가 먼저 “세상에, 어떡하나…”라고 울먹이며 흐느꼈다. 어머니는 아무 말이 없었다. 너무 놀라 말문이 막혔던 것일가. 아버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떨군 채 눈을 감았다.
옆에 있던 형사가 사족을 달았다. “통화도 다 애 걸로 하고, 휴대폰은 강물 속에 버리려고 했더라구요. 그렇게 되면 누가 아나. 그냥 사건이 영원히 묻히는 거지.” 압구정동 여대생 납치살해 사건은 이렇게 해서 수면 위로 나왔다.
10일 새벽 2시30분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80동 건물과 압구정교회 사이 대로변에서 결혼을 앞둔 한 여대생을 납치한 두명의 철없는 20대들은 24시간도 채 못 넘기고 덜미를 잡혔다.
아버지는 원래 경찰에 알릴 생각이 없었다. “신고하면 죽인다”는 협박도 맘에 걸렸지만, 혼사를 앞둔 딸이 이런 일을 당했다는 사실을 되도록 감추기 싶었기 때문이다. 1억원은 마련하기 쉽지 않은 돈이었지만 빨리 딸을 되찾으려는 생각에 순서를 따지지 못했다. 경찰에 수사를 맡긴 뒤에도 “사위가 알지 않도록 조용히 잘 해달라”는 부탁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아버지였기에 막상 딸이 죽었다는 소식이 좀처럼 믿기지 않았는 듯 “내 딸 죽지 않았다”며 화를 냈다. 경찰은 “슬픔이 너무 커 충격을 처리할 수 있는 한계를 넘은 것 같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그 뒤 탈진, 병원에 입원했다.
딸 가진 부모들은 좌불안석(座不安席)이다. 여자들을 상대로 납치, 유괴가 날로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지방경찰청 김영일 강력반장은 “일 하지 않고 쉽게 돈 벌려는 사람들이 한탕을 노리고 이런 짓을 꾸민다”며 “드러난 것 말고도 신고하지 않은 범죄가 많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무사히 생환(生還)했지만 인기 여자탤런트 A양도 그 희생자 중 하나였다. 지난 1일 밤11시쯤 김모(41)씨는 BMW 승용차에 혼자 타는 여성을 납치, 돈을 요구하며 유괴극을 벌였다. 그 여성이 A양이었다. 김씨는 A양인 줄 몰랐다고 경찰에서 진술했다.
김씨의 한탕 꿈은 결국 3일만에 경찰에 잡혀 한낱 백일몽(白日夢)이 되버렸지만 딸 가진 부모들 간담을 서늘하게 한 사건이었다. A양은 목숨은 건졌지만 그뒤로도 기괴한 소문에 시달리고 있어 A양 아버지 마음은 편치 않다. 대학 때까지 매를 들 정도로 엄격한 성격의 A양 아버지는 경찰에 “개인 사생활 보호를 어떻게 하는거냐”며 거칠게 항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4일 딸 납치범과 격투를 벌이다 흉기에 찔려 9일 오전 숨진 정모(45)씨는 비극의 정점에 다다른 경우다.
경찰은 납치·유괴 사건이 일어나면 “무조건 신고부터 하라”고 강조한다. 신고하면 검거율은이 90% 이상일 뿐 아니라, 어차피 범인들이 한번 전화로 돈을 받아낼 수 없기 때문에 여러 차례 가족들에게 지시를 하는 과정에서 꼬리를 밟힐 수 밖에 없다는 논리다.
범인 처지에서도 살아있는 생명체를 데리고 있다는 것 자체는 몹시 힘들고 피곤한 일이기 때문에 되도록 빨리 일을 끝내고 원하는 돈을 타내고 싶은 심정이라, 시간이 흐를수록 실수·허점이 노출돼 범죄가 성공하기 어렵다.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곽대경 교수는 “피해자와 가족들이 절대 끌려다니면 안된다”며 “범인들은 대부분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데 이에 말려들지 말고 냉정하게 대처해야한다”고 지적했다.
경찰이 우려하는 점은 불황이 깊어지고 신용불량자가 많아지면서 자칫 이런 모방범죄가 늘어나지 않을까 하는 부분이다. 집안·금전문제 등으로 벼랑 끝에 몰리면 망상이 머릿속을 휘감으며 통제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 이르기 때문이다. 납치·유괴는 이런 배경을 안고 태어나는 병리적 현상이다.
법은 납치·유괴범에겐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미성년자를 유괴해 돈을 뜯어내면 가중처벌, 무기 또는 10년 이상 징역이다. 더구나 납치해서 죽이면 사형 또는 무기징역을 받도록 했다.
딸을 둔 부모들이 안심할 수 있는 사회는 요원하다. 경찰은 “장기적으로는 사회복지제도 확충 등 사회안전망을 구축, 사회의 그늘을 걷어야 돈을 노리는 범죄가 줄어들겠지만 당장 가능한 일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경찰 대답은 “야심한 시간에 혼자 다니거나 으슥하고 인적이 드문 위험지역을 돌아다니는 일을 피하는 수 밖에 없다”에서 그쳤다.
(정시행기자 polygon@chosun.com )
(이병호기자 desertfox@chosun.com )
출처 :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