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 큰폭 하락 보증금 못받아 발동동
서울 구로구 구로동의 15평짜리 반지하 주택에 세들어 사는 김진숙(가명·31)씨는 전세계약 기간이 끝난 지 한달이 다 돼가도록 방을 빼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01년 6월부터 전세 보증금 3000만원에 월세 15만원을 주고 이 집에 살아 온 김씨는 계약만료일(올 6월12일)을 앞두고 지난 3월부터 집 주인에게 “방을 빼겠다”고 알렸다.
집 주인은 처음엔 “알았다”를 되풀이하다 계약만료일을 넘기더니, 요즘엔 “새 세입자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달라”며 월세를 요구하고 있다.
이달말 첫 애를 낳을 예정인 김씨는 “아기를 위해 눅눅한 반지하방을 벗어나 쾌적한 곳으로 이사하려고 했는데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돈없는 집주인도 난감 분쟁 잇따라 김씨는 “이 동네에 다세대주택들이 많이 들어서서 내가 살고 있는 집이면 보증금 2000만원, 월세 10만원 수준으로 떨어졌는데 집 주인이 계속 예전 가격을 고집해 방이 안 나가고 있다”고 답답해했다.
정재윤(36·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씨는 ‘법적 소송’ 얘기까지 이르고서야 겨우 전세보증금을 되돌려받은 경우다.
서대문구 연희동의 전세보증금 5500만원짜리 다세대가구(18평)에 세들어 살던 정씨는 계약만료일(올 6월2일) 3개월 전부터 집 주인에게 “만기일이 되면 나갈테니 보증금을 제때 되돌려달라”며 내용증명까지 보냈다.
그러나 주인은 주변의 하락세는 감안하지 않고 오히려 7000만원으로 값을 올려 내놓은 채 “방이 안 나가서 보증금을 내줄 수 없다”고 버텼다.
정씨는 “6월30일까지 전세보증금을 되돌려주지 않으면 법적 절차를 밟겠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고 나서야 돈을 되돌려 받고 이사를 할 수 있었다.
정씨는 “그 주변에 전셋방이 남아도는 상황은 아랑곳 없이 주인이 비싼 가격을 고집했다”며 “그 집은 현재 5000만원까지 내려서 내놨는데도 아직까지 나가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 서울·수도권을 중심으로 전셋값 하락세가 전국적으로 계속되면서 세입자들이 방을 빼려 해도 집 주인이 기존 가격을 고수하는 바람에 새 세입자가 나타나지 않아 전세보증금을 되돌려 받지 못하는 사례가 빈발하고 있다.
지난해 이무렵 전셋값이 치솟아 세입자들의 발이 묶였던 상황과 정반대인 이른바 ‘역(逆) 전세난’이 서민들을 울상짓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인천 남동구 간석동 주안주공아파트(13평형)에 사는 안소영(43)씨는 남편과 두 자녀와 함께 지난 2000년 5월부터 살아오다가 계약기간 2년이 지난 뒤 암묵적으로 계약을 갱신했다.
안씨는 지난 4월부터 집 주인에게 이사갈 뜻을 밝혔지만 주인은 “새로 들어올 사람을 알아서 구해놓고 나가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안씨는 “주변 시세가 많이 내린 터라 집 주인을 설득해서 전세가를 1000만원으로 내려서 복덕방에 내놓게 했는데도 집이 안 나가지 있다”며 “일단 이사를 가고 나중에 보증금을 돌려받을까 생각도 했지만 집 주인의 횡포를 견딜 수 없어서 방을 빼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답답한 것은 집 주인도 마찬가지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의 한 다세대 건물주 김규례(56)씨는 “지난 3월에 2800만원짜리 방 계약이 끝났는데 새 입주자가 나타나지 않아 2000만원 빚을 얻어서 4월말에 보증금을 되돌려 줬다”며 “전세가격을 2300만원까지 낮췄는데도 방이 나가지 않고 있어 매달 빚 이자 30만원을 그대로 쏟아붓고 있다”고 한탄했다.
서울 노원구의 현대공인중개사 박노헌(56) 대표는 “상계동 대림아파트 32평형의 경우 4월까지 1억4천만원에 전세 거래됐지만, 요즘엔 1억1천만원에 내놔도 찾는 사람이 없다”며 “전셋값이 뚝 떨어지다 보니 세입자들이 방을 빼려고 해도 집 주인이 보증금을 못 주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실제로 관악구 봉천5동 관악드림아파트 32평형짜리의 경우 1억7천~8천만원 하던게 현재 1억5천~6천 수준으로 떨어졌고, 강북구 미아동의 에스케이아파트 24평형도 1억2천만원에서 9천만~1억원으로 크게 내렸다.
서초구 서초동의 ㅎ부동산 관계자는 “삼풍아파트 34평짜리는 4월까지 2억6천만원선이었지만 지금은 2억~2억1천만원에 내놔도 찾는 손님이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부동산114’에 따르면 전세가는 지난해 10월 이후 하락세로 돌아선 뒤 계속 떨어져, 6월말 현재 서울과 수도권은 전달 대비 각각 0.6%와 0.43% 떨어졌으며, 대전(-0.85%)과 대구(-0.16%) 등 지역에서도 같은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
인천 계양구 병방동 학마을시영한진 아파트(21평)의 경우 3월초까지 7500만원이었으나, 지금은 1천만원 내렸으며, 6000만원 하던 대구 수성구 범물동 범물1단지(19평)도 5000만원으로 떨어졌다.
부동산114 김혜현 팀장은 “서울의 경우 지난와 올 상반기까지 아파트와 다세대 등 모두 20여만 가구가 공급됐으며, 최근의 불경기와 여름철 비수기 등 요인이 합쳐져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서울시 주택임대차분쟁상담실에 따르면 최근 이와 같은 ‘역전세난’에 시달리는 상담사례가 하루 20~30건에 이른다.
이곳 박예순 상담원은 “지난해는 전셋값이 너무 뛰어서 문제였는데 올해는 하락세가 계속되면서 보증금을 되돌려받지 못하는 사례가 많다”며 “그러나 개인간에 보증금 반환 청구소송 등을 통해 해결하는 수밖에 달리 뾰족한 수가 없어 상담을 하면서도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처럼 주택 전세가가 큰폭으로 요동치는 데 따른 피해를 막기 위해 전세가격이 한번에 일정수준 이상 뛰지 못하도록 하는 기간을 늘려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민주노동당 정미현 상담부장은 “지금 일어나는 피해들은 지난해 전세가격이 지나치게 올랐던 데서 비롯된다”며 “주택 전세가를 최대 2년 계약기간까지만 한번에 5% 이상 올리지 못하도록 한 현행 주택임대차보호법을 개정해 적용 기간을 8년으로 늘려서 가격의 급상승을 막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황준범 김진철 기자, 김미영 기자 jayb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