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브리 왕국의 초대 왕은 사울이다. 사울은 겸손해서 왕이 되는 것을 사양하던 사람이다. 그러나 여호와에 의하여 강제로 왕위에 오른다. 여호와의 명을 받은 선지자 사무엘이 여호와의 명에 따라 모든 것을 대행하여, 사울에게 기름부어 등극시킨다.
그런데, 여호와는 사람을 잘못 보았다. 왜냐하면, 사울은 즉시 여호와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악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여호와는 화가나서 역시 선지자 사무엘을 통하여 다윗에게 기름을 붓게 한다. 사울을 버리고 다윗으로 교체하려는 것이다.
사울왕은 아직 건재(健在)하여 있고, 다윗에게는 다음 왕으로 발표가 된 셈이다. 그렇다면, 사울왕은 정적(政敵)인 다윗을 그대로 놔두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목숨이 위태롭게 된 다윗은 부하 600 명을 데리고 망명 생활을 하게 된다. (다윗은 사울왕의 부마이기도 함)
궁지에 몰린 다윗 일당은 어느날, 제사장들(여호와의 자식들)이 모여 사는 놉(지명)이란 곳을 지나게 된다. 제사장은 일의 내막은 모른 채, 왕의 부마(사위)가 왔으므로 어려운 자세로 정성껏 돌보아 준다. 이것이 사울왕에게 알려지자, 제사장들은 칼날의 이슬로 사라진다.
[(사울)왕이 도엑에게 이르되, "너는 돌이켜, 제사장들을 죽이라." 하매, 에돔 사람 도엑이 그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85 인을 죽였고, 제사장들의 성읍(城邑)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
(사무엘상 22;18~19)
* 바이블에는 대단히 이상한 방향으로 초점(焦點)이 맞추어지는 것이 있다. 백발 백중 예외가 없다.
예로서, 甲이라는 사람이 여호와의 사람 乙을 죽이면, 甲을 나쁜 X이라고 지적하면서 여호와의 벌(罰)을 받을 것이라는 예언 따위만 있을 뿐, 억울하게 희생된 乙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아무 말이 없다.
위의 원문 내용도 그렇다. 도엑 또는 사울왕이란 X은 나쁜 X이요, 언젠가는 여호와의 벌을 받을 것 같은 암시만 보일 뿐, 제사장 85 명을 비롯하여 도륙된 남녀노소의 그 많은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 대책(보상)이 없다. 전지 전능한 신(神)의 자식들인데도 말이다. 사전(事前)에 죽지 않도록 보호를 해 주든지, 죽었으면 살려 주든지, 아니면 천당으로 보냈다든지, 무슨 말이 있어야 될 것 아니가?
1) 첫 살인 사건; 살인자 가인에게 벌을 주는 장면은 있지만, 억울하게 죽은 아벨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2) 예수가 태어났을 때: 예수를 죽이려던 헤롯왕만 나쁜 X일 뿐, 억울하게 죽여진 수 많은 아기들에 대한 말이 없다.
3) 욥을 시험할 때; 욥의 아들 딸 10 명이 죽여진다. 이것은 여호와가 직접 살인한 것이나 다름 없다. 시험의 결과 욥은 합격품으로 판명되었다. 욥에게 새로운 자식 10 명을 다시 주어 축복하지만, 이미 죽여진 10 명에 대한 말은 어디에도 없다.
4) 히브리의 북쪽 왕국 이스라엘의 제7대 아합왕 때에는 여호와의 선지자들이 도륙되는 수난의 시대였다. 여기에서도 아합왕만 나쁜 X이 되어 여호와의 벌을 받고 죽는 장면만 있을 뿐, 억울하게 죽여진 선지자들에 대한 말이 단 한 줄도 없다.
5) 여호와의 성전(聖戰); 아무리 여호와의 성전(聖戰)일지라도 여기에는 억울한 사상자(死傷者)는 무수히 많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승리에 대한 이야기만 있을 뿐, 분명히 있을 사상자(死傷者)에 대한 말은 어디에도 거론되는 바 없다.
6)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을 때; 우리아는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또, 방금 태어난 어린 아이가 대용물(代用物)로 죽여졌다.
이때, 다윗과 밧세바에게는 벌(罰) 같지도 않은 벌이 내려졌을 뿐, 억울하게 죽은 우리아와 어린 아이에 대한 말(보상)이 없다.
7)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 한다. 그렇다면, 예수가 오기 전에 살아간 사람들과 예수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서 살아간 사람들은 무엇인가? 예수를 믿고 천당 간다는 말만 있을 뿐, 예수의 이름을 들어 보지도 못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또, 여호와(또는 성령)의 감동과 허락 없이는 `예수를 믿는 일`은 불가능한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믿지 않는 사람은 본인의 책임이 아니다. 이 책임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없다.
8) 순교자(殉敎者)라는 것도 그렇다. 살아 남은 자들만 신나게 살아갈 뿐, 순교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다. 전지 전능한 신(神)이요, 인간의 생사(生死)를 주관한다는 신(神)을 모시는 종교에서 순교자(殉敎者)의 존재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애굽 왕 바로에게 핏대를 올리며 악담과 저주를 퍼부어 대고도 아무 탈 없이 모세는 살아서 나왔다. 그렇다면, 똘마니 예수쟁이들이나 순교(殉敎)라는 것을 하는 것인가?
9) 예수교는 인류 역사(歷史) 속에다 너무도 많은 악(惡)을 배설해 놓았다. 결과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여졌다.
이에 대하여 교황은 구교(舊敎)를 대표하여 입으로만(건성으로) 사과라는 것을 했다. 개신교(改新敎) 쪽에서는 "그것은 이단(異端) 또는 사이비(似而非)가 저지른 일이다."로 발뺌만 하고 있다.
이 경우, 사과한 쪽과 발뺌하는 쪽의 사람들은 저 잘낫다며 신나게 잘 살아가고 있다. 반면에, 그들에 의하여 죽여진 그 많은 억울한 사람들에 대하여는 아무 대책(보상)이 없다. 역시 바이블 내용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악(惡)에 의하여 희생된 인명에 대하여 아무 대책(보상)이 없기는 여호와(예수)도 속수 무책이고, 현실적으로 예수쟁이들도 마찬 가지이다. 능(能)치 못함이 없는 전지 전능한 신(神)을 모신 종교는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일까?
10) 일제(日帝) 강점기 때, 거의 대부분의 예수교 지도자들은 일본의 신사(神社=잡신)에 참배했다(받들었다).
바이블에서는, 페르시아(바사) 대제국의 왕들을 칭송하는 장면이 많다. 즉, 조로아스터교의 신(神) 아후라마즈다(Ahura Mazda)를 대리하여 신권(神權) 정치를 단행하던 왕들을 칭송하고 있다.
고레스(Cyros)왕에게는 14 번, 다리오(Darius I)에게는 13 번, 아하수에로왕과 아닥사스다왕에게는 각각 7 번 씩 칭송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 신사에 참배했던 목사들과 조로아스터교를 칭송했던 바이블 속의 무리들은 승승 장구 신나는 인생을 살아간다.
뿐만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한 자는 잘 살고, 인간답게 살아가려는 사람은 대개 고달프다.
여호와(예수)도 대개 승자의 편으로 되어 있다. 승자가 만들어 놓은 결과이지만. 그리고 고달픈 사람에 대한 보상은 어디에도 없다.
* 결론; 결국, 이 세상은 뜻 있는 지성인들의 손에 달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독하고 힘든 일이지만, 의지할 것은 오직 오염(汚染)되지 않은 인간의 양심과 지성 뿐이다.
예수교는 인간의 모든 것을 가장 크게 오염시키고, 몸과 마음을 마비시키는 종교라고 단정지어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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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구자는 교회에 나오지 말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
무릇 너의 대대 자손중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그 여호와의
식물(食物=예배)을 드리려고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라.
무릇 흠이 있는 자는 가까이 못할지니, 곧 소경이나,
절뚝발이나, 코가 불완전한 자나, 지체가 더한 자나,
발 부러진 자나, 손 부러진 자나, 곱사등이나,
눈에 배막이 있는 자나, 괴혈병이나, 버짐이 있는 자나,
불알 상한 자나, ..... 흠이 있는 자는 나아와 여호와의
화제(제사=예배)를 드리지 못할지니, 그는 흠이 있은즉 나아와
여호와의 식물(食物=예배)을 드리지 못하느니라."
(레위기 21 ; 1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