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다른 사람의 일부이듯, 다른 사람도 그대의 일부다
의식을 바꿈으로써 그대의 성격은 자동적으로 변화된다. 그러나 성격을 바꾼다고 해
서 그대의 의식이 동일한 방식으로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그대의 성격을 바꾸
면 그대의 의식은
억압받고, 이원성을 낳게 된다.
그대의 의식이 하나의 유형으로 남아 있고 그대의 성격도 또 다른 유형으로 남아 있지만, 둘
사이는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대는 두 사람, 혹은 그 이상의 인물이 된다. 그대는 다중 성격이
되고, 군중이 된다. 휴식을 취하기보다는, 깊은 침묵에 잠기기보다는, 평화를 경험하기보다는
그대는 더 신경질적이 되고 더 소란스러워진다. 일체의 내적 조화를 상실하는 것이다.
이런 일은 이른바 도덕주의자에게 일어난다. 그들은 단순히 외부 세계로부터 계속
일시적인 짜맞추기만을 하고 있다. 그들은 겉치레를 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는 이런 무리들을
'무덤에 화질을 한다'고 표현했다.
내부에는 냄새 나는 시체가 있는데, 외부로는 회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외부에서 보면
그 무덤이 아름답게 보인다. 그대는 무덤에 장미를 갖다놓을 수도 있고 무덤가에
꽃을 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아름답게 꾸미더라도 그 내부는
무덤일 뿐이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상황이다.
이 모든 일은 우리가 성격을 너무 과도하게 믿기 때문에 일어난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지만, 세상의
99.9퍼센트의
사람들은 행동주의자들이다. 그들이 하는 말은 무엇이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깊이 들어가서 살펴보면, 그들은 파블로프 학파와 스키너 학파에 속하는 사람들로서
모두 행동주의를 신봉한다. 그들 모두는 그대의 행동은 변할 수 있으며, 그때는 '그대'도
바뀐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대는 단지 그대의 행동일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말로는
그렇지 않다고 할지 모르며, 심지어 자신의 근본적 믿음을 자각조차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사회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이다.
성격의 품의는 명상으로부터 나온다. 그대는 자신의 성격에 관한 한 어떤 것도 훈련
하고 있지 않지만 그대의 통찰력은 성장한다. 그대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기 시작하
며, 그때 자연스럽게 삶 전체는 새로운 빛 또는 비전 속에서 변형된다. 더 이상 낡은 방
식으로는 행동할 수 없게 된다. 이제는 명상을 통해서 우리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사
실을 알기 때문에 그대는 어느 누구도 속일 수 없다. 누가 그대를 속이고 있는가? 그대
는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 그대는 폭력적일 수 없으며, 그대는 남에게 상처 주는 것을
즐길 수 없다. 왜냐하면 이제는 그대가 다른 사람의 일부이듯 다른 사람도 그대의 일부
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의 유기적 우주의 일부며, 우리는 전혀 분리된
존재들이 아니다.
이때는 물론 성격의 품위를 갖출 것이며, 그 품위는 온전함을 통해서 나올 것이다.
그대는 분리되지 않고 하나가 될 것이다. 그대의 삶의 스타일도 단순히 삶의 귀결이 되
지, 삶에 대항하거나 강요되지는 않는다.
명상은 진정한 성격의 원천이어야 한다. 사람은 성격에 대한 모든 것을 잊을 수 있
다. 그대의 전 에너지를 명상 속에 부어라. 그렇게 하면 그로부터 성격이 발생한다. 그
것은 그대에 의해 모아진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나온 것이다. 성격이 자연발생적일
때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지니며, 그것이 하나의
기쁨이다. 그것은 어떤 목적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