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 전기 밥통, 게다가 흑백 휴대폰까지.
우리 주변에선 벌써 구닥다리 취급을 받거나 아예 퇴물이라고 하는 건데.
우리가 너무 빠른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생각의 속도도 중요하지만 비용의 부담도 중요하니까요.
가만히 휴대폰 요금이 적힌 명세서를 바라보면
삐삐 생각이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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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선호출기(삐삐) 제조업체인 한텔은 올해 5백70억원의 매출을 바라본다. 김용섭 부장은 2일 “삐삐가 해외에서 날개돋친 듯 팔리는 덕에 지난 7월 400평에 불과하던 본사와 공장을 1,600평으로 늘려 이사했다”고 자랑했다.
국내에서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져가고 있는 전기보온밥통·무선호출기·컬러브라운관(CRT)·흑백 휴대폰이 수출로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너나없이 첨단제품을 찾아서 뛰느라 바쁜 사이 실속을 챙기고 있다.
맥스컴은 1990년대 후반부터 국내 수요가 급감하면서 팔지 못한 전기보온밥통을 인도네시아에 수출하고 있다. ‘용마’란 브랜드로 연간 80만대를 수출, 1백20억원을 벌어들인다. 단순히 보온만 하는 전기밥통은 국내에서 보온 겸용의 전기밥솥이 쓰이면서 사라졌다.
맥스컴은 그러나 현지인 취향에 맞게 밥통 밑에 접시와 수저를 넣는 ‘드라이박스’를 따로 만들어 붙이는 아이디어로 시장을 개척했다. 경영지원팀 김정훈 과장은 “현지의 브랜드 인지도가 높고 수요가 꾸준해 10여년간은 더 수출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플라즈마 디스플레이(PDP) 등 첨단 디스플레이가 부상하면서 ‘사양산업’으로 불리는 CRT는 아직도 삼성SDI에 큰 돈보따리다. 북미·중국·유럽 등 주요 시장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3·4분기(7~9월)에만 1천6백만대를 팔았다. 매출이 9천9백30억원으로 2·4분기보다 10%나 증가했다. 중국·인도·동남아시아, 신흥시장 매출도 꾸준히 늘고 있다.
이순택 사장이 ‘브라운관 부활론’을 선언했을 정도로 CRT는 이익률이 10~12%로 짭짤하다. 그러나 마냥 앉아서 기다린 것은 아니다. 삼성SDI는 PDP·2차전지 등 차세대 제품을 키우면서도 2000년부터 브라운관을 15~17인치에서 25인치 이상으로 바꾸고 평면화한 게 주효했다. 삼성전자와 소니가 디지털TV에 집중하기 위해 브라운관TV의 생산을 중단한 때였다.
또다른 CRT 생산업체인 오리온전기 남병숙 차장은 “상반기에 월 50만~60만대를 생산했다”며 “7월부터는 공급 부족을 우려할 정도로 가수요까지 일고 있다”고 말했다. 시장조사 전문기관인 디스플레이서치는 브라운관TV가 2007년까지도 세계 TV시장의 90%를 차지할 것으로 전망했다.
무선호출기도 수출을 발판으로 변신중이다. 과거처럼 숫자만 전달하는 게 아니라 문자메시지·e메일 검색이 가능하게 만들어 선진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한텔은 지난 7월 삐삐 가입자가 7백만명에 이르는 아치사(ARCH)와 1백10만대(3백75억원)를 공급키로 계약했다. 최근엔 다른 통신회사와 1백20억원의 수출계약을 맺었다. 때아닌 무선호출기 호황은 미국, 캐나다에서 여전히 애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휴대전화가 삐삐를 밀어냈지만 해외에서는 이동전화 요금이 비싼 데다 수신자도 요금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지역이 넓어 휴대전화 송·수신이 원활하지 않은 것도 이유다. (주)사이버트리도 최근 캐나다 벨사에 3년간 3천만달러어치를 수출키로 계약했다. 값은 개당 4만~5만원 정도. 최경배 사장은 “날씨를 비롯한 정보서비스와 광고채널로도 쓰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세원텔레콤은 국내에서 점차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흑백 휴대전화기가 수출의 80%를 넘는다. 연말에는 신모델을 4종이나 더 내놓을 예정이다.
주덕상 기획팀장은 “올해 지난해보다 50% 증가한 4백만대 이상의 흑백 휴대전화기 수출이 예상된다”며 “중국에서 흑백 비중이 78%인 데다 전체 인구 중 휴대전화 소지자가 12%에 불과한 것에 비춰보면 시장은 얼마든지 있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 김희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