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67] 박정희 카리스마의 허구~!!
무덤 속의 박정희가 다시금 부활해 한국 사회를 떠돌아다니고 있다. 비단 어제 오늘의 현상이 아니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들(?)로 하여금 그의 망령을 떠받들게 하고 있을까? 과연 박정희는 추앙받아 마땅한 인물이며, '기념관'까지 건립해 드려야 할 만큼의 지도자였을까? 정말이지 기가막힌 시대의 불화가 아닐 수 없다.
박정희 기념관 건립 옹호론자들을 보면서 나는 "한국인에게 진정한 역사의식은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을 내던지게 된다. 그리고 박정희는 결코 지금과 같은 대접을 받아선 '절대로' 안 된다는 문제의식을 새삼 느끼게 된다.
지금부터 쓰게 될 나의 글은, 국고 지원까지 강행하며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자 하는 김대중 대통령의 반역적인 행위에 대한 비판이자, 평범한 지지차원을 넘어 '영웅'으로까지 그를 미화시키려는 다수 국민에 대한 강한 도전이다.
먼저, 작가 이인화의 다음과 같은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가고자 한다. 단행본 [인물과 사상] 2권에 등장한 글을 재인용한 것으로써, 가장 흥미진진한 '압권'만을 간추려 보았다.
이인화의 박정희 예찬론
"솔직히 말하면 저는 그 분이 한 일은 (쿠데타를 포함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옳았다고 얘길 하고 싶은데, 지식인으로서의 제 외적인 그게 솔직함을 계속 막네요. 저는 그 분이 유신을 한 것도 옳았고 다 옳았다라고. 전부 다 이해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저는 지금 그 사람한테 미쳐 있거든요. 내 소설(인간의 길)의 주인공(박정희) 말이예요."
"저는 이거 하나로 소설사에 남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람 하나로, 그러면 자폭 할 수 있죠. 이런 인물을 만들었다는 거예요. 지금까지 어떤 작가도 꿈꿔보지 못한 인물, 정말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인물, 스타브로긴이나 라스꼴리니크프 같은 인물을."
"살아서는 온 세상이 놀랄 일세의 인걸로 살고 죽을 때는 귀신도 울 만큼 참혹하게 영웅으로 죽으리라. 한 인간의 일생을 통해 불타오른 고독과 우수의 마키아벨리즘. 그는 따뜻한 인간의 마을을 지나쳐 버리며 고독에서 고독으로 걸어갔다.
다른 누구보다도 더 깊이 죄악 속으로, 야수의 발자국이 새겨진 미지의 길을 따라 점점 더 차갑고, 점점 더 결정적인 고독을 향해 나아갔다. 자식들의 앞날을 걱정하는 대신 어떠한 비극을 무릅쓰더라도 가난과 절망에 빠진 한 민족을 위대한 번영으로 이끌기를 열망했다."
이인화의 말 중 한 가지만큼은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미쳤다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인정한다. 당신은 완전히 미쳤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람도 있다는 걸 입증하고자 하는 것일 뿐, 내가 여기서 거론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유형은 '박정희의 인권유린 등 반민주적 행위에 대해선 스스로도 부정하지만, 그의 경제적 공만큼은 적극적으로 존중한다'는 사람들이다.
이인화 같이 미친 인간들을 상대로 하기엔 나의 역량이 너무 딸린다. 아울러, 박정희의 인권탄압에 대해서는 그의 지지자들과 반대자들 사이에 부족하나마 일정 정도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 중점을 두어야 될 사안은 '박정희 경제 신화론(카리스마)'에 대한 격파(?)라 생각한다. 기념관 건립의 명분도 바로 '경제 신화' 아닌가.
우선 나의 입장부터 간략히 소개하겠다. 나는 당시 한국의 경제 성장에 있어 박정희가 세운 공에 대해 '어느 정도' 인정을 한다.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보릿고개 시절 배고픔에 허덕였던 사람이 박정희에 대해 고마워 한다는 정서에 대해서도 일면 수긍을 한다.
그러나 그 '인정과 수긍'이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박정희에게 어울리는 만큼의 몫을 누릴 때 해당되는 것이지, 지금과 같은 대접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는 결단코 성립(유지)될 수가 없다. 왜? 당시 경제 성장에 대한 결실은 결코 박정희 개인만의 것도 아니었을 뿐더러, 화려한 경제 성장의 이면에 감춰져 있는 '희생과 손실'이 너무 크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좀더 명확히 하고 싶은 게 있다.
위에서 나는 "경제 성장에 대한 결실은 박정희 개인만의 것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자면, 현재 박정희가 누리고 있는 결실에 대한 몫(지분)이 너무 뻥튀기 되고 있다는 뜻이다. 수치로 표현할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좀더 선명한 논지를 위해 수치를 도입해 보겠다.
나는 성장에 대한 공으로서 박정희가 가질 수 있는 몫은 30%면 충분하다고 믿는다. 그런데, 오늘날의 상황은 어떤가? 70% 그 이상을 부여해주고 있는 것 아닐까? 적어도 나의 입장에서 박정희는 너무 과대평가되고 있다. 왜 그러한지 이제부터 구체적으로 논술해 보겠다.
첫째, 박정희의 리더십을 높이 평가하기엔 우리 국민들의 희생이 너무 컸다. 전태일의 분신 자살은 이에 대한 총체적 입증이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이 불길 속에서 외쳤던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등의 구호는 고속성장의 이면에 얼마나 가혹한 노동자들의 희생이 뒤따랐는가를 입증해준다.
인권유린(반민주적 요소)과 경제성장은 결코 분리될 수 있는 게 아니며, 분리해서는 안된다. 열일곱 살도 채 안된 어린 여성 노동자들이 인간의 기본권리조차 유린당하며 하루 평균 14시간 이상을 혹사당했다라고 하는 건 경제성장의 결실을 유독 박정희에게 부여해 줄 수 없는 중요한 이유이다.
결정적으로 희생에 대한 단맛은, 노동자들이 아닌 악덕 경영자들에게 그대로 반납되었다. 노동자들은 최저 생계비 5분의 1도 안 되는 임금을 받으며 신음의 세월을 보내야 했을 뿐이다. "고운 네 손이 밉다"며 "돌아가는 기계 소리를 노래로 듣고 땀을 흘리라"고 말했던 박정희의 외침 속에 인권은 없었다.
편의상 전태일 예를 들었을 뿐 이와 같은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하나만 더 들어보겠다. '월남 파병'에 대한 이야기이다.
박정희 정권 18년 중 한미관계가 가장 밀착이 되었던 시절이 '월남 파병' 때였다. 1965년 5월부터 베트남 전쟁이 종결되는 75년 4월까지 한미 정상들이 무려 7차례의 회담을 개최할 만큼 양국간의 밀월은 뜨거웠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존슨이 월남전 참전을 요구하는 친서를 보낸 20여 국가들 중 유일하게 한국만이 '대규모' 전투부대를 파견했기 때문에 미국의 입장에서는 박정희가 너무도 예뻐 보였을 것이다.
한국이 경제성장을 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때 받은 미국의 원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도움을 받아 경제는 더욱 성장했지만 그 성장 역시 월남전에 파병된 수많은 참전사들의 죽음과 희생, 그리고 지금까지도 고엽제 등으로 고통 속에 신음해야 하는 국민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지, 결코 박정희의 리더십이 탁월해서가 아니었다.
둘째, 박정희 지지자들이 가장 예찬하는 신화 중 하나로 '새마을 운동'을 이야기하는데, 여기에 대한 허구를 지적해 보겠다. 새마을 운동이 박정희의 입을 통해 처음으로 공론화되었을 때가 1970년이었다. 쿠데타로 인해 집권을 한 지 9년이 지난 후이다.
이후 71-72년의 실험 기간을 거쳐 73년부터 본격적으로 '새마을 운동'이 추진되었는데 여기에 대한 배경이 있다. 그 배경이란 다름아닌, 도시와 농촌간의 격차가 더욱 심화되면서 농촌경제가 피폐해졌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대안책이 바로 새마을 운동이었는데, 여기까지는 나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박정희가 10월 유신 이후 체제 안정을 위해 이 운동을 정치적으로 악용해왔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새마을 운동은 "유신 이념을 교육시키고 주입시켜온 조직적인 실천의 장"으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상황이 이러한데, 정치논리는 정치논리고 새마을은 새마을이라고 웅변하는 지지론에 대해 어떻게 공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정치(인권 포함)와 경제를 완전히 분리시켜 박정희의 경제정책을 찬양하는 논리를 경계한다! 그건 정치 따로 경제 따로가 아니었다. 순전히 정치적인 부분만 놓고보자면 박정희의 과오는 너무 크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박정희 지지자들은 경제성장의 내면에 깔려 있는 모순과 병폐들을 정치논리와 결부시켜 그곳으로 끄집어 내던진다.
정치파탄, 인권유린, 민주주의 파괴라고 하는 그들 스스로도 인정하는 이 범주안으로 박정희의 경제성장을 오염시키는 내부(경제) 물질들은 깨끗이 세탁을 해버린다. 결국 그들에게 남는 건 신성하고 화려한 경제성장뿐이다. 내가 박정희에게 후한 점수를 줄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셋째, 박정희는 '하면 된다'는 신념은 심어주었지만, '해서는 안 될' 죄악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 버렸다. 결국 '결과만능주의'가 강조되면서 과정과 절차에 대한 소중함은 잊혀졌다. 박정희의 '성장제일주의'가 제대로 된 빛을 발휘하지 못하고, 표피적으로만 그럴 듯하게 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넷째, '돈'으로 '민족의 자존심'을 팔아 넘긴 죄악이다. '친일 감정'이라는 개인적, 경험적 정서를 가지고 있었던 박정희는 경제성장을 추진하는 데에도 이걸 적용시켰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한일회담을 통한 '대일굴욕외교'이다. 한국 현대사의 원죄라고 할 수 있는 '친일파 청산 실패'는 박정희 정권에서도 연장이 되었다.
민족의 자존과 역사바로세우기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했던 시절 박정희는 '돈'과 '성장'을 위해 '자존'을 팔아먹은 것이다. 이는 주권국가 건설이라는 과제와는 너무도 역행되는 '정통성 없는' 군사정권의 반민족적 '거래'에 불과했을 뿐이다. 그래서 묻는다. 발전도 좋고, 가난의 극복도 좋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될 필요성이 있었을까, 정녕 그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라고.
다섯째, 국제적 환경이 가져다준 대세이다. 박정희 지지자들이 예찬하는 '수출지향주의'는 박정희만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박정희의 "자진 선택"보다는 미국으로 인해 "강요받은 선택"으로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미국의 대한정책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박정희가 미국과 일본에게 '지나치게' 의존함으로써 국가적, 구조적 종속을 심화시켜다고 하는 점이다.
결과 미국과 일본은 한국으로 인해 적지않은 재미를 보았으며, 특히 일본은 한반도를 발판으로 다시금 국제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하는 길을 열게 되었다. 참고로 박정희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이미 장면 정권 때 계획된 것이라는 걸 밝혀 둔다.
여섯째, 박정희 카리스마의 허구로 나는 '성장과 분배의 불균형'을 이야기한다.전반적으로 볼 때 생활 여건이 나아진 건 인정하겠으나,그걸 찬양까지 하기엔 어두운 면이 너무 많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실제로 박정희 경제성장 정책의 주요 특징엔 "중앙집권"과 "영남패권"이 자리하고 있었다
또한 성장의 가시적 결실을 위해 대기업 중심의 자본 논리를 펼쳤는데, 이와 같은 정책으로 인한 오류가 바로 계층간 불균형, 지역간 불균형, 도시-농촌간 불균형, 대기업-중소기업간의 불균형이다. 이건 너무도 중요한 문제이자 심각한 폐단이 아닐 수 없다. 빈부격차 역시 박정희식 개발독재 시절부터 심화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자. 무엇보다 가장 악질적인 건 '지역'문제였다.
사실 여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너무도 많으나 주제가 주제인 만큼 '경제 논리'에 대해서만 간략히 이야기하겠다. 우선 박정희 지역정책의 결실이라 할 수 있는 78년의 시점에 대해 언급하고자 하는데, 다음과 같은 사례 하나를 들어보겠다.
유신말기 1인당 지역 주민소득 (순위별로 기재, 단위는 천원임)
1. 경남 : 760.0
2. 부산 : 699.2
3. 경기 : 691.0
4. 충북 : 532.2
5. 경북 : 526.4
6. 제주 : 514.9
7. 강원 : 485.1
8. 충남 : 476.2
9. 전남 : 474.3
10.전북 : 465.9
참고로 이에 대한 출처 정도는 밝혀드리는 게 예의일 것 같아 말한다. '박정희를 넘어서'라는 책에서 박상훈씨가 내무부, '주민소득연보', 1972년. 1980년을 이용하여 작성한 것이다.
위의 인용글에서도 한 일면을 엿볼 수 있듯이, 박정희의 경제 성장 정책에는 중앙집권화와 영남패권 그리고 호남차별이 확고하게 깔려 있었다. 내가 박정희에게 결코 후한 점수를 줄 수 있는 중요한 이유이다.
이제 이야기를 마무리 짓도록 하겠다. 박정희의 개발경제는 분명, 쿠데타에 의한 집권이라는 정통성 없는 군사정권를 변호하기 위한 명분이었고, '장기 독재'를 펼치기 위한 대국민 설득 작업이었다. 물론 이유 불문하고 그로 인해 경제가 성장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정 정도 인정을 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과 같이 미화될 정도는 아니었다고 본다.
그가 가지고 간 18년이라는 세월도 한번 생각을 해보자. 그 안엔 무수히 많은 고통과 상처가 있었지만, 동시에 그 18년은 박정희가 마음껏 자신의 꿈(?)을 펼쳐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었다는 사실도 인식해야 된다. 단적인 비유로 지금의 김대중 대통령에게 앞으로 15년이라는 시간을 더 준다면, 그리고 한나라당과 같이 발목잡는 거대 야당도 없고, 대통령으로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면, 아울러 그의 고향이 영남이라면, 김대중 역시 '최소한' 박정희 만큼(경제성장)은 할 수 있지 않을까?
김대중 대통령 이야기 나왔으니 그에 대해 쓴소리 좀 해보자. 나는 김 대통령이 역사와의 화해와 용서를 위해 박정희를 껴안는 것에 대해 단호히 반대한다. 그건 '역사'와의 화해가 아닌 자연으로서 김대중 '개인'만의 화해이고 용서일 뿐이다. 오버하지 말아주시길 바란다. 김대중의 화해와 용서가 진정한 빛을 발휘하기 위해선 박정희 시대에 고통받고 억압받아온 수많은 국민들의 합의가 있어야 가능하다.
그와 같은 합의가 이루어진 뒤 그걸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으로서 손을 내밀 때 김대중의 화해는 진정한 화해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의 현실이 과연 그런가?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다.
무엇보다 박정희 기념관을 건립해서는 안 될 가장 큰 이유는 '역사'와 '교육'에 있다. 해방 직후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원죄를 안으며 지금까지도 그걸 극복하지 못한 오욕의 세월을 살아왔으면 되었지,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독재자를 기리고 추모하는 기념관까지 건립한다는 게 이게 과연 상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일까?
자라나는 우리의 자식과 후손에게 그리고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에게 우리를 대표하는 자랑으로 박정희 기념관을 소개한다는 게 이게 정녕 대한민국의 긍지이고 자존심이란 말인가? 지난 현대사를 돌이켜 보건대, 잘못 끼운 첫단추의 폐단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걸 또다시 반복하는 어리석음을 이제는 접을 때도 되었다고 생각한다.
누구보다 우리 자신 스스로에게 한번 물어보자.
해방 이후 50 여년 만에 처음으로 추진되는 기념관의 주인공이 왜 하필 박정희가 되어야 하는가? 그 성전에 진정한 애국자 "김구"를 모실 수는 없을까? 독립운동가 김구가 앉아야 될 자리에 친일 독재자 박정희가 들어앉는 오늘의 현실이야말로 우리에게 딱 맞는 수준이 아닐까? 제발 부끄러운 줄이나 알자.
덧붙이는 글 : 성남 투쟁에 대하여
이 연재가 끝난 뒤 어느 한 독자분께서 전태일 분신 자살의 시기에 일어났던 성남 민중시위에 대해 대략적인 소개를 해줄 수 없겠느냐는 부탁을 해오셨다. 연재의 내용과 상당정도 일치된다고 판단하여 부록으로 몇 글자 삽입해 넣으려고 한다. 성남 시위의 경우 역사의 저편으로 묻혀져 버린 지 오래인데, 잊지 않고 그걸 끄집어 주신 독자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1970년 11월 13일에 있었던 전태일의 분신 자살이 노동자 등의 민중들에게 끼친 영향은 막강했었다. 71년 한해 동안만 노동시위가 1,656 건에 다다를 만큼 이제 더 이상 이 땅의 민중들은, 고속성장의 현란한 빛에 감추어진 박정희 정권의 폭압적인 인권유린을 방치하지 않았다. 전태일의 눈물겨운 투쟁과 자살행위는 그 동안 잠재해있던 수많은 노동 근로자들의 분노와 원성을 폭발하게 만들었으며 그의 육신과 영혼을 태우던 불길만큼이나 뜨겁게 달구었다.
박정희의 집중적인 산업화 정책으로 인해 농촌은 황폐화되고, 여기에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었던 수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도시로 향하던 6-70년대, 마땅한 직장을 구하러 헤매던 생활은 뒤로 하고, 목숨을 부지하고 살 만한 집 한채 구하기 힘들었던 빈민가들이 찾았던 한 가닥 희망은 변두리의 판자촌이었다.
그런데, 이마저 박정희 정부 당국에 의해 강탈당해야 했고, 그 결과 14만 5,000여명의 빈민들이 새로운 정착지를 찾게 된 곳이 바로 지금의 성남시에 해당되는 경기도 광주군이었는데, 위의 독자분께서 말씀하신 '성남 투쟁'의 발단이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잠자리'를 겨우 겨우 찾았던 성남 민중들에게 박정희 당국의 '땅값 폭등'은 그야말로 생존의 벼랑 끝으로 자신들을 내모는 너무도 가혹한 비인도적 행위임에 틀림없었다. 이에 민중들은 '토지불하가격 시정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지만, 당국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결국 성남민중들은 '대책위원회'를 '투쟁위원회'로 그 명칭을 바꾸며, 71년 8월 10일을 '최후 결전의 날'로 선택, 성남출장소와 관용차, 경찰차 등을 불태워 버렸으며 광주경찰서 성남지서를 때려 부수었다. 이에 당황한 당국은 기동경찰대를 투입시켜 최루탄을 발사하였고, 그 과정에서 경찰과 주민 100 여명이 크게 부상 당하였다. 결국 성남주민들의 요구를 수용하겠다는 굴복에 의해 시위는 끝이 났지만, 최선방에서 시위를 주도한 23명은 끝내 구속이 되었다.
전태일의 죽음과 성남 주민들의 시위가 웅변하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우리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가장 평범하고도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열망이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 발전의 외양에는 항상 빛과 그림자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박정희 시대에 존재했던 '명암' 속의 그 그림자는 가볍게 치부하고 넘어갈 성질의 것이 전혀 아니었다. 더군다나 오늘날에 있어서처럼 그 빛이 필요 이상으로 찬양되고 그 그림자는 처참할 만큼 은폐된다는 건 분명 역사에 대한 강간이다.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절규를 외면하는 예찬은 말 그대로 예찬일 뿐, 진정한 양심의 목소리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하며 이 글을 마친다.
절망의 강(www.critize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