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4월 2일, 국내 100여개가 훨씬 넘는 전국개봉관에서 멜 깁슨의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이 상영되었다. 이 영화는 개봉 전부터 로마가톨릭적 편향의 묘사와 마리아의 시각에서 전개되는 스토리 그리고 지나칠 정도로 잔인한 폭력 영화 혹은 피의 제사라는 악평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18세기 후반의 앤 케더린 에머릭의 환상적 작품인 「우리 주님의 비통한 고난」(Dolorous Passion of Our Lord)에서 영감을 받은 멜 깁슨이 그 내용의 일부를 도입해 극적 효과를 더함으로 성경적 내용에서 일탈했다는 비난도 받았다.
그러나 수많은 우려와는 달리 「그리스도의 수난」은 미국 개봉 5일 만에 폭발적인 관객동원에 성공했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부터 시작된 영화는 두 시간 6분 동안 한순간의 호흡도 허락하지 않고 예수님이 흘리시는 피를 통해 관객들의 오감(五感)에 철저한 폭격을 가한다. 그 사이 사이에 창세기 3장 15절을 연상케 하는 예수님과 뱀으로 상징되는 사탄과의 영적 싸움, 성전 수비대의 싸움 중 말고의 귀를 잘랐던 베드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위해 땅에 글을 쓰시는 예수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하늘에서 떨어진 하나님의 폭발적인 슬픔의 눈물,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사탄이 자신의 패배한 모습을 보고 절규하며 울부짖는 모습들은 특히 영상만이 처리할 수 있는 대단히 인상적인 장면들이었다. 더욱이 아람 방언(아르메니아)과 라틴어로 전개된 대사는 다시 한번 보고 싶을 만큼 영화의 현장감을 더해주었다.
이 영화 The Passion of Christ는 그렇게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를 이미지화하는데 철저하게 성공한 한마디로 잘 만든 예수 영화이다. 그래서 미국 전역과 한국에서 벌써부터 이 영화를 전도의 도구로 삼아야 하며, 그 내용을 중심으로 전도 교재를 만들어야 한다고 난리이다. 한 기독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이 영화를 위해 벌써 1천명의 공식 서포터스까지 결성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영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위에 언급한 몇 가지 이유로 절대로 이 영화를 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나친 문화 향락주의도 경계해야 하지만 지나친 금욕주의나 도피주의도 경계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은 우리에게 몇 가지 숙제를 남긴 셈이다.
고난의 이미지화과 그 한계
우선 이미지와 영상의 최 절정에 영화라는 문화가 서 있다는 점이다. 영화는 인간의 시각(視覺)과 오감(五感)을 통해 그 심성을 자극하거나 호소함으로써 제작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현대인들은 웬만해서는 충격이나 감동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멜 깁슨은 제목이 잘 보여주듯이 고난 받는 그리스도의 처절한 피를 소름끼칠 정도로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충격요법을 택했을 것이다. 이러한 충격요법은 그동안 머리 속으로만 혹은 신화적으로만 생각해왔던 그리스도의 수난을 오감으로 느끼게 했다는 점에서 칭찬할만하다. 그러나 그동안 기독교가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리에 도취되어 그리스도의 수난을 참을 수 없이 가볍게 다루어 왔다는 비판을 당해야 한다면, 영화「그리스도의 수난」역시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참을 수 없이 잔혹하게 이미지화 했다는 비판을 받기에 충분하다. 로마군인들로 구성된 전문적인 고문단에게 당하는 고문은 고증을 거쳤다 하더라도 “한편의 잔혹극”으로 불릴 만큼 잔인하다. 6개의 가지가 뻗친 채찍에 40대를 맞으셨다는 고증에 따라 고문대 주위가 온통 피바다로 흥건해지는 장면은 눈을 감을 정도로 관객들을 몹시 불편하게 만든다. 물론 구약에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의 고난이 예언되어 있고 복음서에도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이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과는 달리 그 고난의 자세한 묘사에 대해서 성경은 오히려 매우 절제되어 있다. 이는 성경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중요성을 무시하지 않는 반면, 그리스도의 고난이 그 고통과 괴로움의 정도(degree)에서 고려될 성질의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의 뜻에 능동적으로 순종하신 영광스러운 구속 사역이다. 이런 의미에서 고난의 이미지는 성경이 계시해 주신 이미지로 충분하다 할 것이다. 그것을 이미지로 더욱 확대해석하고 상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존 칼빈이 십자가의 형벌을 이미지화하는 것은 신자들의 주의를 하나님께로부터 빗나가게 하는 우상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영상과 이미지 vs 계시의존사색
정통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 그리고 기도 이외에 다른 은혜의 방편이 없음을 확인하고 있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산물인 Sola Scriptura가 나온 것이다. 영화를 통해 표현된 형식적 줄거리가 종교적 감동, 그것도 주로 감정적 감동을 줄 수 있을지 몰라도 은혜의 방편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매일 성경을 통하여 주님의 말씀을 읽고 보고 묵상한다. 또한 수없이 선포되는 주님의 설교를 듣고 있다. 지난주에도 매일 그리스도의 수난의 말씀을 들으며 그 수난에 동참했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이 영화에 이렇게 환호하는 새삼스러움은 우리를 당황케 한다.「그리스도의 수난」은 실력 있는 가톨릭 감독이 자신의 신앙심에 기초하여 성경적 사실과 역사적 고증을 거쳐 만든 영화라는 문화에 불과하다. 그런데 마치 신약성경을 새롭게 다시 써야 하는 듯, 그 동안 마치 말씀 중심의 신앙이 무엇인가 부족했다는 듯, 그동안의 전도방법이 대단히 잘못되었다는 듯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이러한 열광과 찬사를 볼 때, 그 견딜 수 없는 가벼움에 우울하고 부끄럽지 않을 수 없다. 21세기는 영상과 이미지 시대이다. 그 최정상에 영화가 서 있다. 이미 한국교회는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이러한 현대적 테크닉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주일예배를 영화상영과 토론으로 대치하는 교회도 거짓말 같지만 이미 생겨났다. 그것이 효과적인 설교(전도)와 교육의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상과 이미지 시대에도 전통적인 전도(설교)는 여전히 지난 2천년 동안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변함없는 구원의 방법이었다(고전 1:21). 영화를 보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그 어떤 연극도 영화도 전도의 말씀을 대치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전파하라 했지 영화나 드라마를 상영하라 하지 않으셨다(딤후 4:2-4). 영화나 드라마는 그야말로 전도를 위한 보조 수단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어떻게?”가 아니라 “왜?”로 접근해야
결국 그리스도의 수난은 예수께서 “어떻게 죽으셨는가?”가 아니라 “왜, 누구를 위해서 죽으셨는가?”로 질문하고 해석해야 할 하나님의 구원사적 사건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지 못한 도마는 보기 전에는 절대로 그리스도를 믿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 도마에게 부활의 예수님은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시고 만지게 하셨다. 그리고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이후로는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다(요 20:29).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를 육체로 대면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수난도 십자가도 육체로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예수를 사랑하고 믿으며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벧전 1:8). 그것이 신약적인 신앙의 전형이다. 그렇다면, 왜 꼭 그런 영화라는 영상과 이미지를 보아야만 고난을 현실로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단 말인가? 이제까지 우리가 성경 특히 복음서를 통해 잃고 들은 위대한 수난의 설교 말씀은 우리에게 아무런 현실성 없는 허공 치는 메아리였다는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멜 깁슨도 Christianity Today와의 인터뷰에서 “영화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감정적 수준의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리고 당신은 그 이상의 이미지나 경험을 원할 수도 있다. 영화는 그게 전부다. 영화는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영화는 그게 전부이다. 영화는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오직 그것을 오감으로 경험하게 할 뿐이다. 한 가지 고무적인 일은 영화 관람 이후 많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해 더 깊이 알고자 애쓰며, 그리스도가 누구신가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불신자들이 많아졌다는 점이다. 그것이 영화라는 문화의 순기능이다. 그것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성경으로 돌아와야 한다. 다시 계시의존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물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가 아니라 “도대체 왜?, 누구를 위하여?” 그런 고난을 당하셨느냐고 말이다. 그것이 성경을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진리의 말씀으로 믿는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일 것이다. 그렇게 영화는 영화의 자리에, 성경은 성경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이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계시의존사색(啓示依存思索)의 신앙을 재점검하는 계기가 되어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개혁고려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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