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현재 우리의 형법 제297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강간의 정의이다. ‘폭행, 협박’의 강제력은 상대방의 동의 없이 강제적으로 성관계를 강요했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피해자와 가해자만이 있는 상황에서 목격자 없이 일어나는 강간 사건의 특성상, 피해를 주장하는 사람이 폭행이나 협박의 존재를 입증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폭행, 협박했어도 강간 인정 안돼
특히 자발적으로 성관계를 한 후 강간이라 주장하는, 이른바 “꽃뱀”에 대한 두려움으로 법원은 강간을 당했다는 피해자의 주장을 쉽사리 믿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폭행 또는 협박의 증거가 있다면, 과연 법원은 바로 강간죄를 인정하는가? 두 가지 사건의 사례를 보자.
“피고인이 피해자를 여관방으로 유인한 다음 방문을 걸어 잠근 후 피해자에게 성교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피해자가 이를 거부하자 "옆방에 내 친구들이 많이 있다. 소리지르면 다 들을 것이다. 조용히 해라. 한 명하고 할 것이냐? 여러 명하고 할 것이냐?"라고 협박하면서 강간했다.” (사건 <가>)
“1996년 7월 5일. 오전 7시경 피해자가 운영하는 주점에 찾아가 피해자에게 따라오지 않으면 가게를 불사르고 죽이겠다고 겁을 준 후, 오전 9시경 피해자를 여관으로 끌고 가 정을 통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 당하자 발로 피해자의 배를 걷어차고 떠밀어 침대에 눕힌 다음 베개로 입을 틀어막고 양손을 머리 위로 올린 채 무릎으로 짓눌러 반항을 억압한 후, 1회 간음하여 강간했다. (중략)
7월 16일. 오후 6시경 술을 마시고 취한 상태인 피해자를 유인하여 정을 통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 당하자, 피해자를 위 여관 방의 욕실로 끌고 가 플라스틱 바가지로 머리를 3회 때려 정신을 잃게 하고 잠시 후 정신을 차린 피해자에게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하여 이에 반항을 포기한 피해자를 1회 간음하여 강간했다. (중략)
8월 초순 새벽 4시경 피해자가 운영하는 주점에서 피해자에게 찾아가 가게 문을 닫도록 강요하고서는 피해자를 택시에 태워 끌고 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목을 조르고 뺨을 수회 때려 겁을 준 후, 새벽 5시경 여관으로 끌고 가 피해자의 머리를 물을 채운 욕조에 2회 처박는 등 폭행하여 겁에 질려 반항을 포기한 피해자를 1회 간음하여 강간했다. (중략) 8월 25일. 오후 5시경 주점에서 피해자에게 자주 전화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맥주병을 깨어 들고 죽이겠다고 겁을 준 후 목을 조르고 발로 전신을 걷어차는 등 하여 피해자를 폭행했다. (중략)
9월 23일 오후 4시경 여관방에서 피해자와 함께 술을 마시다가 욕정을 느껴 피해자와 정을 통하고자 하였으나, 피해자가 이를 거부하자 말을 듣지 않는다고 맥주병으로 피해자의 오른쪽 무릎을 1회 내리쳐 반항을 포기한 피해자의 가슴을 입으로 물어뜯고는 피해자를 1회 간음하여 강간하고, 이로 인하여 피해자에게 약 10일간의 치료를 요하는 우측 유방 피하출혈상 등을 가하였다는 것이다.” (사건 <나>)
위의 사건 <가>와 <나>의 사례 중 법원이 “폭행 또는 협박 등 강제력이 행사되었다”고 인정한 것은, 놀랍게도 가장 심한 물리적 폭행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진 <나> 사례가 아닌 <가> 사례다. 실제로 <가> 사례에서는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피해자의 저항이나 흉기 등의 물리적인 폭력을 이용한 가해자의 행위가 없었다. 그러나 법원은 늦은 밤 여관에 둘만 있었던 상황으로 인해 가해자의 언행이 ‘피해자의 저항을 곤란케 하는 유형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나> 사례의 경우 물리적인 폭행과 협박, 불법적인 가택침입과 절도 등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폭행과 협박이 피해자의 저항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곤란케 할 정도의 것으로 인정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바로, <나> 사례의 피해자와 피고인이 “4개월 정도를 사귀어 온 관계”였고 사귀는 동안 “1주일에 2회 내지 3회 성관계를 가져 왔”기 때문이었다. 즉, 강간죄의 객관적 구성요소인 극심한 “폭행, 협박”이 있었고 이를 입증할 신체적 상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법원은 피해자와 피고인이 이미 성관계를 한 경험이 있다는 이유로 강간죄 성립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강간사실 입증책임이 피해자에게 있어
판례들을 통해서 법원이 제시하고 있는 강간죄에 대한 ‘합리적’ 판단을 구성하는 요소는 다음과 같다. 물리적인 강제력이 존재하지 않거나 ‘아는 관계’에서 발생하는 강간의 경우, 대부분의 가해자는 피해자와의 성행위 자체는 인정하지만 그것이 강간이 아니라 합의에 의한 성관계였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서 강간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폭행, 협박’이 강제력의 존재여부를 입증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법원은 이때의 ‘폭행, 협박’을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가장 협의의 개념으로 해석하며, ‘폭행, 협박’ 등의 강제력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피해자의 저항’이 있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러나 피해자의 저항에 대한 물리적 증거를 제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 가해자와 피해자 둘만 있는 공간에서 주로 발생하는 강간사건의 특성상, 증거는 주로 사건 당사자의 진술과 주변적인 정황에 한정된다. 설사 상해의 증거나 성교의 증거가 있더라도 각각의 증거만으로는 그 성교의 강압성을 입증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를 직접적인 강간의 증거로 판단하는 일은 드물다.
이처럼 가해자의 행위가 아닌 피해자의 저항이 ‘폭행, 협박’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상황에서, 강간사실에 대한 입증책임은 대부분 피해자 자신에게 부과된다. 법원은 강간죄 성립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자신이 저항했음을 주장하는 피해자의 진술이 ‘합리적’으로 진실하다고 믿을 수 있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판단하며, 결국 재판의 초점은 (가해자 진술이 아닌)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 여부에 맞추어지게 된다.
이 때 법원이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확증하는 것으로서 고려하는 요건에는 피해자와 피고인의 관계, 피해자와 가해자의 최초 접촉상황에서 피해자의 ‘자발성’ 여부, 강간도중 피고인에 대한 피해자의 태도, 강간 후 피해자의 태도, 강간 당시 피해자의 주변인들에 대한 ‘구조요청’ 여부, 강간직후 ‘신속한 고소’ 여부, 피해자의 과거 품행과 성경험 유무 등이 있다. 그러나 실제 강간죄 판례들을 살펴보면, 이러한 판단요건들이 항상 객관적이고 일관되게 적용되지 않는다.
강간이 아니라 ‘과도한’ 성행위?
서울고법 1996년 판결의 경우, “피고인이 피해자의 뺨을 때리고 승용차에 피해자의 머리를 수회 부딪히게 하는 등 폭행하고, 약혼자에게 자신과의 관계를 알리겠다고 협박한 후 4박 5일 동안 피해자를 끌고 경기도와 강원도 일대의 여관을 전전하며 피해자의 반항을 억압할 정도”의 폭행이 존재했고 이러한 폭행 사실로 인해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약혼자에게 폭로하겠다고 협박한 사실 역시 법원에 의해 인정 받았다.
그런데도 법원은 “피고인과 피해자가 처음 성관계를 맺게 된 과정, 그 후 약 2년 동안 사귀어 온 과정을 미루어 보았을 때 피해자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어” 피고인에게 강간죄에 대해서 무죄를 선고했다. 즉 피해자와 피고인이 친밀하거나 데이트를 하는 관계라면, 특히 피해자와 피고인이 이전에 성관계를 한 적이 있다면, 폭행 또는 협박 등의 다른 여타의 범죄 성립 요건이 충족된다 하더라도 강간죄를 인정 받기 어렵다는 것이다.
폭행이나 협박의 증거가 있더라도, 법원이 요구하는 다른 판단의 요건들이 충족되더라도, 연애 관계나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데이트 강간이나 친밀한 관계에서의 강간이 인정되기 어려운 이유는 바로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성관계 경험 혹은 그 가능성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현행 형법상 강간죄의 적용대상에 아내를 제외한다는 규정이 명문화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판례에서는 아내강간이 인정되지 않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부부관계나 애인관계에서라면 강제적인 성행위도 ‘있을 수 있는 과도한 성행위 혹은 변태적 성행위’ 정도로 인식되기 때문에 입증될 수 있는 폭행이나 협박, 혹은 피해자 저항의 증거가 있다 하더라도 강간이었다는 것을 인정 받기는 어렵다. 피해여성의 성매매 경험이나 과거의 품행이 중요한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 역시, 그 여성이 모든 남성과 성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강간 사건 대부분 ‘무죄’선고
과거에 성관계의 경험이 있거나 미래에 성관계의 가능성이 있는 관계에서 일어난 강제적 성행위를 강간으로 인정하지 않는 법원의 태도 이면에는 ‘강제적 성관계와 합의에 의한 성관계를 구별하기 어렵다’는 전제가 놓여 있다. 강제력이 사용되었다는 증거가 불충분한 강간 사건들이 대부분 무죄선고를 받는 사실은, 역설적이게도 범죄가 아니라고 법이 용인하는 성행위에 실제로는 대단히 많은 강제력이 수반될 수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앞에서 보았던 서울고법 판결에서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강제적 성행위를 강요한 것은 폭행 후 일어났던 4박 5일간의 강간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피해자가 피고인과 ‘연애’를 시작하게 된 이유부터가 “피고인이 피해자를 강간하고 이로 인해 피해자가 임신되었기 때문”이었고, 그 후 피고인은 “피해자를 거의 매일 찾아와 피해자에게 ‘다른 놈을 만나면 몽키 스패너로 머리통을 날려보낸다, 너 결혼하면 그 날이 장례식이 되는 줄 알아라’ 등의 협박을 해, 피해자는 강간당한 사실이 알려지길 두려워하여 할 수 없이 피고인을 만났다. 그러나 피해자로서는 피고인을 결혼상대자로 생각하지 않았고, 2년 동안 한번도 피고인과 성관계를 맺은 일이 없고, 피고인을 만나고 있는 것을 어느 누구에게도 말한 일이 없었다.”
이처럼 근 2년 동안 피해자는 피고인과 만나온 관계를 연애관계로 생각하지 않았는데도, 법원은 “피고인과 결혼할 사이로서 약 2년 간 사귀어 온 피해자가 피고인의 친구와 결혼하기로 하였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 피해자에게 폭행을 행사하였다”라는 피고인의 주장을 피해자의 주장보다 더 신뢰해 강간혐의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렸다. 강제적 성행위를 연애관계에서의 합의된 성관계로 보는 법원의 태도는 비단 이 사례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이러한 형법의 태도는 형법이 보호법익으로 제시한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여성 스스로에게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서 권리의 주체는 여성이 아니라 그 여성과 관계 맺고 있는 남성이다. 이는 어떤 여성과 성관계를 맺은 경험이 있거나 성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있는 남성은 그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몸에 관한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법은 이를 보장하는 방식으로 해석되고 적용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합의된 성관계와 강제적 성관계의 구분은 ‘상대남성’이 결정짓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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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장임다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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