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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시 반응'

 
'동일시 반응'
문길상<수필가>
우리는 일상에서, 어느 특정한 말이나 사람 혹은 일에 대해서 현재의 사실과 관계없이 선입견 또는 편견을 가지고 단순반응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기업을 경영하는 K씨는 ‘노조’라고 하면 무조건 적개심부터 먼저 나타내고, 파업에는 전후사정을 묻지않고 소아병적으로 이해를 거부한다. 반면, 한 때 노조간부를 지낸 적이 있는 L씨의 기업인에 대한 태도는 처음부터 불신이다. 그는 어느 특정 기업인만이 아니라 사장이라는 칭호를 가진 사람은 물론 그의 가족 심지어 그 집의 개까지 미워한다.

'노조'라 하면 무조건 적개심

우리나라의 소위 ‘지역감정’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지역에 따라 서로의 애증(愛憎) 의식의 표출은, 구체적인 사실의 검증이 없는 언어상의 허구적인 동일시의 결과일 것이다. 또,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감정의 앙금은 그 뿌리가 깊다. 개인적으로 만난 일본인은 친절하고 정직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런 현재의 체험이 과거를 수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기존관념에 바탕을 둔 단순반응의 하나이다.

미국의 일반 의미론(General Semantics)의 창시자인 코르지브시키(Korgybski)는 이런 즉석의 단순반응을 동일시 반응(Identification Reaction)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런 고정적인 방식의 반응에 젖어있는 사람은 이름만 같으면, 아무리 경우가 달라도 그에 대해서 나타내는 반응이 같다는 것이다. ‘여자 운전사’에 대해 악의의 동일시 반응을 하는 사람은, 차를 운전하는 여성은 누구나 운전능력이 모자란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에 절대적인 동일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두사람의 같은 기업인이 없고 동일한 두사람의 일본인도 없다. 한 나무에서 자란 잎사귀도 모두 다르고, 한 공장에서 나온 현대차가 같은 것이 있던가. 그런데도 같은 이름이 붙었다고 해서, 구별할 필요가 있는데도 하나로 취급한다면, 분명 우리의 사고와 언어습관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동물세계에서는 이 동일시 반응이 생존차원에서 불가결의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송어는 물속에서 움직이는 갈색의 긴 벌레를 지렁이로 동일시해서 쫓아가서 잡아먹는다. 자연조건 하에서는 이 능력에 의해 송어의 생명이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나 가끔 물속의 지렁이에는 그 안에 낚시바늘이 들어있는 경우가 있다. 이 때는 생존에 유용한 동일시 반응이 생명을 빼앗아 가는 치명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사람에게도, 옛날 원시시대에 단순히 살아남기 위한 보호장치(protective mechanism)였던 동일시 반응이 그대로 내려오는 것이 있다. 친구 한사람은, 한번 뒷골목 어두운 곳에서 깡패를 만나 구타당하고 돈을 빼앗긴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는 어쩌다가 어두운 뒷골목에 들어서기만 하면 전신이 얼어붙는 공포에 사로잡혀 밝은 곳으로 뛰어나와야 진정이 된다고 한다. 머리로서는 위험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몸이 먼저 동일시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처럼, 일단 몸에 붙은 가치축이나 생리적인 행동양식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고 정신과 의사들이 말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러한 동일시 반응이 오늘날에도 우리의 일상언어 습관에 농도짙게 투영되어 있는 것을 본다. 예를 들어 사회적인 큰 사건이 일어났을 때, 우리의 접근방법을 보면 아직도 좋고 싫은 수준(like-dislike level)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명석한 객관성보다 어림짐작이 앞서고 근거가 희박한 소문에 부화뇌동하다 결국 ‘나쁜 놈’만 몇몇 찾아내고 종결짓고 만다. 일의 진실규명과는 거리가 먼, 관념적으로 단순반응을 일삼는 태도이다. 여기서 사실과 언어와의 엉뚱한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 언어의 혼란은 사고와 가치체계의 혼란을 초래하여 마침내 사회의 분열과 충돌로 이어지는 것이다.

객관성보다는 어림짐작 앞서

우리는 지금 말을 믿지 못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가치혼란이 위험수위에 와있다고 걱정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명석하지 않은 것은 프랑스어가 아니다’는 프랑스인의 자부심에 대해서, 언어학자 사르르 바이이는 말하고 있다. “프랑스어의 명석성은 그 구조가 특별히 명석하다기 보다 프랑스인들이 명석하게 표현하려고 깊은 주의를 기울인다는 사정에서 유래된다”고.

바이이의 이 지적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심성이 언어혼란을 가져오고 나아가 이번에는 언어혼란이 가치혼란을 일으킨다고 믿기 때문이다.

세계는 정보화로 개방되었는데, 세계 유수의 고학력 사회에 살고있는 우리들이 아직도 전근대적인 관행에 머물러 있어서야 되겠는가. 깊은 자기성찰이 요구된다고 생각한다. 교육과 노력은 우리를 보다 현명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written by (manma200)
2004-06-12 09: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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