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군학교 졸업후 계속 만주에서 장교로 군복무를 하였
고 장준하는 만주에서 사병으로 군복무하다가 탈출하여 수만리를 걸어서 임시정부로
들어가 광복군에서 독립군 신분으로 군복무를 계속 하였다. 수개월 동안 첩보원을 통
해 정보를 수집한 소련은 1945년8월10일 일본에게 선전포고와 동시에 일본 관동군을
급속히 와해시키면서 만주와 함흥으로 진격하였다. 일본은 8월15일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한 상태였지만 미국의 요청으로 일본 관동군은 8월30일까지 소련군과 전투를 치루
며 소련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상황이였고 이때 박정희는 중국인 복장을 하고 몽골 방
향의 산을 타고 우회하면서 상해로 탈출하여 국내로의 귀국을 모색하고 있었다. 상해
에는 임시정부의 광복군에 속해있던 장준하가 있었는데 임시정부의 명령으로 일본군에
군복무하고 있던 조선인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공작을 수행하고 있는 중이였다. 임시
정부의 광복군이라는 것이 말이 광복군이지 300명도 안되는 소수의 정예이였기 때문에
임시정부는 국내로 돌아가서 있을 정치투쟁에서 우위를 선점하기 위한 목적으로 광복
군의 숫자를 늘이는 정치적인 공작을 하고 있었던 것이엿다. 광복군으로 편입되어 국
내로 귀국하려는 조선인 징용병들을 장준하가 심사하였는데 여기서 장준하와 박정희의
첫대면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악연이 시작된 것이였다. 박정희를 심사하던 장준하는 그
의 행적에 분노하였고 어떻게 너같은 놈이 광복군에 들어올수 있는냐며 광복군 편입
명단에서 제외시켜 버렸다. 그후 광복군은 미군정의 명령으로 비무장인체로 미해군 함
정으로 귀국할 수 밖에 없었는데 함정을 타고 귀국하던 장준하는 어이없게도 박정희를
발견하였고 너같은 놈이 어떻게 광복군으로 함정을 타고 귀국할 수 있는냐며 쫒아가고
박정희는 줄행랑을 치면서 도망을 하였다. 이것이 장준하와 박정희의 두번째 만남이였
다. 도저히 박정희를 용서할 수 없었고 똑똑히 그를 기억하고 있었던 장준하는 1961년
5월16일 군사쿠테타의 주역이 바로 친일분자 박정희라는 것에 치를 떨며 그의 마지막
일생을 친일분자 박정희와 투쟁하며 의문사한다.
이것이 장준하와 박정희의 악연의 대략이다. 일본 육군학교를 졸업하면서 일본천황에
게 충성하겠다고 혈서를 쓴 박정희는 분명한 친일분자다. 이런 박정희를 보고 분노 안
하고 싶어도 안할 수가 없다. 초등학교때 매 맞으면서 국민교육헌장을 외워야 했고 외
국인이 오면 강제로 환영식에 끌려가고 그림 두 장을 놓고 유신을 찬성하면 높은 빌
딩에 행복한 가정이 그려진 그림처럼 살지만 반대하면 낭떨어지에 해골이 수북이 쌓인
그림처럼 살게 될 것이라고 교육을 강요 받은 나로서는 박정희에 대하여 더욱 분노를
안할 수가 없다. 민족주의적인 이념에서라도 친일분자 박정희는 용서할 수 없는 인물
이다. 하지만 내가 나이를 먹고 철이 들면서 이제는 장준하보다 군대를 끌고 나와 민
초들의 배고픔을 먼저 없애고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상황의 대한민국에서 기적과 같은
경제발전의 기초를 닦은 박정희에게 더욱 호감이 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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