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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의 모순과 오류 (도올 김용옥)

 

바이블의 모순과 오류

기독교인들은 Bible 전체가 모두 일치한다고 주장하는데 정경(正經)형성 당시 일치하지 않는 것은 아예 빼 버리는 등 이미 편집이 되어서 만들어진 것이니까 일치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Bible은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다고 믿는 순진한 신도들과 그렇게 믿어 의심치 말 것을 강요하고 진실을 애써 외면할 수밖에 없는 목회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모순과 오류 투성이'이며, 복음서의 종류에 따라 똑같은 사건의 기록도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숱하게 존재하고 있다. 수많은 복사본들이 혼합되어 있는 성경이 모순과 오류투성이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이러한 오류 중에서 사소한 것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이나 오류가 Bible에서 발생한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일점일획도 틀려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얼마나 틀리는 내용이 있는 것인지 우선 대표적인 것들만 살펴 보기로 하자.

▣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창조 이야기
구약성서중 맨 처음을 점하고 있는 기록이 창세기이다. 이 창세기의 기록과정을 살펴보자. 창세기중 1장 ~ 2장 3절까지의 기록은 이스라엘인들이 바빌로니아 포로가 된 후에 나타난 제사학파들에 의하여 쓰여진 제사적 사료층이라고 하며 2장 4절 ~ 3장 끝까지는 야훼이스트 사료층으로서 창세기 1~3장은 두개의 사료층이 혼합되어 구성되어 있다.

제사적 사료층(P문서)
야훼이스트 사료층(J문서)

합본된 귀절
창세기 1장 ∼ 2장 3절
창세기 2장 4절 ∼ 3장

쓰여진 시기
기원전 10세기 ∼ 9세기
기원전 9세기 ∼ 8세기

신의 호칭
엘로힘
여호와(=야훼)

창조 이전에 있었던 것
완전한 물 형체없는 땅 물이 되는 안개 완전한 땅

창조의 과정과 순서
1. 하늘, 땅, 빛 2. 물(바다/하늘) 3. 땅,바다,식물 4. 해,달,별 5. 새, 큰물고기, 물고기 6. 동물, 사람
1. 남자 2. 에덴동산 3. 나무(생명나무,선악나무) 4.강 5. 들짐승,새 6. 여자

표에서 보는 것과 같이 똑같은 창조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으면서도 두 가지의 사료층은 그 내용이 서로 판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두 사료층은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 것인지 판단하기에 실로 난해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두 가지의 사료층을 다 인정한다고 하면 태초의 천지창조는 엘로힘신이 먼저 시작하여 창조를 끝마친 다음에 야훼신이 다시 창조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엘로힘신이 우주를 창조한데 반하여 야훼신은 부분적인 창조활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왜 엘로힘신과 야훼신의 서로 다른 창조 이야기가 나오고 신의 이름도 틀리는 것일까?
▷ 창세기 1장 ∼ 2장 3절에는 "아침이 오고 저녁이 오니 첫째 날이었다."와 "아침과 저녁이 지나고 둘째 날이었다" 라는 구절이 있는데 신은 태양을 4일째에 비로소 만들었다고 하였는데 그 전에는 어떻게 밤이 오고 아침이 올 수 있었는가? 전지전능한 신의 기적으로 가능했다고 치자.
그러나 바이블은 문맥상으로도 분명히 모순이 일어난다. 첫날은 빛과 어둠을 만들었고 넷째 날에 광명을 만들어 낮과 밤을 나누었다고 한다 즉, 넷째 날이 되기 전에는 단지 주야는 없고 빛과 어둠의 구별뿐이었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첫째 날부터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표현을 계속 쓰고 있다.

▷ 새가 먼저일까? 사람이 먼저일까?
* 1장 - 하나님은 다섯째 날 날개 있는 모든 새를 만드시고, 여섯째날 사람을 만드셨다고 되어 있다.
* 창세기 2장 4절 - 땅에 초목도 나기 전에 인간을 만드시고 다음에 나무를 만드시고, 다음에 새를 만드셨다고 되어 있다.

▷ 동식물을 먼저 만들었나? 사람을 먼저 만들었나?
창세기 1장에서는 식물, 동물을 만든 후에 사람을 만들지만 2장에서는 남자를 만든 후에 식물, 동물을 만든 것으로 순서가 되어 있다.

▷ 남자를 먼저 만들었나? 남녀 한 쌍을 같이 만들었나?
창세기 1장에서는 남녀를 동시에 만든 후에 다른 것을 만들지만 2장에서는 남자를 만든 후에 식물, 동물 등등을 만들고 맨 나중에 여자를 만든 것으로 되어 있다.

☞ 창세기에는 아주 내용이 다른 두 가지의 창조담이 기록되어 있다. 첫 번째 창조담은 2장4절의 전반부에서 종결되며, 두 번째 창조담은 2장4절의 후반부에서부터 시작된다. 처음 것은 남녀평등사상이 그 바탕을 이루고 나중 것은 남존사상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

첫 번째 창조담에서는 인간의 창조는 천지창조의 최후에 행하여진 데 비해 두 번째 창조담에서는 신은 천지를 만든 후 동식물보다 먼저 인간을 만든 것으로 되어 있다. 첫 번째 창조담에서는 인간은 처음부터 남녀로 만들어진 데 비해 두 번째 창조담에서는 처음에는 남자만 만든 것으로 되어 있다. 창세기2장에는 신이 인간을 만든 후 코에 입김을 불어 넣었으므로 그 존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신에게서 받은 것이라 말하고 있지만, 창세기 3장에서는 인간은 신에 의해서 흙으로 만들어진 것이므로 괴로운 짧은 생을 마친 후 흙으로 되돌아간다고 되어 있을 뿐이다.
두 번째 창조담은 어림잡아 기원전 8세기 쯤에 성립된 것이지만, 소위 사제성전(司祭聖典)이라고 하는 첫 번째 창조담은 훨씬 뒤에, 그러니까 기원전 4세기쯤에 성립된 것이다.

1장과 2장의 창조된 순서도 다르지만, 창세기 1장의 이야기에서는 신이 창조할 때는 매우 조심스러운 계획을 가지고 만들었고 "보기에 좋았더라"라는 것을 강조하여 신이 만족한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창세기 2장의 이야기는 한번 만들어 놓은 것은 자꾸 고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예를 들어 아담을 만들어 놓았는데 아담이 쓸쓸해 보인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보기 좋고 맛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를 만들어 준다. 그래도 심심해하자, 이번엔 동물들을 만들어 주고, 그래도 쓸쓸해 하는 것 같자, 이번에 이브를 만들어 준다. 그리고 아담에게나 이브에게 생명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결국 먹고 마는 아담과 이브. 또한 1장과 2장의 창조의 방법도 다르다. (이것은 야훼계 전승이 신을 인격화 시켜서 해석하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은 .. 생겨라 하고 만든다. (예:빛이 있으라) 하지만 야훼계 전승은 신이 사람이나 동물들을 만들 때 진흙을 빚어서 만든다. 그리고 야훼계는 신이 에덴동산을 걷고 있었다고 말한다. 또한 선악의 열매를 따먹은 인간이 생명나무를 먹고 영생할까 걱정하는 매우 인간적인 모습까지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창세기 1장에서의 신의 모습은 추상적인 이미지가 매우 강하다.

이와 같이 바이블에는 여러 종류의 복사본들이 뒤섞여 있다. 그래서 서로 간에 모순이 발생하기도 하는 것이라고 신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다고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위와 같은 문제에 대해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으로서 믿어 의심치 말라" "성경을 읽을 때 긍정적으로 보아야지 부정적으로 보아선 안된다" 고 말한다. "성경은 믿지 않는 자는 제대로 그 뜻을 알 수 없다"라는 성경구절을 인용하며 사탄과 마귀의 시험에 넘어가지 말라고 경고할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원전 자체의 문제점을 모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릴 적에 읽은 「벌거숭이 임금님」이라는 동화(童話)에 나오는 사람들이 "정직한 사람의 눈에만 옷이 보인다"는 사기꾼의 농간에 속아넘어간 것처럼 사탄과 마귀의 시험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어떤 의심과 질문도 덮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가 번창하는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일단 다음의 도표를 보고 비교를 해 보자

 


벌거숭이임금님

성서 무오설

교황 무오설

주장

임금님은 선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투명한 옷을 입었다

성서는 신의 감동으로 쓰여진 책으로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다

교황이 교황으로서 공식적으로 신앙이나 도덕 또는 교리에 관하여 선포한 내용은 절대로 틀림이 없다

세뇌교육

( 편견, 선입견

주입 )

악한 사람에게는 옷이 보이지 않는다.

성서 무오설을 의심하거나 부정하는 자는 사탄에게 넘어간 자이다. 성경은 긍정적으로 보아야 하며 절대 의심해서는 안된다. 성서는 성령이 임해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책이며 아무나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다.

교황 무오설을 부정하는 자는 이단이다.

문 제

인지자

모든 사람의 눈에 옷이 보이지 않는다

신학자, 목사, 성서를 많이 읽고 공부한 사람들은 문제를 알고 있다.

성직자들은 알고 있다.

문 제

제 기

세뇌교육을 받지 않은 어린 아이는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임금님은 벌거벗었다고 얘기한다.

가끔 솔직히 말했다가 퇴출당하는 성직자들을 볼 수 있다.   아무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읽다 보면 틀리는 내용과 서로 모순되는 내용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유럽이나 미국의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성서에는 신화나 전설도 있고 또 오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일부 후진국과 우리 나라만 성직자들에게 속고 있다.

1998년 3월 1일자 <파수대>에 의하면 현 교황은 94회에 걸쳐서 천주교의 과거 잘못을 시인하거나 사죄를 구하였다고 한다. 조찬선씨가 쓴 <기독교 죄악사>를 보면 교황들의 추태를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최초의 성서 번역본에 쓰인 히브리어나 헬라어 등은 신의 언어가 아니다. 성서번역학자 나이다(Nida)의 말대로 얼마든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이 가능한 언어이다. 물론 여러 갈래로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단어가 많지만 그러한 여러 가지 해석의 가능성은 주석에 일일이 달아주어 밝혀주면 되는 것이다. 성서가 인간의 언어로 쓰여진 이상 고도의 비유나 상징을 제외한 대부분은 읽어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특히 한글개역판보다 공동번역판 성서가 더욱 그렇다. 신학자 나채운씨의 말에 의하면 우리 나라 교회에서 가장 많이 쓰고 있는 한글개역판 성서에는 문법이 틀리거나 말이 잘 통하지 않거나 부적당한 말이 많아 고쳐야 할 곳이 대략 10,000개 정도 된다고 한다. 따라서 필자가 인용한 성서의 구절은 '공동번역'을 많이 참조했으며 이해하기 쉬운 문장들은 '한글개역판'을 그대로 인용하기도 했다.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성서를 읽어 보면 좋은 점도 나쁜 점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틀리는 곳도, 서로 모순이 되는 곳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런 것이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을 의도적으로 감추거나 발뺌하거나 아예 문제 제기를 못하도록 세뇌교육을 하는 성직자들의 부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성서에 일반인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는 시도는 일찍부터 있었다. 중세기에는 일반인들의 성서 소유를 금지하였고 어려운 라틴어 성서를 영어, 독어 등의 쉬운 언어로 번역하는 것조차 금지했었다. 왜 그랬을까?

벌거숭이 임금님을 보았을 때 사람들이 "벌거숭이"라고 말할 수 없었던 것은 "벌거숭이"라고 말함으로써 그 자신이 악한 인간이 되고 만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성서에 읽고 뭔가 이해가 안되고 의심스러워도 그냥 뭔가 심오한 뜻이 담겨 있겠지 하고 그냥 지나치고, 또 서로 모순되는 구절들이 분명히 있어도 왜 그럴까 하며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말함으로써 그 자신이 "사탄에게 유혹을 받거나 넘어간 사람"으로 간주되고 만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이 얼마나 훌륭한 구조적 장치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장치구조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맴맴 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장치구조를 벗어나 성서를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이 있다. 지금부터 순수한 동심의 어린 아이가 벌거숭이 임금님을 보고 솔직하게 말했듯이 성서를 쓰여진 그대로 읽고 솔직하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장치구조 속에서 벗어나기 두려운 사람들은 이 책을 덮기를 바란다

▣ 카인의 아내와 카인을 죽이려는 사람들

    + 카인이 야훼께 하소연하였다. "‥‥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못하도록 하여 주마. 카인을 죽이는 사람에게는 내가 일곱 갑절로 벌을 내리리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야훼께서는 누가 카인을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그에게 표를 찍어주셨다.   카인은 하나님 앞에서 물러 나와 에덴 동쪽 놋이라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카인이 아내와 한 자리에 들었더니, 아내가 임신하여 애녹을 낳았다. [창세기 4:13~17]

    자 여기서 카인이 에덴에서 쫓겨나 다른 곳에서 살아야 하는데 다른 곳에서 카인을 죽일 만한 사람들과 '놋'이라는 곳에서 동침한 아내는 과연 누구일까? 이는 분명히 카인이 아벨을 죽이고 쫓겨날 당시에 다른 곳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신화학의 거성 죠셉 캡벨은 이러한 얘기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시한다.

    " 나바호족 인디언의 신화에도 보면 나바호족 인디언이 이 세상으로 나왔을 때 푸에블로 인디언은 이미 이 세상에 나와 있다. 이건 아담의 아들들이 이 땅에서 아내를 얻는 것과 비슷하다. 아담과 이브가 최초의 인류라면 이들의 두 아들이 장가가게 될 즈음에는 이 세상 인구는 넷밖에 안 돼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담의 며느리 될 인간이 어디에 있는가? 그러니까 여기에서 인간이 창조되는 것은 저쪽에서 인간이 창조되는 것과는 별개인 모양이다."

    결국 이 에덴동산 이야기는 중동의 코딱지만 한 땅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전세계에서 처음 유일하게 일어난 일로 묘사하고 있는 유대 민족의 신화인 것이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인간을 흙으로 창조하는 얘기나 에덴동산 이야기는 결코 유대인의 창작이 아니라는 점이다.   슈메르, 바빌론 신화를 모방한 것이다. 신학자들도 이 점에 대해서는 인정을 한다. 물론 필자처럼 '모방(模倣)'이라는 단어는 쓰지 않고 '에덴동산 이야기의 원형(原型)', '슈메르 신화의 전승(傳承)' 등의 보다 완곡한 표현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상술하기로 한다.

    그리고 사실 카인이 동생을 죽이게 된 근본 원인은 여호와 하나님의 편애때문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은 가인이 농사지어 바친 음식은 열납치 않으시고, 동생인 아벨이 바친 양고기만을 열납함으로써, 가인이 질투하여 아벨을 죽이게 된 것(창세기 4:8)이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의 편애가 살인을 초래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몰랐을까?

▣ 피는 피로써 갚아야

    + 사람은 하나님의 모습으로 만들어졌으니 남의 피를 흘리는 사람은 제 피도 흘리게 되리라.[창 9:6]

    카인과 라멕은 사람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 대가를 치르지 않는 걸까? 오히려 카인은 다른 사람이 해치지 못하도록 여호와신이 표를 주고 있고, 라멕도 777세까지 장수하고 있다.

▣ 노아의 홍수와 셈의 나이(Age)

    노아가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을 때의 나이는 오백세였다.( 창세기5장 32절)

    땅 위에 홍수가 난 것은 노아가 육백세(셈은 100살) 되던 해였다. (7장 5절, 11절도 동일)

    셈은 홍수가 끝난지 2년 뒤에, 그의 나이 백세가 되어 아르박삿을 낳았다. (11장 10절) .

    홍수기간이 1년이라면 홍수가 끝난 지 2년 뒤는 노아가 603살이 되는 때이므로 셈은 103살이 되어야 한다. 최소한 3년의 차이가 발생한다. 사실 다른 책이라면 이 정도는 애교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다고 우기는 Bible이라면 사정이 틀려진다.

▣ 노아의 홍수

    + 혈육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창 6:19]

    +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취하며[창 7:02]

    창세기 6장에서는 "한 쌍씩" 배에 실으라 하고 7장에서는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실으라 한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된 바 있지만 노아의 홍수도 두 가지의 이야기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이 더 있다. 자신이 만든 짐승인데 부정한 것은 무엇이며 정결한 것은 무엇인가? 처음부터 부정한 것은 만들지 말았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기는 사탄도 하나님이 만든 것이지만 사탄으로 인해서 생기는 어떤 인간들의 죄악도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하는 신이니까, 오직 그런 인간들을 몰살시키기만 하면 되니까 ‥‥‥

    그런데 또 한 가지 웃기는 것은 창세기 7장에서 당세에 완전한 자요, 의인이었던 '노아'는 하나님의 명("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어기고 모두 암수 둘씩 넣고 있다.

    +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더니[창 7:8~9]

    아마 성경 기자가 적는 과정에서 실수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책이 그런 실수를 해선 안되지 않을까?

▣ 다시는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창 8:21]

    다시는 사람으로 인해 땅을 저주하지 않고 노아의 홍수와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한다고 해 놓고서는 요한계시록 등에서 묘사되고 있는 그 무시무시한 종말 Project는 하나님이 세운 계획이 아닌가?  ( 기독교인들은 "물로 치지 않는다고 했을 뿐, 불로 치지 않는다고는 얘기하지 않았다. 최후의 심판은 불의 심판이다" 라고 얘기한다.  참으로 유치한 말장난이다.   마치 "'앞으로' 다시는 **하지마라"고 명하였더니 "예"라고 말하고 나서 '뒤로' **했다는 코미디처럼 하나님이 "다시는 전처럼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라고 말해놓고서 "전처럼 물로 멸하지 않는다고 했지, 불로 멸하지 않는다고는 안했지롱"하면서 유치한 말장난을 했다는 건가?   요한 계시록이 정경으로 채택되어 상당히 견고한 위치를 얻기까지는 200년 이상이나 싸움을 겪어야 했던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여기에 인간의 장난이 얼마나 개입되었는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언급이 되겠지만 여호와신의 언약은 대부분 헛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어려서부터 악하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공동번역판에는 "사람은 어려서부터 악한 마음을 품게 마련"이라고 되어 있는데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악하게 태어난다는 얘기인가? 아담의 원죄 때문이라면 노아의 홍수로 이미 끝난 일이 아닌가? 노아의 홍수로 다 쓸어 버리고 의인이라는 노아의 가족만 살려줘 놓고서는 한다는 말이 어려서부터 악하다? 그래서 노아의 홍수에서나 소돔과 고모라 심판에서처럼 죄도 짓지 않은 갓난 아이들까지도 가리지 않고 다 죽이는 것인가?

    어려서부터 악하다면 그것은 창조자의 책임이 아닌가? 전지전능한 신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단 말인가? 노아의 홍수로 그렇게 많은 사람과 동식물들을 몰살시킨 후에도 세상에 악이 넘치는 것을 보면 역시 해결할 능력이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으로 오는 종말심판 때에 정말로 많은 생명을 죽일 것이고 그 가운데서도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다 살려준다는데 이번에는 그 세상이 악으로 가득차지 않게 만들 자신이 있는 걸까? 완전한 의인 노아 가족 몇 명만 살리고도 실패했는데 수 십억의 기독교인들을 다 살려주고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그에게는 오직 결과에 대한 땜질 처방이 있을 뿐이다. 죄인들이 생기면 죽이고 또 생기면 또 죽이고 ‥‥ 그에겐 근본 처방이 없다. 아담과 이브가 죄를 저질렀다면 차라리 그들을 죽이고 새로 인간을 창조하는 것이 더 나은 처방이 아니었나? 그렇게 홍수를 일으켜 많은 사람을 죽여야 했나? 아무 죄 없는 다른 동식물까지 덤으로 얹어서‥‥ 단 두 명만 죽여서 새로 만들면 되었을 것을, 두 명을 살리는 바람에 수 십만, 수 백만의 생명을 빼앗는다? 우리 나라에는 이러한 어리석음을 풍자하는 좋은 속담이 있다.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다 태운다" 내지는  "호미로 막을 걸 서까래로 막는다"라고나 할까?

▣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

    ▷ 부자가 되기 위해서 인심이 후해야 할까 박해야 할까?

    + 인심이 후하면 더욱 부자가 되지만 인색하게 굴면 오히려 궁해진다.[잠언11:24]

    + 어려운 사람을 학대하면 그가 부자가 되고 부자에게 자꾸 갖다 주면 그가 가난해진다.[잠언22:16]

    ▷ 부지런하면 부자가 될 수 있을까? 아니면 애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정해진 것일까? 즉 야훼로부터 복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 게으른 사람은 떡그릇 옆에서 굶어 죽지만 부지런한 사람은 부자 되게 마련이다. [잠언11:16]

    + 야훼께 복을 받아야 부자가 된다. 애쓴다고 될 일이 아니다.[잠언10:22]

    + 늘 상종하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 이들은 모두 야훼께서 지으셨다.[잠언22:2]

▣ 예수는 하나님의 독생자인가?

    +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의 유명한 사람이었더라.[창세기 6:2∼4]

    +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욥기 1:6]

    + 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와서 여호와 앞에 서니[욥기 2:1]

    + 그 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욥기 38:7]

    +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갈라디아서 3:26]

    +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로마서 8:14]

    +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로마 8:19]

    +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태 5:9]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이 많이 나타나는 걸로 보아 예수만이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것은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이 표현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러한 구절들은 사실 예수의 "내가 너희를 신이라고 하지 않았더냐?"[요한 10:30∼36]라는 말씀을 잘 이해해야 풀릴 수 있는 문제이다. 신의 아들은 역시 신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을 모두 신이라고 말했던 예수의 선언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만이 하나님의 독생자이라고 믿는 기독교 교리에서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구절들은 분명 모순인 것이다. 예수가 인간을 신이라고 한,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상술하겠다.

▣ 여호와라는 이름을 최초로 밝힌 것은?

    여호와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분명히 밝힌다. [창세기 15;6~8] [창세기26~27] [창세기 28;13] .... (이브가).. 가인을 임신하고 여호와로부터 자식을 얻었노라 하더라 [창세기 4:1] 등등....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두 여호와의 이름을 알고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호와신이 모세에게 나타나 말할 때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는 자신의 이름을 알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출애굽기6;2~3]

    기독교인들이 Bible의 오류가 아니라고 우긴다면 하나님이 거짓말을 한 결과가 된다. 학자들은 J문서에서는 여호와라는 이름이 처음부터 사용되고 있으며 E문서에서는 모세에게 여호와라는 이름을 계시하기 전까지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모세5경은 모세 한 사람의 작품이 아니라 여러 문서들(J, E, D, H, P문서)의 혼합이며, P문서를 골격으로 다른 부분들이 거기에 맞추어졌다고 보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모순에 대해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 머문 기간

    +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똑똑히 알아두어라. 네 자손이 남의 나라에 가서 그들의 종이 되어 얹혀 살며 사백 년 동안 압제를 받을 것이다.[창 15:13]

    +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에 머무른 것은 사백 삼십 년 동안이었다.[출12:40]

    삼십 년의 차이가 나는데 하나님은 언약을 정확하게 안 지킨 것일까? 아니면 Bible에 잘못 기록된 것일까?

▣ 원수를 갚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

    + 동족에게 앙심을 품어 원수를 갚지 말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아껴라. 나는 야훼이다. [레위기19;18]

    언뜻 보면 자비로운 하나님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는 곧 실체를 드러내고 만다.

    + 너희에게 복수의 칼을 보내어 계약을 어긴 것을 보복하리라. [레위기26;25]

    + 이스라엘의 강하신 이, 주 만군의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아! 내가 원수들을 속시원히 물리치고, 적에게 보복하리라." [이사야 1:24]

    +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더운 것은 더움으로 상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 찌니라 [출 21;23~25]

    자신의 백성들에게는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해놓고선 여호와 자신은 원수를 갚는다? 자신의 했던 말도 기억 못하면서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고 우길 건가?

▣ 모세의 장인은 누구일까? 겐사람일까?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일까?

    + 모세의 장인은 겐사람이라 그 자손이 유다자손과 함께 종려나무 성읍에서올라가서 아랏남방의 유다 황무지에 이르러 그 백성중에 거하니라[사사기1;16]

    + 모세의 장인 호셉의 자손중 겐 사람 헤벨이....[사사기4;11]

    +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출 3;01]

    ▣ 여호와신의 약속

      + 아비는 그 자식들을 인하여 죽임을 당치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비를 인하여 죽임을 당치 않을 것이라 각 사람은 자기 죄에 죽임을 당할 것이리라.[신명기 24;16]

      그러나 사무엘하12장 15절에는 우리아의 처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신이 쳐서 심히 앓게 하고 결국에는 다윗이 행한 악함에 화가 난 여호와신은 그 아이를 죽이는 벌(12;18)을 다윗에게 보낸다. 자식들은 그 아비를 인하여 죽임을 당치 않을 것이라고 해 놓고선 다윗 대신 그 아들을 죽인다. 자기가 한 말을 쉽게 뒤집어 엎는다. 여호와신에게 있어 약속은 헛된 것이다.

    ▣ 불륜과 벌

      + 나 야훼가 너희 하느님이다. 너희는 내가 정해 주는 규정을 지켜 그대로 해야 한다. ‥‥ 이웃집 아내와 간통한 사람이 있으면, 그 간통한 남자와 여자는 반드시 함께 사형을 당해야 한다. 누가 자기 아비의 부인과 한 자리에 들고 그 부끄러운 곳을 벗겼으면, 그 두 사람은 반드시 사형을 당해야 한다. 그들은 피를 흘리고 죽어야 마땅하다. 자기 며느리와 한 자리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그 두 사람은 반드시 사형을 당해야 한다. 그들은 추잡한 짓을 했으니 제 피를 흘리고 죽어야 마땅하다. ‥‥ 제 아비의 딸이든지, 어미의 딸이든지, 제 누이를 데리고 살면서 누이의 부끄러운 곳을 벗기고 여자는 오라비의 부끄러운 곳을 벗겼으면 그들은 겨레가 보는 앞에서 없애야 한다. 이것은 파렴치한 짓이다. 제 누이의 부끄러운 곳을 벗겼으므로 죄벌을 면할 길이 없다. ‥‥ 네 이모의 부끄러운 곳이나, 네 고모의 부끄러운 곳을 벗기면 안된다. 제 핏줄의 몸을 벗긴 것이므로 죄벌을 면할 길이 없다. 숙모와 한 자리에 든 사람은 삼촌의 부끄러운 곳을 벗긴 것이므로 그들은 죄벌을 받아 후손을 보지 못하고 죽어야 한다. [레위기 20:7~20]

      모세는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들으며 얼마나 뜨끔했을까? 그의 부모가 처형당했더라면 그는 못 태어날 뻔하지 않았는가?

      모세의 어머니와 고모할머니가 동일 인물이기 때문이다. 근친상간의 결과물인 것이다.

      그런데 왜 모세의 부모는 물론이고 롯과 두 딸(근친상간), 아브라함과 이복동생겸 아내인 사라(근친상간+외간 남자와 간통), 이삭(사촌동생과 관계), 유다와 다말(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근친상간), 다윗과 밧세바(유부남과 유부녀의 간통) 등은 죽이지 않았을까? 하긴 이 중에 아브라함, 이삭, 유다, 다윗은 예수의 직계조상들이니 이들을 죽였다간 예수가 탄생할 수가 없는 것인가?

      아직 모세가 율법을 받기 전이라서 용납이 될 수 있다고 우긴다고 하더라도 여호와의 말이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기 위해서는 최소한 다윗과 밧세바는 살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솔로몬도 못 태어나고 예수도 못 태어나는데 ‥‥‥. 아니다. 예수는 어차피 아버지 요셉의 피는 단 한 방울도 이어받지 않고 태어나지 않았는가?

    ▣ 예수의 탄생

      +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의 천사가 일러 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 들였다. 그러나 아들을 낳을 때까지 동침하지 않고 지내다가 마리아가 아들을 낳자 그 아기를 예수라고 불렀다.[마태2:1~25]

      + 1 그 무렵에 로마 황제 아우구스토가 온 천하에 호구 조사령을 내렸다. 2 이 첫번째 호구 조사를 하던 때 시리아에는 퀴리노라는 사람이 총독으로 있었다. 3그래서 사람들은 등록을 하러 저마다 본고장을 찾아 길을 떠나게되었다. 4요셉도 갈릴래아 지방의 나자렛 동네를 떠나 유다 지방에 있는 베들레헴이라는 곳으로 갔다. 베들레헴은 다윗왕이 난 고을이며 요셉은 다윗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5요셉은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등록하러 갔는데 그 때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6그들이 베들레헴에 가 머물러 있는 동안 마리아는 달이 차서 7드디어 첫아들을 낳았다. [누가 2:1~7]

      ▷ 탄생 장소의 불일치 : 갈릴리(요한)일까? 베들레헴(마태,누가)일까?

      + "저분은 그리스도이시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갈릴레아(갈릴리)에서 나올 리가 있겠는가? 성서에도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으로 다윗이 살던 동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고 말했다.[요한7:41~42]

      위 이야기는 예수가 그리스도냐 아니냐의 문제로 군중들 사이에 분분한 가운데 예수가 그리스도라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어야 하는데 어떻게 갈릴리에서 태어났느냐고 따지는 장면이다. 여기에 대해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반박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그리고 그 뒤 50~52절에는 니고데모가 예수를 감싸는 발언을 하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당신도 갈릴레아 사람이란 말이오? 성서를 샅샅이 뒤져 보시오. 갈릴레아에서 예언자가 나온다는 말은 없소" 하고 핀잔을 주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를 통해 볼 때, 그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지 않고 갈릴리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요한복음이 사실이라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예수를 다윗의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날조를 한 것일 것이다.   어느 한 쪽도 날조가 아니라면 이 모순을 해결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 탄생시기의 불일치

      * "헤롯"왕 통치시. ("헤롯"은 BC 4 년에 죽음) [마태 2:1]

      * 로마 황제 아우구스토가 온 천하에 호구 조사령을 내린 시기(AD 6 년 경) [누가 2:1~7]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예수의 탄생 시기에 있어서 최소한 10년 이상의 차이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누가복음 2장2절의 말씀처럼 헤롯의 치세기간 동안에 퀴리니우스(구레뇨)는 시리아의 총독이 된 적이 없다. 이 시기의 로마사는 매우 정확하게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발뺌을 할래야 할 수가 없다. 따라서 누가의 기록은 엉터리이거나 날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기록자는 유태민족의 영웅인 다윗왕이 태어난 곳이 베들레헴이므로 예수가 유태민족의 영웅인 다윗왕의 적통의 자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갈릴리의 나자렛에서 태어난 예수를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출생지를 날조하여 기록한 것이다. 그러다가 그만 예수의 탄생시기를 서로 틀리게 기록하는 실수를 범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 탄생시의 마리아와 요셉의 관계에 대해서도 서로 틀리는 기록을 하고 있다.

      * 마태복음 - 마리아가 요셉과 결혼 후 예수를 낳았다.[1:24~25]

      * 누가복음 - 약혼한 상태에서 낳았다.[2:5]

    ▣ 예수의 할아버지는 누구? 야곱(마태 1:16) , 헬리(누가 3:23)

        예수는 아브라함으로부터 몇 대째일까? 42대(마태 1:17) , 56대(누가 3:23-38)

       



      마태복음 1장

      누가복음 3장

      아브라함 ∼ 다윗

      14대

      다윗 ∼ 여고냐

      1.솔로몬 2.르호보암 3.아비아

      4.아사 5.여호삿바 6.요람

      7.웃시아 8.요담 9.아하스

      10.히스기아 11.므낫세 12.아론 13.요시아 14.여고냐

      1.나담 2.맛다다 3.맨나 4.멜레아

      5.엘리아김 6.요남 7.요셉 8.요다

      9.시므온 10.레위 11.맛닷 12.요림

      13.엘리레서 14.예수 15.에르 16.엘바담 17.고삼 18.맛디 19.넬리 20.네리

      여고냐 ∼ 예수

      1.스알디엘 2.스룹바벨 3.아비훗 4.엘리아김 5.아소르 6.사독

      7.아김 8.앨리웃 9.엘르아살

      10.맛단 11.야곱 12.요셉 13.예수

      1.스알디엘 2.스룹바벨 3.레사

      4.요아난 5.요다 6.요섹 7.서머인

      8.맛다디아 9.마앗 10.낙개 11.에슬리

      12.나훔 13.아모스 14.맛다디아 15.요셉 16.안나 17.멜기 18.레위 19.맛닷

      20.헬리 21.요셉 22.예수

      마태복음1장 17절에 의하면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라고 하여 도합 42대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정작 마태복음 1장 1~16절까지 열거한 족보를 보면 상기 도표와 같이 아브라함에서 예수까지 41대밖에 없다. 여기에 관련된 마지막 구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야곱(39대)은 요셉(40대)을 낳았고 마리아에게서 예수(41대)가 태어나셨느니라. [마태 1: 16]

      이 구절 중 마리아(예수의 모친)를 예수의 조상으로 더 친다면 예수는 정확하게 아브라함으로부터 42대째가 되는 셈인데 세상에 이렇게 치는 족보는 없는 것이니 이 차이를 과연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마태복음에서는 실수로 한 세대를 빠뜨렸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더욱 심각한 오류는 누가복음에서는 아브라함에서 예수까지 56대로 마태복음과는 전혀 다르다. 아버지인 '요셉'만 같고 다른 조상들은 서로 틀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오류를 절대로 인정할 사람들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는 요셉의 족보요 하나는 마리아의 족보라고 궁색한 변명을 하기도 한다. 본서에서 계속 언급되고 있는 유대민족의 멘탈리티를 안다면 그들에게 있어서 여자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였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두 복음서는 서로 틀리는 족보인 것이다. 족보상의 이름을 보면 마태복음은 중복이 없는데 누가복음은 다윗시대의 14대에 "예수"라는 이름이 나오고 여고냐시대에는 맛다디아가 8대와 14대에 중복되고 요셉이 15대와 21대에 중복되어 있음을 볼 때 마태복음의 내용이 누가복음보다는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이나 마태복음 역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 세대의 족보명을 누락하고 있다.

      예수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라는 것을 유대인에게 증명하고 싶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그 족보를 써놓은 것까지는 좋은데 족보의 내용도 서로 틀리고, 마리아는 요셉과 결혼도 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하였다고 했으므로 예수의 몸에는 요셉의 피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는데 예수를 진정 다윗의 후손이라 할 수 있는가?

    ▣ 예수와 두 명의 강도

      예수는 두 명의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렸다. 여기서 누가복음에는 두 강도 중 한 강도는 회개해 구원받았다고 되어 있고 마태복음(27:44)과 마가복음(15:32)에는 두 강도 모두 다 예수를 모욕했다고 되어 있다.

      ▣ 율법은 폐할 수 있는 것인가?

        + 여호와가 너희를 위하여 기록한 율례와 법도와 율법과 계명을 너희가 지켜 영원히 행하고[열왕하17:37]

        +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시편 19:7~9]

        자, 그럼 완전한 여호와의 율법, 영원히 행해야 할 율법이 과연 어떠한가를 한 번 살펴보자.

        * 소나 양, 염소의 비계를 먹어서는 안되고 토끼고기, 돼지고기도 먹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모든 짐승과 새의 피도 먹어선 안된다.[레위 7장,11장]

        * 남자아기는 생후 8일 후에 할례(포경수술)를 해야만 한다.[레위12:3]

        *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면 7일 동안, 딸을 낳으면 14일 동안 월경할 때와 같이 부정하다. 그러니 거룩한 물건을 만져도 안 되고 성소에 들어가지도 못한다.[레12:2~5] 여자는 남자를 가르쳐서는 안되고 [디모데전2:12], 금이나 진주를 착용해서도 안되고[디모데전2:9] 부인은 남편의 말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에베소5:22]

        * 동물이나 작물의 잡종을 금함[레 19:19]

        그러나 이 잡종때문에 지금까지 인류가 굶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게 아닌가?

        + 종류가 다른 실로 짠 옷도 입지 마라.[레19:19]

        그대가 입고 있는 옷은 혹시 두 종류의 재료로 되어있지는 않은가?

        *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방탕하고 술만 마시는 아들은 돌로 쳐 죽여라. [신명기 21:20] 요즘 같으면 돌에 맞아 죽을 자식들이 참으로 많을 것이다.

        * 전쟁시에 항복한 도시의 시민들은 노예로 만든다.[신명기20:11]

        * 만약 어떤 남자가 한 여자와 결혼했는데 그 여자가 처녀가 아니라면 그녀는 돌로 쳐 죽여야 한다[신명기 22:21]

        * 약혼도 안한 처녀와 같이 잔 총각은 그녀와 결혼해야 한다.[신명기 22:28]

        * 남종이나 여종을 두려면 다른 민족에게서 구해야 하고 이 종들을 자손에게 대대로 물려주어 언제까지나 소유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끼리는 아무도 심하게 부릴 수 없다[레위25:44~46]

        +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형제들에게 천대받는 종이 되어라[창세9:25]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이러한 구절들은 이외에 신약에도 많이 있다. [디도2:9, 에베6:5, 골3:22, 디모데전 6:1, 베드로전 2:18]

        + 자기 남종이나 여종을 때려 당장 숨지게 한 자는 반드시 벌을 받아야한다. 다만 그 종이 하루나 이틀만 더 살아있으면 벌을 면한다. 종은 주인의 재산이기 때문이다.[출애굽;21:20蝡21]

        노예는 사람이 아니라 재산이라는 것이다

        + 불알이 터진 사람이나 자지가 잘린 사람은 야훼의 대회에 참석하지 못한다. 사생아는 야훼의 대회에 참석하지 못한다. 그 후손은 십 대에 이르기까지도 야훼의 대회에 참석하지 못한다.[신명기 23:2~3]

        성 불구자나 사생아와 고아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은 교회에 갈 수 없는 것일까?

        +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니라 [신명기 22:5]

        여자들은 바지를 입어서는 안될 것이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다고 한다. 영원히 지켜 행하라고 한다. 그런데 예수는 율법을 완전하게 하겠다라고도 하고 폐하겠다라고도 한다. 예수가 하나님이라면 그 자신이 완전하다고 말해놓고선 다시 율법을 완전하게 하겠다는 것은 자신의 말을 자신이 부정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 예수는 율법을 폐지하였는가? 아니면 작은 것 하나라도 지키라고 했는가?

        ▷ 율법은 폐지되었다

        + 또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달갑지 않은 조항이 들어 있는 우리의 빚문서를 무효화하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아 없애 버리셨습니다. ‥‥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고 마시는 문제나 명절 지키는 일이나 초생달 축제와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로 아무에게도 비난을 사지 마십시오.[골로 2:14~16]

        + 성서에 "율법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꾸준히 지키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율법을 지키는 것에 의존하는 사람은 언제나 저주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율법을 통해서는 아무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갈라 3:10~11]

        +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로마 6:14]

        +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에베2:15]

        +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로마 10:4]

        + 전에 있던 율법의 규정은 무력하고 무익했기 때문에 폐기되었습니다. 율법은 아무 것도 완전하게 하지 못했습니다.[히브 7:18~19]

        ▷ 율법은 일 점 일 획도 없어지지 않는다. 율법을 지켜야 한다.

        +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로마 3:31]

        +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분명히 말해 두는데,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 점 일 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작은 계명 중에 하나라도 스스로 어기거나, 어기도록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마태 5:17~19]

        + 하늘과 땅은 사라져도 율법은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누가 16: 17]

        + 누구든지 계명을 다 지키다가도 한 조목을 어기면 계명 전체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야고 2:10]

        + 너희에게 율법을 제정해 준 이는 모세가 아니냐? 그런데도 너희 가운데 그 법을 지키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도대체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요한 7:19]

        율법을 지켜야 할까? 안 지켜도 되는 것일까? 지킬 필요가 없다는 쪽은 앞의 말씀들만을 인용하고 지켜야 된다는 쪽은 뒤의 말씀들만 인용한다. 자신들의 교리에 유리한 말씀들만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공관 복음서에서 - 바리사이파와의 논쟁에도 불구하고 - 대체로 유대주의의 모든 교의를 고수하는 독실한 유대인으로 그려지고 있다. 또한 율법을 반대하는 발언은 주로 바울이 하고 있고 예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은 "율법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을 비롯하여 주로 지키라는 쪽의 말씀이 많으니 지키는 것이 옳을 것같은데 ‥‥‥.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십계명에 해당하는 안식일(토요일), 여호와신이 영원히 지키라고 하고, 안 지킨 사람을 죽이라고까지 명령한 안식일은 안 지키면서, 십계명에도 들지 않는 "십일조"는 안 지켰다간 교회에서 고개를 들기도 힘들다. 성경말씀보다도 교회가 우선인 것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안식일이 토요일이라는 사실과 천주교가 이를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변경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안식일"에 대한 내용은 뒤에서 다시 상세하게 다룰 것이다.)

      ▣ 이혼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

        모세의 말씀

        + 누가 아내를 맞아 부부가 되었다가 그 아내에게 무엇인가 수치스런 일이 있어 남편의 눈밖에 나면 이혼 증서를 써 주고 그 여자를 집에서 내보낼 수 있지만 ‥‥‥ [신명 24:1]

        예수의 말씀

        +누구든지 음행한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면, 이것은 그 여자를 간음하게 하는 것이다. 또 그 버림받은 여자와 결혼하면 그것도 간음하는 것이다 [마태 5:32]

        바울의 말씀

        +이것은 주님의 말씀은 아니고 내가하는 말입니다. 어떤 교우에게 교인이 아닌 아내가 있는데 그 아내가 계속해서 함께 살기를 원하면 그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또 어떤 여자 교우에게 교인이 아닌 남편이 있는데 그가 계속해서함께 살기를 원하면 역시 그 남편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믿지 않는 남편은 믿는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또 믿지 않는 아내도 믿는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자녀도 깨끗하지 못했을 터인데, 실상은 다 거룩하지 않습니까? 만일 믿지 않는 쪽에서 헤어지려고 한다면 헤어져도 좋습니다. 이런 경우에 남녀 교우들은 아무런 속박도 받지 않습니다. [고린전 7:12~15]

        이 구절들은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있다. 모세의 구약은 예수의 말씀으로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는 것이고 또 바울은 순전히 자기 생각이라고 하면서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서는 일점일획도 신의 감동이 아닌 것이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이 말씀들을 자기에게 유리한 구절만을 이용하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기독교 신자들은 이 세 가지의 말 모두가 성경에 나와 있는 말이니, 아무 말이든 자기에게 유리한 것을 아내에게 들려주면 될 것이다."[ 하원 <한쪽 뺨맞고 성질내신 예수님>중에서]라는 하원씨의 뼈있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기독교인들은 성서에서 구약, 신약 가리지 않고 자신들의 교리를 옹호하는 데 유리한 구절들만 인용해서 쓰는데 참으로 웃기는 것은, 그렇게 인용한 성서의 구절들과 정반대되는 구절들을 가지고 다른 교리를 주장하는, 다른 교파의 기독교인들을 아주 쉽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성서의 포용력은 정말 대단하다. 서로 모순되는 내용을 모두 품고 있으니까 이 주장도 맞고 저 주장도 맞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 주장도 틀리고 저 주장도 틀리다는 사실을 아는가?

      ▣ 예수가 십자가형을 받은 날 : 유월절 전날[요한], 유월절 다음날 [마태, 누가, 마가]

      ▣ 유다의 죽음 :

        * 자기가 저지른 일을 뉘우치고 은30냥을 성전에 내동댕이치고 목매달아 죽었다. 그러자 사제들은 ...그 돈으로 옹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사용하기로 했다... [마태 27:3-8]

        * 유다가 예수를 판 돈으로 밭을 샀는데, 그후 땅에 거꾸러져서 배가 갈라져 내장이 온통 터져 나왔다... [사도 1:18]

      ▣ 12사도 파견에 관한 기록

        +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마시오 [마태 10:9-10]

        +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마가 6:8]

      ▣ 주기도문(예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의 불일치

        +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태 6:9]   --> 주 기도문 말미의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부분 (Doxology) (마태 6:13)은 후대의 interpolation(가필)이라는 것은 신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다.([2부] 참조)

        +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누가 11:1]

        우리나라 신학자가 주기도문에서 문법이 틀리거나 뜻이 이상한 것을 모아 책으로 펴낸 것이 있다. [ 나채운 <한국교회, 주기도문, 사도신경, 축도 문제 있다> ]

        그 중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본다.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그 신학자가 교회 다니는 학생들에게 물어 보았더니, 대부분의 학생들이 '나라에 임하옵시며'라는 뜻으로 알고 있었다 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나라에 임하라'라는 뜻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 나라가 임하라'라는 뜻, 곧 하늘나라가 오라는 뜻이다. 따라서 '나라이'가 아닌 '나라가'로 번역을 해야 옳은 것이다. 이것은 마치 세 살 먹은 어린애가 '아버지가 오셨다'를 아버지이 오셨다'라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구절에서 '오늘날'은 '오늘'을 잘못 번역한 것으로서, 그리스 원문 성경이나 지금의 영어, 독어 등 다른 성경에서는 모두 '오늘'로 되어 있으며, '주옵시고'라는 말은, 우리말에 '주시옵소서'라는 말은 있지만 '주옵시소서'라는 말은 없듯이 문법상으로 틀린 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위의 구절을 바로 잡으면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해야 되는 것이다.

        참 웃기는 일이다.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몇 줄 되지도 않는 주기도문조차 이렇게 번역해 놓고 있으며, 예수가 기도문이라고 가르쳐준 것조차 복음서끼리 서로 틀리니 말이다. 그리고 일반신자들은 그 뜻조차 모르고 외우고 있으니 더욱 가관이다.

      ▣ 예수의 무덤을 찾아간 여인은 몇 명? 3명(마르코 16:1), 2명(마태 27:1-3), 1명(요한 20:1)

      여인들이 예수의 무덤에서 본 사람은 몇 명? 1명(마태, 마가) 2명(누가, 요한)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예수의 무덤을

      찾은 여인들

      막달라 마리아

      다른 마리아

      막달라마리아,

      살로메,

      야고보의 마리아

      여자들

      막달라 마리아

      여인들이 예수의

      무덤에서 본 사람

      주의 천사1명

      흰 옷 입은

      청년 1명

      빛나는 옷을

      입은 두사람

      흰옷 입은

      두 천사

      예수의 무덤에서 일어난 일들을 각 복음서별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마태: 두 마리아가 무덤에 가봄 / 지진 나며 동굴 문 열림 / 천사강림 / 문지기 무서워 떨음 / 천사가 말함 / 예수와 상면함 / 발 붙잡고 경배함 / 갈릴리로 가라하심

        마가: 두 마리아와 살로메가 가서 봄 / 무덤에 들어감 / 흰옷의 청년 서있음 / 이 청년이 갈릴리로 가라 지시함 / 이 청년이 제자에게 전하라 지시함

        누가: 여자들이 가봄 / 무덤 안에 들어감 / 찬란한 옷의 두 사람 있음 / 베드로도 달려가서 조사함 / 베드로는 세마포만 발견함

        요한: 막달라 마리아 혼자서 가봄 / 빈 무덤 발견함 / 베드로와 한 제자 달려감 / 세마포와 머리수건만 목도함 / 베드로와 한 제자 집으로 돌아감 / 마리아 울고 서있음 / 흰옷의 두 천사 나타남/ 예수 나타나 서 계심 / 나를 만지지 말라 명하심

        여기서 막달라 마리아는 세 복음서에서 공통되게 나타나고 따라서 이 복음서들이 서로 틀리지 않다고 주장하려면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 최소한 세 번은 가 보았어야 하고, 매번 다른 사람과 매번 다른 사건을 경험해야 할 것인데 막달라 마리아가 여러 번 무덤에 간 것일까요? 아니면 몇 개의 복음서 내용이 잘못된 기록일까요?

        또 마태복음에는 예수가 부활하여 제자들을 제일 먼저 만났던 곳은 갈릴리에 있는 산이라고 하고, 누가복음에는 예루살렘에서 만났다고 되어 있고, 부활 후 나타내 몸을 보이신 횟수, 보인 무리, 장소, 승천하기까지의 시간 등등에서 4 복음서는 모두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

      ▣ 복음 전파

        ▷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전파하라

        + 열 두 사람을 파견하시면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방인들이 사는 곳으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에도 들어가지 말라. 다만 이스라엘 백성 중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마태 10:5-6]

        +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입니다[마태 1:20-21]

        + (또 한 번은 이방인 여자가 자기 딸이 마귀가 들려 몹시 시달리고 있으니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하자 예수 왈 )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그래도 그 여자가 무릎을 꿇고 엎드려 도와 달라고 애원하자 예수 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태15:21-28]

        ▷ 천하 만민에게 전파하라

        +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마가16:15]

        마가 복음서 16:9~20까지의 내용은 후대에 가필된 것이다(2부 '복음서 변조'편 참조). 가필로 인해 성서의 구절들이 서로 모순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자녀(이스라엘 백성)에게 먹일 빵을 개(이방인)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다"는 비유의 말씀은 성인의 품격에 어울리는 말은 아니다. 물론 사마리아 여인의 믿음을 테스트했다는 식으로 기독교인들은 변명하겠지만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얻어 ꃨ는다"는 비굴한 믿음을 강요해야만 했었는가?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닌 다른 이방민족으로서 구원을 얻는 자는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얻어먹는 떨거지들이란 말인가? 그리고 사실 테스트라고 보기도 힘들다. 왜냐하면 예수는 분명 "이방인들이 사는 곳으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에도 들어가지 말라. 다만 이스라엘 백성 중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예수는 물론 이방인에 대한 차별은 하지 않은 것 같다(예수가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견해도 있음). 그러나 그 이방인들을 적극적으로 구원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예수는 유대인에게만 전도하려 했으며, 그러한 이유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게 전도한 건 예수의 12제자가 아니라 예수가 살았을 때는 한 번도 예수를 만난 적이 없는 바울인 것이다.

      ▣ 예수는 평화적 메시아일까? 전투적 메시아일까?

        복음서의 어느 구절에서는 예수가 아주 평화로운 메시아로 표현되나, 또 다른 구절에서는 전혀 모순되는 진술을 한다. 복음서의 모순성은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비교해 보면 분명히 드러난다. 예수의 진면목은 어느 쪽일까? 문화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그의 저서 <문화의 수수께끼>에서 여러 가지 근거를 제시하며 전투적 메시아가 예수의 본래의 모습이라고 주장한다. (전투적 메시아의 근거에 대해 궁금한 분들은 [ 마빈해리스著 박종렬譯<문화의 수수께끼> 한길사 ]를 참조하기 바란다.)

         

        평화적 메시아

        전투적 메시아

        +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마5:9]

        +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쪽뺨을 돌려 대라[마5:39]

        + 검을 가진 자는 검으로 망하리라.[마26:52]

        + 네 원수를 사랑하며 너를 미워하는 자를 선하게 대하라[눅6:27]

        +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오 검을 주러 왔다.[마 10:34]

        +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 아느냐? 아니다, 도리어 분쟁케 하러 왔노라[눅12:51]

        + 검이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검을 살지니라.[눅22:36]

        + 노끈 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 환전상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 [요2:15]

      ▣ 기타

        ▷ 브엘세바가 어떻게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이야기가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사이에 맺은 계약에서, 또하나는 이삭과 아비멜렉 사이에 일어난 사건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창세 21:31 / 26:33].

        ▷ 벧엘이란 이름의 기원도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가는 길에 환상을 보는 이야기에, 또 하나는 야곱이 몇 해 후에 밧단아람에서 돌아올 때의 사건에 나타난다[창세 28:19 / 35:15].

        ▷ 하갈이 추방되는 이야기도 둘이 있는데, 하나는 그녀가 이스마엘을 낳기 전에 추방되는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이스마엘이 커서 소년이 되었을 때에 추방되는 이야기이다[창세 16:6이하 / 21:9이하]

      이외에도 모순되는 곳은 많다. 필자가 6부에서 기독교의 현행 교리를 비판하기 위해 성서에서 인용한 구절들은, 현행 교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성직자들이 인용하는 구절들과 분명히 모순된다. 가령 삼위일체, 이신칭의, 전생과 윤회 등 아주 중요한 부분들에서 서로 모순이 발생한다.

      성서에는 왜 이렇게 서로 모순되는 내용이 많은 걸까? 가장 먼저는 성서의 모든 말씀을 신의 감동으로 쓰여졌다고 우김으로써 예수의 말씀과 사도들의 말씀이 모순되는 경우에 교리에 맞는 쪽의 말씀만 인용하고 주장함으로써 모순이 발생한다. 예컨데 예수는 자기자신을 하나님이 절대 아니며, 같은 수준도 아니라고 누누이 말하고 있음[뒤의 '예수는 하나님인가?' 참조]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도들의 말 중에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우길 수 있는, 비슷한 말을 끌어다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삼위일체 교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또한 성서에 모순이 발생하는 것은 여러 가지 문서들(J, E, D, P사료층 등)이 혼합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자기 교파의 교리를 옹호하기 위해 후대에 가필[예: 복음 전파]했다거나, 없는 사실을 날조[예: 예수 탄생 장소]했다거나 하는 등의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수가 아람어로 발한 메시지가 구전으로 전해지다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고, 그 구전되던 것을 헬라어로 번역 기록한 원전조차도 없고 수많은 사본들만이 존재하고 누가 지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몇 개 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음서에서 모순과 오류가 많이 발생하는 것은 여러 단계에 걸친 성서의 왜곡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2부에서는 이러한 여러 단계의 왜곡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2부]  Bible의 원전(原典) 문제

         어떻게 해서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바이블이 탄생하게 된 것일까?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여기에 대해서 별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의문을 가지는 순간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는 자가 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두꺼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읽기도 힘들 뿐 아니라 한글개역판의 경우 온통 한자 고어투로 쓰여 있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기도 힘들다.  정말 인내심이 대단하여 해설까지 곁들여진 더 두꺼운 성경을 몇 번씩 정독해야 이런 저런 의문이 생길텐데 이렇게 부지런한 사람은 10%를 넘기 힘들다. 그리고 의문이 생겨서 자꾸 질문을 하는 사람을 성직자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혜보다도 믿음을 더 중요시한다.     그러니 대부분의 신자들은 성경에 있는 예수의 말씀은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어도 목회자들이 말하는 것은 마치 예수의 말씀인 양 순진하게 믿고 따르고 있다.   과연 예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목회자들이 말하는 대로 신앙해서 구원받을 수 있을까?  

        이 문제는 뒤에서 다시 살펴 보기로 한다.

        먼저 바이블의 형성과정을 살펴 보자.  

       1. 구약성서의 형성사

      구약성서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장로회신학대학 교수를 역임한 바  있고 현재 한일신학대학교 객원교수로 있는 박창환 교수의 <성경의 형성사>의 내용을 요약, 소개하고자 한다.

        《 유대인 역사학자인 요세푸스(Josephus, 100A.D)는 구약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며 일정한 계시의 기간에만 기록된 것이고 그 내용 자료의 거룩한 성격 때문에 세속적 문헌과는 구별되는 것이며, 그것을 다치기만 해도 손이 부정을 타고, 단어 하나도 변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예루살렘 함락 후 30년이 되는 해에 에스라가 기도의 응답으로 구약성서를 40일간에 걸쳐서 다섯 명의 조수에게 불러 주어 받아쓰게 했다는 것이다. 즉, 에스라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약 전체를 암송하여 불러 주었다는 것이다.   구약경전이 이렇게 해서 이루어졌다는 생각은 2세기 그리스도인에게까지 번졌고, 에스라 때에 구약 정경이 단번에 다 완성됐다는 설은 계속 유대교와 기독교에 유행되고, 개신교에서도 채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이 이런 설을 부인하고 있다.  예를 들면 유대인들이 바벨론의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후 얼마 안 돼서, 곧 느헤미야 시대에, 국가적 분열이 생겨서 사마리아인들이 따로 나가게 되었다.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사마리안인들은 구약의 첫 다섯 권, 곧 5경만을 성서로 인정한다.  그것은 그들이 분열하던 시대에 경전으로 간주되던 것이 5경뿐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때에 다른 책들도 완전히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가졌다면 사마리아인들이 5경만을 경전으로 가지고 나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구약성서(히브리어)를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율법서 5권(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  예언서 8권(전기예언서 - 여호수아,사사기,사무엘,열왕기  후기예언서 - 이사야,예레미야,에스겔,12소선지),   성문서 11권(시편, 잠언, 욥기, 전도서, 솔로몬의 아가, 룻기, 예레미야의 애가, 에스더, 에스라-느헤미야, 역대기, 다니엘)의 도합 2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개신교도들이 사용하는 성서(39권)의 구약 부분은, '70인역'(LXX,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성서)과 거기에 근거한 라틴어역 불가타(Vulgata)의 배열순서를 그대로 따온 것이다.  기원후 90년에 얌니아(Jamnia)회의에서 유대인학자들이 39권으로 된 구약성서를 정경으로 결정하고 선포했을 때,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유대인들은 이의를 제기했다.  구약성서에다가 외경까지 다 넣어 가지고 그것이 정경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들의 헬라어 번역 구약성서(70인역)는 배열을 다르게 했다.  첫 부분인 율법서를 제외하고는, 순서를 많이 바꾸어 버렸다.   유대인은 율법을 가장 높이 평가하고, 성서라면 우선 율법을 생각하게끔 되었었다.   율법은 온통 그리고 완전하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준 것이고, 따라서 율법의 한 글자라도 모세 자신이 창안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죄를 받는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율법서를 자세히 검토해 보면 그것은 하나의 합성문서이고 오랫동안 자라고  발전되어서 이루어진 산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증거는 율법서 여러 군데에서 발견된다. 신명기 34장는 모세가 죽은 후의 일을 말하고 있고, 5경에 여러 번 블레셋 사람들이 언급되어 있지만(창21:34, 26:14-18, 출13:17) 실은 기원전 1200년 경(모세의 출애굽시대는 기원전 1300-1200년경)까지는 그들이 팔레스틴에 나타나지 않았었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정설이다. 그러므로 모세 시대보다 훨씬 이후에 된 부분들을 5경 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뿐 아니라 5경에는 같은 사건에 대하여 서로 다르게 묘사하는 기사들을 발견할 수 있다. 창조이야기가 두 가지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브엘세바가 어떻게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이야기가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사이에 맺은 계약에서, 또하나는 이삭과 아비멜렉 사이에 일어난 사건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창 21:31 , 26:33).  또 벧엘이란 이름의 기원도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가는 길에 환상을 보는 이야기에, 또 하나는 야곱이 몇 해 후에 밧단아람에서 돌아올 때의 사건에 나타난다(창28:19, 35:15).  하갈이 추방되는 이야기도 둘이 있는데, 하나는 그녀가 이스마엘을 낳기 전에 추방되는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이스마엘이 커서 소년이 되었을 때에 추방되는 이야기이다(창16:6이하, 21:9이하)  창조설화도 역시 뚜렷하게 다른 두 가지로 나타난다.  창세기 1장에는 세상 만물과 동물까지 창조된 후에 남자와 여자로 사람이 창조된다. 그러나 2장에는 남자가 먼저 창조되고 다음에 동물, 그리고 마지막에 여자가 창조된다.    홍수에 대한 기사도 두 가지다. 하나는 노아가  모든 짐승을 한 쌍씩 방주 속에 넣으라는 명령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고(창6:19), 또  하나는 정결한 동물은 일곱씩, 부정한 동물은 한 쌍씩 넣으라고 명령을 받는다(창 7:2). 이와 같이 이야기가 중복된 것은 5경을 오늘의 형태로 작성한 사람들(편집자들)이 그 사건들에 대한 두 가지 기사들을 앞에 놓고 그 자료들을 정직하게 그리고 충실하게 취급하는 의미에서 그 두 가지를 다 나열한 것이라고 보인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 볼 때, 5경은 유대인의 전통적 견해처럼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아쓴 책이 아니라는 것과, 따라서 5경은 하나 이상의 문서의 편집으로 형성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여러 문서들(J문서-야훼이스트 사료층, E문서-엘로히스트 사료층, D-신명기 사료층, H문서-Holiness Code, P문서-제사적 사료층 등) 중에서 P문서를 골격으로 하여 다른 부분들이 거기에 맞추어졌다고 본다.  이리하여 기원전 400년경에 창세기, 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  이렇게 다섯 권이 제일 먼저 성서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그리고 구약성서의 둘째 부분인 예언서는 기원전 2세기 초에 성서로 채택되었으며 성문서가 공식적으로 유대인의 성서로 채택되기까지에는 역시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성문서는 우선 일반 백성이 널리 알고 읽던 인기 있는 책들이었다. 율법이나 예언서처럼 전체적으로 또는 공식적 결정에 의해서 성서 정경에 들어오게 된 것이 아니었다. 히브리 백성들의 일반 종교문학으로 간주되어 전해 오다가, 익명의 책들이어서 그  저작자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과거의 어떤 위대한 인물(다윗, 솔로몬, 에스라 등)이 쓴  책으로 돌려 정경에 넣었다.     이렇게 전승된 성서들이 정경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주후 90년 경얌니야에서 유대 랍비들과 학자들의 회의가 열렸고, 그 회의에서 구약성서의 책들이 최종적으로 낙착되어 그 수가 오늘날 우리의 구약성서의 그것과 꼭 같은 것으로 결정된 것이다. 》

       이상이 개신교의 구약 39권의 형성사이며, 천주교의 구약은 이와 달리 46권으로 되어 있다

      ☞ 구약성서의 여러 가지 사료들

        학자들은 구약성서의 5권(토라, 흔히 모세 5경이라고 한다.)이  다음의 여러 갈래의 구두전승으로 짜여져 있다는 것에 대해서 보편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 야훼계(J문서) : 창세기에서 하느님을 야훼(Yahweh)라 부르는 전승. 신을 인격화하여 표현.

        * 엘로힘계(E문서) : 하느님을 엘로힘(Elohim)이라고 부르고 있는 전승.  신을 인격화하지 않음.   야훼계는 교리에 밝지 못하지만 엘로힘계는 교리에 밝은 사람들이 수집한 것임.

        * 신명계(D문서) : 주로 신명기에 수집된 법률과 관습을 담고 있음.    

        * 제관계(P문서) : 제사장들에 의해 작성되었으며, 레위기의 나머지 제사법과 5경의 나머지 역사 부분들을 포함함.

        2. 신약성서의 형성사

         

        구약성서와 마찬가지로 신약성서도 여러 저자에 의해서 오랜 기간에 걸쳐 기록된 책들이 오래고 또 복잡한 역사를 통해서 집성되어 이루어졌다. 신약성서 역시 고스란히 하늘에서 기록되어 사람에게 떨어진 것이 아니고, 또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 불러 주어 기록하게 하신 것도 아니다.

        교회는 신약성서의 어느 부분도 가지지 않은 채 오랫동안 발전하여 나갔다. 신약 정경이 곧 나타나지 않은 것은 여러 원인이 있는데 중요한 원인중의 하나는 사도 교회가 종말적 기대를 강하게 가졌다는 데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곧 다시 오셔서 심판하시고 새 세계를 완성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긴 앞날을 계획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그리스도를 영접할 준비가 요구될 뿐이었다. 문서로 된 정경이 있어야겠다는 욕구가 생기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그들이 기대가 수정되고, 급박한 하나님 나라 실현의 희망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해서 그들이 예수님의 임박한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은 영구보존을 목적으로 하는 문서운동 같은 것은 생각할 여기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 복음이 구두로 전달되던 시대가 적어도 30년 이상 흘렀다. 제일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도 그 저술 연대를 기원후 60년 이전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고 보면, 구전시대가 한 세대 이상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당시 크고 작은 많은 복음서들이 나돌아 다니고 교회에 혼잡을 조성하였었는데 어떻게 해서 4복음서만이 남아 승자의 관을 쓰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우리는 알 수 없다.

        교회가 어째서 네 개의 복음을 그냥 가지고 있었을까? 그 수를 줄이거나 하나로 통일시키려는 의도는 없었는가? 서로 약간씩 다른 네 개의 복음서가 있다는 것은 확실히 곤란을 가져다주었던 것이 사실이다. 예컨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족보가 각각 다르다. 요한복음서는 성전을 정화한 사건을 예수 생애의 초기에 두었고, 반면에 다른 세 복음서는 그 말기에 두었다. 첫 세 복음서는 예수가 유월절 후에 십자가에 달린 것으로 기술하였는데, 요한복음서에는 유월절 전에 십자가에 달린 것으로 기록했다. 예수님의 부활설화도 복음서마다 차이점을 지닌다. 이런 것들을 아는 교회가 네 개의 복음서를 하나로 만들어 조화시켜 보려는 의도를 가지지 않았을까? 기원후 180년경에 타시안(Tatian)이라는 사람이 소위 디아테사론(Diatessaron)이라는 책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4복음서를 종합한 것이었다. 얼마 동안 이것이 매우 영향이 매우 컸고, 4복음을 대신할 수 있는 것같이 보였다. 그러나 결국은 실패하고, 얼마 후에는 그 책이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공동서신이 한 그룹으로 모인 것은 상당히 후대의 일이었고 그 과정은 퍽 느렸다. 2세기말까지도 베드로 전서와 요한1서만이 보편적으로 수락되었을 정도이다. 계시록은 처음에 널리 알려졌고 인정되었다. 1세기 때에는 비단 요한 계시록만이 아니라 헤르마스의 목자와 베드로 계시록도 널리 사용되고, 상당히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2세기 후반경에 이르러서는 이 묵시서들이 인기를 많이 잃게 되었다. 그 이유는 세상의 마지막이 임박했다고 하는 약속이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만 요한 계시록만이 교회의 광범한 인정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일부의 반대를 받아왔다. 그리하여 이 책이 정경으로 채택되어 상당히 견고한 위치를 얻기까지는 200년 이상이나 싸움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실상 그 싸움은 그 후까지 계속되었고, 현대 교회에서도 그 책을 정경에 완전히 넣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말이 떠돌고 있다.

        교회사상 처음으로 나타난 신약성서 목록인 무라토리 정경목록(AD170)에는 현재의 신약 27서 중에서 베드로 전,후서 , 야고보서, 요한3서, 히브리서가 빠져 있다. 베드로 전서를 제외한 나머지 책들은 상당히 오랫동안 어려운 투쟁을 거쳐서 정경으로 채택된 것이다.

        유세비우스(270~340)는 정경을 호모레고메나(Homolegomena)-누구에게나 받아들여진 책, 안티레고메나(Antilegomena)-일부의 반대가 있었던 책, 노타(Nota)-가짜책의 세 가지로 분류하였는데 야고보서, 유다서, 베드로 후서, 요한2·3서를 안티레고메나에 분류했고, 요한 계시록은 호모레고메나에 분류했지만 노타에 넣어야 된다고 자기의 의견을 덧붙였다.

        논란의 대상의 되었던 책들이 가졌던 문제점은 사도 저작성의 문제, 즉 그 책들의 저작자가 확실치 않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을 정경에 넣기 위해서 히브리서는 바울의 저술로, 야고보서를 주의 동생에게, 유다서를 예수님의 또 다른 동생에게, 베드로 후서를 베드로에게, 요한2,3서를 요한에게 돌려 그 사도의 이름을 빌렸던 것이다.

        예루살렘의 키릴(AD315~386)은 신약성서의 강의목록에서 계시록을 제외한 모든 책을 소개하였고, AD367년에 와서야 아타나시우스가 지금의 신약성서와 똑같은 목록을 제시하였다. 이 신약성서 27권을 393년에 힙포 레기우스에서, 397년에 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서 각각 정식 채택하였고 어거스틴도 이 정경을 지지하였다. 그것이 마침내 제롬의 라틴어 번역(Vulgata)을 통하여 전 서방 교회에 유포,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신약 27권 중에서 베드로후서, 요한2,3서, 유다서, 계시록을 제외한 정경이 5세기 초에 수리아 말로 번역, 발표되어 표준성서의 구실을 하였는데 그 성서를 페쉬타(Peshitta)라고 부른다. 동방 수리아교회는 지금까지도 계속 22권짜리 신약성서를 정경으로 가지고 있다.

         

        3. 서로 다른 정경

        구약성서는 몇 권일까? 천주교(46권)와 개신교(39권) 사이에 차이가 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이주해 살던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보다도 당시 국제어인 그리스(희랍)어가 더 익숙했다. 그래서 기원 전 3세기 중엽에 그리스어에 정통한 72인 유대인 학자들이 히브리어 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하였는데, 100여 년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를 '칠십인역'(셉튜어진트 희랍어판)이라 하며, '알렉산드리아 정경'(Alexandrian Canon)이라고도 부른다. 여기에는 유대인들의 '히브리어 구약성서'의 정경 39권(제1경전) 외에도 토비트서, 유딧서,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 마카베오 상,하권 일곱권과 다니엘서 일부(3,24~90;13~14장), 에스델서 일부(10,4~16,24)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를 제2경전 혹은, 외경이라 한다.

        앞에서 언급한 '얌니야 회의'에서 유대인 랍비들이 결정한 것은 결국 이들 제2경전들은 정경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것을 천명하고, 이들을 정경에서 제외시킨 것이다. 따라서 '히브리어 구약성서'전통의 입장에서는 제2경전들은 정경 밖의 책, 즉 외경이 되는 것이다.

        '얌니야 회의' 이후부터 구약성경의 정경은 두 가지 전승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즉 본래 히브리어로 쓰여진 성서만을 정경으로 인정하고 외경들을 제외시키는 '히브리어 구약성서' 전승과 외경들을 포함시키는 '희랍어 구약성서' 전승이다. 초기 기독교회에서는 희랍어로 번역된 '희랍어 구약성서'를 읽었다. 즉 기독교회는 구약성서에 있어서 '희랍어 구약성서' 전통을 채택한 것이고, 이것은 로마 카톨릭교회(Roman Catholic Church)에 의해 계속해서 유지되어 내려왔다. 즉 로마 카톨릭교회는 '희랍어 구약성서' 전승을 받아들여 온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의 정경전승은 마틴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에 의해서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루터는 정경문제에 관해서 히브리어 구약성서 전승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제2경전들을 외경으로서 정경의 범위에서 제외시켰다. 그리하여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Protestant Church)에서는 외경을 제외한 39권의 책만을 구약의 정경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편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으로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트렌트 종교회의(Trent Council, 1545-1563)가 소집되었고, 정경문제에 대해 제2경전들 중에서 몇 권을 정경에서 제외한 외에는 종래의 '희랍어 구약성서'의 기본 입장을 재확인하였다. 그 결과 오늘날까지 로마 카톨릭교회에서 사용하는 구약성서는 개신교회보다 7권의 책이 더 많은 구약성경을 사용해 오고 있다.

        개신교는 외경을 일체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데 반해 천주교는 구약외경들 중에서 7권을 정경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개신교의 성서는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으로 도합 66권이나 천주교의 성서는 구약 46권과 신약 27권으로 도합 73권인 것이다. 외경을 넣느냐 빼느냐의 차이는 결국 교리의 차이로까지 이어지고 서로가 서로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천주교에서는 지금 기독교인들이 공통적으로 쓰고 있는 한글개역판 성경, 공동번역판 등의 신약성서에 인용된 거의 대부분의 인용문은 '70인역'이라고 주(注)가 달려 있어 70인역에서 인용되었음을 알 수 있고, 70인역에는 외경이 포함되어 있으니 개신교에서 외경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이치에 어긋난다고 본다. 그리고 초기 기독교는 언제라도 외경을 빠뜨린 적도 없으며 더구나 집회서 같은 것은 교회의 전도에 아주 널리 쓰인 경전이라는 것이다. 개신교의 구약성경(39권)은 유대인의 전통을 따라서 정한 것일 뿐이고 기독교 전통에 따른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천주교회에서는 예수시대, 사도시대, 교부시대를 통해서 지금까지 그리스어로 된 칠십인역[제1경전(정경 39권)과 제2경전(외경 7권과 다니엘서 일부, 에스델서 일부) 46권을 모두 성서로 인정해 왔다. 특히 가장 오래된 성서 사본인 쿰란동굴의 구약성서 사본도 칠십인역과 일치하며, 예수님과 사도들이 구약성서를 인용할 때 칠십인역에서 300구절을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근거로서 다음의 구절들을 제시하고 있다.  

        마태 6,14 / 집회 28,2 마르코 6,15 / 집회 48,9~10

        루가 13,27 / 1마카 3,6 루가 24,4 / 2마카 3,26

        요한 3,12 / 지혜 9,16  로마 1,20~32 / 지혜 13,10~19  1베드 1,6~7 / 지혜 3,5~7

        반면에 개신교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일체의 외경을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1) 외경의 어느 책도 스스로 영감 받았음을 주장하지 않는다

        2) 유다인들이 정경으로 인정한 적이 한 번도 없다.

        3) 외경의 많은 책들이 역사적, 지리적, 연대기적 실수들을 포함하고 있다.

        4) 외경의 많은 책이 성경 말씀과 모순이 된다 등등이다.

        이러한 외경들로 인해 개신교와 다른 교리들이 많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1) 연옥: 마카베오하서 12장 39-45절

        2) 구제(즉 자선 행위)에 의한 구원: 집회서 3장 30절

        이외에도 자살을 인정한다든지(마카베오하서 14장 43-46절), 비참한 노예제도를 인정한다든지 (집회서 33장 24-28절), 윤회(솔로몬의 지혜서 8장 19,20절)를 인정하는 구절들이 있으며, 거짓말을 하거나 다른 사람을 몰래 죽이거나 마술을 통해 신비주의를 행하는 것 등을 인정하는 구절들이 있어, 우리 개신교인들이 믿는 성경과 상치된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의 개신교 정경만 가지고도 그 안에서 서로 모순되는 말씀들, 비과학적인 내용들, 노예제도와 윤회를 인정하는 말씀구절 등은 얼마든지 찾을 수가 있다. 앞으로 이러한 문제들을 모두 언급해 나갈 것이다.

        에라스무스(Erasmus)는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 후서, 요한2,3서, 유다서, 계시록 등이 옛날부터 계속 의심을 받아왔다고 지적하였으나 그는 충성된 로마 카톨릭교회 교인으로서 자기 주장을 고집하려고는 하지 않았다고 하며, 루터는 에라스무스가 상기시킨 7권의 이의서(異議書) 중에서 넷만을 문제 삼았다. 히브리서에 대해서는 배교자(背敎者)들에게 두 번째 사죄를 허락지 않는 점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야고보서에 대해서는 믿음으로 의를 얻는다는 것보다 행위를 더 고조하는 것같이 보인다고 비난하였고, 유다서는 베드로 후서에서부터 생겨난 것으로 보이고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증언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지적하였으며, 계시록은 애매하여 그리스도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이 책들을 자기의 번역에서 신약성서의 맨 끝에 두었다. 먼저 그가 완전히 수락한 23권을 열거하고 그 번호를 적어 넣었으며, 다음에 약간 여백을 남겨 놓았다. 그리하여 그 다음에 오는 책들은 질적으로 낮은 수준의 것임을 나타내려고 하였다. 그 열등함을 나타내는 의미에서 번호도 붙여놓지 않았으니 결국 일군(一群)의 신약 외경과도 같은 취급을 한 셈이다.

        정경과 외경의 구분은 여호와신이 한 것도, 예수가 한 것도 아니다.사람들,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천주교는 구약에 7권의 정경을 추가한 데 반해 동방수리아 교회는 오히려 신약에서 5권을 줄여서 정경으로 사용하고 있다. 정경을 다르게 사용하는 이들은 서로를 각각 이단시하고 있다. 정경은 과연 몇 권이 되야 맞는 것일까?  

        4. 성서의 사본과 역본들의 문제

        성서의 원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5,000개가 넘는 필사본들이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필사본을 만드는 과정에서의 문제, 수많은 사본들의 취사선택의 문제 등등......

        1) 필사과정에서의 문제

        《 옛날에 이 필사본들은 만드는 방법은 흔히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한 개인이 한 자 한 자 옮겨 써서 만드는 법인데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알파벳에는 유사한 글자들이 여럿 있어서 아주 성실한 사사일지라도 종종 혼동을 일으켜서 잘못 옮겨 쓰는 일이 생기곤 하였고 더구나 옛날에는 원어 성서에서도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필사할 때 여러 가지 종류의 과오를 일으켰던 것이다.

        또 한가지 방법은 한 사람은 읽어 주고 여러 서사들이 받아쓰기하는 방식으로 단 번에 서사의 수만큼 많은 사본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서사들이 그 문서내용에 대한 지식이 없을 때 자연히 잘못 듣고 쓰게 되는 경우가 많으며, 특히 글자는 다르지만 발음이 같은 경우 등에는 많은 착오가 생기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후대 헬라어에서는 '우리'라는 말과 '너희'라는 말의 발음이 거의 구별할 수 없으리 만큼 같았다. 그러므로 신약성서의 서신들에서 사본마다 각각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본래 어떤 인칭이 사용되었는지 결정하기가 어렵거나 불가능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또 때로는 이러한 차이가 고의적으로 발생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컨데 마태복음의 가장 오랜 사본에는 주기도문(마 6:6~13)이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여 주옵소서"라는 말로 끝난다. 그런데 후대 사본에는 그 끝에 의식(儀式)에 사용하기 알맞은 송영이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처음에는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라는 두 마디 송영이 되었지만, 후에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라는 세 마디 송영이 되었다. 이와 같이 교회 의식의 발전과정을 통해 약간의 고의적 첨삭이 있었던 것을 보여준다.

        때로는 금욕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성서 사본이 변하는 경우도 생겼다. 예를 들면 마가복음 9:29에 본래는 "기도하지 않고는 이런 것을 쫓아낼 수 없다"고 되었던 것이 후에 금욕적 사상의 영향을 받아 "기도하고 금식하지 않고는...."으로 변하였으며, 사도행전 10:30과 고린도 전서 7:5 등도 그러한 예다. 또 때로는 필사자가 다른 책에 있는 병행 구절들과 조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보충 삽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골로새서 1:14은 "우리는 그의 아들 안에서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라고 되어 있는 것인데, 후대의 어떤 사본에는 에베소서 1장 7절과 조화시키기 위해서 '그의 피로'라는 말을 첨가했다.

        이와 같이 실수로, 또는 고의로 사본에 많은 변화가 생기고 차이가 생긴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근본적으로 내용이 바뀌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어쨌든 원문 비평학자들의 피땀어린 노력에 의하여 오늘 우리는 성서 원본에 거의 가까운 것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도 된다.》

        여기까지가 신학대학 교수가 말한 내용이다. "근본적으로 내용이 바뀌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고 지금 성서원본에 거의 가까운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뒤에서 좀 더 솔직한 신학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필사과정에서 너무나 오류와 변개가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2) 성서의 사본들

        현재까지 구약에 대해서 알 수 있는 텍스트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마소라 원문(the Hebrew Masoretic Text) : 10세기 말

        1) 벤 하임 편집본 --> BHK1(Biblia Hebraica Kittel1,1906)

        BHK2(1912)

        벤 하임이 편집했던 본문은 어떤 한 히브리어 사본만을 따른 것이 아니라 입수 가능한 모든 사본을 참조하여 만든 절충 본문으로, 대부분 14-16세기에 쉽게 접할 수 있었던 후대의 사본들이다.

        2) 벤 아세르 편집본 --> BHK3(1937),

        BHS(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1977)

        BHK3 와 BHS는 레닌그라드 사본(B19a 또는 "L")을 기초로 해서 편집되었는데, 그것은 레닌그라드 사본이 완전한 히브리어 성서의 가장 오래된 사본이라는 점과, 그것이 10세기에 인정받았던 벤 아세르 본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BHK3 와 BHS는 대부분의 현대 영어성경의 번역의 기초가 되고 있는데, BHK1 이나 BHK2 에 비교해 볼 때 20,000에서 30,000 군데 차이가 있다. 현재는 히브리 대학에서 레닌그라드 사본보다 그 이전인 A.D. 930년경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알렙포 사본에 근거한 히브리어 성경인 HUB를 발간하고 있는 중이다. KJV, ASV, RSV 등이 초기 맛소라 본문을 사용했으며, NEB, NASV, GNB, NIV 등은 BHK3을 사용했고 NKJV는 BHS를 사용했다.

        ▷ 쿰란의 사해문서(BC1~AD1세기)

        이 고대 사본은 1947년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의 사해 근처 쿰란의 동굴에서 구약의 에스더서를 제외한 모든 책의 사본이 발견되었다. 이 사본이 유태교의 한 종파인 에세네파의 고문서라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 종교의 창시자는 '이스라엘의 구세주' '정의의 교사' '이사야의 고뇌에 찬 종' '하나님의 아들' 등의 이름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괴로운 죽음을 맞을 운명에 처했다. 그는 고문을 받았으며 흉악한 제사장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힌다. 그러나 그는 다시 부활해 세계를 구원하고 최후의 심판을 기다린다. 그는 인내와 인간성과 형제애, 자선과 빈곤을 가르치며 새로운 계율과 정의와 세례, 그리고 성찬(聖餐)을 만든다. 동굴에서 발견된 비밀사본의 이 사람이 누구냐고 퀴즈에 낸다면 거의 모두 '예수'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사해사본'에 적혀 있는 이 사람의 이름이 무엇인지 기록돼 있지 않다. 오직 '구세주'라고만 표기돼 있으며, 천국을 만들기 위해 최후 심판의 날까지 고민하는 사람을 구원해주는 인물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 사람을 예수라고 단정한다면 간단한 일이지만 문제는 이 구세주가 예수보다 1백50년 전에 살았다고 추정된다는 점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크리스찬이 믿는 예수는 오직 단 한사람의 인물이 아닌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의 가르침은 이미 그 이전에 다른 사람에 의해 설교된 것을 예수가 되풀이한 것이란 말인가?

        구약 삼경(三經:율법서, 예언서, 성문서)의 완전한 정본은 오늘날까지도 유동적이다. 금세기만 해도 영국에서 긴스버그의 히브리성경(1894, 1908, 1926)이 마소라텍스트에 의거하여 고대 수사본들을 정밀히 대조하여 새로 나왔고, 또 독일의 구약학자 키텔과 카아레에 의한 『비브라이카 헤브라이카』(1906, 1912)가 있다. 현존하는 최고사본(最高寫本)보다 일 천년이나 앞선 사해두루마리가 1947년에 다시 발굴됨으로써 70년대에 예루살렘의 히브리대학팀들이 새로운 성경을 준비중에 있었다.

        다음은 신약의 사본들이다

        ▷ 시나이 사본(4세기경) 구약이 199개, 신약 147.5개의 양피지에 기록되어 있는 헬라어 성서 사본이며, 신약 성경 본문에 대한 가장 중요한 증거물 중 하나이다. 이 사본에서 마가복음은 16:8절에서 끝나고 요한복음 7:52-8:11의 간음한 여자의 기사는 빠져 있다.

        ▷ 바티칸 사본(4세기초) 외경의 므낫세 기도서, 마카베오서를 제외한 희랍어 성경 전체를 수록하였으나 현재는 상당 부분이 파손되어 있다.

        ▷ 알렉산드리아 사본(5세기초) 원래는 외경을 포함한 희랍어 성경 전체를 담고 있었으나 현재는 구약의 일부가 파손되었고 신약도 일부가 빠져 있다. 구약은 2명, 신약은 3명에 의해 필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 워싱톤 사본(4세기말~5세기초), 에프라임 사본(5세기초), 베자 사본(5, 6세기) 등등

        19세기 이래 많은 성서 사본들이 발견되고 성서원문 비평학의 발달에 따라 다음과 같은 "현대 비평판 헬라어 신약 성서"들이 나타나게 된다.

        그리스바흐(1812), 라흐만(1851), 트레겔레스(1872), 티쉔돌프(1874),웨스트코트와 홀트(1881), 네슬(Nestle)판 헬라어 성경(1-26판, 1898-1979)

        3) 고대 역본(譯本)

        ▷ 셉츄아진트(Septuagint, 70인역, 구약 헬라어[그리스어] 번역본 )

        셉츄아진트는 기원전 280년 경,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헬라어를 하는 유대인들을 위해서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 성서로 '70인역'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셉츄아진트와 마소라텍스트는 체제와 내용이 많이 다르다. 마소라 텍스트는 토라, 네비임, 케투빔의 삼경(三經)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데 반하여 셉츄아진트는 율법, 역사, 시, 예언의 네 부분으로 나뉘고 많은 외경(外經)들이 사이사이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쓴 구약은 희랍어 번역본인 셉츄아진트(Septuagint,70인역,알렉산드리아 번역판)이며 지금 신약에 인용되고 있는 구약의 구절들도 모두 셉츄아진트에서 온 것이다.

        70인역 구약성서(LXX)와 유대교 성서(타낙)가 따르고 있는 마소라텍스트(MT)는 서로 다른 독법(讀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두 성서의 원본이 다르거나 필사과정에서 수정 및 삭제 혹은 보충하는 과정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상당한 차이를 보여준 것이다

        ▷ 탈굼(Targum, 아람어 번역본): 기원전

        ▷ 페쉬타(Peshitta, 시리아 번역본): 2세기에 신약의 일부 번역, 4세기에 신약 22권 번역, 6세기에 27권 전체 번역

        ▷ 라틴 벌케이트(Latin Vulgate, 라틴어 번역본): 4세기말 제롬이 번역한, 오늘날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공식 성서. 이 성서가 1,000년이나 내려오면서 그 내용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고 수정되고 첨가되면서 복잡한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 13세기에 스테판 랑튼이 이 라틴 번역에다 장(章)을 구분해 놓았고 많은 교정을 붙였고 우리는 오늘날까지 그 때의 장 구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라틴어 성서는 그 사본이 약 8,000개나 된다고 하며, 그것들을 모두 대조하여 제롬의 원 벌게이트 성서를 찾아내는 작업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 역시 원본이 없는 상태이고 또 그 내용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고 수정되고 첨가된 것이라는 말이다.

        4) 서로 다른 텍스트(사본)와 번역본들

        다음의 도표는 한글 킹제임스 성경을 지지하는 '말씀보존학회'의 홈페이지에서 인용한 것이며, 제목은 <한글KJV성경><KJV>對<개역한글판성경>,<NIV>대조표 이다. 원래는 "㉮보존된 성경: 하나님께서 기록 --> 최조의 원문 ⓐ히브리 맛소라 원문 ㉯변개된 성경 : 사탄이 변개 --> 바빌론-그리스-로마의 신비종교---> ⒜오리겐" 과 같이 적혀있었으나 필자가 중립의 입장에서 다루기 위해 " ㉮KJV,한글킹제임스 성경 ㉯ NIV ,개역한글판성경"라고 고쳐서 사용하고자 한다.

         

        ㉮KJV(영어),한글 킹제임스 성경

        ㉯ NIV(영어), 한글 개역판, 

        ⓐ히브리 맛소라 원문(Hebrew Massoretic Text) 

        ⓑ코이네 헬라어 표준원문(Koine Greek Textus Receptus) 

        ⓒ구 시리아 역본(The Old Syriac, A.D.120) 

        ⓓ구 라틴 역본(Old Latin, A.D.150) 

        ⓔ이태리 교회에서 사용한 성경(A.D.157-A.D.180) 

        ⓕ골 교회에서 사용한 성경(A.D.177-A.D.200) 

        ⓖ켈트 교회에서 사용한 성경(A.D.300) 

        ⓗ발칸과 독일 지역에서 사용한 성경(A.D.400) 

        ⓘ비잔틴 제국 기간 동안 희랍 교회들에서 사용한 성경(A.D.312-1453) 

        ⓙ헬라어 표준원문(Textus Receptus) 

        ⓚ에라스무스 성경(1522), ⓛ콜리네우스 성경(1534), ⓜ스테파누스 성경(1550), ⓝ베자 성경(1604), ⓞ엘지버 성경(1633) 

        ⓟ틴데일 성경(1525) 

        ⓠ루터 성경(1543) 

        ⓡ킹 제임스 성경(Authorized King James Bible, 1611) 

        ⓢ새성경 사복음서(1998) 

        새성경 1판(신약, 1990) 

        새성경 2판(신약, 1990) 

        새성경 3판(한영판 신약, 1991) 

        새성경 4판(신약, 1992) 

        ⓣ한글 킹 제임스 성경(신구약 합본, 1994) 

        ⓤ한영대역 한글 킹 제임스 성경(1995) 

        ⒜오리겐(A.D.184-254)의 헥사플라(Hexapla)제 5란-70인역(LXX, Septuagint) 

        ⒝유세비우스의 50권의 복사본 

        ⒞바티칸사본(Vaticanus, A.D.350), ⒟시내사본(Sinaiticus,A.D.350) : "외경"포함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Latin Vulgate, A.D.415) 

        ⒡예수회의 림즈 듀웨이 성경(Rheims Douay, 1582) 

        여러 비평가들이 편집한 헬라어 성경들 

        ⒢그리스바흐(1812), ⒣라흐만(1851), 

        ⒤트레겔레스(1872),⒥ 티쉔돌프(1874) 

        ⒦웨스트코트와 홀트의 헬라어 성경(1881) 

        ⒧영어 개역본(RV, 1884) 

        ⒨네슬(Nestle)판 헬라어 성경(1-26판, 1898-1979) 

        ⒩연합성서공회(United Bible Societies)의 헬라어 성경 1,2,3판(1966-1975) 

        ⒪개역표준역본(RSV, 1952), ⒫여호와의 증인 - 신세계역본(NWT, 1957) 

        ⒬새미국표준역본(NASV, 1959), ⒭새개역표준역본(NRSV, 1970) 

        ⒮새국제표준역본(NIV, 1978), ⒯뉴킹제임스역본(NKJV, 1982) 

        ⒰성경전서 개역 한글판(1956) - 첨가와 삭제가 임의로 이루어짐 

        ⒱공동번역 성서(1977)⒲현대인의 성경(1986) 

        ⒳현대어 성경(1991) ⒴표준새번역(1993)

         

        ㉮성경을 사용하는 기독교인들은, 한국을 비롯하여 기독교인들의 절대다수가 사용하고 있는 ㉯성경을 사탄이 변개한 성경이라고까지 비난하고 있다. ㉮성경과 ㉯성경은 그 텍스트를 서로 달리함에 따라 무려 30,000군데 이상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루터와 칼빈이 읽던 성경과 지금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읽는 ㉯성경이 30,000군데가 다르다는 것이다.

        구약성서의 대본으로 ㉮성경은 벤 하임 마소라 원문(봄 베르그 편집본)을 사용한 데 반해 ㉯성경은 벤 아세르 맛소라 원문을 기초로 한 키텔의 히브리어성경(BHK3)과 "비블리아 헤브라이카 스튜트가르텐시아"(BHS) 외에 70인역(LXX), 시리아 역본(페쉬타), 사해 사본, 사마리아 오경, 소수의 히브리어 필사본들, 아퀼라 역본, 심마쿠스 역본, 테오도티안 역본, 벌게이트(라틴어 역본), 탈굼, 제롬의 적스타 헤브라이카(Juxta Hebraica) 등의 원문을 혼용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신약성서의 대본으로 ㉮성경은 전통원문(다수필사본, 비잔틴 원문, 시리아 원문)을 대표하는 헬라어 공인 원문<표준원문, Textus Receptus>를 사용한 데 반해 ㉯성경은 웨스트코트와 홀트의 헬라어성경, 네슬&알랜드의 헬라어성경 등의 현대 비평판 성서를 주로 사용하였다.

        ㉮성경을 주장하는 측은 ㉯성경의 대본으로 사용된 70인역을 엉터리 번역판이고 변개된 의역판이라고 혹평하고 있으며 또 현대 비평판 성서에 대해서도 표준원문을 5,600군데 이상 변개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대본으로 사용된 ⓚ에라스무스 성경에 대해 박창환 교수는 에라스무스가 참고한 사본들 중에는 10세기 이전 것이 하나도 없었고 계시록을 위해서는 12세기 사본 하나만을 사용하였고, 마지막 장이 없어진 사본이었던 까닭에 거기에 있어야 할 여섯 절은 라틴 벌게이트에서 거꾸로 헬라어로 번역하여 사용했다고 한다. 이것은 너무도 서둘러서 출판하였고 아주 후대의 열등한 사본들을 자료로 했기 때문에 헬라어 신약성서의 공인 원문(Textus Receptus)의 조상이 되기에는 전혀 무가치한 것이라고 에라스무스 자신도 고백하였다고 한다. 사실 그는 계시록의 마지막 여섯 절만 아니라 다른 부분도 벌게이트를 기초로 해서 헬라어 본문으로 고쳐 놓은 것이라 한다. 박창환 교수는 오히려 최초의 한글번역성서는 공인원문을 대본으로 하였기 때문에 그 내용에 잘못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하며 성서 원문 비평학의 발달에 따라 최신 비평판 성서를 대본으로 번역되는 새번역 성서들은 원본에 가까운 원문을 대본으로 삼은 번역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결론은 서로가 서로의 대본들을 부정확하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주의 깊게 봐야 할 부분이 있다. 박창환 교수의 말 중에 "원본에 가까운 원문을 대본으로 삼은 번역"이라는 구절에 대해서이다. 여기서 "원본"은 신약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예수가 말한 '아람어'에서 희랍어(그리스어)로 번역된 성경을 말한다. 물론 이 원본은 존재하지 않으며 5000개가 넘는 사본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아람어 --> 희랍어 --> 영어의 번역과정에서 아람어는 예수의 목소리와 함께 증발해 버렸고 무수히 많은 희랍어 번역사본들 중에서 심혈을 기울여 예수가 말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원문을 추려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비평학이 고도로 발달되어 거의 원본(희랍어)에 가까운 희랍어 원문이 만들어진 것이 소위 현대 비평판 헬라어(희랍어) 성경이고 그 헬라어 성경의 원문을 대본으로 번역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대본도 문제가 있지만 또 번역의 과정에서 얼마나 본래의 뜻이 왜곡되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예수가 말한 메시지가 그대로 전해진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물론 '하나님의 감동' 운운하는 것이겠지만 현재의 성서번역에 수많은 오류가 발생하고 이 번역판은 못 믿겠으니 새로운 번역판을 만들자는 식으로 해서 발행된 새로운 번역판은 미국만 해도 100여 종류가 넘는다. 그리고 번역의 오류뿐 아니라 복음서끼리 서로 모순이 발생하는 것으로 볼 때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졌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증거들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성경 구절을 임의로 삭제했다는 확실한 증거도 있다.

        5) 삭제 당한 성경 구절

        개역 한글판(1956), 공동번역 성서(1977), 현대인의 성경(1986), 현대어 성경(1991), 표준새번역(1993) 등의 성경에는 "없음"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구절이 13군데나 있는데 이 구절들이 한글 킹제임스성경에는 그대로 실려 있다. 그 중에서 일곱 개의 구절은 예수가 직접 말한 내용인데 "없음"이라고 되어 있다. 예수는 "하늘과 땅은 없어져도 내 말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24:35)고 말하였지만 무려 일곱 군데나 삭제를 당한 것이다.

        지금 "없음"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구절은 다음과 같으며, 이 중에서 [ ]안의 구절들은 예수가 직접 말한 구절이다.

        마태복음 [17:21], [18:11], [23:14]

        마가복음 [9:44], [9:46], [11:26] 15:28

        누가복음 [17:36] 23:17

        사도행전 8:37 15:34 28:29

        로마서 16:24

        이런 구절들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아니라 성경이 전달되는 과정 속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믿음과 맞지 않기 때문에 고의로 삭제해 버렸다고 한다.

        한글개역판 등의 성경과 한글킹제임스 성경은 서로 다른 텍스트를 기반으로 번역한 까닭에 많은 부분에서 서로 상이한 구절들이 많고 결국에는 교리까지 완전히 틀려지게 되어 버린다. 따라서 '한글개역판' '공동번역판'등의 성경을 고집하는 기득권 세력은 한글 '킹제임스'성경(1994)을 고집하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킹제임스'성경측은 '한글개역판' 등의 성경을 사탄이 쓴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누가 옳을까? 어차피 '원전'이 없는 까닭에 이 번역판이 옳니 저 번역판이 옳니 하며 싸울 수밖에 없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일 것이니 중세시대 천주교의 종교재판이나 장로교의 창시자 칼뱅(Jean Calvin)이 그와 교리를 다르게 주장하던 세르베투스 등을 모조리 처형한 것처럼 교리를 다르게 주장하는 자들을 모조리 죽여 없앨 수 없는 작금에 와서는 그 시시비비를 가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5. 성서 번역의 문제

         

        Bible은 원전이 없는 번역판이 존재할 뿐이며 이 번역판을 다른 언어로 번역할 때 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다음은 「번역의 이론과 실제」(나이다&타버 共著, 김용옥譯)의 내용 중 몇 가지만을 발췌한 내용이다.

        ▷ 단어라는 것은 단순한 의미의 점이 아니며 의미의 면이다. 따라서 다른 언어체계에 있어서 상응하는 단어들의 의미론적 면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원문의 한 단어를 번역하는데 있어서 수신자언어에 합당한 단어를 선택하는 일은 고정된 축어적 일치성 즉 한 단어를 사전적으로 대응시키는 것보다는 그 문맥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보디"(몸)을 뜻하는 희랍어 단어 "소마"(soma)가 개역표준판(RSV)과 새영어성서(NEB), 그리고 오늘영어판(TEV)에서 번역된 몇 개의 용례를 들어보면 일목요연하게 설명될 수가 있다.

         

         

        RSV

        NEB

        TEV

        마태 6:25

        몸

        몸

        몸

        마가 5:29

        몸

        그녀 자신

        그녀 자신

        누가 17:37

        몸

        시 체

        죽은 몸

        로마 12:1

        몸

        너희 바로 그 자신

        너희 자신

        골로 2:11

        (육체의) 몸

        천한 성품

        (죄스러운) 몸

        ▷ 축어적 직역이 과연 완전히 정당한가? 그러한 직역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지거나 곡해되지는 않는가?(많은 경우에 부자연스러운 동시에 곡해된다) 맥락적 일관성과 축어적 일관성의 대조는 희랍어 단어 사르크스(sarks, 축어적으로는 "flesh"[살])의 몇 용례의 번역을 대조해보면 명백해진다.

         

         

        RSV

        NEB

        TEV

        누가 24:39

        살

        살

        살

        고후 7:5

        살

        피로한 몸

        우리

        로마 11:14

        살

        나 자신의 종족의 사람들

        나 자신의 종족의 백성

        사도 2:17

        살

        모두

        사람

        로마 8:3

        살

        천한 성품

        사람의 성품

        고후 10:3

        살

        연약한 사람

        세속‥‥세속적

        고전 1:26

        살

        인간의 기준

        인간적 관점

        ▷ 누가가 기록한 산상수훈에는 그냥 "가난한 자"로 되어 있지만,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심령이 가난한 자"로 되어 있다. 누가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직접 지칭하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마태는 그것을 정신적 문맥에 집어 넣고 있다.

        우리말 성경의 문제를 살펴 보자.

        신학자 나채운씨의 말에 의하면 우리나라 교회에서 가장 많이 쓰고 있는 한글 개역판 성경에는 문법이 틀리거나 말이 잘 통하지 않거나 부적당한 말이 많아 고쳐야 할 곳이 대략 10,000개 정도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성경이야말로 우리 나라의 수많은 번역서적 중 가장 엉터리 번역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의 '한개'(한글개역판)와 '공번'(공동번역판)의 문장을 한 번 비교해 보자.

        고린도후서 3:10

        +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한개)

        + 과연 지금의 이 영광은 엄청나게 큰 것입니다. 이 영광에 비긴다면 과거의 그 영광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공번)

        ▷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한개)

        남을 판단하지 말아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 받지 않을 것이다.(공번)

        남을 심판하지 말라 그러면 하나님도 너희를 심판하지 않을 것이다(TEV)

        한글개역판을 보면 남에게서 비판받지 않기 위해 남을 비판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글개역판의 번역은 철저한 오역(誤譯)이다. 마7:1의 한글개역판 문장을 읽고 오해하지 않을 자는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공동번역판의 번역조차 TEV만큼 선명하게 되어 있지는 못하다.

        ▷ "하늘 나라"는 장소일까? 아니면 사건일까?

        위에서 언급한 것들은 그래도 번역의 사소한 문제라고도 보아 줄 수 있으나 "하늘 나라" 또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련된 번역은 아주 중대한 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번역의 이론과 실제」의 저자 나이다(Nida) 박사는 "하나님의 나라" "하늘 나라"는 "장소"라는 의미로 번역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라는 표현은 너무도 자주 사람들에게 오해되어 왔다. '나라'(kingdom)가 명사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곧 반성 없이 그것은 '대상'을 지시해야만 한다고 상정한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장소'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실상 그것의 제일차적인 지시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the rule of God)을 지시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다! 이러한 문제는 '하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라는 구문에 오면 더욱 첨예화된다. 이 경우는 "하늘"이 "하나님"의 대용어(代用語,substitute)로 쓰이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이라는 말에 대한 유대인들의 금기적 습관의 결과일 뿐이다. 그리고 "하늘"은 보통 일종의 장소술어(place term)로 간주된다. 이 결과 나타나는 경향은 이 구를 "하늘에 있는 나라"(the kingdom which is in heaven)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인데 이것은 명백히 착오적인 것이다."

        그리고 도올 김용옥 선생은 여기에 역주(譯註)를 달았는데 다음과 같다.

        " 여기서 나이다가 말하고 있는 문제는 번역의 문제 혹은 해석의 문제가 신앙의 근본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신학적 문제를 본질적으로 제기한다는 좋은 실례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이러한 나이다의 발언의 입장은 현금 우리 나라의 하늘나라에 들어가려고 광분하고 있는 일부 기독교도들에게 충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 우리 나라의 부흥적 성격을 가지는 대부분의 교회는 묵시사상을 팔아서 장사를 하고 있다. 인류역사상 이러한 묵시운동(apocalyptic movement)은 지속적인 것이며, 그중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로 '여호와의 증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최후의 심판의 날에 하늘나라에 들어갈 티켓이 이제 거의 다 팔렸다고 주장한다. 몇 자리 안 남았으니 빨리 사라는 것이다. 만원사례가 육박한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하늘나라는 완전히 하늘에 붕 떠 있는 나라이며, 우리가 들어가야 할 '곳'이다. 우리 나라의 대부분의 부흥목사가 돈벌어 먹는 것도 이 마지막 티켓을 남발하여 팔아먹기 때문인 것이다. 나는 천국이 그 따위 '곳'이라면 람보를 보러 극장에 암표를 사서 들어가듯이 암표라도 사서 들어가겠다. 만원사례 걱정없다! 하늘나라는 대상, 즉 장소가 아니라 행위이며 사건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신화적 은유(mythical metaphor)이다. 이 세계를 버리고 하늘에 붕 떠있는 나라로 도망쳐 들어가려고 하지말고 이 세계에서 나라를 행위하라! 무지한 동포들이여~."

          영어성서(RV) 번역위원인 웨스트 콧(Westcott)도 "천국은 장소(place)가 아니라 상태(state)"라고 말했는데 다음의 『바이블』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어떤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을 것이다.

        +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 17:20∼21)

        ▷ 신자(信者)에게는 무덤, 불신자(不信者)에게는 지옥으로 번역?

        다음의 내용은 인하대 정동수 교수의 홈페이지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리스어 '하데스'(Hades)라는 단어를 살펴봅시다. 이 단어는 "죽은 자가 가는 곳"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죽은 자의 몸이 가는 곳을 의미할 때는 '무덤'(Grave)으로, 믿지 않고 죽은 자의 혼이 가는 곳을 의미할 때는 '지옥'(Hell)으로 번역됩니다. 이 특정한 단어는 [그리스어 신약성경]에서 모두 11번 쓰였으며, [킹제임스 성경]은 그 중 10번을 '지옥'(Hell)으로 그리고 나머지 1번은 '무덤'(Grave)으로 번역했습니다."

        소위 성령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번역은 이렇게 하는 것인가? 기독교인들은 성서 번역도 영감을 받아서 한다고들 운운하는데 참으로 웃기는 얘기가 아닐 수 없다. 한글개역판 성서의 엉터리번역을 보면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 소리는 얼마나 주관적이고 자의적으로 내뱉는 소리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재까지 출판된 영어성경 번역본의 수는 완역된 것이 135개이고 신약만 번역된 것이 293개에 이른다고 하는데 영감을 받아서 번역을 한 것이 맘에 안 들어 자꾸만 개정을 하거나 새로운 번역판을 내고 있단 말인가?

        ▷ 영어성서 번역자들이 성서를 바라보는 태도

        그러면 과연 영어성서를 번역한 번역위원들은 성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다음은 성서의 영어번역(RV,ASV,NASV,RSV,NRSV,NIV)에 참가했던 번역위원들의 교리적 입장을 정리한 것이다.  (다음의 내용은 정석광씨의 석사학위 논문 <현대 영어성경 번역본의 신학적 입장 및 번역위원에 관한 연구>를 참조하였음)

         

         

        중요 교리

        번역 위원

        성경의 무오성 혹은 영감성을 믿지 않음

        B. F. Westcott (RV) F. J. A. Hort (RV) 

        Vance Smith(RV) George A. Buttrick (NCC-RV) 

        Edgor J. Goodspeed(RSV) Clarence T. Craig (RSV) 

        Frederick C. Grant (RSV) James Moffatt (RSV) 

        Julius A. Brewer (RSV)

        예수의 처녀탄생을 믿지 않음

        Harry Emersion Fosdick (NCC-RSV)

        예수의 대속적 죽음을 믿지 않음

        F. J. A. Hort (RV) Vance Smith (RV) 

        Henry Sloane Coflin(NCC-RSV) 

        Harry Emersion Fosdick(NCC-RSV) 

        Edgor J. Goodspeed (RSV)

        예수의 육체적 부활을 믿지 않음

        B. F. Westcott (RV) Edgor J. Goodspeed (RSV) 

        Clarence T. Craig (RSV)

        예수의 육체적 재림을 믿지 않음

        B. F. Westcott (RV) Vance Smith (RV) 

        Clarence T. Craig (RSV)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지 않음

        B. F. Westcott (RV) Vance Smith (RV) 

        Edgor J. Goodspeed (RSV) Henry F. Cadbury (RSV)

        성령의 인격성을 부인함

        Vance Smith (RV)

        성경에 기록된 기적을 믿지 않음

        B. F. Westcott (RV) Edgor J. Goodspeed (RSV) 

        Henry F. Cadbury (RSV) Walter Rusell Bowie (RSV) 

        Fleming James (RSV)

        문자적 의미의 천국을 믿지 않음

        B. F. Westcott (RV)

        문자적 의미의 지옥을 믿지 않음

        F. J. A. Hort (RV)

        마귀의 인격성을 부인하거나 존재여부를 의심

        B. F. Westcott (RV) F. J. A. Hort (RV) 

        Edgor J. Goodspeed (RSV)

        침례 중생을 믿음

        F. J. A. Hort (RV)

        오직 믿음이 아닌 다른 방법에 의한 구원 인정

        James Moffatt (RSV)

        진화론을 인정함

        B. F. Westcott (RV) F. J. A. Hort (RV)

          이들 번역위원들 중에서 대표적으로 두 사람만 살펴보자.

        ⊙ 웨스트콧 (Brooke Foss Westcott, 1825-1901)

        웨스트콧은 창세기 1-3장을 문자 그대로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것을 믿는 사람들을 비난한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오늘날 어느 누구도 창세기의 첫 세 장이 문자 그대로의 역사를 제공한다고 믿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눈을 뜨고 그것을 읽는 사람 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지 난 이해할 수 없다. 게다가 그 세 장의 말씀들이 우리에게 복음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지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모세나 다윗도 시적 인물들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으며, 성경에 나타나는 기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의 성경 안에 있는 기적들에 대한 입장은 다음의 말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나는 기적 이야기 같은 것은 읽은 적이 없으나 직관적으로 그런 것은 일어날 성싶지 않은 일임을 느낀다. 그리고 그 이야기 안에서 그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을 발견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성경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천국을 글자 그대로의 장소가 아니라 단지 어떤 상태로 믿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그의 말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천국은 장소(place)가 아니라 상태(state)이다". "천국은 우리 안에 놓여 있다. 그리고 생각, 회상, 동경을 위하여 조용한 휴식을 취함으로써, 우리는 좀 더 거룩한 상태(즉 천국)를 계속해서 신선하게 지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습관적으로 그것을 숨쉴 수 있다". "우리는 인내, 확고한 결심, 믿음, 그리고 노력을 통해 우리 주변의 천국 즉 우리의 지상생활의 영광을 희망하는 바이다".

        그는 성경이 오류 없는 책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는 호르트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편지를 쓴 적이 있다. "나는 성경 전체를 뒤덮고 있는 성경의 무오류라는 단어를 부인하오".

        웨스트콧은 예수 그리스도 사역의 속죄의 효능은 그분의 죽음에 기초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의 모든 삶"에 기초해 있다고 믿었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선재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그의 신성을 부인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관련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자(the Son of man)를 반드시 '그리스도'와 동일시할 필요는 없었다. 성경은 예수가 자기 자신을 영화롭게 한 적이 없으며, 다만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예수는 결코 직접적으로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는다."

         

        ⊙ 호르트 (Fenton John Anthony Hort, 1828-1892)

        그는 웨스트콧과 마찬가지로 성경이 오류가 없는 책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는 "만일 당신의 협조를 얻기 위해 신약성경의 절대적 무오류성이 필수 불가결한 것이라고 확신한다면, 유감스럽게도 나는 당신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는가 하면 "난 당신이 성경의 절대 무오류성을 지지하는 한, 당신과 함께 갈 수 없소."라고 말했다. 호르트는 성경 사본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원문들"은 국부본(Local Text)과 일치하며, 이 국부본은 4세기에 안티오크에 있는 시리아교회에 의해 편집된 것으로 바로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보편적 본문(Universal Text)이라고 했고, 이러한 보편적 본문이 교회의 공회에 의해 사람들에게 강요되었다는 이론을 주장했다.

        그는 또한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죽음을 거부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의 공의가 각 개인의 죄에 의한 고통 없이 어떻게 만족될 수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또한 "널리 알려져 있는 대속의 교리(the doctrine of substitution)는 비도덕적이며 유물론적인 위조품"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호르트는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가르침들을 이단으로 생각했다. "확실히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기까지 고통 당하셨다는 것보다 더 성경적이지 못한 것은 없다. 정말로 그것은 거의 보편적인 이단의 한 측면인 것이다". 그는 또한 죄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지불을 하나님보다는 사탄이 받아들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나는 사탄에게 지불된 속죄 값이라는 그 원시적인 교리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혐오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렇지만 속죄 값에 대한 교

        리가 변호되어질 수 있는 다른 형태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어떤 것도 아버지에게 지불된 속죄 값의 개념보다는 낫다".

        호르트는 에덴동산의 실재를 부인한다. "나는 '에덴동산' 같은 곳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아담의 타락도 영국의 시인이었던 콜러리지(Coleridge)가 정확히 지적한 것처럼 그의 후손들의 타락과 전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리고 그는 글자 그대로의 영원한 "지옥"에 대해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연옥에 대한 개념을 받아들였다. 다음 글이 그 사실을 설명한다. "나는 모리스가 말로써 연옥을 부인했다는 것을 당신 마찬가지로 유감스럽게 여긴다... 회개의 힘은 현생에만 제한되어 있지 않다". "나는 불에 의해 깨끗하게 되는 연옥에서의 정화라는 개념이 성경이 내게 가르쳐주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벌(Divine chastisements)과 분리해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기독교인들의 성서를 보는 잘못된 태도

        왜 영어성서 번역자들은 성경의 무오성 혹은 영감성 등을 믿지 않았을까?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인들의 성서를 보는 네 가지 태도를 알아야 문제가 풀리게 된다. (아래의 네 가지 태도에 대한 글은 인하대 정동수 교수의 글을 참조했음)

        A) 자유주의에 속하는 사람들은 성경이 하나님에 관해서 사람들이 쓴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성경에 기록된 창조와 이적들은 믿을 수 없는 것이며, 동정녀 탄생과 피의 속죄, 부활 등의 근본적인 믿음 자체도 수용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아닌 인류의 4대 성인 가운데 한 사람정도로 여긴 슈바이처나 도올 김용옥 등이 아마 여기에 속할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성경을 단지 세상의 고대 문서와 같이, 또는 조금은 다른 가치를 부여하는 정도로 판단한다.

        B) 신정통주의에 속한 사람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또 그 말씀을 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성경이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앙의 문제를 제외한 역사적, 과학적 진술은 오류를 지니고 있으며, 각각의 구체적인 사실 진술에 있어서도 오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성경은 모든 문제에 있어서 판단의 절대기준이 되지 못하며, 권위를 지니지 못한다.

        C) 보수주의에 속한 사람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역사적, 과학적 사실뿐만 아니라 초자연적인 기록에 있어서도 절대 오류가 없다고 믿는다. 그 이유는 성경이 축자적으로, 즉 글자 하나하나에 영감을 받아서 기록되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최초에 기록된 원본만이 온전한 성경이고 필사본이나 번역본은 온전한 성경일 수 없다는 견해를 갖고 있어서 최초의 원본이 없어진 오늘날에는 처음과 같은 권위를 지닌 성경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여러 번역본들에는 삭제되고 첨가된 단어들과 구절들이 들어 있음은 물론 오역된 곳이 여러 곳 있다. 현재 사용되는 성경들을 비교해 보면 신구약 전체에서 각 성경들은 약 30,000군데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개역 한글판 성경>과 <표준새번역>은 둘 다 대한성서공회에서 출간했지만 교리에 있어서 전혀 다르게 가르치는 차이를 많은 구절에서 드러내고 있으며, 똑같은 <개역 한글판 성경>에도 일반용과 침례교용이 다르게 되어 있다.

        D) 극단적 보수주의에 속한 자들로서 현재의 성경 즉, 필사본이나 번역본도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책으로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는, 온전한 성경이라고 생각한다.

        위의 네 가지 태도 중에서 유럽이나 미국에는 A나 B와 같은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 위의 영어성서 번역자들도 이러한 부류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는 C나 D와 같은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유난히 많은데 그 원인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성서비판에 대한 정보를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앞의 구약성서의 형성사에 대한 박창환 교수나 박종수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서 알 수 있듯이 성서에는 분명 똑같은 사건에 대해 서로 틀리게 얘기하는 부분들([2부] 바이블의 모순과 오류 참조)이 많이 있다. 이러한 이유는 여러 문서들(J문서-야훼이스트 사료층, E문서-엘로히스트 사료층, D-신명기 사료층, H문서-Holiness Code, P문서-제사적 사료층등)의 이야기들이 결합되어 있다 보니 발생할 수밖에 없는 문제인 것이다.

        성서에는 서로 모순되는 내용의 여러 문서들(J문서, E문서, D문서, H문서, P문서 등)이 혼합되어 있다. 그렇다면 성서를 보는 태도는 A나 B와 같은 태도가 오히려 정당하다 할 것이다. 따라서 앞의 영어성서 번역자들이 성서의 무오성을 믿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위와 같은 내용들은 신학대학에서 분명히 배우는 내용들이다. 그래서 그런 내용들을 책에도 쓰고 있고 인터넷에도 올려 놓은 것이다. 학자들은 그래도 솔직한 편인 것이다. 그러나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난 후 목사가 된 자들은 이러한 내용을 알면서도 성서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져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는다고 신도들에게 사기를 치고 있다. 한 마디로 비양심적인 사람들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순진한(?) 신도들은 목사의 말만 믿고 성서에 있는 내용은 모두 다 역사적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은 지구가 평평하다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서에 그렇게 쓰여 있다는 것이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이미 증명된 사실인데도 성경 내용하고 틀리니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서가 일점일획도 안 틀린다는 미신을 믿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인 것이다.

        미국에서는 이러한 자들이 일부에 불과하지만 우리 나라는 거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미신에 감염되어 있는 상황이다. 그들은 목사의 얘기 외에는 눈도 감고 귀도 막는다. 가수 조영남(미국에서 목사 자격증 획득)이 최근에 쓴 책 <예수의 샅바를 잡다>에서 "죽었던 예수가 다시 살아나고 부활하고 승천했다는 얘기가 전설이나 신화가 아니라 승승장구로 승인되는 지구상의 유일한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라고 왜 얘기했겠는가? 부시맨들이 하늘에서 떨어진 콜라병을 대하는 태도나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Bible을 대하는 태도는 마찬가지 아닌가? 한마디로 우리 나라의 기독교인들은 현대를 사는 부시맨의 후예들과 다름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부] 바이블은 창작인가? 표절인가?

          1. 구약성서는 창작인가? 표절인가?

            서구문화의 근원을 보통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두 개의 서로 다른 연원에서 찾았다. 그러나 최근의 고고학의 발굴 결과로 수메르 문화가 나타나면서 두 근원이 수메르에서 나왔음이 밝혀졌으며,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수메르가 가장 오래된 문화를 창조한 주인공임이 밝혀졌다. 구약성서의 에덴동산의 모델, 노아 홍수, 모세율법, 욥기의 비극, 시문학 등이 모두 수메르에서 나왔음이 밝혀졌다.

            수메르어의 세계 권위자인 미국의 크레머 교수는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한다」라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수메르어는 고대 히브리 문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고로 설형문자로 씌어진 문서를 복원하고 해독하면 수메르의 신화가 「구약성서」내용의 대부분의 원형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수메르의 우르 3왕조의 창시자 우르남무가 공포한 법전은 법전역사상 최초의 것으로 이보다 250여 년 후에 쓰여진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의 근간이 되었으며 앗시리아 법과 힛티사람들의 법은 물론 구약성서 모세법의 가장 기본을 이루었다. 수메르인들은 또한 안식일 제도와 한 달이 4주가 되는 제도도 만들었다.

          ▣ 창세기의 원형

            구약「창세기」의 장소적 배경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에 있었을 뿐 아니라, 그 이야기 자체도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창세 신화를 엮어 새롭게 번안하고 개작한 것이었다.

            「창세기」의 태초 이야기에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신화 가운데 수메르의 창조신화인「지우쑤드라의 홍수 이야기」와 바빌론의 창조신화인「에누마 엘리쉬」에 담긴 주제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즉 천지창조에서 인간 창조, 에덴동산, 도시의 건설, 계보, 인간의 타락, 끝내는 홍수로 이어지고 홍수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축복받는 계약으로 끝난다.

             

            수메르의 「지우쑤드라」

            ( ) - 인간창조-에덴-도시-계보-홍수-축복-( )

            바빌로니아의「에누마 엘리쉬」

            천지창조 축복 활

            구약「창세기」2~8장

            인간창조-에덴-도시-계보-홍수-축복

            구약「창세기」1~9장

            천지창조 홍수-축복 무지개/활

            먼저 천지창조에 대한 것부터 살펴보면 구약의 창세기에는 천지창조의 시작에 물(대양)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바빌론의 천지창조설을 그대로 따온 것이다.

            바빌론창조신화에는 바다의 티아맛이라는 여신과 육지의 말둑이란 남신과의 싸움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는 구약성서의 창조설화에 그대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구약 창세기는 물을 혼돈, 흑암, 즉 "테홈(Tehom)"이라 하여 "티아맛"과 그 어원을 같이하고 있다. 그래서 구약성서에서도 야훼 엘로힘 신이 혼동을 쳐 우주를 창조했다고 한다.

            그리고 「창세기」1:6~19의 내용인, 창공을 만들어 달과 해와 별을 두었다는 이야기는 「에누마 엘리쉬」에도 나온다. 티야마트의 주검을 둘로 갈라 하늘과 땅을 만든 과정은 「창세기」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지만, 창공을 만든 뒤 그곳에 별, 해, 달을 세우고 이를 절기와 날을 세는 징표로 삼았다는 것과 아래의 물을 모이게 하여 육지와 바다가 생기게 했다는 것은 똑같다. 게다가 '안식일'의 발상도 수메르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아카드어 '샤파투'는 바빌로니아에서 정결례를 행하는 종교일이었는데 이 '샤파투'에서 이스라엘의 안식일을 뜻하는 '샤바트'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다. 바빌로니아의 전승에 따르면 정결례를 행하는 '샤파투'는 "신의 심장이 쉬는날"이라고 해석했다. 즉 신이 쉬는 날이 안식일인 '샤파투'였고, 이스라엘인들은 이를 히브리어로 음역하여 '샤바트'라고 부른 것이다.


            참고로 「에누마 엘리쉬」와 「창세기 1장」을 좀 더 구체적으로 비교해 보자. 한마디로 창세기 1장의 창조신화는 바빌로니아의 창조신화 「에누마 엘리쉬」를 개작한 것이다.

             

             

            에누마 엘리시

            창세기 1장

            신과 우주적 질료가 동시에 존재하며 양자 모두 영원함

            신과 우주적 질료가 각자 독립적으로 존재함

            원초적인 혼돈을 나타내는 바다의 여신 티아마트는 어둠에 감싸여 있음

            땅은 텅 비어 있으며 어둠이 깊은 물(테홈) 위에 있음

            마르두크가 바람을 타고 티아마트 여신을 잡으러 감

            신의 바람이 깊은 물(테홈:"에누마 엘리쉬"에 나오는 바다의 여신 티아마트와 어근이 같은 말) 위에 휘돌고 있음

            신들에게서 빛이 나옴

            빛을 창조함

            하늘을 창조함

            하늘을 창조함

            마른 땅을 창조함

            마른 땅을 창조함

            섬광체(해와 달)를 창조함

            섬광체(해와 달)를 창조함

            인간을 창조함

            인간을 창조함

            신들은 휴식을 취하고 축하함

            신은 휴식을 취하고 안식일을 정해 거룩하게 하게 함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로써 우리는 우리 나라의 1천 2백만 신도, 나아가 전 세계 17억의 인구가 믿고 있는 성서가 더 이상 신의 영감에 의해 쓰여진 오류가 없는 책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수집하고 편집하였으며 그들의 머리와 사상에 의해 덧칠해진 인간의 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성서를 맹목적으로 신앙할 것이 아니라, 성서에 담겨 있는 옛 이스라엘 사람들의 종교적 사상은 무엇이며, 그것이 오늘날에도 가치 있는 것인가를 심사숙고하여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이를 합리적으로 연구하여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여 인류의 한 고전(古典)으로서, 인류가 축적한 한 지혜의 산물로서 올바로 자리매김해야 할 것이다. [ 에누마엘리쉬와 창세기1장의 비교는 석동신著<창세기와 히브리신화>(근간)의 내용을 그대로 발췌한 내용임 ]

          ▣ 인간 창조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중 바빌로니아의 홍수 이야기인 「아트라하시스」에는 죄짓고 처형당한 신의 살과 피에 점토를 섞어 사람을 만드는 이야기가 나온다. 흙으로 사람을 만드는 발상은 동일한데 여기서 구약의 내용과 차이가 있는 점은 "죄지은 신의 살과 피가 결국 사람의 혼이 되었다"는 부분이다. 그러나 구약성서에서도 "살의 혼은 피에 있다"[레위기 17:11]고 풀이하여, 피가 사람의 혼이라고 해석한다. 따라서 「레위기」의 해석을 염두에 두면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내용중 구약성서에서 배제한 것은 "죄짓고 처형당한 신으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부분뿐인데 이러한 '인간창조와 죄의 연관성에 관한 신화'가 구약성서에서는 정결한 염소의 피를 제단에 뿌리는 '속죄례'라는 종교적 관습으로 실행되었으며 '속죄 신학'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속죄례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어 "세상의 죄를 치워 없애신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는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여기서 "죄지은 신의 피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인간창조 신화'가 살아있음을 볼 수 있다.

            또 왜 남자의 갈비뼈에서 여자가 만들어졌는가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신학자, 종교가, 학자가 논쟁을 벌여 왔으나 최근에 수메르의 설화에 나오는 신 엔키와 여신 니프르사구에 관한 자료가 발견되자 완전히 해명이 되었다. 수메르어로 '티'란 말은 '갈비뼈'와 '생명을 주다'라는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수메르의 물의 신 엔키와 갈비뼈의 통증을 치료하기 위해서 태어난 여성은 닌티라 부른다. 이것은 '갈비뼈의 여인' 또는 '생명을 주는 여인'이라는 뜻이 있다. 결국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는 구약성경의 이야기도 수메르신화에서 나온 것이다.

            세계에서 몇 십 명 정도에 불과한 수메르어 전공자의 한 사람이며, 현재 서강대학교 수도자대학원에서 구약성서를 가르치고 있는 조철수 박사의 얘기를 들어보면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창세기」의 '여자가 태어난 이야기'에 따르면 야웨는 남자의 갈비뼈 중 하나를 뽑아 여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잘 알려진 고대 수메르신화의 한 부분을 히브리어로 번안한 것이다."

          ▣ 에덴동산의 모델

            기독교의 에덴동산 이야기는 아주 오랜 옛날 수메르의 딜문(Dilmun)동산의 신화로부터 차용한 이야기이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지키게 하기 위해 아담을 창조해 놓고는 늘 어떻게 하면 아담을 좀 즐겁게 해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데, 이건 아주 오랜 옛날 수메르로부터 차용한 이야기이다. 수메르 신화에 보면 신들은 누군가가 동산을 돌보고 필요한 먹거리를 지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한 사내를 창조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창세기>2, 3장에 나오는 신화의 배경은 바로 수메르 신화인 것이다.

            조철수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동산'은 수메르어 명사인 gan₂eden(들판의 일궈놓은 밭)과 같은 단어이다. '들판'이나 '들판의 일궈놓은 밭'의 수메르어 보통명사가 창세기에서는 고유명사로 사용된 것이다. 또한 수메르 이야기에 사람들이 땅에 기는 것들(즉 뱀)과 들짐승과 서로 즐겁게 살았다는 부분도 창세기 2-3장에 나오는 아담(사람)이 온갖 들짐승들에게 이름을 불러주고 뱀과도 서로 말을 주고 받으며 살았다는 이야기와 관련이 있다."

          ▣ 카인과 아벨 이야기 - 농경민족과 유목민족의 투쟁

            '카인과 아벨 이야기'에서 단편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는 당시 사회 상황은 농부와 목자 사이에 갈등이 심했다는 점이다. 농부와 목자의 갈등에 관한 이야기도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작품에 자주 나온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몇세기에 걸친 농경민족과 유목민족의 투쟁이 그 배경이 되고 있는데 이 형제 살인 이야기의 원형은 고대 오리엔트 메소포타미아의 목축신 두무지(다므스스)와 농경신 엔키무드의 투쟁 이야기이다.

            성서에 보면 농부(카인)와 양치기(아벨)가 반목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당하는 것은 농부이다. 이것은 농경문화권을 정복하고 피정복자인 농경민들을 욕보인 수렵민족, 혹은 유목민족의 신화가 반영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성서 문화에서는 승자가 되는 쪽, 선한 쪽은 늘 둘째 아들이다. 둘째 아들은 나중 온 자 즉, 히브리인을 상징한다. 둘째 아들이 그 땅으로 왔을 때 이미 그 땅에는 맏아들, 즉 가나안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카인은 농경에 기초를 두고 있는 당시의 도시문화를 상징하는 것이다.

            왜 카인이 여호와에게 선택을 받지 못하였는지 충분히 이해가 갈 것이다. 만약 오늘날 가나안 민족이 히브리인들을 몰아내고 역사의 승자가 되었다면 이 유대의 민족신 '여호와신' 대신에 가나안 민족신인 '바알신'이 자리할 것이고 농부가 양치기를 밀어내고 선택받는 스토리가 채택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신화'야말로 역사의 거울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된다.

            농경민족과 유목민족의 이러한 갈등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채 Bible을 읽는 다면 '카인과 아벨 이야기'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가 없다.

            농사를 지어본 사람이면 잘 알 것이다. 농사짓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얼마나 심한 육체적 고통과 수련이 따르는가를 ―. 인류에게 있어서 "농경"이란 "현재적 고통"을 "미래적 쾌락"을 위해서 참는 "이성의 발전"이 없이는 발생하지 않는다.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 열심히 한눈 팔지 않고 모든 육체적 고통을 인내하면서 가을의 수확의 기쁨을 위하여 노동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또 수확을 저장하여 겨울을 넘기는 준비도 해야 한다. 이러한 계절의 변화에 따른 주도면밀한 사고력이 없이는 농경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신중함"이란 곧 인간의 "이성"의 발전의 원초적 양태이며 곧 "농경의 질서"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성적 질서 속에서만, 그러한 농경의 질서 속에서만 인간은 살 수가 없다. 인간은 이러한 이성적 질서로부터 어떠한 "비이성적 해방"을 추구하게 된다. 농경문화에 있어서 이러한 해방의 최초의 문명적 산물은 바로 "술"이었다 그리고 또 "色"이 있었다. 우리말에 항상 "酒色"이라는 말이 쌍을 가지고 나타나는 이유는 바로 이 두 가지가 인류문화에 가장 원초적인 해방을 나타내는 보편적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酒色"에서 "酒"에 대한 종교적 예배가 곧 희랍의 농경민족에게서 발전된 바카스예배(Bacchilc Cult)이며, "色"에 대한 종교적 예배가 곧 가나안 농경민족의 바알의 축제 즉 혼음의 축제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바카스 예배와 바알 예배가 우리민족에서는「東夷傳」의 영고(迎鼓)나 동맹(東盟), 그리고 솟터의 제사 속에 혼합되어 나타나고 있다. 「東夷傳」의 기사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월과 시월에 國中大會하여 飮酒歌舞하였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축제의 모습이며, 「東夷傳」의 기자들은 "其俗淫"이라 하여 그 풍속이 음란하다고 적고 있다. 당시 고도의 제국문명의 유교독존의 세뇌를 받은 중국의 지성의 눈에는 한민족(韓民族)의 모습이 매우 "음난"하게 보였던 것이다. (마치 이스라엘민족의 사사들이 가나안의 바알축제를 그렇게 본 것처럼....... 그러나 이것을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윤리적 구조의 틀 속에서 바라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 이러한 酒와 色의 축제는 희랍의 바카스축제(Bacchic cult), 가나안농경민족의 바알축제, 중국의 『시경(詩經)』, 우리나라의 견우,직녀의 신화 등에도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며, 농경문화의 매우 중요한 전인류적 보편종교양식이다.

            『구약』의 「사사기(士師記)」는 한마디로 유목문화와 농경문화의 대립·마찰·갈등을 표현하고 있는 인간실존의 현장이며, 인류사의 보편적 패턴을 나타내고 있다. 모세나 여호수아에게는 농경생활의 안락이나 그에 뿌리박고 있는 고도의 문명 그 자체가 저주스러운 것이다. 즉 어떤 의미에서 문화의 접촉에서 오는 초기현상적 칼춰쇼크(culture-shock)가 反文化的 형태로 표출되고 있다. 사사들의 임무는 이러한 이스라엘민족의 갈등, 즉 고도로 성숙한 가나안문화의 유혹과, 또 문명에 대한 저주와 방황하는 자유로 얼룩진 유목생활에 대한 참신한 동경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민족적 갈등으로부터 구출하고 야훼의 새로운 인식을 불러일으키는 작업이었다. 즉 이스라엘민족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새롭게 접촉한 바알신앙문화는 또한 참신한 유혹이었으며, 특히 농경의 생산예찬과 그로 인한 성적 해방은 그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본능적 유혹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종교적 지도자들에게 있어서는 그러한 유혹은 하나의 타락이며, 야훼에 대한 배반이며, 계약의 위약이었다. 이러한 갈등은 야훼자신이 다음과 같이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 야훼께서는 몹시 화가 나셔서 이렇게 생각하셨다. "내가 이 백성의 조상들과 계약을 맺을 때 명령한 대로 이 백성은 살지 않는다. 통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여호수아가 채 몰아내지 못하고 죽은 민족들을 이 백성 앞에서 결코 몰아내지 않으리라. 그들을 시켜 이스라엘을 시험해 보리라.(사사기 2:20∼23 공동번역판)

            이것은 야훼가 결코 몰아내지 못한 갈등이다. 그리고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이란 현존재의 시험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만 하나님의 역사로 보고 우리 민족의 역사는 하느님의 역사로 보지 못하는 바보새끼들은 더 이상 역사를 운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민족에게 하느님이 있었다면, 「동이전(東夷傳)」에도 하느님이 있고 『시경(詩經)』에도 하느님이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민족에게 나타났던 갈등은 어떠한 문명에서든지 볼 수 있는 보편적 인간의 갈등의 이스라엘적 표현에 불과하다.

          ▣ 노아의 홍수

            구약성경의 노아의 홍수는 유태교나 기독교의 성서가 씌어지기 2,000∼3,000년 전에 씌어진 수메르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에서 따 온 것이다. 구약성서의 저자가 살던 땅은 폭풍우나 홍수가 없는 지방이다.

            성서의 대홍수 이야기가 성경을 편집한 헤브루인들의 독창적인 작품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이는 영국 국립박물관의 조지 스미스에 의해 바빌로니아의 서사시 <길가메시>의 열 한 번째 점토판이 발견되고 판독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바빌로니아의 대홍수 신화도 사실은 수메르(지우쑤드라의 홍수이야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

            홍수 신화의 점토판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 기독교계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일신 여호와가 인류의 오만함을 징벌하기 위해 내린 노아의 대홍수가, 사실은 타민족(수메르) 신화의 복사판이라고 해서는 모세의 십계가 강조하고 있는 '도적질하지 말라'는 계명의 체면이 서지 않는다. 더군다나 모세와 연관된 것에까지 표절의 냄새가 풍기자 로마 교황청은 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로마교황청은 어떤 곳인가? 교황을 필두로 한 수많은 성직자들이 완고함으로 무장한 보수의 발원지가 아니던가? 예컨대 멀리로는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하는 갈릴레이를 이단으로 몰아 투옥하였으며(1633년), 근세에는 1859년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하자 분개한 나머지 졸도한 성직자가 나올 정도였다. 교황청의 입장은 너무도 분명한 것이었다. 인간은 아담을 시조로 하여 창조된 것이며 결코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진화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갈릴레이를 이단 심문에 회부한 것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잘못한 처사'라고 사과한 것은 1983년의 일이다. 갈릴레이의 명예 회복은 350년만에 된 셈이다. 그러나 그뿐이 아니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1996년 10월, 요한 바오로 2세는 놀랍게도 이렇게 공언했다. "인류의 조상은 아담이 아니라 역시 원숭이였다." 교황청은 바로 이런 곳이다.

            그런데 조지 스미스가 발견하고 해독한 점토판은 「길가메시의 서사시」라 불리는 것으로서 고대 바빌로니아의 도시 우루크의 왕 길가메시의 놀라운 모험담을 기록한 것이었다. 이 서사시에는 홍수 이야기가 들어 있는데, 여기서는 성경에 나오는 '여호와'가 '에아'로, '노아'가 '우트나피시팀'이라는 이름으로, '40일 낮 40일 밤'이 '7일 낮 7일 밤'으로, '방주는 7월 17일 아라랏 산에 머물렀다'는 내용은 '방주는 니실 산 꼭대기에 머물렀다'로 되어 있을 뿐 기본 골격은 매우 비슷하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의 비둘기와 까마귀를 날려 보내서 육지를 확인하는 내용까지도 똑같다. 아마 노아 시대의 홍수에 버금가는 대홍수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 실제로 있었던 것 같다.

            '나바라'라는 사람은 방주의 일부를 아라랏 산에서 발견하였는데 이 탐험기록을 『나는 노아의 방주를 발견했다』는 책으로 엮어 1959년에 발표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 고목재가 노아가 만든 방주의 일부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왜냐하면 노아의 홍수 자체가 수메르의 전설에서 가져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홍수 이야기는 수메르, 바빌론신화뿐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중국, 한국, 오스티악족, 캄차달족 등 중앙아시아의 알타이신화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중국의 요, 순과 고조선의 단군이 '9년 홍수'를 맞아 치수사업을 벌이는 이야기가 한·중 고대사서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최근 4천년 전의 중국 하나라 수도 유적 발굴에서 홍수로 파괴된 흔적이 발굴되었다고 한다.(중국 고고학 잡지 「문물」) 그 당시 홍수는 세계 도처에서 발생했으며, 유대민족은 이 홍수이야기를 바빌론 포로시절에 듣고서는 마치 자신들만이 겪은 것처럼 노아의 홍수이야기를 수메르의 홍수신화(지우쑤드라의 홍수이야기)의 모방인 바빌론의 홍수신화(길가메쉬 서사시)로부터 차용해서 신(神)의 섭리를 내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 아브라함과 사라 이야기의 원형 - 아카드서사시와 케레트서사시

            1929년 셰프로를 단장으로 한 프랑스의 고고학자들이 우가리트에서 발굴한 점토판에서 아카드와 케레트의 서사시가 나왔다. 아카드서사시에는 다니엘과 그의 처 사이에는 딸만 하나 있고 아들이 없다. 다니엘은 시녀 사이에 아들을 낳는다. 그후 부인 사이에 아들을 낳으면 희생물로 바치겠다고 신에게 약속하고 아들을 얻는다. 이것은 구약성서의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태어난 이삭의 이야기의 원형이다. 케레트 서사시는 왕비 프로티를 다른 왕에게 빼앗긴 케레트왕이 그녀를 되찾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도 아브람함 이야기와 같다. 구약성서가 만들어진 것이 기원전 7세기이며 우가리트 문서가 만들어진 것은 기원전 1400년이다.

          ▣ 모세 율법

            모세 오경을 모세의 저작으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경 자체의 문헌 비판에서 명백해지는데 아마도 BC 5·6세기경 바빌로니아 유치시대에 기록되고 경전화된 것으로 보여진다. 이 오경을 모세가 전한 율법이라 하여(신명기 31:9) 신약에서도 보통 "율법"이라고 부르고 있다.

            수메르의 「슈루파크의 가르침」은 히브리 성서 십계명의 5~10조항의 원형이 되었으며 "도둑질, 살인, 간음, 헛된 명세, 말다툼, 거짓 증거 등을 하지 말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십계명 중 6~10계명과 같은 맥락이며, 또한 "도둑질, 살인, 간음, 거짓 증거 등을 하지 말라"는 계명의 내용과 순서는 「출애굽기」21장 12절부터 23장 8절까지 기록된 모세법의 기본 골자와 같다. 이 가르침의 전통에서 후대의 법전들이 편찬되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편찬된 법전은 BC 2100년경에 공포된 『우르남무 법전』이며, 이보다 350년 후에 만들어진 고대 바빌론 왕조의 『함무라비 법전』의 모체가 되었다. 이 법전은 히브리 성서에 전해진 모세 계약법이나 십계명과 「잠언」 등에서 그 전통을 찾아볼 수 있으며, 인류의 법전 발달사에서 가장 근원적인 뿌리가 되었다.

            예를 들면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경구로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의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 이 「출애굽기」21장에 "상해가 생겼을 경우에, 생명은 생명으로 갚아준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갚아야 한다"는 내용이나 「레위기」의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한 사람은 그의 피를 흘려야 한다"는 구절에 잘 반영되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민희식교수는 모세와 여호와신의 이야기는 애급의 아톤신앙(一神敎)과 모세의 관계를 새롭게 편집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또 수메르 점토판의 사르곤전설에서도 모세이야기의 원형이 발견되고 있다. 바빌론을 수도로 하는 아카드왕조를 세운 왕이 바로 사르곤1세이며, 이 사르곤의 어머니는 신분이 낮은 여자였는데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이를 낳은 사실을 숨기기 위해 사르곤을 바구니에 담아 유프라테스강에 흘러 보냈다. 그 때 마침 물을 길러 나왔던 아츠키라는 여자가 이를 발견하고 물에서 건져 올렸다. 대지의 여신 이슈타르에게 아이의 가호를 빌자 여신이 직접 맡아 길렀다. 후일 사르곤이 성인이 되자 애인으로 삼음과 동시에 제사장(임금) 자리에 오르게 했다. 이것이 조지 스미스가 발견한 점토판에 기록된 내용이다. 다른 전설에 따르면 사르곤의 어머니는 이슈타르 신전의 무녀(무녀)였으나 잘못하여 임신을 했고, 신의 벌이 두려워 낳은 아이를 유프라테스강에 버렸다고 한다. 이 전설 역시 물을 길러 나왔던 여인이 아이를 구하여 키운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사르곤의 전설은 선지자 모세가 나일 강에 버려졌던 아이였으며 이집트 파라오(왕)의 딸이 건져서 궁전에서 길렀다는 전승으로 바뀌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마리아의 처녀 회임설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 처녀 출산이야기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성령에 의한 잉태- 즉 남녀간의 '정자·난자의 결합'이 아닌 방법-에 의한 임신이라는 부조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처녀출산'이 기본적으로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짜라투스트라가 창설한 '파르시교'의 교리에 따르면 - 그들의 아베스타 경전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것이지만- 지금도 출현을 기다리고 있는 구세주 사오슈안트는 처녀출산으로 이 세상에 온다는 것이다.

            신비적인 출생이 거론되는 사람 가운데는 고대 페르시아의 왕 큐로스 2세가 있다 그는 기원전 538년에 바빌론을 공략하여 '바빌론의 포로(유대인)'을 석방시킨 사람이다.

            전설적인 로마 건설자 로물루스와 레무스 쌍둥이 형제는 테베강에서 건져내어 늑대젖으로 키웠다고 한다. 로마 건설은 기원전 753년으로 알려져 있으며 로마 기원(紀元)은 이 해를 원년으로 삼고 있다. 이외에도 많이 있다. 알렉산더 대왕은 마케도니아의 필립2세의 친아들이 아니라 제우스의 번개에 의해 수태되었다고 한다. 필자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영웅이 된 자는 그의 부친이 왕족이거나 귀족 출신인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아버지를 부인하거나 '전설'을 만들어 미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예수가 전도 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양부'요셉은 이미 죽고 없었다. 때문에 예수는 '과부의 아들'로 불렸다.

            시조(始祖)탄생설화에 있어서는 대강 그 시조 이전의 부계(父系)를 설정해 놓으면서도, 그 시조의 탄생 그 자체는 그 부계와 무관하다는 구조로 나타난다. 처녀생자(處女生子), 감천생자(感天生子), 그리고 난생(卵生)의 설화 등등은 모두 이러한 부계사회를 배경으로 태어난 것이다. 중국의 시조나 성인은 모두 이러한 탄생설화를 빌리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주몽탄생설화나 또 박혁거세의 탄생설화 등등도 그렇다. 마태복음에 보면 "A는 B를 낳고"로 죽 연결되어 문자 그대로는 마치 A가 B를 생산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지만, A이고 B이고 다 남자이다. 희랍어성서나 영어성서는 모두 "A는 B의 아버지이며"의 문형으로 이어지고 있다. 계보가 우선 철저하게 부계상속의 부권사회구조를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의 감천생자(感天生子)탄생이나 은(殷)나라의 契나 주(周)나라의 后稷의 감천생자(感天生子)탄생이나 동명왕 주몽의 감천생자탄생은 이 모두가 부계혈통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음을 볼 때, 종적(縱的)인 부계사회의 권력의 절대화를 위한 수단으로 강구된, 즉 부계를 강화하기 위한 부계의 부정의 논리로 은폐된 시조(始祖)신화의 특수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즉 세속적인 계보의 혈통성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시조(始祖)의 시조적 절대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이었던 것이다.

            마리아의 처녀 수태설은 당시의 유행이라고 할 수 있다. `편모슬하에서 자란 과부의 아들'이란 당시 활약했던 예언자들의 공통적인 자격조건이었던 것이다. 예수의 라이벌이었던 티아나의 아폴로니우스도 어머니가 신의 아이를 처녀 수태했다고 알려져 있다. 아버지가 왕이나 귀족이 아닌 바에는 아버지란 존재는 오히려 장애요인일 뿐이다. 예수의 경우에도 시시한 목수의 아들이라고 알려지는 것보다는 좀더 그럴듯한 이야기를 꾸며내는 편이 유리했을 것이다.

            당시 유태인들은 자신들 나름의 전통을 가진 이교도들의 방대한 세계에 둘러싸여져 있었다. 이교도들의 전설에서는, 위대한 영웅, 즉 기적을 행하는 사람은 신의 아들이라는 것이 상당히 관례적이고 통상적인 사항이었다(사실상, 거의 필요조건이다시피 했다). 처녀는 마법적인 방법으로 신에 의해 임신을 하게 될 수 있었다―이것은 그리스 전통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원래 그렇듯, 유태인들은 유태교의 사고가 편협하고 보수적이었던 유대 지방에만 살았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의 영향이 강했던 알렉산드리아나 기타 지방에도 살았다. 그리스판 성경은 이사야의 인용구에서 "처녀"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를 사용했고, 마태오는 처녀 출생을 뒷받침하기 위해 히브리어판이 아닌 그리스어판을 따랐던 것이다. 만일 처녀 출산이 로마와 같은 이방인의 도시를 설립한 사람들을 찬양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면, 하느님의 왕국을 설립하는 사람을 찬양하는 데 사용되는 것은 그보다도 훨씬 정당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을 것이다. 마태오는 예수의 출생에 관해 두 가지 전통, 즉 다윗의 후손이라는 엄격한 유대의 전통과 처녀 출산이라는 주변 민족의 전통을 둘 다 - 서로 배타적이긴 하지만 -를 수용했던 것이다.

          ▣「욥기」

            히브리 성서에 전해진 「욥기」와 매우 흡사한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작품이 있다. 수메르어로 기록된 이 글이 쓰여진 연대는 BC 17~18세기로 보인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구약의 에덴동산, 선악과, 노아의 홍수 등 많은 내용이 다른 민족의 신화의 내용을 차용하여 주인공만 여호와신과 유대인으로 바꾸어 편집한 허구의 신화이다. 즉 유대인들은 이집트 노예시절, 바빌론 포로시절을 거치며 민족 단결의 필요성을 느꼈고 민족을 결집시키기 위하여 자기 민족만이 선택받은 민족으로 만들기 위하여 주변의 페르시아신화, 이집트신화, 수메르신화 등을 편집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가공해 낸 신화를 기반으로 한 원죄론 등의 교리는 허구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2. 신약성서는 창작인가? 표절인가?

              일본의 호리(堀堅土)교수는 그의 저서 『불교와 그리스도교』에서 ①탄생설화 ②신앙을 씨앗에 비유한 것 ③빛의 비유 ④구하면 주어라 하는 설교 ⑤의식주 문제를 걱정하지 말라는 대목 ⑥죽은 자에게 구애받지 말라는 대목 ⑦물 위를 걷는 기적 ⑧음식의 기적 ⑨병을 고치는 기적 ⑩나는 왕이라고 한 대목 ⑪무덤의 기적과 부활의 기적 등을 위시한 "많은 부분의 성경 내용의 원형이 불경에 있다"고 지적하고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 이렇게 해서 '탄생'에서 '사망'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의 전생애에 걸친 수수께끼가 바로 불교경전에 의해 해명될 뿐 아니라, 『미린다 왕문경』이라는 불경에는 그 뒤에 일어난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적'의 원형이 무엇인가를 밝혀주는 자료까지 준비되어 있다."

              그러면 불교의 불경(佛經)과 기독교의 성경(聖經)을 대조하여 장소나 인물만 다를 뿐 그 상황설정이나 이야기 전개, 가르치고자 한 교훈 등이 거의 흡사하다는 것을 상세하게 증명한 『불경과 성경 왜 이렇게 같을까(윤청광 著) 』의 내용을 요약, 대조해 보기로 한다. 불경과 성경의 말씀들을 일일히 비교, 대조해 보고 싶은 분들에게는 본서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 하늘에서 내려온 두 성자

              예수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로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과 똑같이 석가모니도 아름다운 하늘나라 도솔천에서 머물다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세상에 내려온 것으로 되어있다.[ 불경 『자타카(본생경)멀지 않은 인연 이야기』『불소행찬 탄생품』]

              우선 불경과 성경은 똑같은 출발점, '하늘'에서 시작하고 있다.

            ▣ 너무 비슷한 탄생 이야기

              ▶ 석가모니와 예수 모두 태몽을 통해서, 남녀의 동침 없이 잉태된다는 점이다. 마야부인이 여덟가지 계행을 지키느라고 그의 남편과 동침하지 않고 있었는데, 석가모니가 흰코끼리가 되어 어머니의 오른쪽 갈비뼈를 헤치고 그 태(胎)안에 들어가는 꿈을 꾸고 잉태된 것으로 불경『본생경』에 기록되어 있고, 성경 또한 요셉의 태몽에 주(主)의 사자(使者)가 나타나 성령이 임하여 마리아에게 잉태됨을 알린 이후 예수가 태어나기까지 동침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 석가모니가 태어나자마자 아시타 선인(仙人)이 왕궁에 나타났다고 불경은 기록하고 있는데, 바이블 또한 이와 비슷하게 예수가 태어나자마자 동방박사가 마굿간에 나타났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아시타 선인이 왕궁에 서린 서광(瑞光)을 보고 찾아왔듯이 동방박사는 별빛의 인도를 받아 찾아왔다.

              ▶ 갓 태어난 석가모니를 보고 아시타 선인이 "장차 부처가 되리라"고 예언했다고 불경은 기록하고 있는데, 바이블 또한 아기 예수를 본 예언자 시메온이 "주의 구원을 보았다"고 예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 불경『현우경비파리품』에는 미륵의 탄생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나라 왕이 미륵의 탄생을 두려워하여 없애고자 하였으나 도피하여 생명을 구하는 대목이 있다. 그런데 바로 이와 똑같은 이야기가 예수의 탄생과 헤롯왕의 이야기로 변형되어 성경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 불경의 『불소행찬』에는 노부인이 어린 석가모니를 보고 찬탄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성경에도 노부인이 아기예수를 보고 예수를 찬탄하는 대목이 똑같이 실려 있다.

            ▣ 소년시절의 성인될 징조

              석가모니와 예수 둘 다 어렸을 때 스승을 놀라게 할 정도로 총명하였고, 이미 성인(聖人)이 될 징조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불경『과거현재인과경』『불교성전 불전(佛典)』 성경『누가복음 2장 41∼50』]

            ▣ 책봉식과 세례식

              불경『과거현재인과경』에는 석가모니의 태자책봉식 때 강가에서 왕은 손으로 태자의 이마에 물을 끼얹고 '그대는 나의 후계자니라'하고 선언하자 하늘에서 '좋도다!좋도다!'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하늘로부터 청작(靑雀) 5백 마리가 날아 내려왔다고 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성경에도 요단강에서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할 때 하늘에서 '너는 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성경과 불경 모두 의식(儀式)이 '강가'에서 물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온다'는 점에서 이야기 전개가 똑같다고 할 수 있다.

            ▣ 카아샤파와 요한 - 선지자

              불경『과거현재인과경』『우리말 팔만대장경』과 성경『마가복음 1:4∼10』『마태복음 3:11∼14』을 보면 불경의 '카아샤파'와 성경의 '요한'이라는 선지자가 이미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있다가 더 큰 성인인 '석가모니'와 '예수'가 나타나자 선지자는 머리를 조아리며 바로 이 분이 성인(聖人)이시라고 만인에게 선언하고 있다.

              미리 준비된 선지자, 그리고 그 후에 나타나는 성인, 많은 사람들 앞에서 행해지는 선언, 장소와 이름만 다를 뿐 전개되는 이야기의 구성은 한치도 다를 바가 없다.

            ▣ 고향에서의 푸대접

              석가모니가 부처님이 되어 고향에 돌아가자 처음에 석가족들은 석가모니를 부처님으로 얼른 인정하려 들지 않은 채 '저 싯달타 태자는 나보다 나이가 어리다,조카뻘이다,손자뻘이다,동생뻘이다'하면서 경배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는 석가모니의 신통력에 친족들이 모두 인정하고 경배하게 된다.[ 불경『본생경』]

              마찬가지로 예수가 고향에 돌아 간 후 고향사람들이 예수를 구세주로 인정하려들지 않고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고 업신여기자 예수께서는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하고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셨다고 한다.[ 『누가복음 4:20∼24』『마태복음 13:53∼58』]

            ▣ 마아탕가와 사마리아 여인

              불경『마등가녀경』에서 아난다가 우물가에서 여자를 만나 물을 청한 것이나 성경『요한복음 4:3∼15』예수가 우물가에 앉아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청한 것이나 그 장소 설정과 주고받는 이야기까지도 똑같다. 마아탕가 처녀가 출가사문과는 감히 상종도 할 수 없는 천민의 딸임을 이유로 내세워 물을 떠바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나 사마리아 여자가 유대인과는 상종치 못하는 사마리아 여자임을 내세워 물을 떠바치기를 사양하는 것이나 똑같다.

              또한 아난다가 출가 사문이므로 나의 마음에는 빈부귀천 상하의 차별이 없으니 물을 달라고 한 것이나,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네게 물을 달라고 한 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생수를 주었을 것이라 대답한 것은 예수도 사람 차별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우물의 물을 매체로 해서 나중에 석가모니가 직접 마아탕가 처녀를 만나 설법을 통해 전법에 성공한 점과, 예수가 이 우물의 물을 매체로 해서 사마리아 여인을 전도하는 데 성공한 점이 똑같다는 점이다.

              또 한 가지 같은 점은 석가모니가 '애욕의 갈증으로 인하여 모든 생명은 영원히 지옥, 아귀, 축생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지혜있는 사람은 욕심을 멀리하여 애욕의 불 속에서 영원히 벗어난다'고 설법한 내용이나, 예수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설교한 내용은 똑같이 '영원히 잘 사는 길'을 뜻하고 있다.

              이와 같이 불경의 마아탕가 이야기와 성경의 사마리아여자 이야기는 지명과 인명만 다를 뿐 설정된 무대와 등장인물, 주고받는 이야기의 내용, 가르침까지도 똑같다.

            ▣ 가난한 여인의 공양과 헌금

              불경『근본설일체유부』『현우경빈녀난타품』『본생경』『잡보장경』의 '가난한 여자걸인'이야기와 성경『마가복음 12:41∼44』의 '가난한 과부'이야기는 헌금에 하는 데 있어서 그 액수의 많음을 칭찬하지 않고 액수가 적더라도 그 정성과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는데 이 이야기들은 누가 보아도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똑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죄짓기보다는 육신을 절단하라

              불경『아함경』에는 죄를 짓는 것보다는 차라리 '타는 불을 껴안는 게 나으며, 살이 찢기고 살가죽이 벗겨지고 힘줄이 끊어지고, 뼈가 꺾어지고, 이글이글 불에 단 쇳덩이를 삼키고, 불에 단 철침상에 눕는 편이 낫다'고 석가모니가 설법을 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성경『마가복음 9:42∼47』에는 죄를 짓는 것보다는 차라리 '손이 죄짓게 하거든 손을 잘라버리고, 발이 죄짓게 하거든 발을 잘라버리고, 눈이 죄짓게 하거든 눈을 빼버리라'고 예수가 설교하는 장면이 있다.

              두 성인 모두 육체의 고통을 참을지언정 죄를 짓지 말라고 하면서 죄악을 지으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경고하고 있는 점에서 똑같다.

            ▣ 물위를 걸어가는 이적(異蹟)

              불경『불전(佛典)』『아함경』『본생경 무쌍품』에는 석가모니와 그 제자가 물위를 걷는 이적을 보이고 있으며, 성경『마태복음 14:22∼29』에는 예수와 그 제자(베드로)가 역시 물위를 걷는 이적을 보이고 있다. 두 제자 모두 강한 신앙심으로 물을 건넜다는 점에서 똑같은 이야기이다.

            ▣ 신앙의 힘으로 잠재운 폭풍

              불경『자타카(본생경)』에는 배를 타고 떠난 신자들이 바다 가운데서 폭풍을 만나 파선을 당하고 사경을 헤매다가 깊은 신앙심으로 구원을 받는 이야기가 나오고 『법화경 관세음보살 보문품』에는 관세음보살을 일심으로 믿고 염하면 어떤 태풍이나 환난 속에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 내용이 있다. 마찬가지로 성경『마가복음 4:36∼41』『누가복음 8:22∼25』『마태복음 14:29∼33』에도 예수가 바다에서 제자들과 배를 타고 가다가 폭풍을 잠재우는 대목이 있다.

              불경과 성경 모두 한결같이 믿음이 강하면 거센 파도와 폭풍도 잠재울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는 점에서 똑같은 이야기이다.

            ▣ 의식주를 걱정 말라

              불경『슛타니파아타 여덟 편의 시(詩)』에서 석가모니는 제자들에게 먹고, 입고, 잠자는 걱정을 하지 말고 다섯 가지 욕심에서 벗어나 해탈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성경『누가복음 12:22∼23』『마태복음 6:24∼33』에도 예수가 제자들에게 먹고, 입고, 마시는 걱정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말하고 있다. 의식주를 걱정 말고 궁극의 목표를 추구하라는 점에서 똑같은 이야기이다.

            ▣ 곡식의 비유

              불경『아함경』과 성경『마태복음 3:11∼12』『마태복음 13:24∼30』에는 가르침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 짚이나 쭉정이가 되지 말고 알곡이 되라는 석가모니의 비유와 가르침을 듣고도 믿지 못하고 깨닫지 못해 쭉정이와 가라지가 되면 불에 태움을 당하리라는 예수의 비유가 나오는데 이는 '똑같은 발상, 똑같은 표현, 똑같은 결론 유도'라고 볼 수 있다.

            ▣ 너희에게 이르노니

              불경『율장(프리아티모옥샤)』을 보면 석가모니가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두 벌 옷이나 밥그릇마저도 두 벌을 가지지 못하게 했고, 법을 전파하고 나서 금이나 은이나 돈을 받지 말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한 번 먹고 자기로 한 집에서 한 번 이상 더 묵지 말라고 가르쳤으며 부부의 눈치가 다른 줄 알면서 억지로 앉아 있지 말라고 다짐했다.

              성경『마가복음 6:7∼13』『누가복음 9:1∼6』을 보면 예수 역시 제자들에게 두 벌 옷을 입지 말고, 금이나 은이나, 동을 받지 말라고 다짐하는 데까지는 석가모니의 다짐과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들어간 집에서 영접하지 아니했을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석가모니와 예수의 가르침이 서로 다르다.

              석가모니는 '부부(夫婦)중 어느 한쪽이라도 싫은 기색을 내거든 더 이상 폐를 끼치지 말고 나오라'고 당부한 데 반해, 예수는 '영접치 아니하거든 그 성을 나올 때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 저희에게 증거로 삼으라'고 하였으니 이는 곧 대접 못받은 분풀이로 발을 굴러 흙을 털어 버리고 '너희가 우리를 괄시했다' 하는 점을 증거하여 훗날 심판대에 혼날 것임을 암시하라 했던 것이다. 석가모니와 예수가 제자들에게 당부한 말씀은 비슷하지만 그 심성(心性)만큼은 똑같지 않음을 알 수 있다.

            ▣ 가짜 성인이 나타날 것이다.

              불경『율장(律藏)』과 성경『마가복음 13:21∼23』『마태복음 24:3∼14』에는 각각 가짜 부처님과 가짜 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이지만 끝까지 제대로 견디는 자는 각각 성불(成佛)할 수 있고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이야기가 있다. 성불(成佛)이나 구원은 각각의 종교에 있어 최고의 이상이므로 이 두 이야기는 똑같은 내용이라는 걸 알 수 있다.

            ▣ 모든 죄악은 마음에서

              불경『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법구경』에는 '악(惡)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와 다시 사람의 몸을 망친다'라고 비유했듯이 성경『마가복음 7:20∼23』에도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함으로써 같은 어법을 쓰고 있으며 악한 행위의 나열에 있어서도 살인,음란,도둑질,탐욕,속임수,성냄 등 거의가 다 똑같은 것이다. 결국 석가와 예수는 모든 죄악이 사람의 마음 속에서 나와 바로 그 사람 자신을 망친다는 경고를 똑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 장자 궁자와 돌아온 탕자

              성경『누가복음 15:11∼32』의 '돌아온 탕자' 이야기는 한 번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반성하고 돌아오면 용서해주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와 너무도 흡사한 '장자 궁자(長子 窮子)'의 이야기가 불경『법화경 신해품』에 고스란히 실려 있는 데는 아연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에서 '돌아온 탕자'는 곧 이 세상의 죄지은 사람들로 비유되고 있고 죄를 용서해준 탕자의 아버지는 곧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상징하고 있으며, 불경의 '장자 궁자'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었던 부처님의 제자들로 비유되고 돌아온 가난한 아들을 용서하고 받아주고 보배까지 안겨주는 '장자'는 곧 석가모니 부처님으로 상징되고 있다.

              '돌아온 탕자'나 '장자 궁자'의 이야기는 모두 '죄있는 자','허물있는 자'도 반성하고 믿고 따르면 용서받을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점을 똑같이 강조하고 있다.

            ▣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나를 돕는 것

              불경『제법집요경 보시품』『방등경』『잡보장경』에서 석가모니는 재물이나 착한 일을 베풀 때, 그 재물이나 도움을 받는 특정한 사람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체의 모든 중생이 다 구제받게 되기를 원하라 하였다. 그리고 부처님 자신에게 보시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보시하면 그것이 곧 부처님 당신에게 보시하는 것과 같다고 당부했다.

              성경『마태복음 25:35∼46』에서 예수 또한 보잘 것 없는, 다른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을 주고, 물을 주는 것이 곧 예수 당신을 대접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설교하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곧 성자인 자신에게 베푸는 것이라는 석가모니의 설법이나 예수의 설교는 결국 똑같은 내용이라 아니할 수 없다.

            ▣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

              불경『방등경』『법구경』과 성경『마태복음 7:15∼20』『마태복음 12:33∼35』『누가복음 6:43∼45』에는 사람이 행하는 선(善)과 악(惡)을 석가모니와 예수가 똑같이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로 비유하고 있다.

              예수가 말한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는 곧 석가모니가 '착한 인(因)을 심지 않고 어찌 좋은 열매(果報)를 얻을 수 있겠느냐'는 가르침과 같으며, 그 비유 또한 좋은 나무는 '착한 일을 하는 것' 또는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을 상징하고 있고 열매는 그 행(行)에서 얻어지는 과보를 상징하고 있으며 석가모니가 '선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죄를 받는다'고 강조한 것이나 예수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고 한 것은 똑같은 경고라고 할 수 있다.

            ▣ '내가 법이요'와 '내가 진리이다'

              불경『열반경』『아함경』과 성경『요한복음 14:5∼12』에서 석가모니는 '법을 보는 자를 곧 나를 보는 자'라고 설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는 '나를 본 자가 곧 하나님을 본 자'로 말하고 있다. 또한 석가모니가 '나는 곧 법이니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보는 자'라고 말한 것처럼 예수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똑같은 의미의 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석가모니가 '나의 가르침대로' 법에 의해 등불을 삼고 살아가라고 당부한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도 '나를 믿는 자는 나의 일을 저도 할 것'이라고 당부하고 있다.

            ▣ 행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불경『법구경』과 성경『마태복음 7:21∼27』에서 '제 아무리 경전을 많이 읽고 외워도 실천하지 않으면 성인의 문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한 석가모니의 가르침이나, '제 아무리 주여 주여 함께 하지 않았느냐고 가까이 지냈음을 강조하더라도 행하지 않은 자는 모르는 자니 내게서 떠나가라 할 것이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똑같이 실천 없는 신앙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 비록 원수일지라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예수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불경에 수록되어 있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에도 여러 번 되풀이 되고 있다.

                불경『열반경 범행품』『아함경』에서 석가모니는 '부모를 죽인 원수도 갚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고 '마주 때리거나 원수를 갚으려고 하지 말라'고 몇번이나 다짐을 받는다. 또 '부모와 원수를 대할 때에도 평등한 마음으로 대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성경『누가복음 6:27∼35』『마태복음 5:38∼46』에서 예수 또한 '원수를 사랑하라'고 강조했고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저주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강조했다.

              ▣ 살인마와 길 잃은 양

                불경『아함경』에는 '99명을 살해한 아힝사카가 구원받는 이야기'를 통해 악인도 바른 마음을 깨치면 구원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성경『누가복음 15:3∼10』『마태복음 18:12∼16』에도 '99마리의 양과 길잃은 한 마리의 양'이야기를 통해 잘못을 저지른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성경은 '99마리의 양과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비유해서 죄지은 자를 구원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불경은 '99명의 피살자와 한 명의 죄인'을 들어 죄 지은 자를 구제하고 있는데, 가르치고자 한 점은 다 똑같이 악(惡)을 선(善)으로 구해주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 경전비방과 성령모독

                성경『누가복음 12:4∼10』『마태복음 23:23∼29』에는 예수의 설교를 제대로 믿고 따르지 않은 자들에게는 구원이 없으며 지옥에 던지움을 당할 것이라고 극렬하게 경고하고 있다. 또한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할 것이니 이는 곧 하나님의 용서를 못받고 최후의 심판에 의해 지옥에 던져질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가 전도를 위해 파송한 제자들을 박대한 자들도 폐망하게 되리라고 경고하고 있다.

                불경『법화경 비유품』에도 경전을 비방하거나 가르침에 의혹을 품고 믿는 자를 미워하고 천대하면 지옥에 떨어지는 벌을 받게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또한『법화경 법사품』에서는 "어떤 사람이 나쁜 마음으로 한 겁 동안을 부처님을 항상 훼방하고 꾸짖더라도 그 죄는 오히려 가벼우려니와 어떤 사람이 한마디 나쁜 말로써 집에 있는 이나 집을 떠난 이가 법화경을 읽고 외우는 것을 비방하고 방해한다면 그 죄는 매우 무거우니라"고 경고하고 있는데, 성경에서도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함을 받지 못하리라"고 한 것은 석가모니나 예수를 비방하는 것보다 경전을 비방하고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강조하고 있는 점에서 똑같다고 할 것이다.

              ▣ 신앙과 씨뿌림의 비유

                불경『슛타니파아타』『아함경』『미린다 왕문경 6장』과 성경 『마가복음 3:2∼9』『마가복음 3:14∼20』『마태복음 13:31∼32』『마태복음 13:36∼40』에서 석가모니가 자기 자신을 농사짓는 농부로 비유하고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린다고 설법한 것은 예수가 자신을 씨뿌리는 인자라 비유한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또한 예수가 '길가에 뿌려진 씨앗'과 '돌밭에 뿌려진 씨앗''가시떨기 밭에 뿌려진 씨앗'을 비유로 든 것과 똑같이 석가모니도 '돌과 나무가 무성한 황무지에 뿌려진 씨앗'을 비유로 들어 잘못된 신앙 행위를 지적하고 있는 점은 불경과 성경이 똑같은 비유, 똑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석가모니가 씨를 뿌려서 얻는 수확은 '온갖 고뇌에서 풀려나게 되는 것'이니 곧 불교의 이상이자 목표인 '해탈'에 이르는 것이요, 예수가 씨를 뿌리는 목적은 '추수 때인 종말의 때'에 천사들의 구원을 얻게 하는 데 있으니 석가모니와 예수가 씨뿌리는 목적 또한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 말법시대와 말세

                불경『아함경』과 성경『마가복음 13:4∼13』『마태복음 24:6∼22』에는 불경의 말법시대와 성경의 말세에는 똑같은, 비참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첫째, 사람들이 미혹하여 서로 미워하고 서로 잡아 죽이며,

                둘째, 기근과 재앙이, 처처에 지진이 일어나며,

                셋째, 자식이 부모를, 부모가 자식을, 형제가 형제를 잡아 죽이게 되고,

                넷째, 사람과 사람,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가 활과 칼로 죽이려 싸우게 되고.

                다섯째, 불법이 횡행하게 되며,

                여섯째, 그러나 서로 죽이는 것을 싫어해 산 속에 숨어 있다가 깨달은 자들이나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는 다시 구원을 받아 살 수가 있다는 점에서 불경과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말법시대와 말세는 똑같이 묘사되고 있다.

              ▣ 이 세상의 빛

                불경『슛타니파아타』『법화경 안락행품』『법화경 서품』과 성경『누가복음 2:30∼32』『누가복음 11:33∼36』『마태복음 5:14∼16』『요한복음 1:4∼11』『요한복음 8:12』를 보면 석가모니와 예수 모두 자신도 빛이요, 횃불이요, 광명이며, 이 성자들의 가르침도 빛이요, 등불이요, 광명으로 묘사되고 있는 점에서 똑같다.

              ▣ 악마와 마귀

                성경『마태복음 4:1∼11』『마가복음 1:12∼13』『누가복음 4:1∼13』에는 예수가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석가모니도 악마의 시련을 받는 이야기가 『본생경』『아함경』『불소행찬』『불본행경』『잡아함경』등 불경에도 많이 실려 있으며 그 이야기의 구성이나 전개,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 강조하려 한 것까지도 불경과 성경이 서로 똑같은 데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마귀가 시험하기 위하여 예수를 금식시켜 주리게 해놓고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한 것이나, 석가모니에게 걸식을 못하도록 해서 주리게 해놓고 다시 걸식하게 권해서 '식욕의 유혹'에 빠지게 하려는 것이나, 마귀와 악마가 한 짓은 '배고픔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유혹'을 향해 던진 미끼였다.

                이 때 예수는 배고픔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식욕의 유혹을 단호히 뿌리치고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대답하였고, 석가모니 또한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광음천처럼 기쁨을 양식으로 먹고 산다'고 똑같은 대답을 했던 것이다.

                또 마귀가 예수를 높은 산으로 데려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마귀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유혹한다.

                마찬가지로 악마도 석가모니에게 '나라 전체를 직접 통치'하라고 유혹한다.

                이에 대해 예수는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하였으니 이는 곧 하나님의 진리대로만 살 것이지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갖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이요, 석가모니가 '물욕을 따르는 자 물욕에 결박될 것이니 사람은 마땅히 그 결박 벗어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 것은 진리, 곧 법을 취했다는 점에서 똑같다 할 것이다.

                그리고 마귀가 예수로 하여금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돌에 부딪혀 죽게 하려 한 것이나 데바닷타가 높은 산에서 돌을 던져 그 돌에 맞아 석가모니가 죽게 하려고 한 점이나 '돌'로 해치려고 한 점에서는 그 발상이 같다.

              ▣ 한 명의 배신과 도망친 제자들 이야기

                불경『아함경』과 성경『누가복음 22:20∼21』『마태복음 26:20∼25』『마태복음 26:31∼35』『마태복음 26:45∼56』을 보면 예수는 자기의 제자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자기를 배반하고 팔아넘길 줄 미리 알고 있었으며 이것은 석가모니가 그의 제자 데바달타가 자기를 배반할 것을 미리 알고 제자들에게 얘기했던 점과 같다.

                그리고 예수가 검과 몽치를 들고 온 자들에게 붙잡혀 가게 되자 그의 모든 제자들이 모조리 다 도망갔듯이 석가모니의 제자들도 그의 스승이 코끼리의 위해(危害)에 처했을 때 5백 명이 모두 도망쳤다.

                뿐만 아니라 예수가 자기를 잡으러 온 자들에게 '검을 가진 자는 검으로 망한다'고 경고한 것처럼 석가모니는 '악은 악으로 망하는 법'이라고 경고한 점에서 똑같은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인가?

              ▣ 하늘에서 내려온 음식

                하늘에서 내려온 음식이야기는 불경『본생경 길상초품』『본생경 바수나품』『아함경 카필라성의 비극』『유마경 향적불품』등과 성경『마가복음 6:35∼45』의 '오병이어(五餠二魚)' 『마가복음 8:1∼9』『마태복음 15:32∼39』의 '칠병이어(七餠二魚)'의 기적 이야기가 있다.

                불경의 유마힐과 성경의 예수가 똑같이 수많은 사람을 앉혀놓고 없던 음식을 순식간에 만들어 그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고도 남을 수 있도록 기적을 일으킨 사실이 똑같다는 데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가르침을 듣기 위해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 먹을 것이 없는 상황, 기적을 일으키는 유마힐과 예수, 배불리 먹는 신자들, 그러고도 남는 여유있는 음식, 이 얼마나 똑같은 구성과 전개이며, 이 얼마나 똑같은 공식에 의해 이야기가 엮어져 있는가?

              ▣ 부자는 천국에 가기 어렵다

                불경『방등경』『법사경』과 성경『마가복음 10:21∼30』『누가복음 18:22∼30』에서는 석가모니가 재물을 버리고 법을 따르라고 한 것이나 예수가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좇으라고 한 것이나 그 가르침은 똑같다. 또 석가모니는 재물에 집착하면 열반에 들 수 없다고 하였고, 예수는 부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으니 그 말씀이 그 말씀인 것이다.

              ▣ 네 자신을 뒤돌아 보라

                성경『요한복음 8:1∼11』에서 예수는 간음한 여자를 잡아온 사람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였다. 이 는 '너 자신부터 죄가 있는지 없는지 솔직하게 되돌아 보라'는 이야기이고 여자를 잡아왔던 사람들은 모두가 다 양심의 가책을 받아 하나씩 하나씩 그 자리를 도망쳐 나간 것이다. 불경『불전(佛典)』에도 석가모니가 물건을 훔쳐 도망친 창녀를 잡으려고 찾아다니던 젊은이들에게 '죄지은 여자를 찾는 것과 그대들 자신을 찾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급하냐'고 힐문하자 젊은이들은 한동안 아무 대답도 못하고 부끄러워하다가 '자기자신을 찾는 것이 더 급하다'고 대답하고는 부처님으로부터 설법을 듣는 장면이 나온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끌려온 여자와 값진 물건을 훔쳐 도망쳐버린 창녀, 그리고 그 여자를 벌주기 위해 끌고온 사람들과 도망친 창녀를 붙잡기 위해 찾아다니던 젊은이들, 그들에게 너 자신부터 되돌아보라고 요구한 예수와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같은 것이다.

              ▣ 남을 비방하기 전에

                불경『사십이장경』『법구경』에서 '남의 잘못을 보기는 쉽지만 자기의 잘못은 보기 어렵다. 남의 잘못은 등겨나 쭉정이처럼 까불어 날리지만 자기잘못은 교활한 도박꾼이 제게 불리한 주사위 눈을 숨기듯 한다'고 한 것이나 성경『마태복음 7:1∼5』의 '형제의 눈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한 것은 똑같은 내용의 비유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서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라'고 한 것이나 불경에서 '남 듣기 싫은 성낸 말 하지 말라. 남도 그렇게 네게 답할 것이니'라고 한 말이나 그 표현은 똑같은 것이다.

              ▣ 신통술과 기적

                성경을 읽어 보면 예수가 기적과 이적을 일으키는 대목이 곳곳에 수없이 나오고 있다. 장님을 눈뜨게 하기도 하고,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기도 하고, 귀신을 쫓아내기도 하고, 떡 일곱 개와 생선 두 마리로 4천명을 배불리 먹이기도 하고, 그야말로 벼라별 기적을 자유자재로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능력은 예수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 제자들도 '병자를 고치면서' 복음을 펴고 다녔다고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예수가 행하고 다녔다는 기적들의 유형은 이미 불경의『본생경』에 거의 다 있으며, 이외에도 석가모니와 그 제자들이 일으킨 기적 이야기는 불경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 석가모니는 독룡(毒龍)을 잡아 밥그릇 속에 담기도 했고, 허공 중에 가부좌를 틀고 앉기도 했고, 용왕의 세계에 나타나기도 했고, 병자를 고쳤으며, 전염병을 물리치고 홍수를 물리쳤으며, 하늘 세계에 있는 여러 나라를 자유자재로 왔다갔다 했으며 석가모니의 제자가 하늘 나라 향적국을 마음대로 왔다갔다했을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 음식을 얻어다가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기도 했고, 하늘나라의 왕 제석천왕으로 하여금 하늘밥, 하늘옷을 내리게도 했는가 하면, 석가모니의 제자는 지옥에까지 내려가 지옥중생을 구제하기까지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석가모니와 그 제자들은 형용할 수 없이 먼 거리도 잠깐 사이에 왔다갔다하는 신통자재술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불경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

                성경에 나타나는 기적과 이적의 원형은 수많은 불경 여기저기에 수록되어 있으며 이 불경의 기적들이 조금씩 변형되어 성경에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없다.

                불경『방등경』『유마경』『미린다 왕문경』에는 괴로움의 바다에서 헤매고 있는 중생을 병든 환자로 비유하고 있으며 '병든 자에게만 의사와 약이 필요하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와 약이 필요치 않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그런데 성경『누가복음 5:30∼32』『마가복음 2:16∼17』에도 예수가'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하고 있다.

                괴로움의 바다를 헤매는 중생을 병자로 비유한 불경이나 죄인을 곧 병자요, 의사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비유하고 있는 성경이나 똑같은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석가모니와 그 제자들을 의사로 비유하고 있는 부분이나 예수가 자신을 의원에 비유한 것도 똑같은 이야기이다.

              ▣ 깨우침의 경지와 하나님의 나라

                불경의 '해탈'의 경지와 성경의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석가모니와 예수의 대답은 똑같이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이다. 불경『원각경 보안보살장』을 보면 '극락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네 마음 속에 있다' 즉 '心卽是佛'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성경『누가복음 17:20∼21』에서 예수도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한 예수의 가르침이나 '네 마음이 곧 부처다'고 한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 진정한 보물

                불경『소송경(小誦經)』『잡아함경』과 성경『마태복음 6:19∼20』『요한복음 17:14∼16』에서 세속적인 재물은 참다운 보물이 아니며 '마음 속에 지녀야 할 참다운 보물은 자비, 경건, 절제, 침착함'이라고 가르친 석가모니의 말씀과'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고 가르친 예수의 말씀은 똑같으며 그 다음에 계속되는 '다른 사람이 가질 수 없고 도둑이 훔쳐갈 수 없는 보물을 가지고 떠나라'는 석가모니의 말씀이나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고 한 예수의 말씀도 똑같다.

                석가모니와 예수는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장소가 엄청나게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에게 들려준 가르침은 서로가 서로의 경전을 옮겨놓은 듯이 똑같음을 보여주고 있으니, 대단한 '경전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 평등한 사랑

                불경과 성경을 비교해 보면 석가모니의 길고 긴 설법 내용 가운데서 그 핵심부분만을 간단히 추려내어 다이제스트처럼 축약시켜 놓은 대목이 성경의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불경『법화경 약초유품』『법화경 신해품』과 성경『마태복음 5:39∼47』의 경우도 이와같은 예(例)라 할 것이다.

                석가모니가 어떤 차별도 없이 골고루 비를 내리듯이 모든 중생들에게 가르침의 비를 내린다고 했듯이 예수 또한 악인에게도 선인에게도 하나님이 해를 비춰주시고, 의로운 자에게도 불의한 자에게도 비를 내린다고 표현하고 있다.

              ▣ 서로 돕고 존중하라

                불경『백유경(百喩經)』과 성경『고린도전서 12:14∼31』에서는 서로 아끼고, 서로 존중하고, 서로 화합하라는 가르침을 펴기 위하여 석가모니는 뱀의 머리와 꼬리를 비유해서 설법했고, 바울은 같은 가르침을 펴기 위하여 몸과 지체(肢體)의 비유를 들고 있는데 불경과 성경이 똑같이 강조하고자 했던 점은 교단의 화합과 결집이었다. 머리라고 해서 귀중하고 꼬리라고 해서 하찮은 것이 아니며, 머리와 꼬리가 서로 자기만 제일이라고 주장하고 우기다가는 뱀의 몸통은 물론 머리와 꼬리 전체가 다 죽는다는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만일 한 지체(肢體)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는다'는 바울의 가르침은 똑같은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 석가모니의 수명과 예수의 수명

                불경『법화경 여래수량품』에서 석가모니는 낳고 죽는 일에서 벗어난 분이요, 헤아릴 수도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헤아릴 수도 없는 아득한 미래까지도 그 수명이 늘지도 줄지도 않고 항상 머무르며 무한한 자비심으로 중생들을 깨우치고 지켜주며 괴로움의 바다에서 건져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 부처님도 영원히 살아 있으되, 중생들의 깨우침을 위하여 인간의 모습을 잠시 보였을 뿐이라고 불경은 강조하고 있다.

                성경『누가복음 24:13∼53』『마가복음 16:1∼20』『마태복음 28:5∼20』에서 예수도 이와 똑같이 세상 끝날이 있음을 알려 주고 그들을 구원에 들게 하기 위하여 잠시 그 모습을 이 세상에 보였다가 다시 하나님의 나라로 올라 갔을 뿐, 결코 죽은 것이 아니며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깨어 있으리라'고 하였으니 세상 끝날까지 영원히 살아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석가모니도 그 수명이 헤아릴 수 없는 무량수(無量壽)니 영생(永生)이요, 예수도 영생(永生)이라, 불경과 성경은 교조(敎祖)의 죽음 그 이후까지도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이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 무덤에서 일어나는 기적

                불경에는 '무덤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날 수 있는 경우'를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성경『마가복음 16:1∼6』『누가복음 24:1∼6』『마태복음 28:1∼4』『요한복음 20:1∼14』에서는 '불경의 무덤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설명 그대로를 '재현'시켜 놓고 있다.

                『미린다 왕문경』에서 나아가세나 존자가 '향이나 화환이나 의복 중 한 가지를 탑, 묘에 바치면 죽은 자를 묻은 탑이나 묘에서 기적이 일어난다'고 설명한 그대로 막달라 마리아는 미리 준비해둔 향품을 가지고 무덤을 찾아 갔으며 무덤에는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처럼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예수의 '무덤의 기적'은 이미 불경의 『미린다 왕문경』에 이론과 근거가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며 이 불경의 내용을 그대로 재현시킨 것이 이른바 예수의 '무덤의 기적'이라고 볼 수 있다.

              ▣ 기타

                석가는 49일 단식했을 때 마라라는 악령의 시험을 받았다.

                예수는 40일간 단식 후 악마에게 시험을 받았다.

                석가는 12제자를 모든 계급의 사람들에게 파견했다.

                예수는 12제자를 이스라엘 전역에 파견했다.

                석가는 갠지스강을 걸어서 건넜다.

                예수는 갈릴리 호수를 걸어서 건넜다.

                석가는 과부의 두 냥 헌금이 정말 값지다고 했다.

                예수는 과부의 한 냥 헌금이 거룩하다고 했다.   [ S. 라다 크리슈난 <석가와 예수의 대화> 중에서 ]

                불경과 신약성서가 왜 이렇게 같을까?

                여기에 대한 해답은 인도에서의 예수의 잃어버린 생애와 기독교의 영지주의와 불교와의 관계 등을 알면 자동적으로 풀리는 문제이다.

                영지주의가 활짝 꽃 피었을 당시는(서기 80년 ~200년) 그리이스-로마 세계와 극동 지역간의 무역로가 열리고 있었던 중이었고, 불교 포교사들은 여러세대에 걸쳐 알레산드리아에서 포교하고 있었다. 또한 그리이스어를 아는 기독교인이었던 로마의 히폴리투스(225년경)가 인도의 브라만교도들을 알고 있었고, 그들의 전승을 이단의 원천들 가운데 하나로 여기고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을 [ 일레인 페이젤 <성서밖의 예수> 방건웅,박희순譯, p24, 정신세계사, 1989 ] 볼 때 불교나 힌두교가 기독교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앞서 영지주의 복음서인 『도마복음서』에 있었던 말씀 중에 '하느님은 너희들 안에 있고 동시에 밖에 있다'는 말은 불교의 불성내재론(佛性內在論)이고 또 그 다음에 계속된 문장은 『법화경 방편품』의 '여아등무이(如我等無異)'다 『도마복음서』의 존재는 예수의 사상이 불교 사상 그 중에서도 불성내재론(佛性內在論)을 역설한 『법화경』과 유사하다. 유태교의 토양에서는 이러한 사상이 발생할 여지가 없으므로 불교의 『법화경』사상이 실크로드를 거쳐 이스라엘에까지 간 것으로 추측할 수 있고 예수 자신이 인도와 간다라, 티벳트에서 배워 왔을 가능성도 있다. [ 민희식 <법화경과 신약성서> p27, 가이아, 1999 ]

                이러한 불교적인 색채들이 비단 영지주의 복음서뿐 아니라 필자가 앞에서 Bible과 불경을 비교한 것처럼 기독교인들이 소위 '정경(正經)'으로 분류해 놓은 복음서에서조차도 많이 발견되는 것이다.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불교적인 요소들을 빼어 버리고 나면, 남는 것은 예수가 영적인 스승이었다기보다는 주로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었으며, 종말을 예언한 사람이었다는 것 정도뿐이다.[ 루이아모르著, 류시화譯 <성서 속의 부다> p257 ]

                다음의 비교표[ 루이아모르著, 류시화譯 <성서 속의 부다> p251~3 ]를 보면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누가복음

                관련된 불경의 내용

                2:8 ~14

                목자들이 천사를 보다

                본생경

                아시타가 천사들을 목격

                21~24

                할례와 이름짓기


                이름 지어주기 의식

                25~35

                시므온의 예언


                아시타의 예언

                4:1 ~13

                유혹, 금식, 사탄과의 대화

                불본행집경

                고오타마의 금식과 악마 마라와의 대화

                6:20~22

                팔복의 가르침

                간법165~68

                진정한 행복

                27~36

                분노하지 말라

                280~81

                분노하지 말라

                37~38

                판단하지 말라

                271~72

                판단하지 말라

                39

                장님의 인도와 개천에 빠짐

                무문 9.7

                사기꾼이 인도하면 개천에 빠짐

                43~45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

                간법 258

                어리석은 자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46~49

                잘 지어진 집과 나쁘게 지어진 집

                간법 219~220

                지붕이 잘된 집과 좋지 못한 집

                7:36~38

                예수의 발아래 엎드린 여인

                불본행집행

                고오타마의 발 아래에 엎드린 여인

                9:28~29

                모습의 변화와 얼굴의 빛남

                장아함경 16

                고오타마의 피부가 밝게 빛나다

                57~62

                집 없이 사는 것이 좋다

                법구경 91~2

                집없이 사는 생활

                10:1

                칠십 명의 선교 사업

                율장

                육십 명의 사명

                11:34

                눈은 등불이다

                무문 22.5

                등불을 든 현명한 사람

                37~39

                내면의 사악함

                간법 2

                내면의 사악함

                12:16~21

                하늘의 보물을 갖지 못하다가 갑자기 죽은 부자

                무문 1.20~22

                하늘에 보물을 간직하지 못한 부유한 바보는 죽을 수밖에 없다

                22~31

                걱정하지 말라

                법구경 92~3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 사람

                33

                도둑맞을 염려가 없는 하늘의 보물

                무문 10.11

                도둑으로부터 안전한 하늘의 보물

                15:11~32

                탕자의 비유

                법화경4

                탕자의 비유

                16:13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무문 13.5

                니르바나와 재물을 동시에 추구할 수 없다.

                * 간법: 간다라어 법구경, 무문:무문자설경

              [4부] 종교회의

              제1차 종교회의 (니케아) : 하느님이 되어 버린 예수

              제2차 종교회의(콘스탄티노플) : 삼위일체를 결의

              제3차 종교회의(에페소스) : 마리아를 하나님(신)의 어머니로 숭배할 것을 결의

              제4차 종교회의(칼케돈) : 예수의 이중성(신과 인간의 성격이 불가분적으로 합치)에 대한 신조 도입

              제5차 종교회의(콘스탄티노플) : ▷ 인류의 타락 누구의 죄인가?

                ▷ 천국에서 하나님의 피조물(루시퍼)이 일으킨 쿠데타

                ▷ 자신(하나님)의 친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게 하고 그제서야 자신의 아들을 살해한 인류와 화해(?)

                ▷ 삼위일체 - 애당초부터 하나인 아버지와 아들

              1. 제1차 종교회의

              니케아에서의 제1차 범 종교회의. 콘스탄티누스황제가 소집.

              속셈은 한창 번창중에 있는 그리스도교를 업고 로마제국을 굳혀놓기 위해서였다. 콘스탄티누스가 318명의 주교들을 선발, 소집했던 배후에는 이빨을 드러낸 파워폴리틱스(Power Politics)에서였고, 종교야 어찌되건 관심밖의 일이었다.

              이 점에 대해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던 주교들도 짐작 못한 바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황제는 ①회의를 사회했고 ②내 뜻은 바로 교회의 법률이라는 성명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주교들은 세례도 받지 않은 황제를 <세계의 주교>격으로 영입시켜 속세의 왕으로서 교리에 관한 투표에 참가시켰던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예수의 가르침이니 뭐니 전혀 아는 바 없었다. 그는 미트라의 태양숭배를 받들었었고 기독교세상이 된 뒤에도 그가 발행한 화폐에는 미트라神의 초상을 조각, "무적의 태양, 나의 보호자"라고 써놓고 있다.

              희랍에 옛날부터 있어 오는 비잔틴에 자기 이름을 붙여 330년 콘스탄티노플로 고쳤는가 하면, 여기를 로마제국의 수도로 정했을 때에도 역시 기독교적인 겸허따위는 오불관언, 기념축전에서는 거대한 기둥탑을 세워, 미트라신과 자신의 모습을 조각케 했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적인 사랑으로 노예를 폐지하려는 생각은 커녕 오히려 음식물을 도둑질한 노예의 입에 납을 녹여 붓는 형벌과 가난한 자는 자식을 팔아도 된다는 법을 정하기까지 하였다.

              그럼, 이 폭군은 교회정책의 어떤 결정에 참여했던 것일까?

              당시에는 하느님과 그리스도는 동등하다고 하는 아타나시우스의 설과 신은 오직 하나뿐이므로 그리스도는 신을 닮아 있을 뿐이라는 알렉산드리아의 아리우스의 설이 대립되어 있었다. 이것이 많은 사제들과 지식인들 사이에 파급되어 대립이 심각해지자, 콘스탄티누스황제가 끼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종교 고문관인 오시우스를 보내어 진상을 조사케 했다. 오시우스는 돌아가서 황제에게 아타나시우스를 지지하라고 했다. 그는 만일 '예수가 하느님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기독교 교리가 허물어지고 믿음에 혼돈이 생겨 교회의 권위가 파괴되어 분열을 일으킬 것이며, 결국 로마제국까지 흔들리게 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 당시는 유럽, 이집트, 서남아시아의 전지역에 퍼져있던 미트라 신앙이 쇠퇴하고 그 대신 기독교가 국교(313)화된 시점이었다. 그 때문에 기독교 교리의 절대적인 힘을 빌리지 않고는 로마제국을 강력하게 통치할 수 없다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세속적, 정치적 속셈도 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친히 회의를 주도하고 토론에도 참석했다.

              그런데 회의에 참석한 주교들 대부분은 극단의 양 견해를 피하고 중간자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이 채택되도록 주교들에게 압력을 가해 아버지격이 되는 하느님과 예수그리스도는 동등하다고 결의케 했다. 결국 단 두명을 제외하고는 모든 참석자가 아타나시우스에게 표를 던졌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 니케아회의의 결정이 신의 감화에 의한 것이라고 자랑했고, 대부분의 순진한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본래 페르시아의 태양신 미트라를 섬기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야 세례를 받은, 신학적 논리에는 어두운 인물이었다. (이러한 황제의 영향으로 예수의 가르침이 국교화되는 과정에서 이 미트라신앙의 의식이나 제도,관습,교리 등이 없어지지 않고 초기 기독교에 의해 대부분 수용된다. (미트라 신앙이 기독교에 미친 지대한 영향은 따로 후술할 것임)

              그러나 그 후 황제의 입법으로서 손질을 한, 이 변경은 교회의 핵심<도그마>가 되어 버렸다.

              비기독교인인 콘스탄티누스는 또 그 이상의 공적도 교회에 기여했다. 예수의 무덤을 사상 처음 발견하여 그 자리에 교회를 세웠다. 그해에 그는 근친 몇몇을 살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아들 그리스프스, 처 파우스타를 끓는 열탕 속에 처넣어 죽였고, 장인 마키시미안을 체포하여 자결시켰다.

              <니케아의 신앙 선언>을 주재하여 회의를 끝낸 뒤, 318명 주교들의 합의야말로 하느님의 결정이라는 것을 기독교 교단에 회람을 돌린 인물은 대주교격인 황제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아르메니아, 그리이스, 러시아 교회의 성인으로 추대받기까지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 미트라(Mithras) 신앙과 기독교

              흔히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이들이 미트라 신앙을 고대의 잡신 신앙이나 원시신앙으로 매도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미트라 신앙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기독교의 뿌리를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태양신으로 널리 알려진 미트라에 대한 신앙은 약 사천년 전, 페르시아에서 시작되었다. 미트라 신앙은 동으로는 인도에서 중국까지 서로는 로마국경의 전 범위, 즉 스코틀랜드에서 사하라 사막, 스페인에서 흑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미트라를 숭배했던 장소들이 영국,이태리,루마니아,독일,헝가리,불가리아,터기,페르시아,아르메니아,시리아,이스라엘, 그리고 북아프리카에서도 발견된다.

              미트라 신앙은 로마제국에서 로마 군인들의 종교가 되었고, 제국 전역에 사원과 성전이 세워진다. 그들은 미트라에움이라는 자연적인 동굴모양을 모방해서 만든 사원에서 의식을 행했는데, 황소를 제물로 바쳤다.

              "미트라" 동굴에서 꼭 발견되는 하나의 그림이 있는데, 한 인물이 황소의 목을 따는 그림이다. 그림에서 황소를 제압하는 인물이 "미트라"로써 태양신의 아들이다. "세상의 빛"으로 불리워졌고, 예수와 마찬가지로 "미트라" 성 삼위 일체의 두 번째, 즉 아들의 존재로써 중개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의 생일은 12 월 25 일로 경축되었다. 만인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죽었다가 3 일만에 부활하였다. 그의 부활은 기독교의 부활절 주기와 일치하며 12제자를 거느렸다고 전해진다.

              예수의 가르침이 국교화되는 과정에서 이 미트라 신앙의 의식이나,제도,관습,교리 등이 없어지지 않고 초기 기독교에 의해 대부분 수용된다. 즉, "미트라" 숭배자들이 믿었던 천국과 지옥, 죽은 자가 부활하는 심판의 마지막날, 어둠에 대한 빛의 승리를 위해 현존하는 모든 것들을 파괴하는 최후의 전쟁, 구세주의 고통과 형벌이 신자를 구원하게 되리라는 교리, 영을 통해 거듭 태어난다는 것, 구원, 부활, 재림 등의 교리, 최후의 만찬 이야기 등등 너무도 흡사하다.

              또 미트라신은 처녀한테서 태어났는데 예수도 처녀에게서 태어났다. 또 미트라의 탄생을 경축하는 축제가 12월 25일에 열렸는데 이를 기독교에서 그대로 차용하여 예수의 생일로 쓰게 되었다. 그리고 두 종교 모두 세례의식과 피와 포도주에 의한 성화의례가 있다. 기독교 사제의 명칭인 파더(Father)는 미트라교 사제의 이름에서 따 온 것이며 미트라교의 주교는 자신들 직책의 상징으로 미트라 또는 미테르(주교관)을 썼는데 기독교의 주교들 또한 이러한 미테르를 지금까지 쓰고 있는 것이다. 카톨릭의 성직자 계급 제도나 예배 형식 및 예배 시 쓰이는 도구들 즉 향불, 예배 의복 등등 모두 미트라와 흡사하다. 십자가 목걸이, 염주알 등도 마찬가지이다. 이와같은 연유로 라즈니쉬는 기독교의 창시자는 예수가 아니라 콘스탄틴 황제라고 선언한 것이다.

              " 믿기지 않겠지만 기독교의 창시자는 콘스탄틴 황제이다. 기독교에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대중들이 그 사실을 알도록 허용하지 않고 있다. 니케아 종교회의를 주도했던 콘스탄틴 황제는 기독교인으로 죽었지만, 임종직전에 세례만 받았을 뿐이다. 그는 평생동안 태양신 종교의 고위성직자로 있었다. 바로 이런 관계로 예수의 안식일인 토요일을 일요일로 바꾸게 된 것이다. 아직까지 유대인들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고 있다. 예수 역시 토요일을 안식일로 믿고 평생 살았다..

              태양의 숭배자들은 항상 태양의 날이 신성한 날이라고 믿어왔다. 실제 기독교의 창시자는 콘스탄틴이다. 그는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로마의 황제였기 때문에 그의 압력하에 성직자들은 예수의 신성에 찬성하게 된 것이다. 바로 콘스탄틴이 예수를 신으로 만들었다. 예수의 신격화는 콘스탄틴의 착안이다.

              또 콘스탄틴은 예수의 생일을 1월 6일에서 태양의 재생일인 12월 25일로 바꾸었다. 12월 25일은 예수 탄생 이전부터 전세계적으로 경축해온 태양신의 날이었다. 크리스마스의 발상 전체는 꾸며진 것이다.

              예수는 1월 6일에 태어났다. 그런데 콘스탄틴의 영향력에 의해 예수의 생일은 태양의 재생일인 12월 25일로 둔갑된 것이다. 태양숭배자들은, 태양이 12월 25일에 탄생했다고 생각해 왔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완전한 무지 속에서 살고 있다. 그들의 크리스마스가 가짜라는 것을 모르는 채..... 교회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대중들에게 철저히 감추고 있다. 이것이 진리의 수호인가? 거짓의 방어일 뿐이다.

              콘스탄틴은 예수를 실패한 메시아로 보고, 그 자신을 진정한 메시아로 생각했다. 그의 이런 견해는 유명한 주교인 케자리아의 유세비우스의 다음 말에서 잘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의 종교는 마침내 예수가 아닌 콘스탄틴에게서 완성된 것처럼 보인다."

              콘스탄틴은 그 자신을 유대인들이 기다려온 마지막 예언자로 만들었다. 물론 유대인들은 로마의 황제를 십자가에 매달 수는 없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왕권의 원조를 원했다. 그 당시 기독교인들은 곳곳에서 십자가에 처형되고 있었다. 그들은 콘스탄틴의 보호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순전히 협상,비지니스에 불과하다.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실패한 메시아이고 콘스탄틴이 참메시아라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런 사실은 대중들에게 공표된 바가 없다. 기독교인들은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라즈니쉬)

              2. 제2차 종교회의

              콘스탄티노플에서의 제2차 종교회의를 소집한 주역은 교회가 대제(大帝)의 칭호를 봉헌한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였다.

              이 황제는 도덕적 소질에 있어서 콘스탄티누스황제에 뒤지지 않았다. 역사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가난한 백성들을 들볶는 악취미가 있어 하류층 백성들에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부담케 하고 중세관리들에게는 고문을 예사로 자행시켰다. 뿐만 아니라 황제의 권한으로 만약 누가 빈민들을 숨겨주거나 했을 경우, 마을 주민 전체를 학살시키기도 했었던 폭군이었다.

              경건한 종교회의가 있은 지 10년 뒤, 즉 기원 390년에는 데사로니카시 근처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시민 7천명을 참살시키기도 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때는 기독교에서 <할렐루야>라는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의 기도가 도입되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테오도시오스는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여 미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로부터 <대제>라는 호칭을 받았으며, 그는 암브로시우스로 하여금 타종교의 성소(聖所)들을 모조리 파괴시켜 버리게 하였다.

              이 소행은 실제로 이단심문(異端審問)의 시조라고 불러 주어야 마땅한 처사였다.

              그럼 콘스탄티노플의 제2차 종교회의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 났던 것일까?

              신학전문가들로부터 <산송장 회의(殘骸 會議)>라는 욕을 먹고 있는 이 모임에서 그 어느 것보다도 중차대한 신앙조항이 교회에 도입되었던 것이다. 성부,성자,성신(성령)의 삼위일체가 바로 그것이다. 이 삼위일체설은 지금까지도 교회의 주식(主食)이 되어 내려오고 있다.

              3. 제3차 종교 회의

              에페소스에서의 제3차 종교회의. 소집자는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2세와 서로마의 발렌티아누스3세였다. 두 황제 모두가 종교는 고사하고 정치마저도 아예 관심이 없었던 플레이보이들로서 회의에도 얼굴조차 제대로 내보이지 않았다.

              테오도시우스 2세, 그는 도락에만 철저했던 무기력자로 방탕생활에 돈이 많이 들게 되다 보니 신하와 백성들로부터 인정사정 없이 세금을 갈퀴질해 냈다. 권력욕에 탐닉되어 있던 음모덩어리인 누나 부르케리아에게 완전히 잡혀 휘둘려지고 있었던 것도 지당했던 일로서 그녀는 잠깐 섭정으로 앉기도 했었다. 그녀는 기회 있을 때마다 사람들을 비웃어댔지만 처녀임을 자처했다.

              그러나 그녀는 종교에만은 열심이었던 관계로 성녀 품에 오르기에 이르렀고, 동생이 죽은 뒤 그 유능한 라이벌인 크류소프스를 살해하고서도 태연했던 그녀였다. 그리고 서로마의 발렌티아누스는 모친인 태후 프라키디아가 섭정을 맡았었고, 발렌티아누스는 권신인 아에티우스를 미워하여 살해하려다가 황후 에우독시아를 탐낸 막시무스에게 살해되었다.

              그럼 에페소스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가?

              이 회의에서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숭배할 것을 결의했었다. 이것이 <테오도시우스 법전>에 수록되어 국법이 되었다. 순번(順番)식이 된 셈이다. 언제나 거기에는 성령이 따라 붙고 있었다.

              4. 제4차 종교회의

              칼케돈에서의 제4차 종교회의. 정식으로는 비잔틴 황제 마르키아누스가 소집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흑막은 역시 테오도시우스2세가 죽은 뒤, 마르키아누스를 남편으로 삼은 처녀(?) 부르케리아였다. 주교 축들보다도 자신의 목적을 잘 분별하고 있던 여성이었다.

              신학자 에드알트 슈바르츠는 부르케리아가 각 교회의 의사에 반하여 압력적으로 종교회의를 소집, 자신 스스로 주도했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럼 칼케돈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교황 레오1세는 <도그마 편지>에서 예수의 이중성(二重性)에 대한 신조를 도입시켰다.

              이 회의에서 예수라고 하는 인격 안에 신과 인간의 성격이 불가분적으로 합치되어 있는 것으로 믿게 되었다. <칼케돈 신조>라는 이름으로 이 이중성은 지금까지 살아 남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칼케돈에서는 교리 통일의 호지(護持)가 교황의 개입에 의해 가능할 수 있게 확정되었다.

              이에 로마 교황의 탄생이 있게 된 것이다. 그 뒤에 전개될 기초가 여기에서 문서상으로 명시되었던 것이다. 지금의 바티칸은 빈말로라도 부르케리아가 음모를 꾸며 칼케돈의 종교회의를 열게 해준 데 대해 감사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고 본다.

              5. 제5차 종교회의

              콘스탄티노플에서의 제5차 종교회의. 주최자는 동로마제국의 황제 유스티아누스1세였다. 황제는 쟁쟁한 독재자의 처이며 공동 통치자인 테오도라가 시키는 대로 처신하였다.

              테오도라는 서커스 매니저의 딸 출신이었다. 청색,녹색의 서커스당이 반기를 들었던 <니카의 난>때 옥좌자리를 되찾아 주면서 황제를 남편으로 소유해 버렸던 것이다. 이 공적이 있은 뒤부터 그녀는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이교의 잔여세력들을 뿌리뽑아 없애 버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쾌거야말로 종교회의의 높은 양반들이 이빨을 드러내면서 애걸했던 것이었다. 제5차 종교회의의 주교들은 이 처사에 대해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종교회의에서 의도했던 것을 유스티아누스는 벌써 황제로서의 교서, 법률로 공포해 놓았던 것이다. 이 모임이 역사에서 <갈채 회의>로 규정짓고 있는 데에는 일말의 비웃음이 아니었다고만은 단언할 수 없다 하겠다.

              유스티아누스는 교황 비기리우스(뒷날 교황의 무류성을 규탄하는 사람들에게는 눈에 가시로 보이는 배역)를 콘스탄티노플로 불러 들였다.

              비기리우스나 주교들이나 무두가 뒤에 가차없는 이단 소탕 법령때문에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기게 되는 황제의 파워폴리틱스적 관심에 꼬리를 치며 뒤따랐던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도그머를 부인하는 자는 이단자로 낙인이 찍혀 죽음의 벌로 다스려졌고 세습권도 정지당했다. 로마 관리들은 큰무리로 떼지어 다니면서 이단자들을 색출해 내 끌어 모아다가는 유스티아누스의 어명에 의해 강제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세례를 받게 했었다.

              비잔틴의 사학자 프로코피우스는 페르시아, 반다르고트를 상대해서 유스티아누스의 전쟁사실을 기록했고, 또 유스티아누스의 소피아 교회의 건설사업까지도 문서로 남긴 인물이지만 동시에 유스티아누스와 그 처 테오도라를 비난하는 전단을 초안해 내기도 했었다. 유스티아누스를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던 프로코피우스는 그를 교만하고 성인인 체하고 방자하고 음험스럽고 잔인하고 피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규정짓고 있기도 하다.

              기독교 계통 사학자들은 프로코피우스의 기록을 대할 때 돌아 앉아 버리고 싶어 한다. 그것도 그럴 것이 콘스탄티누스와 테오도시우스와 마찬가지로 유스티아누스도 성인 품에 올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 회의에서는 또 무슨 일이 벌어졌었던 것일까?

              ▣ 인류의 타락 누구의 죄인가?

              신은 아담과 하와를 시험하려 하셨다는 사실을 신학자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하느님을 모독하는 일이 된다고 극구 부정하는 것이다. <유혹>이니 <시험>이니 그건 하느님답지 못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느님께서는 전지하시니 테스트 결과쯤이야 미리 알고도 남을 일이 아니었겠는가? 아담과 하와에게는 자유의사가 있었을 것이므로 지혜나무의 열매를 먹어도 되느냐의 여부를 자기 스스로가 판단했었던 것이라고 하는 답변 또한 문제될 것이 없다. 이것 역시도 하느님께서는 미리 잘 알고 계셨을 것이니까 말이다.

              그럼 두 내외가 자유의사로 낙원동산의 사과를 씹지 않았었다고 가정해 보자. 이 경우 아담과 하와는 지금껏 낙원동산에서 발가벗고 어슬렁거리고 있을 것이 아닌가? 사과를 따 먹지 않은 두 남녀, 발가벗은 히피 스타일로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생식가능성도 모르는 고자에 고녀, 이 꼴이 되어 버렸더라면 도대체 세상은 어찌 되었을 것인가?

              신은 그럼 컨베이어 벨트로 실어 나르듯 계속적으로 인간을 생산해내지 않으면 안될 뻔하지 않았는가? 신의 금지령에 고분고분하기 때문에 자유의사로 지혜를 구해볼 생각조차를 가져볼 줄 모르는 멍청한 인간이 아니었겠는가?

              그러고 볼 때 전능하신 신은 타락을 미리 계산에 넣고 있었던 것이 분명해진다. 그것도 아닐 경우 설마 오늘날, 이 나라 저 나라 모두가 인구과잉으로 터질 지경까지 이르게는 만들어 놓지 않았을 게 아니겠는가?

              ▣ 천국에서 하나님의 피조물(루시퍼)이 일으킨 쿠데타

              그럼 어떤 사정에서 아담과 하와가 나무가지로부터 사과를 따먹은 것일까?

              거기에는 유혹자인 사탄인가 뱀인가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두를 하느님이 만드셨다고 우리는 배우고 있다. 사탄 또는 뱀은 지선(至善)하신 하느님의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단순하기만 한 인간 두 사람, 그것도 이 세상에 오직 그들만이 존재하는 선남선녀를 속였다는 말인가? 그게 사실이라고 가정해 보자. 하느님은 어찌 되었길래 사과 한쪽 베어 먹은 데에 모욕을 느껴 가지고 그 세계에 구세주가 나타나기까지의 원죄 뿌리를 못박아 주기까지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인가? 어떻게 될 것쯤이야 미리 아시고 계셨을 터인데도 말이다. 이쯤된다면 신학자들은 내 입을 틀어 막으려 들 것이다. "그게 아니오. 악마 루시퍼는 하느님 나라에서 반역한 존재라는 것을 알기나 하고 하는 말이오?"라고 말이다. 아니 하느님 나라에서 반역을 일으켰다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천국>이란 우리에게 약속해 놓고 있는 것처럼 <행복>이란 말과 같은 뜻을 가진 곳이라면, 그런 곳에 어떻게 쿠데타 음모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일까?

              하느님의 나라, 그 지복(지복)의 세계과 이상적인 완전 행복을 보증한다고 할 때, 루시퍼도 하느님에게 대항하려는 생각을 품지 않았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전지전능한 신에게 감히 대항할 수 있단 말인가? 대항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와 반대로 천국에 완전한 행복이라는 것이 없다고 할 경우 결국 하느님은 완전한 전능이 못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지 않겠는가? 이 대목 역시 신학논쟁의 아픈 부위로 하느님과 루시퍼의 싸움에 대하여 신학자들은 그럴 듯한 해석을 붙이지도 못할 뿐더러 논리적인 동기의 구실도 내세우지 못하고 있다. 루시퍼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러 오기 전에 이미 하느님은 그 계략이 성공할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 아니겠는가? 아담과 하와의 <자유의사>라고 하는 문제에 이르러서는 아무리 루시퍼니 사탄이니를 등장시켜 보았던들 기분내키는 대로의 해결, 그런 방법 이외로는 달리 논리의 실마리를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루시퍼, 아담과 하와, 또는 뱀까지도 전지(全知)하신 하느님의 의사로 행동했던 것이기에 말이다.

              ▣ 자신의 친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게 하고 그제서야 자신의 아들을 살해한 인류와 화해(?)

              교육받은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하느님은 지극히 행복스러운 천국에 살고 계시며, 거기에는 음모세력도 있었다. 루시퍼는 그 짓을 저지르기 위하여 에덴동산에 나타났고 아담과 하와는 그 꼬임에 빠져 하느님이 예측한 그대로 죄를 범하게 된다. 이 부분이 비논리성의 극치적 장면이라 하겠는데, 이에 전능하신 하느님은 진노하여 최초의 부부자손들을 세세영겁으로 저주, <원죄>라고 하는 낙인을 박아 버린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세상 인류를 사랑하사 스스로 독생자를 희생시키셨다고 한다. 하느님의 아드님은 원죄탓으로 고통받고 있는 인류를 위하여 형제자매들을 구제해 주기 위한 일념에서 죽음을 당하게 되고 그제서야 비로소 아버지 하느님의 진노가 풀리셨다고 한다.

              미리 알고 계셨던 전지(全知)의 하느님은 방지할 수도 있었을 텐데도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도록 방치했고, 또 뻔히 알면서도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친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게 하고 그제서야 자신의 아들을 살해한 인류와 화해했다? 이건 도대체 어느 고장 풍습이란 말인가? 진노한 신의 기분을 진정시키기 위해 피의 희생제물을 바치는 식의 잔인스러운 결말로 사실상 이 세상으로부터 원죄가 추방되었다는 이야기지만 그건 지금껏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 삼위일체 - 애당초부터 하나인 아버지와 아들

              재치 풍부하고 말재주 좋은 신학자들은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그 아드님을 희생시킬 정도로 인류를 사랑했던 것은 아니고, 도리어 예수가 자유의사로 인류를 사랑한 나머지 자신의 생명을 바친 것이라고 얘기하기도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방향 전환 역시 신통한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 한쪽이 무엇을 하고 다른 쪽이 무엇을 한다고 하는 차이는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여하튼 희생이란 넌센스다. 아버지와 아들은 현행 교리(三位一體)로 볼 때 애당초부터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론에 맞지 않으니까 신학자들은 다른 최후의 해석을 착상해 내기에 이르렀다.

              예수는 아버지격인 하느님의 마음에 들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처신해야 되겠는가를 몸소 인류에게 보여주려 했기에 그런 행동을 했던 것이라고 한다.

              이거야 원위치, 제로점으로 돌아가는 셈이 아닌가? 온 인류가 하느님의 마음에 들게 꼭 그래야만 될 것이라면, 전능하신 하느님은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를 자신의 의사와 명령에 의해 원죄라는 과정 없이 만들어 놓았으면 좋았을 것이며 그런 능력쯤이야 있었을 것이 아닌가?

              이상 "종교회의"에 관한 내용은 백남철 편저<Cosmic Bible>에서 많은 내용을 참조, 요약한 것임을 밝혀둔다.

                 ☞ 성경은 앞에서 이미 원전(原典)에 대해 논한 바 있지만, 하느님(신)의 말씀일 수가 없다. 성령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다섯 번에 걸친 종교회의에서 다수 교회장로들과 종교에 대해 전혀 관심이라고는 없는 황제의 정치적 이해가 얽혀 도그마화 된 교리들을 만들고, 이단자 심문의 고문과 살인을 허용하여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종교재판이라는 잔학스런 의식까지도 탄생시킨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만들어진 교리는 수많은 오류와 문제점을 안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2004-08-17 21:37:36
3788 번 읽음
  총 7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1. 이희승 '04.8.17 9:47 PM 신고
    :-)*재미있다 ㅎㅎ ↓댓글에댓글
  2. 2. 김영한 '04.8.17 10:10 PM 신고
    :-)*이래도 지금의 기독교가 적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댓글에댓글
  3. 3. 전성호 '04.8.17 10:13 PM 신고
  4. 4. 김지형 '04.8.17 11:06 PM 신고
    :-)*아 잘 읽었습니다. 좋은 자료로군요. 하드에 일단 저장. :) ↓댓글에댓글
  5. 5. 김지형 '04.8.17 11:12 PM 신고
    :-)*예전에 이글의 일부를 읽었었는데 .. :) 내용이 보강(?) 되었군요. ↓댓글에댓글
  6. 6. 김지형 '04.8.17 11:13 PM 신고
    :-)*기독인들 이글을 읽으면 뭔 생각을 할까나.. 두뇌활동을 멈춰버릴라나? 어쩌면 용량 부족으로 다 읽지도 못하려나?.. 읽어도 이해나 할까? ↓댓글에댓글
  7. 7. 김영한 '04.8.18 1:23 AM 신고
    :-)*사탄의 글을 읽었다고 욕실에 가서 눈을 씻겠지요^^ ↓댓글에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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