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법이 폐지돼도 우리 사회에 아무 탈이 없다거나 더 나은 발전이 이뤄질 거라면 국보법은 폐지돼야 마땅하다. 반대로 국보법이 폐지된 이후 우리 사회가 감당하기 힘든 일이 벌어지거나 사회 안전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가능성이 크다면 국보법의 핵심조항은 어떤 형태로든 유지돼야 할 것이다.
이런 이성적 관점에서 보면 대통령이 “(국보법은) 칼집에 넣어 박물관으로 보내야 한다”거나 “국보법이 없어야 대한민국이 문명국가로 간다고 할 수 있다”거나 “국보법을 자꾸 법리적(法理的)으로 얘기할 것이 아니다”라면서 이 논쟁을 감정적·정치적 차원으로 끌고 가려 한 것은 정도(正道)를 벗어난 일이다.
그렇다면 국보법이 완전 폐지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인가. 한국 국민이 북한 노동당에 가입하는 것을 법적으로 막을 방법이 없어진다. 한국 내에서 북한 체제와 주체사상을 마음 놓고 전파하는 행위도 제재할 수가 없다.
방송과 신문에 김정일 정권을 찬양하는 프로나 글이 나와도 그만이다. 대학 강의실에서는 물론이고 서울 한복판에 주체사상연구소를 차려 놓고 학생들에게 주체사상을 학습시켜도 말리지 못한다.
전국 주요 도시에 일제히 인공기가 휘날리고 적기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김일성 추모 집회가 열려도 경찰이 막을 수가 없다. 주한미군 철수와 연방제 통일을 지지하는 시위가 열려도 속수무책이다. 국보법이 사라지면 송두율씨가 노동당 정치국후보위원이라도 처벌하기 어려워진다.
이런 일들을 허용하고 방치해도 우리 사회가 아무 일이 없다면 국보법 폐지는 당연한 시대적 흐름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이런 혼란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고 우리 국가가 이러고도 안보와 경제발전을 조화시켜 나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한 일간지의 여론 조사에서도 ‘국보법을 일부 개정하거나 보완해야 한다’가 66%, ‘그대로 둬야 한다’가 16%, 완전히 폐지해야 한다’가 14%로 나타났다. 더 구체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 전복의 자유까지 허용할 수 없으므로 폐지해선 안 된다’는 대법원 판결을 지지하는 국민이 62%로, ‘보안법은 독재시대의 낡은 유물이므로 폐지해야 한다’는 대통령 발언을 지지한 28%의 두 배가 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면 대통령과 여당은 국보법 개폐에 관한 국민의 견해를 우선 묻고 나서 논의의 방향을 정할 일이지 이념적 차원에서 목표를 미리 설정해 놓고 국민을 그 방향으로 우격다짐으로 끌고 가려고 할 일이 아니다.
따라서 지금의 국보법 논의는 국보법이 우리 사회에서 갖는 의미를 따져보고, 만일 지금도 국보법의 존재 의의가 여전하다면 악용 염려가 있는 조항들을 어떻게 바꾸고, 국보법의 의미를 살려갈 핵심조항을 어떤 형태로 유지해 나갈 것인가를 논의하는 단계로 진행돼야 마땅한 것이다.
이런 합리적 논의의 단계를 무시하고 대통령이 감정적이고 정치적인 언사를 사용하면서 이 논쟁에 뛰어듦으로써 범민련 남측본부 명예의장이 “현재의 국보법으로는 재판을 못받겠다”며 재판을 거부하는 사태까지 촉발한 것이다.
정부와 여당은 국보법 개폐 논쟁이 이같이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공공연히 그리고 집단적으로 대한민국의 현행 법률을 무력화하려는 무정부적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지금이라도 국보법 개폐 논쟁을 정상 궤도로 복원시켜야 한다. 국정을 책임진 정부와 여당이 정상적 입법 논의 단계를 밟지 않은 채 대한민국의 현행 법률에 대한 모독과 공격의 선봉에 서는 것은 누가 봐도 정상이라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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