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목사의 의식구조
목사란 매우 어려운 직업이다. 복음을 위해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따르겠다고 나선 사람들이니 우리는 이들을 존경하여 마지않는다. 그러니 목사에게는 일반인의 윤리적 기준보다 차원이 높은 윤리적 기준이 더 요구된다는 점은, 일반인은 물론 목사 자신도 모두 이의가 없을 줄로 믿는다. 그러므로 목사에 대한 존경은 목사 스스로가 약속한 십자가의 길을 오롯이 걸을 때 합당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목사들이 과연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지, 교인들에게는 십자가를 지라고 하면서 자신은 교인들이 진 십자가에 걸터앉지는 않았는지 의심스럽다.
목사는 교회의 지도자이다. 그러므로 목사가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어떻게 목회를 하는가에 따라 평신도의 신앙생활은 물론 교회의 진실성마저도 크게 영향을 받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목사의 의식구조를 몇 가지 면에서 검토해 본다.
1). 목사의 직업윤리
[퍼온글]
[ S교회의 담임목사였던 A목사는 80년대 초에 C장로에게서 $100,000를 무이자로 빌어 집을 샀다. 그 집의 은행 융자금은 주택수당으로 교회가 지급했다. 곧 그 집이 A목사의 재산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런 일에 죄의식을 갖는 목사는 몇 명이나 있을까 싶다. ]
오히려 목사에 대한 이와 같은 "대접"은 일반적으로 목사들에 의해 "하나님의 종에 대한 극진한 대접"으로 칭찬받을 사례로 불리워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만약 학교 교사가 학부형에게 무이자로 돈을 빌어 집을 사거나 투자를 한다면 지탄의 대상이 될 것은 뻔한 일이다. 수년 전 자민련의 이건개 의원은 정덕진 씨에게서 무이자로 수억을 빌어 쓴 것이 뇌물로 인정되어 실형을 언도받고 복역한 사실이 있다. 공직자에게는 뇌물이 될 수 있는 일이, 즉 일반인들에게 지탄받을 일이 어떻게 목사에게는 극히 칭찬받을 일이 되는지 아무리 해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목사들의 윤리의식을 잘 드러내 주는 예가 있다. 문민정부가 집권한 지 얼마 후에 신문에 난 일이다. 개신교 목사들이 모여 소득세를 내는 것이 옳은지 안 내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 논의가 있었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었다. 세금을 낼 것인지 말 것인지를 법이 아니라 자신들이 정한다는 것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우리나라 개신교의 목사들이 대부분 갑근세를 내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일부 양심있는 목회자들에 의해 이런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얼마 후에 다시 비슷한 일로 가톨릭 사제들의 회의가 있었고 여기서는 이론없이 세금을 낼 것을 결의했다는 기사가 났었다. 또 다시 얼마 후 비슷한 일에 대해 기자들이 조계종 총무원에 문의를 한 바 불교 측의 대답은 승려란 소유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승려에게는 재산도 없고 소득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세금 낼 일이 있겠는가 하는 대답이었다. 불교에 일부 돈 많은 주지가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교단의 원칙을 벗어난 일이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총무원의 답변은 그 나름대로 논리가 있다.
그러나 목사의 경우는 다르다. 신문에 난 것을 보면 그날 목사들은 갑론을박 하다가 결국 결론을 내지 못하고 헤어졌다고 한다. 세금을 안 내도 된다는 측의 주장은 교회의 돈은 하나님의 것인데 왜 세속정부에 세금을 내야 하느냐는 논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설령 그들의 주장을 그대로 인정하여 헌금이 하나님의 돈이라고 해도 그것이 한국은행의 발행권이고, 또 그들이 아무리 성직이라 하더라도 대한민국에 주소를 갖고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또 아무리 목사들의 양심상 세금을 안 내는 것이 정당하다 해도 일단 실정법에 대한 의무로라도 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은 삼척동자라 하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같이 갑론을박 하다 만 것은 왜일까? 솔직히 말해 지금껏 안 내던 세금을 이제 와서 내자니 돈이 아까웠다고 볼 수밖에 없다. 목사들의 경우, 실제로 일반 직장의 봉급자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봉급을 받고 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이것이 현재 성직자라고 하는 우리나라 목사님들의 윤리의식의 현주소다.
우리 주위에 목사의 자제로서 유학을 간 사람들을 많이 본다. 목사의 자제라고 유학하지 말하는 법은 없다. 그러나 70년대, 혹은 80년대 초까지 유학을 시도해 본 사람이면 다 알 수 있듯이 당시 유학이란 것이 어지간한 경제력을 가지더라도 어려운 일이라 일반인은 도무지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목사의 봉급으로 유학을 시킬 수 있었을까 하고 의심한다면 잘못된 일인가? 우리는 공직자들이 많은 재산이 있을 경우, 그들이 어떻게 박봉이라는 공무원 월급으로 그와 같은 재산을 모았는가 하고 의심의 눈으로 보게 마련이다.
[ 지방에서 감독까지 하셨다는 K목사님은 아들이 이곳 북가주에서 사업을 하기 때문에 자주 오신다. 이분은 아들을 유학시켰을 뿐 아니라 그 아들의 사업자금을 대 주셨다. 한번은 이 목사님이 우리교회에서 설교를 하신 적이 있는데 설교에서 자기 아들의 사업자금을 충분히 대 주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면서 "교회는 목회자에 대해 더 좋은 대우를 해 주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이분은 그렇기 때문에 실일조는 최소의 의무이고 그 이상 소득의 20%, 혹은 30% 정도는 헌금해야 된다고 강조하셨다. 이분은 골프도 보기 플레이 이상의 수준이다. 아들을 유학시키고, 미국에서 사업을 하도록 아들에게 자금까지 대 주고, 또 한국에서는 아직도 상류층의 운동인 골프를 즐기기 위해 평신도로부터 소득의 20-30%를 헌금으로 거두어들인다고 한다면 좀 지나친 일이 아닌가? ]
2) 목사의 교만
[ 1996년 A목사는 예배시간에 광고하기를 "담임목사가 매우 바빠 교인을 일일이 심방할 수 없으니 목사를 만나고 싶은 사람은 교회 입구에 비치한 목사 면담신청서를 기록하여 면담을 신청해 달라"고 강조했다. A목사는 같은 광고를 그 다음 주, 또 그 다음 주에도 계속하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 교회는 교인이 약 300명 정도였다. 300명 정도의 신도를 가진 교회의 목사는 면담신청서를 작성하여 면담을 요청해야 할 만큼 바쁘고 대단한 분인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중략) ]
내 중학교 때의 동창 중에 신학을 공부하고 오지에서 전도사로서 목회활동을 하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와 이야기 하는 도중 내게 하는 말이 어떤 미국영화(제목은 기억이 안 나는데 브루스 윌리스가 나오는 영화로 어떤 아이가 갑자기 자신의 위에 서서 명령을 내리게 되는 상황...) 를 예를 들며 지금은 너와 내가 같은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자신이 내게 명령을 내리는 경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느끼는 교회에 대해, 내가 만난 많은 사람에 대해, 타종교에 관해 이야기했고 함께 이야기하고자했으나 이야기를 듣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못했으면서 너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으며 자신의 기준으로는 나의 마음에 믿음이나 신앙이라고 보이는 최소한의 건덕지도 없다, 믿음을 더 키운 다음에 나를 찾아오라는 이야기만 했고 자신은 다만 나에게 걸어가는 방향을 제시해 줄 뿐 이라면서 교회나 목사들의 문제점을 이야기하자 너는 친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하지 않느냐고 하면서 상당히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내가 세상사람 들에게 배운다는 생각보다는 세상 사람들을 가르치고 명령을 내린다는 생각, 자신이 학교에서 몇 년 동안 공부한 성경과 신학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고 그 외의 것은 무가치하게 단정 짓고 있는, 내가 가진 주장이나 생각이 틀리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면서 머리로만 아는 교리, 마음으로 전하며 행동으로 보여주는 신앙.. 과연 그 친구가 추구하는 그리스도의 삶은 어느 쪽이었으며 그가 사람들에게 심어 주고 있는 것이 어느 쪽일까 하는 생각을 하니 저절로 마음이 착잡해 져갔다.
위의 경우만이 아니라도 일반적으로 목사들은 자신이 교인들의 정신적 지도자라고 자처하며 상당히 교만한 것이 사실이다. 대부분은 자신이 그만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평신도는 목사들의 교육이나 지적 수준이 높아서 목사를 존중해 드리는 것이 아니다. 평신도는 자신보다 조금은 더 예수를 닮은 모습을 목사에게서 기대하는 것이다. 목사들은 그들의 말대로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존경해 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겸손을 몸소 실천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예수의 교훈을 가르치는 사람이 남보다 겸손하지는 못할망정 교만하다면 이는 예수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처사가 되기 때문이다. 일반인에게 겸손은 미덕일지 모르나 목사에게 겸손은 사명이다.
목사의 교만은 우리 평신도에게 실망을 넘어 신앙 그 자체에 대한 회의를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목사 같은 성직이 아닌 초등학교 교사라도 제자들의 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를 실족케 하려거든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고까지 강경히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나는 목사는 교만하게 처신하느니 차라리 목회를 그만 두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3) 목사들의 세자랑, 줄서기
[퍼온글]
[ 1994년으로 기억한다. 샌프란시스코 공항 근처에 있는 한 호텔에서 한국의 모교단의 선교대회가 열렸던 적이 있다. A목사는 수 개월 전부터 이 대회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교인들에게 동참할 것을 독려했다. 목사가 워낙 중요하게 강조하고 참여를 독려하므로 성가대원은 몇 달 전부터 연습하고, 일부 교직자는 아예 회사에 휴가를 내고 이 일에 몰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 역시 하루 시간을 내어 여기에 참석했었다. 목사님의 체면을 보아서라도 한 번쯤 참석하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생각해서였다.
대회 내용은 한국의 그 교단에서 세계에 파견된 많은 선교사들과 또 그 교단의 많은 관계자들이 참석하여 선교사들의 여러 가지 사례나 문제점 등을 발표하고 또 지원을 다짐하는 대회로 일종의 워크샵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동남아는 물론 아프리카, 남미의 오지 등으로부터 온 많은 선교사들이 참석했으며 한국에서 유명하다는 교회의 목사들과 교회의 대표들도 많은 교직자와 성도들을 대동하고 대규모로 참석했다.
아무튼 목요일 저녁 이 대회에 참석했던 나는 그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회는 그 호텔 일층에 있는 연회실 여러 개를 터서 족히 일천여 명 이상이 참여할 수 있는 대규모 연회장에서 일 주일 동안 진행되는 것이었다. 한국의 재벌그룹에 간부로서 여러 해 근무했던 나는 회사의 경영관계로 간부직원을 교육하거나 경영지침을 준비하는 대회에 여러 번 참석했던 경험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회의 규모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굳이 관계된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 같은 대회의 경우 수십만 달러가 소요되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대회를 보는 나의 마음은 착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같은 성격의 대회라면 선교 추진의 본거지인 한국에서 관련된 사람들이 모여 소규모로도 효과적인 대회를 얼마든지 치를 수 있을 것으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한국에 있는 교단이 그들의 대회를 굳이 이곳 미국에 와서 해야 하는가, 또 왜 그 같이 대규모로 해야 하는 것일까? 이 대회는 한마디로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의 세자랑, 돈자랑이었다. 한국의 목사님은 모두 성도들이 정성껏 바치는 헌금으로 부부가 여행왔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교회의 헌금이 하나님의 돈이라 소득세도 낼 수 없다는 목사님들이 하나님의 돈을 이렇게 함부로 사용해도 되는가?
또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이곳 미국 현지의 목사들의 태도였다. 엄격히 말하면 한국의 교단과 미국의 교단은 같은 교파라도 별개의 교단이며, 직접적 관계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이곳의 여러 목사님들은 헌신적으로 이 대회를 도와주고 특히 A목사 같은 분은 거의 온 교회를 총동원하다시피 하여 협조를 한 것이다. 돕고, 협력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다 알다시피 이곳 미국의 이민생활이란 대부분 부부가 맞벌이하는 경우가 많으며 또 많은 교포가 소규모 소매업에 종사하기 때문에 시간을 낸다는 일이 쉽지 않다. 왜 생업에 바쁜 교포들을 거의 등을 떠밀다시피 하여 이같이 많은 사람을 참석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일까? ]
미국의 한인 목사들은 이 "능력 있는" 한국의 목사님들과 교분을 두터이 할 좋을 기회이니 교인들을 동원하여 그들 앞에서 능력발휘를 하는, 말하자면 일종의 줄서기인 것이다. 물론 목사도 직업이니 더러 줄서기가 필요할 수 있겠다고 인간적으로 이해해 주고 싶다. 그러나 그런 일은 개인적으로 할 일이지 왜 무고한 교인들을 동원하여 들러리를 세우는가?
4) 목사들의 사회적 지위
[ A목사는 96년 서울에 전통 있는 S교회이 담임목사로 "영전"했다. 그 후 A목사의 부인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 "한국에서는 목사에 대한 대우는 미국보다 나은 것 같으나 목사의 사회적 지위는 미국보다 못하다"고 말했다 한다. A목사의 의식구조가 충분히 짐작가는 대목이다 .]
목사들 중에 설교를 통해 정치인을 한두 번 비난한 적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감리교나 장로교나 할 것 없이 개신교의 선거를 보면 세속의 국회의원 선거보다 더한 것 같다. 몇 년 전 서울에서는 교단장의 자리를 놓고 형제 목사가 혈전을 벌인 적이 있다. 이 선거가 돈 선거였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국회의원 선거는 최소한 선거자금에 대한 법이라도 있어 더러 통제라도 되지만 목사는 그런 것도 없는 것 같다.
[퍼온글]
[ 내가 한국에 있을 때니까 16년도 더 된 이야기인데(1982년으로 기억) 나의 상관이었던 B전무는 장로교 목사의 아들이었다. 그 아버지는 지방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다. B전무가 한탄하는 것은 대 그룹의 전무로서 아버지를 노회장 한번 시켜드릴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내용인 즉 그 아버지가 노회장을 한 번 해보고 싶어하시는데 선거에 당시로 1억 5천만 원 정도의 경비가 드는데 이를 감당할 능력이 자기에게 없다는 것이다. 그 당시 내가 수원에서 1,600만 원으로 25평 아파트를 샀으니까 대략 이 아파트 9채 값이 있어야 노회장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목사의 아버지는 아들이 사장이 된 후에야 비로소 노회장이 될 수 있었다. 이 B전무의 아버지는 그래도 잘난 아들 덕분에 노회장이 되었지만 다른 노회장이나 감독들도 모두 잘난 아들의 덕택으로 출세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
내가 이슬람을 선택한 큰 이유 중에 하나는 기독교나 불교와 같이 그 어떤 사제계급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는 중간에 그 어떠한 매개체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이슬람에서 말하는 교리이기 때문이다.
5. 왜곡된 교회
오늘날 한국 개신교는 여러 가지 면에서 왜곡되어 가고 있다. 기복신앙은 아주 일반화되어 가고 있고, 교회의 기업화는 이미 그 한계를 넘었다는 느낌이다. 교세 확장이라는 목표를 향해 마치 브레이크가 파열된 자동차같이 달리기만 한다. 전도나 선교, 혹은 하나님 사업이라는 명분을 내세워서는 어떤 행위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고 있다.
이슬람의 코란에서는 진리나 신앙은 권유하되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으며 예배당을 절대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몸과 마음이 깨끗한 상태에서 신을 경배 할 수 있다면 이 세상 어느 장소가 되었든 그것이 곧 사원(예배당)이 되는 것이다.
시장터, 산과 계곡, 배의 갑판, 비행기내, 식당, 길거리, 다방 등 지구 전체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교회가 된다. 하나님께 예배보는 장소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내용이다.
이슬람의 영광가운데 하나는 인간의 손에 세워진 교회에서만 예배를 근행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만든 세계 어느 장소에서든지 예배를 실천 할 수 있는 것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남자와 여자의 경우 생활상황이 다른 만큼 그에 맞게 배려를 해 놓았다.
이슬람에서는 예배를 혼자서, 어느 장소 에서나 볼 수 있다.
물론 남자의 경우 합동으로 여럿이 보는 예배가 더 가치가 높다고 하나 여자의 경우는 집안일이나 그 밖의 상황을 고려해서 굳이 합동예배를 안 나오고 집에서 개인예배를 봐도 상관없게끔 해 놓았다.
예수께서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는 것이지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내용을 무하마드는 잘 실천토록 해 놓은 것이다.
이슬람세(자카트)는 연말정산에서 개인비용, 가족부양비와 용돈, 필요경비를 빼고는 부채가 있을 경우에는 부채를 상환한 후 남은 순수한 이익금잔액이 15불이상 상용하는 재산을 소유한 무슬림(이슬람신자)이면 남녀를 막론하고 최소한 그 금액의2.5%를 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기독교의 십일조의 경우는 부자나 가난한 자나 수익에서 무조건 10%이다 보니 가난한 자들에게는 여간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는 반면 이슬람에서는 그만큼 형편에 따라 낼 수 있도록 잘 배려가 되어 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누진세의 시초가 되는 제도이다.
중요한 것은 자카트는 의무적인 성격을 띄고 있으나 기독교의 헌금과 십일조와는 달리 교회나 사원을 거치지 않아도 되게끔 장치되어 있다.
가령 내 옆집의 사람이 병원비가 없거나 등록금이 모잘라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면 내가 모은 자카트를 그 사람에게 희사하면 하나님께 의무를 다 하는 것이다.
도움받는 사람이 무슬림이 아니라도 괜찮다.
왜냐하면 이슬람의 하나님은 부자에게나 가난한자에게나 선한사람에게나 악한사람에게나 무슬림이나 비무슬림이나 공평하게 대해 주시기 때문이며 이는 기독교성경에서 나오는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에서 1000년이 넘도록 해결할 수 없는 성직자의 절대성, 교회의 절대성, 완벽하다는 교리에 따른 문제, 그로인한 세속화들이 이슬람에서는 잘 수정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일반 사회의 기준으로 보아도 조금도 나을 것이 없으며 솔직히 말해서 어떤 경우는 교회의 운영이 기업보다 훨씬 비리를 많이 갖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교단의 감투에 수억의 돈을 척척 쓰질 않나, 공공연히 교회를 매매하기도 한다. 우리 속담에 처녀가 애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고, 목사들은 이것도 모두 전도를 위한 것이니 궁극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논리를 전개한다.
교회가 앞장서서 이렇게 타락하니 교인들이 기독교인으로서 바른 가치관을 갖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목사님들은 교회는 하나님의 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하나님의 몸과 같이 운영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의 윤리적 기준은 그 스스로 지키지 않으면 아무도 설정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조그만 구멍이 댐을 허물 듯이 교회가 작은 것에 스스로 엄격하지 못하면 결국 교회의 매매와 같은 엄청난 일에도 무감각해지고 마는 것이다. 왜곡된 교회의 모습을 몇 가지 면에서 생각해 본다.
1) 아전인수격 성경해석
목사들이 곧잘 인용하는 성서 말씀에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 15:22)는 구절이 있다. 목사들은 이것을 흔히 교회에서는 순종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인용한다. 이 말은 사울이 아말렉족과 그 재산을 다 죽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고 귀중한 것을 제사를 드린다는 명목으로 남긴 것에 대해 사무엘이 꾸짖은 말로 하나님은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제사보다 더 원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요즘말로 바꾸자면 하나님은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을 예배보다 더 좋아하신다는 말이 되겠다. 복음(사랑)을 실천하고 사는 것이 교회에서 예배보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도 되겠다. 그러나 이 말이 목사들에게는 목사에게 순종하는 것이 믿음 생활의 요체라는 의미로 둔갑해 버린다.
예수께서 ‘너희들은 서로 사랑하라’ 라고 하셨는데 이는 모든 사람(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결교회에서는 그 뒤에 ‘주 안에서만’ 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한 술 더 떠서 교회 안에서, 기독교(개신교)신자들끼리만 사랑하라는 뜻으로 둔갑시켰다.
마치 조지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에서 나오는 스타일과 같다.
“악한 것은 보지도 듣지도 말라”는 구절의 경우도 그 전체적인 문맥상으로는 옳지 못한 것에 물들거나 따르지 말라는 말로 해석이 가능하지만..
교회에서는 “악하다” 는 것을 자신들과 다른 모든 것으로 해석하면서 기독교 이외의 것은 볼 가치도 들을 가치도 없다는 쪽으로 가르치고 있고 자신들의 말만 무조건적으로 믿으라는 그 저의 속에는 교회의 일을 의심하지 말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자신들의 부정부패, 교세확장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위조차도 주님의 뜻이고 사업이라는 뜻으로까지 연결이 되는 것이다.
[퍼온글]
[ B목사는 성경공부시간에 말하기를 "기독교인이 임의로 주위의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일 뿐이다. 교인은 마땅히 그럴 돈이 있으면 교회에 바쳐 교회가 구제사업을 하도록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S교회는 교인이 현재 500명 정도인데 교인이 1500명이 넘는 이곳의 가톨릭 성당보다 2배 이상의 헌금을 거둬들인다. 그런데 실제 구제 사업에 대한 노력은 성당에 훨씬 못 미친다. 이 목사는 다른 자리에서 어떤 교인이 왜 교회가 구제사업에 소극적이냐고 묻자 교회는 복음 전도가 그 주임무이지 구제사업이 주임무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
복음의 본질에 있고자 노력해도 쉬운 일이 아닐 턴데, 성경 말씀이나 복음을 이렇게 목사들 편한 대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갖다 붙이니 교회와 평신도의 신앙이 왜곡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2) 헌금과 기복신앙
교회에서는 십일조를 교인의 신앙의 의무 내지는 미덕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신약전서 어디를 보아도 십일조를 하라는 말은 찾을 수 없다. 앞서 언급한 십일조에 대한 신약의 근거로 유일하게 마태복음 23장 23절을 제시하고 있다. 옹색한 설명이다. 이 구절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이 십일조를 지킨 것으로 율법을 모두 지킨 것으로 여기는 것에 대해, 율법에 더 중요한 바 의와 인을 잊어 버린 것을 예수께서 경계하여 꾸짖은 부분이다.
십일조란 구약에서 유대인들에게 요구되던 율법이다. 구약의 율법이라도 성경에 있으니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고 강변할지 모르겠다. 그러면 구약에 있는 그 많은 율법사항 중에 왜 하필 십일조만 지켜야 하는 것일까? 안식일도 지켜야 하고, 돼지고기도 먹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도대체 이런 식으로 구약의 율법으로 돌아간다면 복음은 어디 갔는가? 기독교가 유대교의 한 교파는 아니지 않는가?
사실 교회에서는 헌금을 유도하기 위해 여러 가지 기법이 동원되고 있다. 나는 목사님들이 "십일조를 한 번 해 봐라!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지 안 주시는지" 하며 십일조를 권장하는 말씀을 여러 번 들었다. 그러나 나는 십일조 잘 해서 재벌이 되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많은 목사들이 자신은 헌금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헌금을 많이 하는 교인을 그만큼 대우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를 편다. 실제 헌금이 권사, 장로 등의 "진급" 심사의 중요한 기준인 것이 사실이다.
개신교에서는 추수감사절 행사가 대단히 크다. 일반적으로 목사님들은 추수감사절을 기독교의 큰 절기로 강조한다. 그러나 추수감사절은 단지 미국의 명절일 뿐, 2000년의 오랜 기독교 전통을 가진 유럽 개신교 국가에는 이 행사가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하기야 한국의 개신교가 주로 미국에서 전도되었으니 그 영향을 받았을 수는 있겠지만 왜 하필 미국의 명절을 그토록 지키려고 노력할까? 그 이유는 검사헌금을 걷기 위한 것과 얼마나 무관한 일일까? 본래적 신앙의 의미를 지키고 있는가? 이 말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목사님들이 많을 줄 안다. 비록 미국의 명절이더라도 좋은 것을 따른 것이 잘못은 아니지 않는가 하고... 그러면 맥추감사절은 왜 있는가? 나는 현재 15년째 미국에 살지만 미국에 맥추감사절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맥추감사절이란 것도 있어서 어려운 보릿고개에 또 한번 감사헌금을 거둬들인다. 그러니 감사절이란 감사헌금을 위해 미국에서 수입한 것이라고 말해도 변명할 말은 없을 것이다. 감사절에 일년 예산의 반이 들어와야 한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목사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것을 없는 자와 나누기를 원하신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십일조를 하면 복 받는다는 식의 논리는 하나님 장사다. 개신교는 가톨릭이 면죄부를 판 것이 빌미가 되어 개혁했다고 하지만 오늘날 한국 개신교는 하나님을 통째로 팔고 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3) 직분
[퍼온글]
나는 직업상 서울 출장이 잦다. 내가 서울에 갔다오면 목사에게 무슨 선물을 사다 주었느냐고 묻는 교인이 많았다. 얼마 전 C장로님은 나에게 좀더 목사와 좋은 관계를 갖도록 노력하라고 충고하신 적이 있다. 그래야 권사로 진급도 되고 교회생활이 원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솔직한 충고였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한국의 개신교가 대부분 그렇듯이 감리교회에도 소위 집사, 권사, 장로라는 직분이 있다. 그런데 감리교의 원류인 미국 연합감리교회에는 이런 직분이 없다. 왜 본 고장 미국에도 없는 이 같은 제도가 한국교회에만 있는 것일까? 이는 신분의식이 강한 한국사람의 정서와 교인들을 직분제도를 통해 장악하려는 목사들의 현실적 이해관계가 딱 맞아떨어진 대표적인 예라고 본다.
한국사람들은 신분의식이 매우 강하다. 남의 집 머슴을 살아도 명함만은 커야 한다는 것이 한국 사람이다. 월급보다도 직급을 더 중요시하는 것이 한국사람들의 일반적인 정서이다. 그러니 교회에 와서도 집사니, 권사니, 장로니 하는 계급을 받는 것을 좋아한다. 일반적으로 교인들은 집사가 권사가 되고, 권사가 장로가 되는 것을 진급으로 받아들인다. 기독교의 역사가 일천한 한국에서는 교인들의 신앙적 뿌리가 짧다. 그렇다 보니 이렇게 교회에서까지 사회적 정서가 연장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하겠다. 목사들은 이런 정서에 적당히 편승하여 교인들의 진급에 대한 자신들의 영향력을 통해 교인들을 장악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진급을 원하는 사람은 자연히 목사에게 충성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교인들의 경쟁을 유도하는 결과를 낳게 되고 목사는 이를 반갑게 이용하는 것이다.
직분의 난맥상은 교포 교회가 더 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교포들은 별달리 사회적 지위가 없다 보니 교회의 직분에 더 집착하는 것 같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 K집사는 부목사가 잘 봤다고 소문이 나더니 이듬해 젊은 나이에 권사가 되고, 또 다른 K집사는 사모가 거듭났다고 몇 달 소문을 내더니 권사가 됐다. S권사는 S교회에 온 지 1년만에 집사도 거치지 않고 바로 권사가 되었다. 이분은 전에 미국감리교회에 계셨기 때문에 집사, 권사가 뭔지도 몰라 내게 그게 뭐냐고 물은 적이 있는데 그 몇 달 후 권사가 된 것이다. 이분은 샌프란시스코의 유명한 목사님의 아들이다.
돈이 많다고 소문이 자자한 L씨는 S교회로 온 지 1년만에 부부가 다 한꺼번에 권사로 진급하셨다. K장로는 S교회에 온 지 일 년만에 다른 사람은 20년을 다녀도 되기 힘든 장로가 되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K장로는 한 달에 $4,000 정도의 헌금을 했다고 한다.
이런 얘기를 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고, 또한 S교회가 특별히 잘못된 것도 아니다. 내가 S교회에 다녔으니 이 교회의 예를 들은 것뿐이다. 다른 교회도 비슷한 예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진급을 시키니 권사나 장로의 수준도 문제가 된다. K권사는 1992년에 권사가 된 사람인데 1998년 성경공부시간에 말하기를 자기는 기독교의교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인 줄 그때 처음 알았다는 것이다. 솔직한 것은 좋으나 나는 그가 어떤 기준에 의해 권사가 됐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떤 장로님은 하박국을 신약에서 찾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
교회 안에 이와 같은 계급을 만들어 놓고 교인들 상호간에 경쟁을 유도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목사들은 성경이 어떻고 초대교회가 어떻고 하며 이런 직분제도를 대단한 것으로 포장하려 한다. 그러나 무슨 말로 변명을 하더라도 교인간에 경쟁을 유도하는 제도를 운영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교회란 반구조적이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는 노력을 해야 할 사명이 있고, 하나님 나라에는 신분이나 귀천의 차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치소한 교회에서는 이런 사회의 구조 내지는 계급을 부정하고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무릎에 안길 수 있는 곳이 천국임을 보여주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도 이 땅에 건물을 짓고 운영되고 있는 세속의 조직 중의 하나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한다면 최소한 그 기준이라도 공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교인간에 경쟁을 유발하지 않도록 개선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교회 직분에 객관적이고 공정한 기준이 엄격히 적용된다는 말을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
4) 교회의 기업화
오늘날 교회는 도대체 기업인지 교회인지 도저히 구분이 안 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나는 술집 광고와 나란히 있는 교회의 광고를 보면서 착잡한 기분을 아니 느낄 수 없다.
[퍼온글]
[ B목사는 S교회에 부임하자 팜플렛을 만들었다. 여기에 보면 인사말 초대합니다와 함께 교회의 사진, 목사의 사진과 약력, 각종 예배시간 안내, 교회 각종 행사의 사진, 약도 등이 총 천연색으로 멋지게 인쇄되어 있다. 일반 기업체의 선전 브로셔와 전혀 다를 게 없다. 그러니 B목사가 부임하자 왜 로고를 현상 모집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개신교라도 미국교회는 좀 다르다. 나는 1973년 처음으로 미국에 출장 온 적이 있었다. 당시 미국교회를 빌어 예배보는 한인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곤 했는데 미국교회에도 이런 브로셔가 있어 유심히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전혀 달라서 경제적으로 어려워 학교를 못 간다든가, 가정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라든가, 미혼모가 되었다든가 하는 사람에 대한 위로와 찾아달라는 목사의 전화와 주소 등이 적혀 있었을 뿐이었다. 왜 이런 것은 배우지 못하는가?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목사들은 이렇게 교회가 기업화하는 것에 대해 특별히 잘못되었다는 인식이 없는 것 같다. 이런 식으로 교회가 계속 기업화마다 보니 심지어 교회의 매매에도 무감각해지는 것이다. 내 친구 중에 K라는 목사가 있는데 80년대 말에 이곳 북가주에 와서 개척교회를 하여 유학을 하다 돌아간 적이 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갈 때가 되어 준비를 하며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분당에서 교회를 하는 친구가 있는데 이 교회를 8.000만원에 팔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 교회목사는 늦게 목사가 되어 분당에 개척교회를 세워 현재 교인이 70명 정도 되는데, 강단과 의자, 전세금 등 들어간 돈이 약 8,000만원이 되니 이 가격에 넘기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 목사는 이 돈으로 유학을 하려고 한다는 이야기이다. 인간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말로 변명을 해도 명백한 교회 매매이다. 한국에서 공공연히 교회가 매매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
이같은 교회 매매에 대해 교단차원에서 어떤 제동이 있었다는 얘기를 나는 아직 들어본 적이 없다. 비록 모양새는 좋지 않지만 전도와 선교를 위한 것이며, 하나님을 위한 것이니 궁극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자세이다. 살인자도 용서하라는 예수께서 성전 안의 장사꾼을 채찍을 들어 내어쫓지 않으셨던가? 그 당시의 성전의 장사꾼들도 다 제사드리는 성도들의 편의를 위해 존재했던 것이다. 교회가 경계해야 할 바에 대한 명백한 교훈이 아니겠는가?
맺는말
개신교는 오늘날 한국사회에 기여한 바도 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솔직히 나는 골목골목에 세워진 십자가를 볼 때마다 착찹한 기분을 느낀다. 교회란 올바른 복음 위에 서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개신교가 진정 올바른 복음 위에 기초했는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평신도에게는 신학적 이론이나 교리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목사님들이 교회에서 훌륭한 이론으로 복음을 설명하고 천국에 대해 설교한다고 하더라도 목사와 교회가 스스로 복음의 원칙적 자세로 돌아가지 않으면, 평신도에게는 오히려 더 큰 실망만을 주게 될 뿐이다. 개신교 교회가 말만 예수를 앞세우고 자신은 예수의 길에 서 있지 않다면 JMS나 만민중앙교회와 같이 사이비 종교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한국 개신교는 중병에 걸린 환자와 같다. 너무 병이 깊어 자신이 병들었다는 것조차 느낄 수 없는 정도가 아닌가 의심스럽다.
교회가 기업화되고 타락했다면 모든 교인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싫든 좋든 교회의 지도자는 목사들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잘못되었다면 그 주된 책임은 어차피 목사들의 몫이다. 또 교회를 바로 잡아야 할 책임 역시 목사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그 때로 돌아가서 마음을 비우고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며 오늘 이 순간에도 교회가 바로 복음의 원칙에 충실했는가를 항상 반성하고 돌이켜보아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그리하여 자신이나 교회가 하나님께 누가 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일차적인 책임이 바로 목사에게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도 못 가고 남들까지 못가게 천국문을 막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누구도 목사가 되라고 강요한 사람은 없다. 자신의 말대로 목사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일하는 하나님의 종들이 아닌가?
내가 너무 목사와 교회의 부정적인 면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아직 교회에는 훌륭한 목회자들도 많다고 나도 믿는다.
그러나 나는 오늘날 개신교는 큰 흐름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감옥 밖에 있는 사람의 수가 감옥 안에 있는 죄수의 수보다 많다고 하여 그 사회가 건강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목사라면 당연히 걸어야 할 성직자의 길을 가고 있을 뿐인 분들이 특별한 목사가 되고 있는 현실이 바로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이며 문제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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