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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은 친일한 적이 없습니다? - 퍼온글

 










천리안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우연히 게시판에 올라온 글을 보고 퍼 왓습니다.
퍼온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정희의 가장 큰 오점은 유신독재입니다.
그의 실책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유신 이전의 박정희의 업적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박정희 이후의 대통령과 정치인과 비교하여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다양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친일한 적이 없습니다.
°글쓴이 : 박정철 ° 날짜 : 2004. 11. 21 ° 조회 : 3 ° 추천점수 : 0 ° 답글수 : 0


박정희는 어릴 때 이순신과 나폴레옹의 전기를 읽고 군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대구사범에 가서도 일관된 그의 희망이었고 박정희가 교련 과목에서 출중한 두곽을 나타내자 아리가와대좌가 박정희를 좋아하게 되고 서로 서신왕래를 하는 사이로 발전합니다.


박교사는 학교 바로 아래있는 김순아라고 하는 아주머니집에서 하숙을 합니다.
남편을 잃고 임창발이라는 아들과 하숙을 치며 사는 여인인데 인정이 많고 호방한 여자였다고 합니다.
하숙을 정한 다음 달 문경군청의 농회(農會)기사인 허동식이 하숙생으로 들어 옵니다.
두사람은 한집에서 친하게 지내며 퇴근 후 술친구가 되었답니다.
다음은 당시 생활에 대한 허동식의 증언입니다.


"나는 대구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왔다.
박교사의 첫인상은 꾀죄죄했는데 눈빛만은 빛나고 다부진 느낌을 주었다.
우리는 곧 친숙한 사이가 되었고 매일 집에서 술을 마신 것 같다.
술마신 것이 기억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막걸리를 동이로 받아와서 쪽박을 띄워놓고 허연 배추 속과 된장을 안주삼아 밤새도록 마셔댔다.
하숙집 주인도 가끔 끼어들고 했는데 박정희는 평소엔 말이 없다가 술만 한잔 들어가면 [왜놈들][왜놈들]하면서 일본인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그리하여 이순신이나 나폴레옹에 대한 이야기도 하면서 호탕하게 웃기도 했다.
노래는 황성옛터가 18번이고 방학때도 집에 가지 않았기 때문에 결혼한 줄은 전혀 몰랐다.(이때 박정희는 아버지의 종용으로 김호남씨와 결혼한 상태였습니다.)
집안 이야기는 도통 꺼내지 않았다.
그는 늘 스파이크를 가지고 다니며 애지중지했고 아침 6시에는 학교 운동장에 올라가 어김없이 나팔을 불었다.
시계가 없던 시절에 이 나팔소리가 들리면 문경사람들은 ´야,박선생 나팔소리다.이제 일어날 시간이다.´하고 일어날 정도였다.


박교사는 누구보다도 대일감정이 좋지 않앗다.
말끝마다 [왜놈들]이 튀어 나왔으며 의식적으로 일본말을 회피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한번은 무슨일인지는 몰라도´그 새기 때려죽이려다 놔주었다.왜놈이면 다여 !´하면서 아리마 교장을 패주고 와서는 씩씩거리는 것을 보았다."


박정희의 머리 속에는 하나의 지워지지 않는 신천지가 있었으니 그것이 곧 만주땅입니다.
그가 만주땅을 처음 밟아 본 것은 1935년 5월의 4학년 수학여행 때였습니다.
학생들은 2주간에 걸쳐 봉천,대련,여순,신경,하얼빈,길림,무순지방을 기차로 여행했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평야와 지평선 뒤로 떨어지는 장엄한 석양은 학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박정희는 어려서부터 군인이 되기를 희망했고 언젠가 고향의 선배인 강재호가 만주군 장교의 계급장을 달고 박정희앞에 나타나자 만주군관학교에 대해 자세히 묻기도 했습니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강화되면서 박정희교사의 마음은 울분과 갈등으로 끝없는 방황이 계속되었습니다.
당시 동료교사로서 박정희의 교사시절을 마지막까지 지켜보았던 권상하의 증언입니다.


"나는 그때 상주에서 보통학교교사로 있었는데 군은 달라도 박정희가 근무하던 문경보통학교까지는 4킬로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일요일만 되면 서로 하숙집을 오가며 만났다.
1939년의 10월인가 11월경인데 그가 나한테 놀라왔다 간지 며칠 안된 화요일인가 수요일이었다.
내가 6학년의 오후수업을 하고 있는데 누가 복도에서 창을 똑똑 두드려 나가보니 박정희였다.
국민복을 입은 채 멀쑥하게 서 있는 그의 신색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나도 얼른 말을 못하고 멍멍히 서 있었다.
"수업이 언제 끝나는가 !"
"한 30분있으면 되네."
"그런 내가 저기 운동장 나무 밑에서 기다림세."
"그러게.마치고 곧 감세."
수업을 마치고 나무아래로 가니 그가 들고온 가방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박정희는 사표를 내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나는 그와 함께 하숙집으로 와서 또 밤새도록 술을 들이 마셨다.


박정희는 그때 머리를 기르고 있었다.
교사들은 군대식으로 머리를 빡빡깎게 되어 있었는데 그는 장발이었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도전이요 반발이었다.
이틀전 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는 연구수업에 대한 발표가 있었고 도에서 데라도(寺戶) 시학(장학사)이 시찰을 나왔던 것이다.
그는 강평하는 자리에서"아직도 총력정신이 결여된 교사가 있다.이것은 황민화의 정책에 순응하지 못한다는 증거이다."하고 박교사를 겨냥하여 비판했다.
그날밤 아리마 교장의 사택에서 시학을 위한 술자리가 있었다. 물론 교사들도 초대되었다.
그자리에서 또 박교사의 두발 문제를 거론하자 그는 시학과 교장을 상대로 언쟁을 벌이다가 술잔을 던지는 등 소란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다음날 아리마교장은 박교사를 교장실로 불러 질책을 한 다음 데라도시학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던 것이다.
젊은 혈기를 이기지 못한 박교사는 모욕감을 참을 수 없어 울컥하고 말았다.
[조선인]주제에 너무 건방지다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박교사의 주먹이 아리마 교장의 면상으로 날아갔던 것이다.
평소에 쌓이고 쌓인 울분이 한꺼번에 폭발하고 만 것이다.
그리곤 사표를 써던지고 곧장 나를 찾아 왔던 것이다.
"그래 !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가?"
"막막하이.부모님한테는 이야기 할 수도 없고...그런데 전에 우리학교 배속장교인 아리가와(有川)대좌 알지?"
"응."
"실은 졸업 후에도 편지왕래가 가끔 있었어.그분은 지금 만주 관동군부대의 지휘관으로 있는데 거기로 한번 가볼까 해."
"아리가와가 널 무척 사랑했지."


이렇게 해서 박정희는 약 3년 동안의 보통학교 교사생활을 마감하고 스스로 군인의 길을 찾아 북만주로 향했습니다.


만주군관학교로 일본육사로 독립군으로 한국육사로 한평생을 군인의 길을 걸어온 박정희의 군인에 대한 집념은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최상천이나 이부영은 박정희를 변신의 천재니 달인이니 하지만 그는 숙명과 같이 오로지 군인 한길을 걸어왔고 평생을 군인이 되는 길을 찾아 갔습니다.
민족적 울분에 일본인 교장을 대책없이 패주고는 그길로 만주로 갔던 것이지 무슨 기회를 노려서 변신을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김구가 일본인 순사를 죽이고 만주로 갔던 것과 같은 동기로 박정희도 일본인 교장을 때리고는 만주로 가는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일본인 교장을 때리고 상주에서 권상하와 헤어진 박정희는 잠시 고향집에 들러 어머니에게 인사를 드리고 곧바로 만주에 도착하여 아리가와 대좌를 찾아 갑니다.
박정희를 반갑게 맞이한 그는 "왜 왔느냐?"고 묻습니다.
학교에 사표를 던졌으며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하고 싶다는 뜻을 밝힙니다.
아리가와는 "넌 군인이 돼야 해."라면서 입학시험에 필요한 추천서등을 써주었고 다른 것은 선배인 강재호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리하여 1940년 봄, 박정희는 2기생으로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합니다.
총입교인원 470명,그중에 일본인 240명,만주족(한족과 몽고족)228명, 조선인 12명이었고 박정희의 입학성적은 470명중 15등이었습니다.


일본은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중국에서 떼어내 독립국을 세웁니다.
청왕조가 무너지자 일본은 청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부의를 만주국황제로 삼아 괴뢰국을 만들었습니다.
만주국의 건국이념은 명목상 일본족,한족,조선족,만주족,몽고족의 다섯민족을 화합시켜 지상의 낙토를 건설한다는 것이나 사실은 일본의 대륙침략 전초기지였습니다.
1940년에는 독일과 이탈리아가 폴란드,노르웨이,덴마크,네덜란드를 거쳐 프랑스를 점령했고 일본은 중국대륙을 휩쓸고 불령인도지나로 진격하던 때였습니다.
다음해에는 일본이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2차세계대전이 발발합니다.


만주군관학교 시험 당시를 이재기는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1939년 10월,만주국 목단강성의 관구 사령부에서 나는 시험을 보았다.
과목은 수학,일본어,작문,신체검사의 네가지였는데 시험이 시작되기 직전에 국민복을 입은 자그마한 청년이 만군 대위와 함께 들어오기에 시험감독관인 줄 알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청년이 박정희였고 그 장교가 강재호였다.
강재호는 대단한 민족주의자였으며 박정희도 아마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만주군관학교는 2년의 예과에 해당하며 윤리,법학,철학,역사와 중국어를 가르쳤습니다.
아침 6시 기상 오후 10시 취침의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야 했고 이때에도 역시 일본인은 우대합니다.


1기생들은 기강을 세운다는 명분으로 구타를 가하고 조선인 선배들은 중국인과 일본인에게 지지말라고 격려성 구타를 가합니다.
그런 1기생으로는 박항임,최창륜,이기건,방원철등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정열적이고 민족정신이 투철했으며 인간적인 매력도 있었다고 합니다.


방원철의 증언입니다.
"나도 후배들의 군기를 잡는다고 박정희를 주먹으로 때린 일이 있었다.
다른 사람은 턱을 맞으면 휘청휘청하는데 박정희는 딱 버티고 서서 차돌같이 단단한 느낌이 들었다.
맞아서 몸이 밀리면 금방 제자리로 와서 다음 주먹을 기다리는 것을 보고 지독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우리보다 나이가 많은 것을 몰랐다."


이재기의 증언입니다.
"우리는 동기생이기 때문에 친하게 지냈다.
학과수업을 받으러 갈 때는 모두 기숙사의 책상서랍을 열어놓고 가게 되어 있었다.
그때 박정희의 서랍을 보면 책이나 문구류가 그렇게 깔금하게 정돈되어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는 교칙위반을 하고 있었다.
외출을 나가면 줄담배를 피우는 것이다.
그때는 여자,술,담배의 3금을 위반하면 무조건 퇴학이었다.
외출에서 돌아오면 치솔질을 하고 담배냄새를 없애려고 애를 썼다.
일본인 교장과 싸우고 군관학교에 들어왔다는 말을 했으며,나이가 너댓살 아래인 1기생 선배들로부터 구타등의 수모를 받으면서도 과묵한 인내심으로 소화하는 것을 보고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또한 정의감이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때 홍사익중장(일본육사 26기졸업,일본육군대학졸업,조선인으로서 일본군 중장,관동군 군사학교부교장역임,2차대전후 전범자로 처형됨.)이 만주군관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는 조선인 생도들만 별실로 불러모아놓고 "민족적 차별대우의 비통함을 극복하여 조선민족의 우수함을 과시해야 한다."는 요지의 훈시를 했다.
그리고 박정희생도가 답사를 했는데 평소에 과묵하던 그가 감동적인 열변을 토하는 바람에 우리는 모두 놀랐던 것이다."


이기건의 증언입니다.(만주신경군관학교 1기 졸업,만군중위,육군준장예편(사단장),인민군 소좌로 있다가 6.25때 국군으로 전향함.)
´내가 처음 박정희를 만났을 때 "왜 여기왔느냐?"고 물으니 그는 당돌하게 "왜놈보기 싫어서 왔다."고 하더라.
나는 그때 왜놈이란 말을 처음 들어 보았다.
우리 북한 사람들은 일본놈이라고 하지 왜놈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정일권의 증언입니다.
"나는 그때 만주 상위(대위)로 신경에 근무하고 있었다.
박정희생도는 일요일이 되면 나를 찾아와 놀다 가곤 했다.
그는 담배와 술을 좋아 했고 말수가 적었으며 성실한 청년이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더러 했는데 나도 똑같은 환경에서 컸기 때문에 대화의 공감대가 있어 각별히 친하게 지냈다.
난 술을 별로 좋아 하지 않았으나 그가 오면 배급표를 정종으로 바꿔 대작하곤 했다.
그는 당시 일본이 멀지 않아 망하고 조선이 독립하고야 말 것이라는 말을 했다."


박기병의 증언입니다.
"나는 당시 만주국의 만군 헌병사령부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박정희등의 생도를 불러내어 가끔 저녁을 사주곤 했다.
박정희생도는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벌떡 일어나 독립군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닌가.
"선배님들 이 노래를 모르시죠 !"하면서 주먹질을 하며 부르는데 우리는 그때 어안이 벙벙했다."


이상에서 보듯이 만주군관학교는 일제의 충복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 하더라고 조선인과 중국인이 고분고분 따라간 것은 아니고 만주국의 국시가 5족화합이었기 때문에 일본인의 우월성만을 부각시키지도 않았습니다.
일본의 지식인이나 청년장교중에는 일본의 팽창주의에 부정적인 사람도 있었고 다른민족의 독립을 옹호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환경하에서 박정희는 나름대로 민족정신에 대해 자각해 나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17년 11월 14일생인 박정희.
당시는 이미 나라를 빼았겨 조선이란 나라는 없을 때이고 무엇을 하든 일본의 행정체계 아래가 아니면 불가능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런 그가 만주군관학교를 갔다는 사실만으로 친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그것이 과연 그의 잘못인지,또 그런 환경 아래서 그나마 민족정신을 잃지 않으려는 그의 노력이 폄훼되고 무시되어야 하는 것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잘못이라면 나라를 잃은 무능한 선조들의 잘못이고 나랏말이나 성씨조차 지키지 못한 못난 조선왕조와 조선인들 모두의 잘못일 것입니다.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이 이야기는 앞으로 진행될 과거사 문제에서 박정희를 친일파로 매도하는 것에 대비하여 증언의 데이터 베이스를 구축하려는 목적 아래 쓰여지고 있습니다


 


일제는 조선민족의 혼을 말살하기 위하여 조선의 말과 글을 빼았고 역사를 식민사관에 기초해 왜곡합니다.
그리고 조선 사람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게 합니다.
소위 창씨개명으로 1940년부터 일제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학교에 입학허가도 내주지 않았고 배급도 주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자의든 타의든 창씨개명을 하게 됩니다.
도요다니 시게미쓰 구니오니 하는 이름들은 그런 시대의 산물입니다.
박정희도 그같은 제도에 따라 일제가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던 해인 1941년에는 일본명으로 오카모도 미노루(岡本 實), 혹은 다가키 마사오(高木 正雄)로 불리게 됩니다.


박정희는 2년간의 군관학교 생활에서 검도, 유도,승마,교련은 물론 모든 과목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입니다.
1942년 3월 군관학교를 450여명 졸업생 가운데 1등으로 졸업하여 만주국황제의 금시계를 상으로 받았고 일본육군 사관학교(제 57기)로 진학할 수 있는 특전을 받습니다.


박정희가 졸업생대표로 재학생대표의 송사에 답사를 하는 장면이 뉴스영화로 촬영되어 극장에서 상영되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고무되어 군관학교에 들어 간 사람중에 하나가 강문봉입니다.강문봉은 만군소위를 거쳐 일본육사를 졸업하고 (한국)군사령관을 지낸후 육군 중장으로 예편합니다.


당시 졸업성적이 우수하여 일본육사 3학년에 편입된 사람은 박정희와 이한림,이섭준,김재풍등이 있습니다.


이섭준의 증언입니다.
´일본육사 교육은 만주군관학교보다 더 정신적으로 쥐어 짜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여기서도 모범생이었다.
그는 도무지 말이 없었기 때문에 한문 선생이 "박정희의 작문에는 뭔가 숨어 있는데 뭔지 잘 모르겠다."고 한 적이 있다.
그의 일기장을 검열한 교관도 같은 말을 했다.
그때 나는 거의 일본인이 다 되어 있었는데 박정희는 좀 달랐다.
일본 청년 장교들이 일으킨 [2.26사건]에 대해 매우 관심이 많았다.
박정희가 "이런 시대에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군사학 뿐이다. 우리는 독립을 해야 한다."고 했을 때 "독립이 무엇인가?"라고 물으니 "독립이란 혼자 사는 것이다.남의 간섭 안받고 우리 스스로 사는 것이다."라고 정의를 내리는 것이었다.
자유시간에는 혼자서 운동장을 거닐며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모습을 가끔 보았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느냐?"하면 귀찮게 굴지 말라고 하더군.
그래서 대통령이 된 뒤에 내가 "너 그때부터 혁명할 꿈을 꾸었지? 명치유신,손문혁명, 그리고 터키의 게말 파샤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지?"하고 농담을 한적도 있다."


김종길의 증언입니다.
"박정희와 나는 대구사범 동기생이다.
그가 일본 육사에 다니고 있을 때 나는 일본 중앙대에서 공부했다.
사범학교 시절부터 친근한 사이라 그는 나의 하숙방에 자주 놀러왔다.
술.담배 좋아하는 버릇은 여전하여 늘 술타령이었다.
하루는 술을 잔뜩 마시고 귀교가 늦어져 외출금지 처분을 당하기도 했다.
그의 일본육사시절은 가장 흥겨웠던 때가 아닌가 한다.
그의 작은 누님(박재희)이 동경에 살면서 뒷바라지를 잘했고 그의 자형 한정봉도 처남을 무척 사랑했다.
이섭준의 누이동생이 일본에서 자취를 하면서 여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식량사정이 어려울 때라 일요일의 외출 시에는 도시락에 밥을 꽉꽉 담아와서 그의 동생에게 갖다 주기도 했다.
방학때는 고향에 가지 않고 일본의 전국을 유람하면서 여유있는 시간을 보냈던 것도 일본육군사관학교 시절이다."


1944년에 박정희는 일본육사를 3등으로 졸업합니다.
졸업과 동시에 곧 소.만 국경지대인 지지하르에 있는 관동군 635부대에 배속됩니다.
이때부터 해방될 때까지 약 1년동안 박정희는 본격적인 군인의 길에 들어서 만주에 산재해 있던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합니다.
만주군 소위가 된 박정희는 지지하르에서 화북지방의 열하성으로 이동배치되어 만주군 보병 제 8단에 배속됩니다.
여기서 과연 박정희는 독립군과 싸웠던 것일까요?
제8단의 주요임무는 모택동의 팔로군을 토벌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은 당시 공산주의를 위험하게 보고 적대시하고 있었고 공산주의를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박정희도 일찍부터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당시 만주군 제 8단에서 팔로군을 상대로 같이 싸웠던 중국인 친구 고인경은 박정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박정희소위는 겉으로 보기에는 무뚝뚝한 것 같았으나 내심은 퍽 다정다감한 사람이다.
우리가 평천진(平泉鎭)이란 곳에 있을 때 어느 날 조선인과 중국인이 모인 자리에서 "여러분 ! 일본과 공비들은 모두 우리의 적이다. 언젠가 이를 배격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국가와 민족의 자유를 기대하기 어렵다.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으니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박정희는 당시 군장교로서 군사전략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전황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패망을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의 투철한 민족주의적 자각으로는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가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주장은 근거없는 억측일 뿐만 아니라 제8단의 임무도 아니었습니다.
팔로군이라는 공산당과 싸웠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국내 항일 지도자 였던 박승환은 여운형과의 긴밀한 연락하에 중국및 만주지역내의 조선출신 일본군 장교들을 규합하여 독립군과 연계, 국내에 진공할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들 장교중에는 박정희가 있었습니다.
박정희는 독립군을 토벌한 것이 아니라 독립을 위해 싸울 채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김규식박사의 비서실장이었던 송남헌은 그의 저서 해방 3년사(1권 26쪽.1990년 까치사 간행.)에서 한국 국적의 일본군인의 국내 진공계획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박승환은 국내 항일 지도자로서 여운형과 긴밀한 유대와 연락을 가지면서 군사활동을 전개하는 한편,일본군의 조선출신 장교로서는 당시 최고 계급이던 일본군 육군 중장 홍사익(남방전선으로 전출되기 전까지)과 상호 긴밀한 유대를 견지하고 만주국에 군적을 둔 조선출신 장교를 상당수(60-70) 규합하여 만주 일대에 산재한 독립군과의 연계를 도모하였다.


그런 한편 그는 일본 관동군의 주력부대가 남방전선으로 이동하고 태평양전쟁에서 일본 패전이 결정적으로 예견된 1944년부터 위에서 말한 조선출신 장교와의 연계를 한층 강화하는 동시에 일본군의 기밀작전 지도를 탈취하여 엄밀한 계획을 수립한 후 한달에 한번씩 비밀회합을 가지면서 관동군의 주력이 남방으로 이동한 허점을 이용하여 만주에 산재한 독립군과의 결합과 인근주재 부대의 통합으로 약 1개 사단병력을 편성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군사편성을 모의하고 1945년 8월 29일 국치일을 기하여 국내진공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의외로 일본의 항복이 예상보다 빨리 진행되어 만주에서의 박승환을 중심으로 한 조선출신 군인의 국내 진공계획은 유감스럽게도 좌절되고 말았다.


이 국내진공에 관한 비밀 거사에 참여한 바가 있었던 조선출신 군인 가운데는 박정희 전대통령도 있으며 그는 북경에 있던 광복군 제3지대 김학규부대에 편입하여 1946년 귀국하였고 8.15해방 즉시 귀국하여 국방경비대 창설에 참여한 장교도 있었다.


그러므로 그당시 여운형(독립운동가,정치가,중국 금릉대학에서 영문학 전공, 1945년 일본이 망할 것을 예상하여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여 위원장이 됨. 해방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음.암살당함.)은 박승환과 상의하여 군사행동을 계획했다.


우선 만주에서 유격대를 조직하여 백두산을 넘어 국내로 진입할 계획을 세우고,당시 중국 연안에 있던 무정(함북출생,중국하남군관학교 졸업,1926년 중국공산당에 가입.중일전쟁중 팔로군 포병사령관,북한인민군 창설에 참가,6.25뒤 숙청됨.)과 연락하여 그로 하여금 만주의 전체 유격대를 총지휘케함이 좋으리란 점에 대체적인 합치를 보았다.


1945년 4월말 여운형은 중국 연안의 조선의용군과 협동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박승환을 건국동맹 대표로 메시지를 지참시켜 연안에 파견하였다.


그해 6월에는 국내정세 보고서,통계등 기밀자료를 박승환의 아내 김순자에게 맡겨 북경의 이영선을 경유하여 연안으로 보내려 했다.
그러나 이영선이 연안으로 가는 도중에 8.15해방을 맞이했던 것이다.


 


이상의 기록에서 보는 바와같이 박정희는 비록 만주군의 장교계급장을 달고 있었지만 민족적 양심을 지닌 민족주의자였습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국내진공계획에 참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박승환은 1918년 경기도 파주군 월룡면에서 지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제2고보(경복고)를 나와 1937년 봉천 군관학교에 들어갑니다.
박정희가 대구사범을 나왔기 때문에 박승환이 박정희보다 한살 어렸으나 군관학교는 3년 선배가 됩니다.


학창시절부터 스케이트,수영선수로 활약했고 훤칠한 키에 힘이 세고 미남인 동시에 정열적이었다고 합니다.
군관학교시절에는 교관 간노 히로시와 친했고 졸업후에는 봉천비행대에 근무하면서 김순자와 결혼합니다.
그 중매를 홍사익(당시 관동군 군사학교 부교장)이 합니다.


여운형의 신봉자이던 박승환이 봉천비행대에 있으면서 홍사익장군의 비호아래 만주군 내의 조선인 장교및 하사관들을 상대로 개별적인 의식화 작업을 벌였습니다.
본래 김순자는 친일파의 딸이었으나 박승환과 결혼한 이후 열렬한 조선독립운동가로 변신합니다.


박승환과 접선된 사람으로는 박정희,문용채(만군대위,군사영어학교,부군단장,육군중장예편) 최남근, 최창륜,양국진(만주신경대 졸업,만군대위,군단장,육군중장예편.) 이기건, 박임항(만주신경군관학교 1기 졸업,만군대위,군사령관,육군중장예편.), 김백일,이상열,박준호,박동균,등 수십명에 달했습니다.


문용채의 증언입니다.
"1945년 4월 박승환,박준호,이상열,최창륜과 나는 [조선건국동맹 만주분맹 군사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때 봉천비행단에는 박임항과 최창륜이 있었는데 최창륜이 2기 대표로 박정희를 추천했다.
나의 계급은 만군대위였고 그는 소위 시절이다.
박정희는 반벽산(半壁山)에서 근무했고 나는 그곳에서 가까운 금주헌병대에 있었기 때문에 몇번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박정희는 술자리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신랄히 비판하며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조국광복의 방략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이역땅에서 향수를 되씹으며 서로의 회포를 털어 놓았다.
그는 만군 제 8단의 일본인 장교들의 감시를 피해가며 조국광복운동에 참여했다.


박정희가 만군에 있을때 조선의 독립군과 연관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고 학자들 간에 논란이 있는 모양이나 그당시 우리는 비밀활동을 했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고 [조선건국동맹]이라는 것은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국내파 독립운동단체이다.


1945년 2월 9일,만주군 제 8단을 위문하기 위하여 [신태양 악극단]이 찾아왔다.
단장은 김이태이고 단원들은 손목인,김준영,윤난성등 십여명의 가수와 연기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때 신태양악극단의 잡부로 가장해서 따라 다닌 사람이 이용기인데 그는 광복군 화북지구의 특파원으로 광복군 지대장 김학규의 지령을 받고 왔던 것이다.


위문공연이 끝난 뒤 박정희와 이용기는 술자리에 함께 있었고 그들은 은밀히 만나기도 했다.
이용기는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장군의 커다란 도장이 찍힌 자신의 신분증을 확인해 보였다.
그뒤 박정희에게 떨어진 지령은 조선건국동맹이 추진하는 작전계획에 협조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박정희는 광복군의 밀명을 받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박명근의 증언입니다.
"박승환은 나의 삼촌이다.
삼촌이 요절한 뒤 나는 삼촌의 동지들을 자주 찾아갔다.
내가 심계원에 근무할 때 1군 참모장이던 박정희장군을 찾아 갔더니 삼촌의 이야기를 하면서 반갑게 맞아 주었다.
삼촌의 딸 정근이 해운대로 피서를 갔다가 익사했을 때는 군수기지 사령관으로 있던 박장군이 시체수습등 여러가지 편리를 봐주었다.
내가 청와대 근무를 한 것도, 또 지역구 의원후보 공천을 받을 때 삼촌이 사상적으로 불온했다는 모략을 받았으나 박대통령께서는 그것을 막아 주셨다.
그분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주의자라는 점을 분명히 했고,자신도 한때 그와같은 오해를 받아 군에서 홍역을 치른 적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박정희가 만주군 소위로 임관해서 해방을 맞을 때까지의 시간은 1년 남짓입니다.
그가 속해 있던 만주군 제 8단은 열하성 반벽산에 주둔해 있었는데 이곳은 북경으로부터 동북쪽의 산악지대로 만리장성의 북쪽 변경입니다.


제8단의 병력은 약 3,000명으로 연대 규모의 편제를 유지하고 있었고 공산 게릴라들과 싸웠기 때문에 중국인 사병과 현지 중국농민들의 인심을 얻는 것이 전투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제 8단의 단장은 당제영(唐際榮)상교(대령)이 맡았고 사병은 전원이 중국인, 장교도 대부분 중국인이었고 일본인 20여명,조선인 4명이었습니다.
4명의 조선인 장교가 신현준,이주일,방원철,박정희였습니다.
박정희는 당시 단장의 부관이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과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이 천하의 명운을 놓고 사상전을 전개하면서도 일본이라는 외세에 대해서는 공동으로 대처하는 연합전선을 펴고 있었습니다.
거대한 중국의 늪에 빠진 일본은 전쟁수행능력에 한계를 드러내면서 제 8단도 종전이 된 줄도 모르고 산악지대를 헤메고 있었습니다.


1945년 8월 14일.
박정희는 구산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방원철중위가 지휘하는 부대로 전화를 겁니다.
"형님 수고 많습니다.
지금부터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조선말을 쓰겠습니다.
소련군이 침공,전면전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우리 제 8단은 명령에 따라 외몽고의 다륜으로 진격하게 되었습니다.
훈련은 중지하시고 장비를 최대한 가볍게 하여 내일 새벽까지 본부로 돌아오십시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방원철은 박정희의 전화를 받고 반벽산으로 되돌아 갈 준비를 하였습니다.
행군로는 험하고 여러 계곡과 절벽을 지나야만 했습니다.
15일부터는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인마는 비에 젖어 무겁고 긴 행렬을 이루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5년에 걸친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14년에 걸친 대륙침략도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36년간의 식민통치도 막을 내려 광복을 맞았습니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은 만주와 북중국,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힘의 공백상태를 가져옵니다.
만주에는 소련군,일본군,민주군,장개석군,모택동군이 어지럽게 뒤엉켜 살벌한 분위기가 고조 되었고,제 8단의 조선인 장교 4명도 무장해제 당한 채 부대안에서 손님대접을 받으며 며칠을 보냈습니다.
적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묘한 입장이 되었습니다.
이때가 박정희가 중위로 진급한지 한달 되는 때였습니다.


이들 4명의 조선인에게 당면한 과제는 고향으로의 무사귀환이었습니다.
철도의 마비,대중교통수단이 전무하고 공권력이 없는 무법천지에서 오로지 적자생존의 힘의 논리만이 있었습니다.


잡다한 무장집단들 틈에서의 무사귀환은 또다른 전투였습니다.
방원철은 아내가 기다리는 봉천으로 가고 박정희,이주일,신현준은 북경으로 갑니다.
8월 29일에 북경에 도착하여 덕경루를 찾았습니다.
조선인이 운영하는 음식점으로 다음에 북경 동북쪽의 제지공장으로 옮깁니다.


이곳은 임시정부가 보낸 최용덕(중국육군대학졸업,중앙군대좌,광복군참장,공군중장예편,공군참모총장,장개석의 전용기를 조종했음.)장군이 이곳을 숙영지로 마련했던 것입니다.


당시 임시정부는 독립에 대비하여 군대조직을 만들고 있었고 장개석군이나 팔로군을 포함하여 학병으로 끌려갔던 젊은이들과 일본군,만주군에서 근무했던 젊은 장교나 하사관들을 모두 광복군으로 편성하여 고국에 돌아간다는 게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이곳에 모인 약 400명의 청년들을 규합하여 김학규가 지휘하는 광복군 제3지대에 편입시켰고 이들은 제 1대대에 배속되었습니다.
제 1대대장은 신현준이,그밑의 제 1중대장은 이주일,제 2중대장은 박정희,제 3중대장은 학병출신의 윤영구가 맡았습니다.


그들은 소총 기관총등 기본무장을 갖췄고 고국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매일 훈련에 몰입합니다.
제일 큰 문제는 먹는 문제로 간부들이 식량조달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고 광복군채를 발행하기도 했지만 굶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무렵 박정희가 부르던 노래입니다.
"조팝 깡다리에
소금국만 먹어도
광복군 정신만은
씩씩하게 살아있다."


신현준의 증언입니다.
"그 당시 혼란상은 말로서는 다 할 수 없다.
일본이 망해 버리니 만주군 제 8단도 장개석에 붙어야 할지 모택동에 붙어야 할지 갈팡지팡하고 광복군 안에서도 부대원들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사상문제로 밤새워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박정희는 부대안에서 자연스럽게 리더가 되어갔다.
만주군관학교 1등졸업,일본육사 졸업이라고 하는 군인으로서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나이도 그들보다 월등히 많았다.
말이 없으면서도 두주불사하는 호방한 성품인데다가 사사로운 욕심을 갖지 않았다.
여운형을 줏대있는 지도자라고 했으며,어느 사람이 박정희에게 [중대장 동무]라고 하자"동무가 뭔가? 내가 자네 동무란 말인가 !"하고 핀잔을 준일도 있다."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중국정부와 미 군정당국에 대하여 교섭을 활발히 벌였으나 지금 당장은 어렵다는 말뿐이고 특히 부대단위의 집단입국이나 [광복군]의 명칭으로는 입국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전승국도 패전국도 아닌 묘한 입장에서 10개월을 보낸 후 1946년 5월 6일 미 해군 수송선을 타고 천진을 떠나 5월 8일 부산항에 도착합니다.
박정희와 신현준은 기차편으로 서울까지 올라와 피난민 수용소에서 며칠을 보내다가 고향인 선산으로 내려 갑니다.



2004-11-21 22:58:57
2148 번 읽음
  총 20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1. 엘리시안 '04.11.22 10:59 AM 신고
    :-O*이것이 박정희를 정당화 시키는 데이터 베이스라면, 박정희의 친일과 공산당 경력에 대한 데이터 베이스도 만만치 않습니다.
    제가 묻고 싶은것은..박정희의 남로당 가입과..여순사건으로 체포되자 동지였던 남로당원들 명단을 불어 동지를 배반하며 목숨을 부지한 것은 어떻게 반박할수 있는지요? ↓댓글에댓글
  2. 2. 김도원 '04.11.22 12:45 PM 신고
    :-)*저는 이글을 그렇게 자세히 읽고 싶은 느낌이 안드네요..
    대략 보니 박정희를 너무 정당화시키는 쪽으로만 글을 만들었네요.
    제가 자세히 아는건 아니지만 만주군들이 얼마나 잔인무도한 행동을 하셨는지 아십니까? 독립운동가들의 게릴라식 전투에 계속해서 당하자 그 만주근방의 조선인 마을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조리 쑥대밭을 만들었습니다.
    그 만주군에 있었다는 자체만으로도 어떤 변명도 납득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독립에 뜻이 있었다면 광복군에서 얼마든지 행동할수 있었을겁니다. 그렇게 모욕적인 일본군들 아래서 장교가 되지 않더라도... ↓댓글에댓글
  3. 3. 날쌘거북이 '04.11.22 1:14 PM 신고
    :-P* 그렇소. 친일 안했소. 다만 섬나라를 자신의 영달을 위해 이용했을 뿐이요. 자신의 출세와 보신을 위한 러 차례의 배신 중의 하나일 뿐이요. 한번 배신한 자를 섬나라넘덜이라고 중용하겠소? ↓댓글에댓글
  4. 4. 어둠속의빛 '04.11.22 1:20 PM 신고
    :-)*ㅋㅋㅋㅋ 반일감징이 투철하고 그런데도 군인니 되고 싶었다면 만주가서 무력항쟁 하시는데 찾아가지 왠 일 사관학교 지금 말이된다고 생각

    쓰벌 ↓댓글에댓글
  5. 5. 으함™ '04.11.22 1:32 PM 신고
    :-)*이순신의 글을읽고 군인될 결심을 했는데 왜 나라를 삼킨, 그것도 이순신 대장군님의 적인 일본군에 입대할 결심을 했다는것만으로도 역적이로세...
    친일파,유신독재자 말고도 역적이 하나더 추가되는 글을 쓰셨군요. 수고하셨습니다. ^^ ↓댓글에댓글
  6. 6. 김서방 '04.11.22 5:43 PM 신고
    :-)*이것도 펀 글이요..

    박정희가 독립투사면
    조선일보도 언론사입니다.

    조선일보가 언론사면
    박근혜는 샤라포바요.

    박근혜가 샤라포바면
    전두환은 아마 29만원 밖에 없을거요. ↓댓글에댓글
  7. 7. No우사 '04.11.22 8:48 PM 신고
    :-)*제가 방금 읽은 글이 김일성전기 아니었나 싶어 위로 힘들게 스크롤을 올려 또 확인해보네요.

    만주군 인사들이 그렇게 투철한 민족주의자들이었는데 어찌해서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창설에서 광복군인사들이 철저히 배제당하고, 들어간 사람들도 자신이 광복군 출신이라는 것을 철저히 숨겨야 했던것일까요.
    광복군과도 교감이 있었던 사람들이 반민특위의 명단에 올라갔던 것일까요.

    광복군가도 제법 흥얼거렸다던 박정희가 대통령시절 술먹고 취기가 오르면 만주군당시 부르던 노래를 제법 잘 불렀다지요.

    그렇게 일본을 싫어하던 박정희가 새마을운동이라면서 군시절 일본이 만주에서 독립군을 견제하고 중국인과 조선인을 통제하기 위해 행하였던 제도를 그대로 심지어 노래까지 그대로 베껴온 것이군요. 국민교육헌장도 일본의 맹세를 그대로 베껴왔죠.

    그리고 오히려 역으로 국내에서 일본이 말하는 그대로 일본이 이길거라 믿고 끝까지 일본을 위해 일한 사람들과 달리 군에서 고급정보를 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패망을 예견할수 있었고 이후의 자신의 처신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판단할수 있었겠지요.

    참으로, 김구선생님이 과거는 중요하지않고 민족을 위해서 일한다면 용서해주어야 한다며 우리는 민족이기에 같이 나가야 된다고 하셨지만.....

    백범 선생님!!!!
    우리가 남의 무력에 아팠으니 우리는 힘으로 다른나라에게 아픔는 주는일은 없어야 한다며, 우리나라는 다른나라가 부러워할 높은 문화와 사상을 가진, 그리고 그런 높은 문화를 향유할 교육을 가진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지요....
    그런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지금우리는 어찌해야 되는것일까요. ↓댓글에댓글
  8. 8. 별이 '04.11.23 9:01 PM 신고
    :-)*친일파들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 누군지?
    개혁한다면서
    숙청당한 사람들은 누군지?
    소설을 써서
    단행본으로 출간하시죠^^ ↓댓글에댓글
  9. 9. 잘살아보세 '04.11.23 11:00 PM 신고
    :-)*친일이라.. 박정희가 정말 친일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진짜 친일파 놈들은 일본을 이용해서 자기의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목숨을 걸었지만, 박정희는 이 나라를 일으키는데 목숨을 걸었다.. 물론 독재, 탄압.. 정당하지는 않았지만.. 70년대 그시대에.. 김대중, 노무현, 김영삼 이런사람들이 대통령이었으면 과연 우리가 이렇게 편하게 배부르게 컴퓨터 앞에서 이런글을 쓸수 있었을까? ↓댓글에댓글
  10. 10. 쓰지 '04.11.23 11:36 PM 신고
    :-)*박정희가 친일파이든 아니든 그게 중요한게 아니다.. 박정희는 그나름대로..그시대의 히어로 였던것만은 사실이다...그러나..문제는 공이 있는 만큼 과도 있었거늘 오늘에와서 박정희를 이용한 정치를 한다는것은 덜 떨어진 수구 꼴통들의..몰상식한 짓이며..그에 현혹되어..박정희가 없었으면..우리는 지금 어땠을 꺼다..라고 하는 우민들의 어리석음 또한 이나라의 진정한 (시대적)발전을 위해서는 아무런 도움이 못된다..그때는 그때의 아젠다가 있는것이고 지금은 지금의 아젠다가 있는것이다..

    지금의 아젠다는..더이상 국민을 졸로 보는 정치인도 스스로 그러한 정치인에게 이용당하길 원하는 우민 들도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선진사회를 만드는것일뿐...박정희나..70년대나.. 지나간 추억외 엔 아무것도 아닌것이다... ↓댓글에댓글
  11. 11. 치세 '04.11.23 11:36 PM 신고
    :-)*박통이 "위대"하면, 전통은 "숭고"하겠대요. ↓댓글에댓글
  12. 12. 쿠웨이트 '04.11.24 1:25 AM 신고
    :-)*재밌는 소설이군... ↓댓글에댓글
  13. 13. 별이 '04.11.24 10:17 AM 신고
    :-)*박정희정권 때 편하게 배부르게
    컴퓨터 앞에서 글을 썼다고요?
    박정희정권 때 편하고 배불렀나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무역적자를 메우기 위해
    더 많은 달러를 빌려오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었습니다.
    그것이 결국 imf를 불러 왔습니다.

    수출증가율은 대서특필되고
    수입증가율은 사전검열되었습니다.
    수입액을 이야기하면 빨갱이였죠. ↓댓글에댓글
  14. 14. 별이 '04.11.24 10:32 AM 신고
    :-)*곰곰히 생각해보면
    지금 현재 먹고 마시는 것은 모두
    박정희 독재자가 총살된 후에
    누리게 된 것들입니다.
    만약 여태 살아 있었다면
    빈부격차가 극에 달했을 것이며
    누적된 적자를 이기지 못하고
    대한민국은 아예 망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르헨티나처럼 말입니다.
    달동네가 언제부터 사라지기 시작했는지
    주택보급률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 언제였는지
    엄청난 불경기에도
    김치냉장고를 새로 장만하는 사람들이 줄을 서는건 언제부턴지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고
    언론통제가 풀린 것은 언제부턴지
    거리에서 데모대가 사라진 것은 언제부턴지
    대통령에게 대놓고 막말하는 풍토는 언제부턴지
    각자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턴지
    죽도록 일하고
    저임금에
    체불에
    그나마 회사를 문닫아 버리고
    달아난 사장을 원망하며
    넋놓고 하늘만 바라보던 시절이
    당신들은 그리워졌습니까? ↓댓글에댓글
  15. 15. 피어스브로스넌 '04.11.24 2:55 PM 신고
    :-)*박정권때 컴앞에서 글썼다? 박정권때의 무역적자 때문에 IMF를 불러왔다?
    박정권이 무너지고 데모대가 사라졌다? 김치냉장고와 컴퓨터가 그때 있었나요? 님아 박통이 친일독재 맞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박전대통령이 싫어도 인정하실건 인정해야해요! ↓댓글에댓글
  16. 16. 스마일맨 '04.11.24 3:49 PM 신고
    :-)*비시파크 보면서 첨으로 로그인 하게 만드네요...
    회원가입할때빼곤 로그인한적이 없는데..

    다 읽지 않았지만(길어서 안읽은게 아니라 읽을 의지를 상실했기에)
    소설 한편 쓰셨네요.
    그정도 소설, 3류작가에게 돈 조금만 주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글인거 같은데... ↓댓글에댓글
  17. 17. 별이 '04.11.24 11:02 PM 신고
    :-)*박정희 쿠데타 세력에 의해 누적된 적자가
    김영삼 시절 터져버린 거 맞습니다.
    외국돈 빌려와서 인심쓰는 정책은 바보도 합니다.
    없으면 더 빌리면 됩니다.
    대들면 국가보안법에 긴급조치에 안전기획부가 있었습니다.
    사실 법도 필요없었죠.
    납치하든가 고문하면 되는데.
    자고 일어나니 옆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어느날 나타났는데 바보가 되었더랍니다.
    전설의 고향 아닙니다.
    국민들에게는 열심히 일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죽도록 일했지요.
    듣기 좋은 말로 수출드라이브정책입니다.
    설마 김영삼정권이 5년동안에 모두 빚진거라고 생각하는건 아니겠죠?
    전두환 사형수와 노태우정권때는
    적자규모가 상대적으로 매우 작았습니다.
    물론 2년연속 마이너스 성장이라는 말도 안되는 일도 겪었지만.
    소위 대기업의 수출가격과 국내가격이 엄청난 차이가 나는 것도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이 최고 아닙니까?
    언제부터 그랬는지 아십니까?
    그래도 대기업이 망하면 나라가 망하니까
    열심히 사주어야 합니다.

    통계와 국제정세 및 실물가치로 보면 전두환 사형수 시절이
    박정희 쿠데타 독재기간 때보다 훨씬 낫습니다.
    박정희군사정권 때보다 못사는 국민들이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댓글에댓글
  18. 18. 란스 '04.11.25 10:46 AM 신고
    :-)*별이// 지나가는 거지, 다 망해가는 조그마한 나라에서
    거대한 부자나라에게 가서 돈 빌려보십시오.
    어떤것을 담보로하고 돈을 빌리겠습니까?
    나라? 인구? 목숨? 빌리는것만으로도 대단합니다.
    그 돈마저 없었으면 우리나라는 자폭했을겁니다.
    도로 까는 비용은 어디서 공짜로 준답니까?
    일거리는 어디서 공짜로 준답니까?

    친일이건 안친일이건 -_-;
    중요한것은 우리나라에서 커다란 획을 그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현재는 그것 이외에 다른 이야기거리를 낼 필요가 없지요. ↓댓글에댓글
  19. 19. 구르미 '04.11.28 1:59 PM 신고
    :-)*박통은 울나라에 있어서 하나에 획을 그은 중요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박통 애기를 꺼내서 자신들의 뱃속을 챙길려고 하는 사람들.. 그때를 생각하며 그 사람들을 찍어주는 사람들
    대체 이런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그런 행동들을 하는지..
    지금에 박대표가 그때의 박통인지.. 그만한 능력이 있는지...
    참 알다가도 모르겠네요.. 왜 모든 사람들이 자꾸만 과거로 과거로..
    갈려고만 하는지. 내일을 생각하며 내일을 걱정하며.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고.. 하지만 잘못된 것은 고쳐야 겠죠.. 기초가 튼튼해야. 건물도 높게 올라갈테니깐요.. ↓댓글에댓글
  20. 20. kyne '04.12.14 2:51 PM 신고
    :-)*전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박정희씨가 만들어 낸건 경부고속도로(그것도 정주영씨와 합작품이지요)
    이것 외 별로 생각나는게 없내요 경재5계년계획도 쿠테타 이전부터 계획되어왔던 계획이었고 (물론 군인식 밀어부치기식으로 해서 빠르고 효과적이었지만 그로인한 패해는 지금까지도 많연하고있는 공무원 부패와 금전비리
    등등 수없이 많지요) 전세계적으로 경제발전의 시기였다고 알고잇습니다.
    이승만씨정권이 무너진후에 민주정부가 들어서 더디지만 착실히 만들어가던
    민주주의가 박정희씨를 비롯한 군인들의 군사쿠테나로 무너져 버린건 생각을 안하시는군요.
    쿠테타가 없었고 민주정부가 꾸준희 이루어져 왔다면 아마 대한민국은 지금의 대만과 비슷할꺼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국민성이달라 차이는 있겠지만
    지금처럼 실업율이 높아지고 먹고살기힘들어 자살하는 일은 없었을거란 생각이드내요.
    pc나 정보통신이 대기업에 의해서 빠르게 사용되어진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건 대한민국 국민들의 국민성과 잘맞아서이지 박정희씨의 덕이란건 좀 맞지않는 비유같내요. 그럼 그리 잘사는 미국이나 일본 서구유럽의 pc보급율이 대한민국의 보급율보다 낮을까요?
    지금의 대한민국은 중간층이 없습니다.
    대만처럼 기초과학이 탄탄해 중소기업이 나라의 경재의 중심이 돼어야 하는대 일본도 중소기업이 탄탄하죠. 대한민국은 제벌 대기업은 있어도 탄탄한 중소기업이 거의 없는것이 현실이죠.
    이모든것이 박정희씨의 경재계획때 대기업 밀어주기가 만든것들입니다.
    아직도 대한민국은 공정한 시장경재가 아닙니다.
    특혜로 일어선 대기업들의 횡포에서 벗어나지 못해 능력있고 참신한 아이디어로 일어서려는 중소기업들이 무너져 가고있는현실을 외면합니까?
    이것들 전부가 고기국에 흰쌀밥을 먹여준 박정희씨의 작품입니다.
    획을 거은것은 사실입니다. 한나라에서 쿠테타로 정권을 잡고 불법적방법으로 정권을연장하고 자신의 마음에 드는여성이면 여성의 인권은 무시하고
    자신의 욕망을 체우고 부하에게 테러당해 죽었으면 충분희 한획을 거었다
    할수잇겠지요.
    세상이 바로잡히려면 잘못돼어 온시간의 3배이상이 걸린다고 어떤분이 그러시더군요.
    하시만 답답한 심정은 어쩔수 없나봅니다... ↓댓글에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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