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위글과는 대조적인 글을 퍼왓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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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보다 더 일본적인' 조선인 박정희, 다까키 마사오(高木正雄) 전 명 혁(민주화운동자료관(추) 자료실장)
� 문경보통학교 교사에서 만주군관학교 생도로 1937년 3월 대구사범을 졸업한 박정희는 20세의 나이에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게 된다. 소년시절부터 군인을 동경하던 박정희에게 초등학교 교사는 그리 탐탁치 않은 직업이었다. 이 무렵 일본제국주의는 중국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조선에 대해 전시 체제를 강화하였다. '황국신민화'교육의 철저화가 요구되었고 1938년 3월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일제는 “충량(忠良)한 황국신민을 육성하는 데 힘쓸 것”과 조선어를 정규교과목에서 제외하고 선택과목으로 하고 일본어를 국어로 상용(常用)케 하였다. 박정희는 교사로 부임하여 매일 아침 6시에 기상하면 트럼펫을 불었다. 하루는 교장인 아리마(有馬)가 “나는 그다지 세세히 따지는 성격은 아니지만 아직 잠들어 있는 사람이 많은 시간에 도대체 무슨 이유인가. 행동이 지나치지 않나?”라고 묻자 “이 긴박한 시국에 게으르게 잠이나 자는 것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아침부터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만 합니다”라고 대답하여 오히려 교장을 당황케 했다고 한다. (하신기, 『박정희 -알려지지 않은 그의 사상과 생애-』, 세경사, 1997) 박정희의 교사 3년의 생활은 일본제국주의의 정책에 순종하는 평범한 생활이었다. 당시 보통학교 교사의 초봉은 월 45원이었고 일본인 교사의 2/3였다고 한다. 그런데 한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문경보통학교에 수업시찰온 데라도(寺戶) 시학(視學 : 지금의 장학사)이 박정희의 머리가 길다고 지적하면서 “아직도 총력정신이 결여된 교사가 있다. 이것은 황민화 정책이 철저하지 못한 증거이다”라고 은근히 박정희를 비판했다. 그날 밤 아리마 교장 집에서 시학을 위한 술자리에서 다시 박정희의 머리문제를 거론하였다. 술에 취한 박정희는 언쟁을 벌이다가 술잔을 던지는 소란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사건을 겪은 후 박정희는 교장에게 사표를 던지고 대구사범때 그가 존경했던 교련주임이었던 아리까와(有川) 대좌가 있는 만주군관학교를 택하게 된다. 이 시기 식민지 조선의 많은 양심적 지식인들은 민족독립과 해방을 위해 상해, 만주, 연해주 등지에서 일제와 투쟁을 하던 시기였다. 박정희는 민족해방운동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제가 민족해방운동을 저지하기 위한 친일적인 주구들을 양성하는 만주군관학교에 스스로 입교하였던 것이다.
1931년 일본제국주의는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만주를 점령하였다. 1932년 3월 일본 관동군은 만주제국을 세우고 청의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를 앉히고 1939년 수도 신경(新京 : 현 長春)에 신경군관학교(통칭 同德臺)를 세웠다. 신경군관학교는 봉천(지금의 심양)에 있던 봉천군관학교가 문을 닫으면서 정규 4년과정의 군관학교였다. 박정희는 1940년 봄 동덕대 제2기 신입생으로 입교하였다. 박정희와 같은 2기생은 강창선(姜昌善) 김묵(金黙) 김원기(金元起) 김재풍(金在豊) 안영길(安永吉) 이병위(李丙胃) 이상진(李尙鎭) 이섭준(李燮俊) 이재기(李再起) 이한림(李翰林) 등이었다. 이 동덕대 출신은 압도적으로 함경도 출신이 다수를 점하고 있었고 또한 봉천군관학교 출신인 정일권의 영향으로 만주 용정 광명중학 동창들이 대거 신경군관학교에 입교하기도 했다고 한다. 대구사범학교를 꼴찌로 졸업한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것은 군관학교가 매우 그의 적성에 맞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후 만주군에서 6개월간 근무하고 그는 마침내 그가 염원하던 일본육사 3학년(57기생)에 편입되어 이한림, 김재풍, 이섭준 등과 더불어 동경으로 출발하게 된다. 박정희의 일본 육사 편입은 당시 만주계 및 조선인 생도 중에서 성적이 좋은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일종의 특전이었다. 일본 육사의 교육은 만주군관학교보다 더욱 혹독했다. 박정희의 일본 육사 생활 역시 만주군관학교에서의 생활과 별로 다르지 않아, 여전히 그는 모범적이었다. 이러한 그를 보고 육사 교장이었던 나구모 쥬이치(南雲忠一) 장군은 "다가키 생도는 태생은 조선일지 몰라도 천황폐하에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점에서 그는 보통의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다운 데가 있다”고 생도들을 모아놓고 말할 정도였다. 일본 육사 시절 그는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고 한다. 말도 없고 표현도 없었으며, 속에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그러한 사람으로 비추어졌다. 그렇지만 그는 1936년 일본 청년장교들이 쿠데타를 시도했다 실패로 돌아간 2・26사건에 관해서는 매우 많은 관심을 보였다. 여하튼 만주와 일본의 사관학교 생활에 박정희가 만족했던 것만은 틀림없다. 그가 사관학교 생활에 열심이었던 것은 자신이 원했던 군인이 되기 위해서였으리라. 그러나 사관학교 시절 그가 말없이 자신의 내면 세계에서 만들어 나갔던 꿈은 무엇이었을까? '사무라이 정신'으로 무장한 군인으로서 목숨을 걸고 시도해 볼 만한 그 무엇을 꿈꾸고 있지 않았을까? 일본 청년장교들의 2・26쿠데타 기도에 대한 관심은 그의 그러한 생각의 반영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1944년 4월 박정희는 일본 육사를 졸업했다. 졸업성적은 3등, 조선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일본교육총감상을 받았다.
저널리스트 이상우는 『신동아』1987년 10월호에 게재한 ⌈박정희, 그 ‘컴플렉스의 정치학’⌋에서 다음과 같이 이 시기를 서술하고 있다. 박정희가 육사를 졸업하고 일본군장교로 임관된 다음 처음 배치된 곳은 일본의 마쓰야마(松山) 제14연대였다. 그러나 곧 만주국 보명 제8연대의 소대장으로 임명되어 목단강 아래 있는 영안으로 파견되었다. 이곳은 일찍이 노령 신한촌에 웅거하던 항일독립운동가들이 서진할 때의 요충으로서 한인 농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박정희는 얼마 안있어 이곳으로부터 화북지방의 열하성으로 이동배치되어 일본 북지나파견군의 열하보병 제8단에 배속되었다. 열하지구는 만주와 중국대륙을 잇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일본군에 대한 항일세력의 저항이 끊임없었던 곳이다. 항일세력의 중심을 중국공산당의 팔로군이었으나 당시 동북지구성과 화북일대에서 일본군에 항거한 세력은 이밖에도 여러갈래가 있었다. 국민당 정부의 국부군관 군벌군, 독립적인 항일유격군, 심지어는 만주일대의 비적들까지도 일본군과 싸웠다. 주력은 중국인이었으나 조선인의 항일조직도 만만치 않았다. 한인들은 임시정부의 광복군, 연안의 조선의용군 혹은 독립된 게릴라부대로서 때로는 단독으로 또 때로는 국부군이나 중공군과 함께 항일유격전을 벌였다. 조직의 구성과 이념은 달랐지만 당시 조선인 항일부대의 목표는 우선 한가지, 일본에 대한 무력항쟁과 조국의 광복이었다. 박정희가 일본군장교로서 싸운 항일세력이란 이런 것이었다. 식민지민족의 비극이기도 하겠지만 그가 속해 있던 일본군이 소탕의 대상으로 삼았던 항일세력 속에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이역에서 피흘린 동족의 청년들이 있었다. ...... 당시 일본군으로 끌려간 조선인 학병이나 징용군 가운데서는 일본군으로부터 탈주하여 항일군에 가담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 1945년 8월 종전과 함께 박정희는 주둔지인 화북지방에서 무장해제를 당했다. 그 자신은 일본이 연합군에게 패배하리라고 예견했다지만 그가 소속했던 일본군이 하루 아침에 사라지고 말자 그의 처지는 마치 끈 떨어진 연과 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일본을 출세의 발판으로 삼았던 박정희에게 있어서는 일본의 패망은 조국의 해방을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을 것으로 해석됐다. 종전 10여일 후에 박정희는 같은 만군소속이었던 이주일 신현준 등과 함께 북방으로 흘러들어갔다. 마침 광복군 제3연대에서 일제소속 한일들을 모집하고 있던 터라 주저없이 여기에 들어갔다. 46년 6월 제3연대가 천진에서 미군 LST선편으로 귀국할때까지 10개월간 박정희의 광복군 생활에 관해서도 별로 알려진 바는 없다. 또 성공회대 정해구교수는 『청산하지 못한역사』에서 박정희의 독립운동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일제의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를 나와 만주군에 몸담았던 그가 독립 운동에 참여했다는 것이 과연 사실일까? 논란이 되는 첫 번째 문제는 일제 패망 직전 그가 여운형(呂運亨)의 건국동맹과 관계가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여운형의 건국동맹과 연결된 만주 군관학교 출신 박승환(朴承煥)이 만주군에 군적을 둔 조선 출신 장교를 상당수 규합, 만주 일대에 산재한 독립전하의 연계를 도모하고 인근 주재 부대와 통합하여 1개 사단의 병력으로 국내 진공을 계획하였고, 바로 이 국내 진공 계획에 박정희도 참여하고 있었다는 주장이다(<해방 3년사> 1, 26쪽). 만주의 박승환과 연계를 지니고 있었던 여운형이 일제의 패망을 앞두고 연안의 무정(武亭) 및 만주의 박승환으로 하여금 유격대를 조직, 국내 진공 계획을 논의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박승환이 만주에서 어느 정도 조선인 장교들을 규합했는지, 그리고 거기에 박정희가 가담했는지 여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다음으로 논란이 되는 것은 박정희가 광복군의 비밀공작원이었다는 주장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박정희는 '철석(鐵石)부대' 예하에 배속되어 만리장성 남방 평곡(平谷)에서 중공의 팔로군과 싸우고 있던 만주군 제7단에 소속되어 있었고, 중국 동부의 각 전선에 배치되어 조선인 장병들을 대상으로 귀순 공작을 벌이고 있던 광복군 제3지대의 공작원이 이 7단에 침투하여 박정희 중위 및 신현준(申鉉俊) 대위와 접촉, 이들을 광복군의 비밀 요원으로 만들었다는 주장이다(<육사졸업생>, 25~26쪽.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사실이 아닌 듯하다. 육사졸업 후 소만 국경 지대인 치치하얼(齋齋哈爾)에 있는 관동군 635부대에서 3개월 동안 사관 견습을 받은 박정희는 1944년 7월경 만주군 보병 제8단에 배치되어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그 부대에 있었다. 만주군 제8단이 주둔하고 있던 곳도 만리장성 북쪽 변경 산악 지역인 열하성 흥륭현의 반벽산이었다. 당시 3천여 명의 만주족 및 한(漢)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8단은 그곳에서 팔로군을 토벌하고 있었고 박정희는 그곳에서 단장의 부관으로 있었던 것이다(<다큐멘터리 박정희>2, 45~47쪽. 이런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박정희가 광복군의 비밀공작원이란 주장도 근거가 빈약하다. 박정희는 만주군 제8단에서 일제의 패망을 맞았다. 박정희를 비롯하여 신현준 대위, 이주일(李周一) 중위, 방원철 중위 등 제8단에 같이 있었던 4명의 조선인 장교들은 어제까지 같은 부대의 동료들이었던 중국인 장교들에 의해 무장해제되었다. 박정희로서는 오랫동안 절치부심하며 쌓아왔던 노력이 하루아침에 허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제 남은 길은 극도로 혼란스러운 그곳에서 벗어나 무사히 고향으로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며칠 후 이들은 제8단과 헤어져 북경을 향했다. 8월 29일 북경에 도착한 이들은 조선인 동포가 경영한다는 덕경루(德慶樓) 라는 음식점을 찾았다. 이미 그곳에는 학병으로 끌려갔던 청년들과 만주 일대를 배회하던 동포들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북경 동북쪽에 있는 북신구(北新區)라는 제지공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공장은 모여든 조선인 병사들로 인해 순식간에 병영처럼 되었다. 이곳에 이들의 숙영지를 마련해 준 동북판사처장 최용덕(崔用德) 장군은 이들 4백여 명을 김학규(金學奎) 지대장이 지휘하는 광복군 제3지대에 편입시켰다. 최장군은 중국 공군 소장으로 장개석의 전용기를 조종했던 사람이었다. 광복군 제3지대 제1대대로 불리게 된 이 부대에서 신현준은 대대장, 이주일은 1중대장, 박정희는 2중대장, 학병 출신인 윤영구(尹映九)는 제3중대장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말이 광복군이었지 일제의 만주군에 근무했던 그들로서는 쑥스러운 일이었다. 사실 그것은 광복군이라기보다 고향에 돌아오기 위해 일시적으로 만들어진 귀향대였던 것이다. 한편 박정희 독재에 투쟁하다가 결국 의문사 당했던 장준하(張俊河)가 박정희를 만났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백기완 선생은 ⌈장준하와 박정희⌋(역사문제연구소편, 『한국현대사의 라이벌』, 역사비평사,1992)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장준하 선생이 박정희를 처음 만난 것은 중국에서였습니다. 장준하 선생이 독립군 대위로 있을 때 일본군 중위로 있던 박정희가 무장해제를 당한 후 피난민 대열에 끼어 있다가 도망쳣 독립군 군대로 자원해 들어왔답니다. 처음에는 일본군 출신인 줄 모르고 독립군에서 받아들였다고 해요. 당시는 훈련도 잘 안되어 있고 이른바 신상기록이라는 것도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을 때니까 그렇지 않겠어요? 그 넓은 중국땅에서 젊은 사람이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싸우고 일본놈에 항쟁하겠다고 나서니까, 덮어놓고 좋거니 하고 받아들였겠지요. 박정희가 군대에 대해서 뭘 좀 아니까 그 사람한테 중대장인가를 맡겼대요. 그런제 장준하 선생이 보니까 전형적인 일본식 군대방침을 독립군에게 그대로 강요하더라는 겁니다. 장준하 선생이 그 광경을 보고 역겨워서 “넌 뭐야” 하고는 반말로 욕을 했대요. 그랬더니 이 사람이 나와서는 경례를 딱 붙이더래요. 하도 화가 나서 아무 생각없이 모자를 획 벗겨서 땅에다 밟고는 “너는 독립군 모자를 쓸 자격이 없어. 독립군 훈련을 일본식으로 해?”하고 막 야단을 쳤답니다. 그랬더니 고개를 푹 꺽고서 “잘못했습니다”라는 말을 하는데 일본말로 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더 깜짝 놀라서 상부에 보고를 했답니다. 일본군대 출신들이 피난민 대열에 끼어 있다가 광복군에 들아왔는데, 이 사람들이 일본군의 밀정일지 모르니 전부 제거하자는 안을 내놓았습니다. 그런데도 이때는 육군대위의 안을 받아들일 만큼 지휘체계도 되어 있지 않았고, 일본이 곧 망할 거라는 흥분에 빠져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답니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할 때 박정희는 독립운동은 커녕 종전후 일본군이 무장해제되자 잠시 몸을 피하기 위해 광복군에 들어갔다가 그 편으로 국내에 들어오게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출처 : 뉴스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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