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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왜 늘 아름다운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는 말할 것 도 없고 유년시절의 끔직한 궁핍과 추위를 회상하는 일도 때로는 아름답다. 지금 오십대가 넘은 이들은 너나없이 모두 전후의 가난을 기억한다.
상기 포연이 가시지 않은 초토 위에 얼기설기 학교를 짓고 매주일 하루를 정해 학교운동장에서 전교생을 모아놓고 담임선생님이 퍼주던 옥수수가루 배급날을.
미국인들이 버터와 치즈를 빼먹고 남긴, 가축사료로 쓰던 탈지분유 그 드럼통처럼 생긴 커다란 분유통에 키작은 선생님이 거꾸로 쳐박히다시피해 퍼주던 하얗고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을.
과자가 귀했던 때이니만큼 배급받은 우유가루는 밥솥안에 넣고 찌면 딱딱해서 긁어 먹기 좋은 심심풀이 간식이 되었다. 더러 학교에서 옥수수죽을 끓여 초등학생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는 날이면 인근 동네의 개들이 모두 학교운동장으로 모여들어 구수한 냄새를 맡고 아이들과 함께 겅중겅중 뛰어다녔다. 꿀꿀이죽을 끓여서 먹던 이들도 많았던 시절이다.
세기 지나 우리는 그 때의 굶주림을 이제는 미소띠며 추억한다. 이 땅의 어느 국민도 이제 굶지 않는다. 국민의 정부 때‘기초생활보장법’이 입법되어 빈곤계층은 국가가 그 생계를 책임질만큼 되었다. 요즘 논란되고 있는 차상위계층의 확대문제에도 눈을 돌려야하겠지만 최소한의 사회적안전망은 구축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지난날의 굶주림의 기억은 낡은 사진첩 속에 비녀지르고 소복으로 앉아계시는 할머니를 보는 것처럼 잔잔하게 여운이 일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추억이 아름다운 건 아니다. 날궂이를 하는 신경통처럼 우리를 괴롭히는 추억이 많다. 박테리아처럼 창궐해 시시때때로 가슴을 공격하고 우울의 나락으로 빠져들게 하는 기억은 하루바삐 잊어버리는 것이 최상책이지만 망각이라는 적절한 생존 본능을 두고도 그 기억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는 많은 환자들을 본다.
일전에 우연히 84학번 후배를 만났다. 재능많은 386세대인 그는 학생운동과 감옥전력으로 번번히 입사 마지막단계에서 고배를 마신 후에 시청율이 꽤나 높은 방송드라마의 작가로 가까스로 입신했다. 결혼해서 남매를 둔 성실한 가장이 된 그가 지난주 월요일 경향신문에 연재중인 ‘70-80 실록 민주화운동’을 읽고 필자인 내게 메일을 보내왔다.
그는 86년 이맘때쯤 감옥에 있었다.
여러분은 혹 기억하는가? 86년 그해 겨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두환 군사정권이 온 국민의 눈을 속이고, 그에 빌붙어 기업을 확장하고 부를 천문학적으로 불려가던 이름붙이기도 낯부끄러운 소위 ‘언론’들이 저지른 범죄행위를.
권력과 부를 장악한 자들이 작당하여 순결한 어린 영혼들을 어떻게 학대하고 유린했는지를 기억하는가? 또한 그들은 지금 과연 어디에 있는가?
86년 10월 31일 오전.
건국대에 모여 전두환군사정권과의 한판승을 준비하기 위해 ‘전국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발족식을 갖던 29개 대학 2천여명의 학생들은 8천여명의 중무장 전경들에 의해 마소처럼 끌려나왔다.
이들은 사흘간이나 물한모금 마시지 못하고 극심한 굶주림과 추위에 떨었던 관계로 대부분 탈진상태에 있었다. 군사정권은 안전귀가를 협상으로 내건 대학측과 ‘애학투’의 말에는 귀한번 열지 않은 채 학생들을 투망식으로 건물안으로 몰아넣은 뒤 단전 단수에 이어 일체의 의류나 의료품까지 차단하는 조치를 취했기 때문이다.
사흘밤을 칠흑어둠 속에서 허기와 갈증과 추위에 시달리던 학생들을 향해 불공대천의 적군을 향하듯이 굉음으로 지축을 울리는 하늘의 소방헬기와 땅위의 대형 소방호스가 소이탄과 최루액을 동시에 퍼부었다.
건국대 교정은 아수라 지옥으로 변했고 유혈진압에 모기소리로 항의하는 학부모와 인근 주민에게도 최루탄을 발사했다. 학생들은 차마 짐승에게도 그러지 못할 만큼 참혹하게 끌려나와 전원 구속되었다. 1298명. 근대적 사법체계가 세워진 이후 최대기록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바야흐로 전두환의 탄압이 끝간데없는 광기를 내뿜으면서 민주화운동단체들의 사무실이 폐쇄당하고 재야단체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속 수배된 상태에서 학생들을 변론해줄 그 누구도 남아 있지 않은 폐허 지경이었다. 학생들은 그들의 민주화열망을 옹호해줄 아무런 세력도 없이 홀로 버려져 있었다.
이런 때에 소위 ‘언론’이란 자들이 어떤 짓을 했던가. 그들은 일제히 앵무새처럼 ‘공산혁명분자 건국대점거난동’을 일면 톱으로 깔면서 정부고위관리가 배포한 보도자료를 한획 틀림없이 보도했다. 문공부에서 매일매일 하달하는 ‘보도지침’을 말 잘듣는 어린애처럼 복창했다. 그런가하면 건국대 일대에는 고성능 마이크를 장착한 괴차량들이 경찰의 보호아래 ‘공산당 게릴라는 반드시 망한다’면서 괴성을 지르며 휘젓고 다녔다.
손발이 삼위일체로 척척 환상적 콤비를 이루느라 공중파 방송사들은 음산한 음악을 배경으로 ‘건국대 공산 게릴라 점거 난동’을 대대적으로 때렸다. 어떻게 하면 각하가 보시기에 흡족할지 노심초사하는 자들이 사장으로 앉아 있었으니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었다. '각하'께서 이미 학생들을 시국사범으로 다루지 말고 폭력등의 파렴치범으로 쓰라고 지시한 이후의 일이다.
건국대 드넓은 교정에 평균 한평당 세발이 터진 최루탄 폭우세례속에서 기진한 학생들을 유혈진압한 이후 경찰은 55개 중대병력을 대운동장에 집합시켜 전공을 자축했다.
더 가관인 진풍경은 바로 이날 저녁 건국대 폭력진압 뉴스와 함께 흘러나온 국방부장관의 담화내용이었다. 7개월 이전인 86년 4월, 북한은 만성적인 전력난을 해소하기 위해 금강산댐 건설계획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그 때는 아무말없었던 정부는 돌연 이 날 금강산댐 저수용량을 볼 때 북괴가 이 댐을 일시에 방류할 경우에 서울의 63빌딩이 반나마 잠기고 수도권 일대가 수몰당할 것이라는 공포감을 조성했다.
당장 서울이 수몰위기에 직면한 듯한 갖가지 시물레이션 화면들이 난무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모든 언론사들은 금강산 댐에 맞서 서울을 사수할 댐을 건설해야한다고 곡학아세에 익숙한 전문가와 극우논객을 동원해 화면과 지면을 도배했다. 신문 TV는 구국의 성금을 걷는데 팔걷어부치고 나섰다.
유명연예인을 앞세운 이 ‘앵벌이’로 기업체를 선두로 공무원 시민 해외동포 재소자 코흘리개 어린이의 돼지저금통까지 훑은 결과 700억원의 거액을 순식간에 거두어 들었다. 이른바 ‘평화의 댐’ 협박사건이다.
정권보안을 겨냥한 전두환의 이 후안무치한 사기극은 93년 감사원감사에서 ‘완전히 조작된 정보에 의해 꾸며진 허구’임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그 이전 88년에 이미 워싱톤 포스트는 ‘사상최대인 불신과 낭비의 기념비적공사’로 이를 야유하고 조롱한 바 있다.
고구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시대라면 모를까 대륙간탄도탄이 날아다니는 20세기 말에 충분히 교육받은 국민들을 향한 사기라기엔 믿기지 않지만 이성이 잠들어 버린 시대의 광기가 어디까지 다다를 수 있는지 치욕스럽게 증언한 역사기록이다. 그 뿐 아니다. 건국대사건에 연이어 전두환은 학생들이 모여 노동자의 무권리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만든 여러 작은 모임들에 ‘전국노동자연맹추진위’ ‘반제동맹당’ ‘M.L’당등의 이름을 지어붙이고 용공매도에 혈안이 되었다.
이로 인해 도처에서 고문수사와 불법감금으로 인해 신음과 비명이 터져나왔지만 검찰과 법원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감옥은 양심수들로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86년 이맘때 12월 겨울은 어느 때보다 혹독하게 추웠다.
건국대사건은 과거 학생운동이 국민대중과 괴리되었던 점을 맹렬히 반성하고 국민과 함께하는 공개적이고 대중적인 투쟁노선으로의 일대전환을 꾀하기 위해 결성한 조직이었다. 그 주된 슬로건도 ‘한사람의 열걸음보다 열사람의 한걸음으로’였다.
이를 사전에 간파한 정부는 그 폭발력을 미리 차단하기 위해 투망작전으로 학생들을 건물안으로 밀어넣은 것이었다. 이들이 혹한의 감옥으로 행진하는 동안 가장 큰 고통을 감내했던 집단은 그 가족들이었다. 일가친척으로부터 빨갱이 소리를 들으며 배척당하고, 먼 길 달려 교도소에 가면 번번이 금치를 당해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흐느끼며 돌아설 때의 통곡을 타인이 어찌 알리.
그해 12월 서울 중구 삼각동의 한 남루한 건물의 꼭대기층에 세들어 있던 민가협은 연탄재가 수북한 난로를 둘러싸고 송년회를 하면서 모두 같은 상념에 잠겼다.
‘이러다가 정녕 저들이 사람을 죽이고 말지. 전에도 죽여 놓고 감쪽같이 감춘 일이 많지만 언젠가는 들키고 말거야. 그리고 바로 그것 때문에 제 무덤을 팔 거야’
그리고 오래지 않아 한달 지나지 않아 이 예감은 적중했다. 박종철을 고문살해한 그들은 서둘러 서울지검에 시신화장신청을 했다가 거부당한 것이다.
86년 겨울. 이러한 범죄들을 기획하고 협조하고 방조한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보도지침’을 충실히 지킨 댓가로 거액촌지를 받고 해외여행하고 승진하고 사세를 확장해 황금탑을 쌓은 자들이 ‘언론자유’라는 명분아래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가?
‘법이 좋긴 좋다. 너희같은 빨갱이한테 무슨 재판이야? 그냥 총으로’라고 지껄이던 공안검사 일부는 국회에 있다.
‘평화의 댐’앵벌이에 나선 앵커와 아나운서도 국회에 있다. ‘공산게릴라 난동’을 떠벌렸던 신문사는 도심에 더욱 번드르르한 사옥을 건설했다.
그 때 금강산댐 사기극의 전위에 가담했던 국방부의 높으신 분들은 일천억에 이르는 수의계약특혜를 누리면서도 여성의원을 협박하는 단체에서 잘 먹고 잘산다.
이런 사람들의 목소리가 요즘은 더욱 높아간다. 하는 말도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정책의 증거도 하나 거론하지 못하면서 무턱대고 ‘빨갱이’ ‘좌파’라고 우겨댄다. 정말 역겹고 신물난다. 공부 좀 해서 제발 신곡으로 좀 뽑아달라.
인간은 망각해야 살 수 있다. 생존 본능이다.
치욕과 수모를 일일이 다 기억한다면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살인의 추억’은 결코 잊어서 안된다. 지난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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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전에 만났던 그 후배는 내게 보내온 메일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날 진압당하던 날, 끔찍한 추위와 허기 속에서도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입고 있던 흰 런닝을 벗어 찢어서 백기를 만들어 흔들던 일과 무릎꿇고 쓰러져 있던 여학생들의 비명위로 어지럽게 날라다니던 쇠파이프가 주던 공포를 잊을 수 없습니다. 생활에 쫒기느라 오랜동안 잊고 있었는데 그러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날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 그날의 전쟁은 정녕 끝나지 않았다. ‘살인의 추억’이 지워지지 않는한 엄정하게 되새기고 또 되새겨야 한다.
‘살인의 추억’에 관한 한 우리는 망각본능과 싸워야 한다.
참여정부는 이 ‘기억투쟁’을 통해 우리 국민이 온전한 인격이 될 수 있도록 경제살리기에 사력을 집중하라. 천지신명께 기도하라.
‘그가 살아 돌아오지 않는 땅에서 사는 내가 무섭다/ 그러나 나는 결코 아무것도 잊지 않는다/ 오, 기억하게 하라/ 우리들의 이름으로 불러보는/ 자유, 나의 조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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