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영화 ‘대단한 유혹’이 우리나라에 소개되기 시작했을 때, 처음에는 그 제목이 ‘아름다운 유혹’이었다. 제목만 보고 사람들이 멜로 영화라고 오해한 탓인지, 또는 똑같은 제목의 우리나라 TV 아침 드라마나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이라는 영화와 혼동하기 쉬웠던 탓인지, 나중에 제목이 ‘대단한 유혹’으로 바뀌었다. 영화의 내용으로만 본다면 ‘아름다운 유혹’이 훨씬 더 어울리는 번역이다. 영화의 줄거리를 욕먹지 않을 만큼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캐나다 외딴 작은 섬에서 120명쯤 되는 주민이 살아간다. 이 사람들은 모두 직업을 잃은 지 오래다. 매달 나오는 실업연금을 받으면서 근근이, 그러나 단란하고 행복하게 살아간다. 마을 사람들은 이 외딴 작은 섬에 공장을 유치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떳떳한 직장인-노동자로 살아가고 싶은 것이다.
플라스틱 사출 공장을 하나 지을 적당한 지역을 물색하고 있는 자본가는 “공장을 유치하려면 그 마을에 반드시 의사가 한 사람 상주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을 내세운다.
그래서 그 마을에 의사가 와서 머물도록 하기 위해 온 마을 사람들이 혼신의 노력을 다해 의사를 상대로 ‘아름다운 유혹’을 벌이면서 벌어지는 갖가지 일들이 영화의 내용이다. 그 마을의 ‘이장’쯤 되는 사람의 대사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우리는 8년 동안 매달 실업연금이나 바라며 줄을 서왔어. 자네는 한번이라도 실업연금 수표를 받기 위해 줄 서 본 적이 있나? 자네는 돈도 벌어야겠지만 부끄러움도 벌어봐야 돼. 자네한테는 단 한번의 불쾌한 경험 정도겠지. 실업연금으로는 2주밖에 견딜 수 없어. 그 돈으로 한달간 버티는 것은 지옥이야. 그 실업연금이 우리 같은 마을들을 잡아먹고 있는 거라구. 간단한 진실이지. ‘의사가 없으면 마을도 아니다.’ 그게 진실이야. 우리는 의사 한 사람 구해보자고 이러는 게 아니네. 마을 사람 120명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이러는 거라구.”
캐나다 작은 섬의 주민 120명이 8년 동안 어떻게 아무 직업도 없이 실업연금만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까?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한 마을 주민 120명이 어떻게 8년 동안 아무 직업도 없이 공공복지기금에서 지급되는 생활비만으로 생존할 수 있었을까?
작년 여름, 내가 사는 동네 가까이에서 한 엄마가 두 자녀를 14층 아파트 계단의 창밖으로 던져버리고 자신도 어린 딸을 품고 투신해 목숨을 끊은 사건이 있었다.
세 아이를 데리고 남의 동네 아파트까지 찾아가는 동안 그 엄마의 마음이 오죽했을까? 큰 딸아이는 소란을 듣고 아파트 계단으로 나온 동네 아주머니에게 “엄마가 우리를 죽이려고 해요. 살려주세요”라고 호소했다지.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서에는 생활고를 비관한 자살 등의 사건이 일주일에 한두 건씩은 접수됐는데 사건 담당 경찰관은 기자들에게 “자살보다는 병사가 더 많다”고 했다. 오랜 시간 알코올에 찌들어 폐와 간이 망가져 피를 토하고 죽어있는 변사체로 발견되는 경우 등이 더 많다는 것이다.
그 숱한 죽음들을 외면하던 언론이 엽기적 자살 사건이 터진 다음에야 비로소 몰려온 것에 대한 비아냥거림이 그 경찰의 말 속에서 느껴졌다.
아이를 병원에 데리고 갈 돈 3천원을 더 이상 빌릴 수가 없어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 엄마나,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은 채 술에 찌들어 사는 알코올중독자들에게 전혀 잘못이 없다거나 그 정신상태가 극히 온전했으리라는 변명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 소식을 듣고 아내에게 “우리가 한 달에 10만원씩만 도와줬어도 그 네명의 소중한 목숨이 죽지 않을 수 있었을 거야”라고 말했더니, 아내는 “5만원씩만 도와줬어도 죽지 않을 수 있었을 거야”라고 했다.
우리 부부는 잠시 아무 말도 주고받지 못했다. 도대체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정부는, 사람들은, 우리들은 그리고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나 싶은 자책으로 한동안 마음이 어두웠다.
성탄절을 앞 둔 며칠 전에는 ‘긴급생계급여 대상 빈곤층’에 해당하는 대구 한 가정의 장롱 안에서 네살배기 아이는 숨진 채, 두살짜리 동생은 영양실조로 목숨이 위험한 상태로 발견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세상에서 죄 없이 고통당하는 사람이 있다면 행복하게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공범일 거라는 생각으로 그날 밤 잠이 잘 오지 않았다.
한 마을 120명의 주민이 8년 동안 아무 직업이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세상, 그것은 결코 꿈속에서나 가능한 나라가 아니다. 노동자 중심의 진보정당이 여러 차례 집권한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 바로 위에 있는 캐나다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 나라들은 결코 빨갱이 나라가 아니다.
자본주의가 인간을 왜곡시키는 수많은 현상들에 대한 해답을 아직은 사회주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회주의를 전적으로 신봉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가져 보지 않은 사람들이 “어리석은 사람들이여, 하루빨리 사회주의의 몽상에서 깨어나라”고 함부로 비난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사회주의의 수렁에 빠져 헤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누구나 처음에는 그런 순수한 관심으로부터 시작해 빨갱이가 되고 마는 것이다”라고 염려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시대착오적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가.
하종강 /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