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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당이 ‘원칙’을 무너뜨리면…

 
젊은 세대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40%의 응답자가 앞으로 잠재력이 있는 정당으로 민주노동당을 꼽았다. 그것은 민주노동당이 나아갈 한 가지 방향을 지시한다. 다른 한편, 당의 안쪽에서 민주노동당은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그 위기의 일단은 최고위원 선거에서 특정 당파가 조직 표에 힘입어 당직을 싹쓸이할 때 이미 드러났다. 인터넷의 시대에 소수가 담합, 조직표를 동원하여 상층부를 장악하는 못된 운동권의 버릇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이는 민주노동당이 빠져들 수 있는 또 다른 길을 지시한다. 한 마디로 민주노동당은 갈림길에 서 있다.

한때 나도 그 당의 당원이었고, 한동안은 그 당을 열렬히 지지했고, 지금은 그냥 선거 때에 표나 던져주는 정도만 하고 있다. 지금 벌어지는 문제들은 해묵은 것이어서 내 눈에는 이미 2년 전에 보였다. 내가 탈당을 한 것은 나름대로 거기에 항의를 하려는 제스처였다. 민주노동당이라는 게 말이 정당이지 실은 정파들 간의 연합에 가깝다. 정파 간의 권력 나누기는 아주 익숙한 것이어서, 그게 고쳐지려면 사울이 바울이 되는 기적이 일어나야 할 게다. 개인으로 들어온 당원들은 사실상 정파 소속 당원들보다 더 적은 권리만 갖는다.

이런 일이 터질 때마다 이게 ‘정파’ 문제가 아니라고 강변하는 당직자들도 있다. 물론 민주노동당의 모든 문제가 정파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 게다. 하지만 벌어지는 대부분의 문제가 정파 구조라는 낙후된 원시적 소통체계와 관련이 있음을 부인할 수 있을까? 한 마디로 아무리 몰상식한 일을 해도, 정파 소속의 사람들이 저지른 것이라면, 정파들 사이의 무형, 유형의 담합을 통해 적절한 선에서 용서된다. 이게 어디 한두 번인가? 이렇게 당의 운영이 ‘원칙’이 아니라 정파들 사이의 원시적 역관계에 따라 이루어질 때, 그 당을 진보정당이라 부를 수 있을까?

열린우리당 2중대

얼마 전 민주노동당 최고위원회에서는 “열린우리당의 2중대”가 될 것을 결의(?)했다. 2중대의 욕을 먹더라도 열린우리당의 국보법 폐지투쟁에 당력을 총동원해야 한다는 얘기다. 국보법 폐지투쟁 열심히 하겠다는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방식이 기회주의적인 보수정당의 2중대가 되는 것이어서는 곤란하다. 게다가 서민들이 자살하고, 노동자가 분신하는 상황에서 그 의제가 무엇보다 민중의 생존권을 앞세우는 진보정당에서 최우선으로 매진해야 할 사안은 분명 아니다. 이 황당한 편향은 분명히 지도부의 정파적 성격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최고위원회에서 “열린우리당 2중대” 운운하는 얘기가 있었다는 사실이 폭로되자, 그들은 정보 유출을 먼저 문제 삼았다. 당원들 앞에 떳떳하게 공개하지 못할 얘기라면 아예 하지 않았어야 하지 않을까? 최고위원들이 모여 앉아 그 따위 얘기나 하고 앉았는데, 당원들이 그 사실도 모르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보수정당들조차 투명성을 지향하는데, 진보정당에서 기껏 “열린우리당 2중대”가 되자는 망언이나 늘어놓으며, 그거 폭로한 사람 색출하겠다는 발상이나 하고 있다. 이런 몰상식도 사회적 소통에 대한 특정 정파의 낙후된 관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가장 많은 당원들이 민주노동당이 해결해야 할 과제로 비정규직 해결과 고용안정’(34.1%)을 꼽았고, 그 다음으로 ‘빈부격차 해소와 사회복지’(29.2%)의 문제를 들었다. 반면 열린우리당의 의제인 4대 개혁과제 완수 등의 응답은 10%를 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위원회에서는 “열린우리당 2중대” 올인 운동을 벌였다. 이런 짓 하는 지도부는 그럼 다음 선거에서 교체될까? 정파 구조와 조직표 문화가 남아 있는 한, 나는 거기에 대해서 대단히 부정적이다. 교체될 수 있다면 아예 뽑히지를 않았지.

여자 패는 진보정당

지난해에는 황당한 일이 있었다. 남성 당직자 둘이 시비 끝에 여성 당원에게 끔찍한 폭행을 가한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아니라 열린우리당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어떻게 됐을까? 민주노동당처럼 대충 징계하고 용서해 줄까? 또 한나라당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어떻게 됐을까? 가령 한나라당의 남성 당직자 둘이 여성의 목을 조르고 발길질을 한 사실이 드러나고, 언론에 보도가 되어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하자. 한나라당이라면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까? 당에 발전한 공로를 봐서 당원자격을 유지시켜 줄까? 심지어 한나라당도 민주노동당처럼 처리하지는 않았을 게다.

민주노동당은 아주 좋은 정당이다. 남자 둘이서 합세해서 여자를 패도 당원 신분 유지에 아무 지장 없다. 진보정당 하면서 그 정도 과를 덮어줄 공로 하나 없는 사람 있는가? 심지어 게시판에 피해자의 처신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올라온다. 강간해놓고 왜 미니스커트 입었냐고 따지는 자들이 진보정당에 다수 존재한다. 이 몰상식한 관념도 특정 정파의 낙후된 멘탈리티와 관계있다. 어느 나라 진보정당이 여자를 팬 자에게 당원 자격을 주던가? 만약 그 짓을 정파와 관계없이 순수하게 개인으로 입당한 당원들이 저질렀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들도 구명운동의 대상이 되어 용서를 받았을까?

앞으로 나가야 할 진보정당이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다. 내가 이런 식으로 말하면 또 “내부 사정을 몰라서 그런다”고 할 것이다. 내가 내부사정을 모르려면 제발 영원히 모르게 좀 해줬으면 좋겠다. 그럼 도대체 겉으로 드러나는 사건들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그 당을 지지하면서 알게 된 것은 언젠가 누구나 다 알게 될 것이다. 이미 여러 사람이 하고 있는 실망이라면 언젠가 누군가 다 할 수 있는 실망이다. 이런 식으로 진보정당의 생명인 ‘원칙’ 자체를 무너뜨리고 대체 누구의 지지를 받겠다는 것인가? 당원 자격으로 여자 패도 되는 진보. 참담하다.

진중권 / 문화비평가

건전한싸이코
2005-01-29 11:47:04
913 번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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