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밤새도록 통곡하듯 울었던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와 여동생을 여의었을 때를 빼고도 세 번이다.
그 세 번 가운데 두 번은 해외여행도중 우리나라의 가여운 처지를 생각하게 되었을 때였고, 장소는 이집트의 카이로와 미국의 그랜드정시였다. 그러나 나의 최초의 밤샘 통곡은 아직 대학에 다니던 64년 12월에 있었다. 신문기사 한 줄을 읽고서였다.
당시 박정희대통령은 조국 근대화의 수출입국의 깃발을 걸고 어떻게서든지 농업국가인 이 나라를 공업국가로 만들려고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장을 지으려 해도 기계 사올 돈이 문제였다. 당시 국내에 있던 최대의 공장은 요즈음 없어진 충주비료공장과 고 이병철 회장이 세운 제일모직과 제일제당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외국에 내다 팔 만한 물건을 만드는 공장을 짓자면 다른 건 몰라도 기계는 돈주고 사와야 하는데 달러가 문제였다. 빌려줄 나라나 은행이라곤 없었고 모두가 그저 속만 끓이는 판이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한 정부가 "같은 분단국인 서독에 가서 사정을 하면 돈을 좀 빌릴 수 있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으로 대통령의 서독방문을 결정했다. 64년 12월 7일서부터 12월 15일까지 박정희대통령은 독일 방문길에 나섰다.
나는 대통령의 등정 행색부터가 마음에 걸리고 가슴아팠다. 당시에는 대통령 전용기는 고사하고 kal의 전신이었던 kna의 보유 항공기 가운데서도 그렇게 먼길을 갈 수 있는 비행기가 한 대도 없었다.
그래서 서독의 민간항공회사인 루프트한자로부터 비행기 한대를 빌려서 태극기를 달고 대통령 일행이 타고 갔다. 그러고 며칠이나 지났을까. 방학이라 고향에 내려와 있던 나는 한 줄의 신문기사를 읽고 그 자리에서 얼굴을 파묻었다.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대통령 일행을 맞아 서독의 교민들이 환영회를 열어줬다. 10여명의 유학생과 수백명의 간호원 광부들이 대통령을 환영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교민 대표로 뽑힌 간호사가 환영사를 읽었다.
그러나 간호사는 환영사의 첫줄을 읽자마자 목이 메어 뒷말을 잇지 못했고 대통령과 수행원들도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았다. 간호사의 환영?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대통령 각하! 우리는 언제나 잘 살아 봅니까?"
나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하나의 연상을 했었다. 당시 시골의 가난한 집안에서는 자녀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대처에 나가 있는 친척들을 통해 딸아이는 식모살이 그리고 아들같으면 점방의 고용원으로 내보내곤 했다.
월급을 받기 위해 그렇게 내보내는게 아니라 집에 그냥 있을 때보다 양식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만 해도 생활급을 주는 직장은 삼성물산 한군데뿐이었고 식모나 가게 점원은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는 것만으로 고맙게 여기던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집안에 무슨 급한 환자가 생기거나 우환이 있게되면 딸자식을 식모살이 보낸 부모가 그 주인집을 찾아가곤 했다.
"가을걷이를 하면 갚을 테니까 얼마간만 융통해 달라"는 통사정을 하기 위해서다. 마음씨 좋은 주인이면 얼마간의 돈을 빌려주기도 했으나 대개는 거절당하는 게 일쑤였다.
그런 때에 식모살이를 하던 딸자식이 모처럼 찾아온 아버지나 어머니를 제방으로 모시고 가서 정성들여 차린 밥상을 올리면서 부녀간에 나눈 얘기는 늘 하 나였다.
"우리는 언제나 잘 살아봅니까?"
사실 나의 이와 같은 연상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었다. 그날 대통령 일행을 환영하기 위해 나온 교민 가운데 십수명의 유학생을 뺀 나머지 수백명은 보도된 대로 간호사와 광부였다. 지금의 20대들은 먼 외국땅에 나가 광부 노릇하고 간호사 노릇한 사람들이니까 대략 그런 수준이겠지라고 생각하기 십상이겠지만 그때의 사정은 전혀 달랐다.
정규 4년제 대학을 나온 젊은 청년들이 손에 굳은살이 박히도록 하기 위해 몇 달씩 삽질과 곡괭이 질을 한 끝에 합격하곤 했다. 간호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명문여대를 나온 여성들이 새삼스레 간호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했고 치열한 경쟁을 거쳐 독일까지 간 것이다. 국내에서 최고의 대우를 해주는 직장보다 간호사나 광부로 일할 때 받는 월급이 서너배나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 아들,딸들은 독일 사람들이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하기 싫어하는 일거리를 얻기 위해 경쟁을 벌였다.
그리고 그 나라에 돈을 빌리러 간 대통령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잘 살아봅니까?"라고 환영사의 첫마디를 시작했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처지가 식모살이 하는 딸집에 돈빌러 간 시골의 어느 아버지와 어디가 다르단 말인가.
이때의 기억 때문인지 나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늘 후하게 하는 편이다.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후에는 줄곧 야당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한 핵무기를 개발하려 했던 점 하나만 빼고는 늘 관대한 태도를 취했다.
입장을 바꾸어서 내가 그였다 하더라도 64년 12월 그날, 딸같은 아이로부터 "각하, 우리는 언제나 잘 살아 봅니까"라는 말을 들었다면 독하디 독한 공업화의 집념을 평생 떨치지 못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준공 이후 한참동안 자동차라곤 그저 10분에 한대 다닐까말까 했던 경부고속도로를 기어이 건설한 집념, 누구도 상대하지 않던 포항제철 건설을 위해 대통령 자신이 수모를 마다하지 않고 뛰어다닌 열의, 그리고 공업화 자금을 마련할 수 있다면 전쟁터건 사막이건 가리지 않고 뛰어들던 욕심등은 그날의 충격과 집념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다고 믿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