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티즌들이 흔히 사용하는 단어 중에 '폐인'이 있다. 원 뜻은 '병이나 못된 버릇 따위로 몸을 망친 사람'이지만 어느날 갑작스레 인터넷에 등장하더니 여기저기서 종종 쓰인다.
좋은 의미에서의 폐인도 있다. '한가지일에 미친 사람'으로 '마니아'(Mania)와 비슷하다. 그러나 폐인은 전반적으로 좋지 못한 의미이다. '사람의 구실을 못하는 쓰레기 같은 인간' '폐인이란 아무일도 할수없고 아무일도 않하려는 사람'이란 것이 대세다.
2003년 추석으로 기억된다. 주변사람들이 명절에 고향에,또는 집으로 향하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아니 안했다. '바쁜 일이 있어서 못간다'고 핑계전화를 드렸고,부모님은 명절에 자식을 못본다는 소식에 서운해하셨다.
집에 내려가지 않은 이유는 그당시 즐기던 '메이플스토리' 때문이다. 메이플스토리는 본인이 거의 처음 즐긴 MMORPG다. 1차 전직 이후 2차 전직을 향해 달려가던 재미에 흠뻑 빠져있었던 나로서는 명절이 '열렙'의 찬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명절새 2차 전직을 이루고 성취감에 흠뻑 취했다.
내가 한 일이라곤 돼지를 잡는 일 밖에 없었다. 히든존에서 하루종일 몇마리를 잡은 지 기억도 안난다. 추석이 끝나자 시간이 없었다. 그러자 어느새 '자동사냥' 프로그램까지 구했다. 그리고 밤새 그 프로그램으로 돌렸고 다음날 아침에 렙업이 이뤄져있으면 한없이 기뻤다. 그리고 퇴근후 컴퓨터를 켜고 또 돼지를 잡았다.
어느날 문뜩 깨달았다. 이걸 내가 왜하고 있는지.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이 일어났다. 내가 한심하다는 생각에 게임을 종료했지만,1~2시간 후엔 어느순간 돼지를 또 잡고 있게된다는 것이다. 이 현상을 알아채기까지도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이마저도 내가 왜이러나 싶었을 때... 그때 메이플을 그만두게됐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이 폐인이 아닐까 싶다.
최근 '월드오브워크래프트'(이하 WOW)로 인해 폐인이 된 느낌이 강하게 든다. 12월초 부터 꽤 재밌게 즐겼다. 만렙인 60레벨 캐릭터도 2개 가지고 있을 정도로 몇달 푹빠져 살고 있다. 일반섭에서 시작했다가 가장 인기있다는 '아즈샤라'로 이주했다. 요즘은 3번째 캐릭터를 키워볼까하는 생각도 하고 있다.
WOW는 훌륭한 컨텐츠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요즘 내가 게임을 즐기는 패턴은 그게 아니다. 오그리마에서 외치기로 파티를 구하고,그 파티(공격대)가 완성되기까지 2시간 소요된다고 생각하자. 그리고 인스턴스 던전을 가게된다. 스칼로맨스의 경우 보통 2~3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인던을 시작해서 마치는 시간까지 약 5시간이상이 걸린다는 얘기다.
문제는 스칼로맨스를 위해 5시간을 소비하는 이유가 단 하나의 아이템 때문이라는 점이다. 교장이 주는 '머리' 세트 아이템을 먹기위해서다. 그런데 이 머리가 1/7 확률로 드랍이라 '이 작업을 많이 반복해야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이런 세트아이템이 머리,어깨,가슴,허리,손,손목,다리,발 8개나 존재한다. 즉 하나의 인던이 5시간 소요된다고 치면 엄청난 시간을 쏟아부어야한다. 얼핏 계산해보면 7*8*5시간이다.
최근 WOW를 즐기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교복' 작업에 빠져있다. 오그리마에서 만나는 대부분이 똑같은 차림을 하고 있다. 개성도 없이... 모두가 비슷한 무기에,비슷한 옷을 걸치고 있다.
교복작업을 끝낸 게이머들은 더이상 인던에 갈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기에 60레벨이 대부분인 이 시점에 시간이 흘러갈수록 인력난에 시달리고 파티를 구하는 시간이 2시간이 아니라 더욱 길어진다.
오늘도 난 오그리마의 은행위에서 외친다. '스칼가요~' '데나 가요~' '첨상가실 뿐' '첨하 단코스 갑니다'. 그리고 5시간후 내가 원하는 아이템이 나오지 않는다. 좌절한다. 게임은 종료한다. 그리고 내일 또 오그리마 은행 지붕위에서 외치겠지.
무법항,톱니항,가젯잔,눈망루마을 등에 가면 고블린이 말하는 대사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시간은 금이라구~ 친구'.
전형철 기자 hoogoon@stoo.com [2005년 03월 10일 09:5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