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 대한 감정과 편견이 있다면,
모두 내려놓고 진지하게 끝까지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읽어보시고... 그리고 결정하십시오.
그리고 기독교인인 분들이라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능한 창조주는 우리에게 알쏭달쏭한 것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저는 확실히 알았습니다...
나에게 믿음의 근거가 있는 건지...
있다면 그건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선표아빠의 편지
나는 두 자녀의 아빠입니다. 그 중 큰 놈 이름이 선표인데, 보통의 경우가 그렇듯이 사람들은 우리 큰놈의 이름을 붙여서 나를 선표 아빠라고 부릅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아니,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이라고 말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 되겠습니다. 누가 나보고 예수 어쩌구 하면 불같이 화를 내거나, 아니면 아예 고개를 돌려버려서 말하는 사람을 민망하게 만들던 내가, 다른 사람에게 험한 꼴을 당할 것을 작정하고 이렇게 예수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예수님은 참 대단한 분이십니다. 이 글을 보고계신 당신도 나중에 나와 같은 입장이 될지 모르는 일이니까 나를 너무 민망하게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나는 이글을 통해 내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 동기와 과정에 대해 가감 없이 이야기 하려합니다. 이글은 내 인생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로, 주인공만 바꾼다면 당신의 이야기 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나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신에 대한 이야기가 거론될 수도 있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부터 10년 전인 서른다섯 살 때에, 나는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어보겠다고 결정했습니다. 그 해에 크게 위험하지 않은 질환으로 입원 치료를 받던 아버지께서 치료를 마치시고 퇴원하기로 예정되었던 날 아침, 갑작스런 심장질환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숨을 놓으시던 마지막 순간까지 현장에 같이 있으면서도, 아무 도움도 드릴 수 없었던 나는 심한 무력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귀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금 내 나이 마흔 다섯이니, 지나온 10년 세월이 잠깐 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쉰 다섯이 되는 것도 잠깐일 것입니다. 나이 많은 선배들께는 죄송한 표현이나, 지금 내가 느끼기에 쉰다섯이면 인생 막장에 서있다는 느낌이 들 것이 거의 분명합니다. 벌써 노안이 와서 돋보기를 써야만 신문을 읽을 수 있고, 지금도 어깨와 무릎이 시린데, 10년이 지나면 내 육신의 처지가 더 험악해 질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이란 그저 주어진 팔자 속에서 살다가 느닷없이 끝나버리는 허무한 드라마 같은 것이라고 체념해 버리기에는 악착같이 살아온 시간들이 서럽기만 합니다. 그런데도 죽음은 반드시 나를 찾아올 것이고, 내가 이루어놓은 모든 것 들을 나와 상관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오직 잘 살 것만을 생각하다가 갑자기 죽음과 맞닥뜨릴 때, 몹시 당황하고 있을 나를 생각하니 죽음의 문제는 더 이상 외면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끝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실제로 죽어보니까 죽음이 끝이 아니고 동화처럼 들리던 지옥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정말 기가 막히고 비통한 심정이 될 것입니다. 나도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던 사람입니다. 그런 내가 이제야 천국이 있음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에 오늘 이 글을 씁니다. 부끄럽게도 나는 교회를 다닌 지 10년이 되어서야 막연했던 천국을 분명히 보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문제는 반드시 풀고 넘어가야할 당신과 나의 숙제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록 작은 것일지라도 삶에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최선을 다한 삶 전체를 통째로 잡아먹는 죽음에 대해서는 듣지도, 알지도 않으려 합니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죽음의 문제는 오직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 때 해결되는 것인데, 그런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여 주면 믿겠다고 말하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영 이시기 때문에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는 존재임을 아시고 스스로의 존재를 알려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성경은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과, 그분이 내 죄의 대가를 지불하시기 위해 희생 제물이 되어 피 흘려 죽으셨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사실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어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원래부터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학창 시절을 회상해 보면, 교회에 다니는 아이들은 자기들끼리만 어울렸고, 소극적으로 보였으며, 아무튼 얄미운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사회에 나와서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못마땅한 모습이 싫었습니다. 위선적으로 보였고, 이기적인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한번은 내가 한정식 집을 운영 할 때였는데, 나이가 지긋하신 몇 분이 목사님을 대접하기 위해 우리 집에 오신 적이 있었습니다. 대접하는 분들이 매우 정중하게 목사님을 모시는데 반해, 나이 젊은 목사님이 자기 아들만 챙기면서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보고 굉장히 못마땅한 기억이 오래 남았습니다.
황금 같은 일요일 날에 쉬지도 못하고, 거기다 돈 까지 바쳐가면서 교회에 가는 사람들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전도라도 할라치면 매우 야멸차게 거절하곤 했습니다. 순순히 이야기를 들어주다가는 끝이 없다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마치 다단계회사의 판매원들처럼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거나, 길거리에서 무슨 구호를 외치듯이 전도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경멸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내게는 그 사람들이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면서 이런 생각이 사실과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교회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별별 사람이 다 있을 수 있습니다. 그중에는 심지어 순전치 못한 목사님들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들을 삯꾼 목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독교를 대표하는 사람도 아니고, 더욱이 예수님을 대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나는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항상 가짜가 있게 마련입니다. 귀한 것 일수록 가짜가 많은 법입니다. 커피 깡통에는 가짜가 없지만 다이아몬드에 가짜가 있는 이유는 다이아몬드가 그만큼 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 이단이 많고, 가짜 교회와 가짜 목회자, 가짜교인들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도 가짜가 많습니다. 특히 국산으로 둔갑한 가짜 농축산물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속을 것을 우려해 아예 수입소고기만 산다고 합니다. 행여 한우로 믿고 샀다가 속게 되느니, 아예 수입소고기를 사면 속을 가능성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짜 때문에 진짜 보물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당신도 가짜교인들 때문에 눈이 가려서, 찾아보지도 않고 구원의 길을 포기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새로 지은 빌딩이 있다고 칩시다. 그 안에 들어가 보지도 않은 사람이 내부구조가 이렇다, 인테리어가 저렇다 이야기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지도 않고, 교회에 다녀 보지도 않고, 더욱이 예수님에 대하여 들어보지도 않고서 하나님을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하던 즈음에, 정확히 말하자면 교회를 다니기로 결정했을 즈음에, 내 형편은 아주 어려웠습니다. 이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형편이 험악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내 신분은 달라졌으며 내 영혼은 누구라도 부러워 할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 당시 나는 나이에 맞지 않는 욕심으로 3개의 사업체를 동시에 운영하다가 실패하여 경제적으로 큰 곤경에 처해 있을 때였습니다. 인생의 귀천은 돈이 결정하는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살아온 나에게 경제적 실패는 심한 허탈감을 가져다주었으며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야한다는 절박감으로 내 마음은 강퍅해 있었습니다. 해도 되는 일과 하지 말았어야 될 일에 대한 구분도 없이, 오직 경제적 재기에만 몰두해 있던 나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나는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내가 교회에 출석하기 직전 몇 해 동안은 제법 큰 돈을 번적도 있었지만, 이때를 제외하고는 지긋지긋할 만큼 가난이 나를 따라다녔습니다. 어린시절의 가난한 환경은 내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이 상처는 나를 매우 부자연스러운 아이로 만들었고, 사람들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자신감 없는 태도를 만들어 냈습니다. 고등학교 과정은 부모를 떠나 객지에서 혼자 학교를 다녔는데, 정말 굶기를 밥 먹듯 한다는 표현이 나를 두고 한 말 같았습니다. 내 주변에는 학생이 아닌 장발의 친구들이 모이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학교바깥의 아이들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소년전과가 있는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나는 교내에서 우유와 요구르트를 판매하여 생활비를 조달하기도 했었고, 구두를 닦는 친구의 도움으로 근근이 생활을 유지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그 어린시절 내 친구중의 하나일 수 도 있습니다. 정말 간절히 원하는데, 내가 사랑하는 어릴 적 친구 모두가 이 글을 읽고 나와 똑같은 은혜를 누리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또 다른 객지인 강릉에서 두 번을 휴학한 끝에 6년 만에 대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 시절에는 몇 달 동안을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이처럼 지낼 때도 있었습니다. 이런 생활을 해 오는 동안 내게는 나 자신도 이해하기 어려운 비정상적인 현상들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길을 걸어가다가, 자기를 쳐다보는 것 같은 행인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도망치듯 집으로 숨어드는 이상한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증상은 점점 자주 나타났고, 그리고 깊어져 갔습니다.
환경과는 다르게 나는 자아실현의 욕구가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기질과 환경과의 부조화는 나의 내면에 이상한 왜곡을 가져왔습니다. 예를 들면 나는, 익숙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평온하고 자연스러운 분위기속에서 지내는 것보다, 오히려 격론에 가까운 험한 분위기 속에서 지내는 시간이 훨씬 덜 어색하곤 했었습니다. 한차례 그런 시간이 지나가야 자연스러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이런 모습의 내가 싫었습니다. 오랜 가난은 강한 보상욕구를 만들어 냈고,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내가 싫어하는 내면의 상처와 투쟁을 벌이면서, 오직 스스로의 존재감을 확인받기 위해 빠르고 큰 성공을 목표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자라오면서 내가 받은 내면의 상처와 왜곡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가끔씩 드러나서 나를 당황하게 만들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증상들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게 된 순간, 정말 봄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지금의 나를 보고 나의 옛 상처를 상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내가 물질적으로 잘 살게 되어서 생긴 변화가 아닙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지금도 나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습니다.
성인이 되어서 겪는 가난의 문제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하다는 것은 모든 방면의 문제를 의미합니다.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이 멀어지고, 자연스럽던 인간관계가 어색해지고, 좋은 교육환경을 제공받지 못하는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뒤 처지고, 풀이 죽고, 가족구성원 모두에게 미치는 열등감, 위축감 등은 서로를 용납할 여백을 빼앗아 버려서 작은 일에도 화를 내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필연적으로 술을 찾게 되고, 더욱 술을 의존하게 되고, 가족간의 분쟁이 잦아지는 악순환이 반복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고도 얼마동안은 이런 상황이 계속 되었습니다. 오죽하면 옛말에 ‘가난이 담을 넘어 들어오면 사랑이 담을 넘어 나간다.’고 했을까. 절박한 가난을 겪어보지 않고는 그 고통을 말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야말로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내를 예비해 두셨습니다. 가난의 온갖 부산물들이 우리 가정을 공격했지만, 아내의 사랑과 인내, 그리고 눈물의 기도가 우리가정을 지켜냈습니다. 아내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이렇게 살아오던 내가 예수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나서야 내게 주어진 고난이 축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말장난이 아니라 정말 그랬습니다. 고난은 위장된 축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성경을 보니까 기가 막힌 예수님 말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라.” (마태복음 5장 3절)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어떻게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을까? 왜 애통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는 걸까?
내가 이 말씀을 이해하고 동의하는 데에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천국이 없다면 모르지만, 만약 있다면 그곳에 가는 자가 복 있는 자일 것입니다. 그런 천국에 마음이 가난한 자가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모르지만 만약 있다면 사람의 위로 따위는 비교할 수도 없는 위로가 될 것입니다. 또 다른 비슷한 말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마태복음 19장 23절)
사실상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당장 이해가 되지는 않더라도 이 땅에서 서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부자들이 천국에 갈 수 없기 때문에 위로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지친 영혼들이 천국을 볼 것이며,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다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지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이 땅의 삶도 서러운데, 죽어서까지 서러운 시간을 보낼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상황에 따라 변하는 사람의 위로가 아니라 이 세상을 창조한 전능자 하나님의 위로라니 기대가 됩니다.
나는 하나님이 있는 것이 확실하고 천국이 존재하는 것이 확실하다면 붙잡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이 존재하는지 알아보기로 결정 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려고 하자, 하나님은 내가 자신의 존재를 쉽게 알 수 있도록 여러 방법으로 나를 도와 주셨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던 순간이 기억납니다.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던 날, 그날의 감격은 이런 영상으로 나를 찾아왔습니다.
나는 술에 취해 인사불성인 상태로 거리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내가 비틀거리며 무단 횡단을 하고 있을 때, 내 뒤에서는 덤프트럭이 무서운 속도로 나를 덮치려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트럭이 나를 덮치려는 순간 나는 누군가에 의해 밀려 넘어졌고, 나를 밀어낸 그 사람이 내 대신 트럭에 깔려 죽었습니다. 그는 만신창이가 되어 죽어갔습니다. 나는 아무렇게나 쓰러져 잠이 들었고 다음날 아무것도 모른 채 일상으로 돌아가 세상살이에 바빴습니다. 그렇게 몇 십 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오래된 CCTV 녹화 테이프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몇 십 년 전 내가 트럭에 치일 뻔 했던 사건을 찍은 영상기록이었습니다. 나는 그 테이프를 통해 어떻게 해서 내가 살아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나를 구해주고 대신 죽은 사람이 있는데, 나는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그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니 기가 막혔습니다. 나는 나대신 죽은 그 사람을 수소문하기 시작 했습니다. 그의 유족 들을 만나면 나는 최선을 다해 그들을 돕겠노라고 말 할 작정이었습니다. 다행히 나는 그의 유족들을 찾았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나를 대신하여 죽은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내가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는지 물었습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당신을 사랑해서 당신대신 죽었습니다. 그 사람처럼, 당신도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십시오.” 나는 처음으로 내가 누군가의 목숨을 바친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구원의 감격은 당신에게도 이런 모습으로 찾아올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게 된 경위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는 분을 이 땅에 보내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분이십니다. 우리는 학교에서 4대 성인의 한사람으로 예수님을 배웠습니다. 그 분이 태어난 때를 기점으로 서기가 시작되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건도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이야기나,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믿기가 어려웠습니다. 흔히들 예수님을 믿느냐고 묻는 것은, 예수님을 이 세상 모든 죄와 사망으로부터 우리를 건져 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느냐, 즉 그분을 우리의 그리스도로 믿느냐는 말입니다. 그 분이 부활하신 것을 증명하거나,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줄 수 있다면 나는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믿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곧 하나님과 같은 존재라고 주장하는 부분이 여러 군데 나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 한다.” (요한복음 5장 17절)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한복음 10장 30절)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 (요한복음 14장 9절)
그리고 자신이 종교 지도자들에게 붙잡혀 죽으실 것과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에 대해서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예수님께서 자신이 약속한 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다면 자기 말이 모두 사실임을 믿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 인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13장 19절 )
과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고, 하나님께서는 사흘 만에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예수님의 말씀이 사실인 것과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증명하셨습니다. 그의 다시 사심을 보고서야 많은 사람들이 그가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구세주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이 우리들의 믿음 없음을 벌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믿음을 도와주시기 위해 너무나 여러 번 애쓰시는 것을 발견하고서 상당히 놀랐습니다. 그 분의 사랑을 감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강아지에게 인정 받으려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 보시기에 추악한 미물에 불과한 우리로부터 인정받으실 어떤 필요도 없는 분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오직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부활하신 자신의 몸을 내 보이며 손과 발의 못 자국에 손가락을 넣어보고라도 믿는 자가 되라하시는 그 친절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요한복음 2장 22절)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거는 너무나 충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선 구약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많은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역사적인 증거로는 당시 유대를 지배하던 로마 총독 빌라도가 본국 황제에게 점령지의 정세를 보고하는 군사보고서에서 예수의 부활이 사실이라고 증언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외에 유대인 고대사에도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우리나라 교과서와 백과사전에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역사적 사실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확실한 부활의 증거는 성경에 기록된 여러 가지 사건들과 제자들의 변화였습니다. 그 중 바울이라는 사람은 본래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사람인데, 그런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는 목숨을 바쳐 예수님을 증거 하였으며, 오히려 부활의 증인으로 살다가 순교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500여명의 사람들 앞에도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믿지 못했던 제자들에게 스스로를 드러내시고, 성경에 기록된 자신에 관한 예언과, 자신이 죽기 전에 가르쳐 말한 것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밝히 가르쳐 알게 하셨습니다. 그래도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에게는 몸의 상처를 만져보게 하셨고, 그들과 식사도 하시며 대화도 하셨습니다. 그렇게 40여 일 간을 스스로 부활을 증거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믿고 구원에 이르도록 사랑으로 그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하늘로 올라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실 때 자신이 승천할 것에 대해 미리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예수님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요한복음 6장 62절)
내가 승천 하는 것을 보면 내가 말 한 것을 믿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열두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모두다 주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그들도 죽음의 공포가 무서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그리고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하고 난 후,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자기의 그리스도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증거하며 순교합니다. 겁쟁이 제자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순교할 수 있었던 용기와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두말 할 것도 없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목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말씀이 모두 사실임을 증거 하는 승부수였던 것입니다. 그는 이 땅에 오신 구세주요,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고, 모든 죄를 용서하셨으며, 천국을 허락하사 영생을 누리도록 축복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모두 사실이라는 증거가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내가 믿음의 눈을 뜨고서 하나님의 약속을 들여다보니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이미 나의 모든 질고를 담당하셨다는 것과, 내가 하늘나라의 시민권자라는 사실과, 현재는 하나님의 사신으로서 이 땅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내가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된 것은 바로 위의 말씀을 만날 때였습니다.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이 말씀을 대할 때, 나는 천국의 존재가 분명히 믿어지는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을 떠나 어디론가 가셨으니, 그 어딘가에 내가 모르는 천국이 있다는 말입니다. 천국은 우리의 상상 속에만 있는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천국은 실존하는 어떤 공간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천국이 실재하는 곳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 그 천국이 얼마나 광대하고 영광스러운 곳인가 하는 것을 아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추석날 예배시간을 통하여 나에게 천국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보여주셨고, 이 세상의 현상과 시간들이 얼마나 왜소하고 거짓된 것인지를 알게 해 주셨습니다. 천국은 영존하는 곳입니다. 그런 천국에 내가 간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습니다. 당신도 나와 함께 천국에 가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은 정말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들어가기 쉬운 천국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천국 문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천국으로 통하는 문이 되십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마음에 믿으면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나는 자녀가 되어 천국을 가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귀한 것을 얻으려면 엄청난 수고를 지불해야 하는 이 세상 원리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믿기 어려운 말이지만 이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 받는 것이 자기 수고의 대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요한복음 10장 9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 치 못하게 하려함이라” (에베소서 2장 8·9절)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 라.” (요한복음 14장 6절)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시록 3장 20절)
지금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부르심에 순종하여 예수님께로 들어가면 누구든지, 누구든지 구원을 얻는다고 하십니다. 내가 죄가 있든, 못나고 가난하든, 술을 많이 먹는 사람이든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부르신다고 모두가 예수님께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음성을 외면하거나, 듣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이 글을 통해 특별한 사랑으로 당신을 부르고 계십니다. 당신은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은 이제 당신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요한복음 6장44절)
우리는 지금까지 자기의 힘으로 수고하고 애쓰며 살아왔습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관대하고, 작은 것이라도 베풀며 사는 것이 옳은 삶의 태도이며, 그렇게 살다보면 죽어서도 좋은 곳에 간다고 생각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만큼 선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하셨고, 이 세상에 의인은 단 한명도 없다고 단정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죄라고 규정합니다. 즉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이며,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은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
(요한복음 3장 18절)
“죄에 대하여 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한복음 16장 9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또한 공의로운 분이셔서 죄의 대가를 반드시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죄의 대가는 사망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법에 비추어 볼 때 우리 모두는 죄인이며 죽어야 마땅한 존재들인 것입니다. 예컨대 예수님이 말씀하신 죄의 정의를 보면 우리가 왜 죄인인지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한 자와 같다 하셨고,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자 마다 이미 간음하였다고 하셨습니다. 형제란 넓은 의미로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어느 누가 죄 없다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공의의 법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죽어야 마땅합니다.
이런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은혜의 법을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사 하시는 대가로 짐승의 생명을 바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흠이 없는 양 한 마리를 취하여 그 양의 머리에 안수함으로써 자기의 죄를 전가한 후, 그 양을 잡아서 피를 흘려 바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를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짐승 한 마리의 피로 민족과 나라의 죄를 용서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악하여서 하나님의 은혜를 이용하였습니다. 마음의 중심에 뉘우치고 회개 하기는 커녕, 죄를 짓고도 마음의 돌이킴 없이 몇 푼의 돈으로 짐승을 사서 바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우롱하였습니다. 더 이상 짐승의 피로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없게 된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용서하시기 위해 사랑하는 아들을 제물로 삼기로 작정하시고, 그 아들에게 사람의 몸을 입혀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속죄양이라고 표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본체이며, 그는 바로 나와 당신의 죄의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속죄 제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인 것입니다. 세상에 어느 누가 나를 위해 죽어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단돈 몇 백 만 원도 기꺼이 손해 볼 형제자매가 없는 것이 이 세상 일반인데, 하늘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아들을 피 흘려 죽임으로써 우리를 구원하기로 작정하고 그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말입니다.
나도 자식을 키우는 사람입니다. 내 아들이 죽는 꿈만 꾸어도 가슴이 떨리고 눈물이 왈칵거리는데,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이 죽을 것을 아시고, 또 죽는 장면을 직접 보면서까지 사랑하는 아들을 우리 죄의 값을 치루는 제물로 주셨습니다. 짐승의 피가 아닌, 바로 하나님 아들의 피로 우리 죄의 대가를 지불하심으로, 우리는 영원한 죄 사함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 이십니다. 이제 그 사랑의 증거이신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모든 죄를 용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렇게 고백하는 나와 당신은 이 땅에 속한 자가 아니요,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은 나와 당신을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증거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장 16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 로서 난 자들 이니라.” (요한복음 1장 12절 ~ 13절)
나는 당신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순간, 당신의 모든 문제, 살아온 세월의 서러움 따위는 정말로 한방에 날아가 버립니다. 그 분이 얼마나 자기를 사랑하는가를 깨닫게 될 때, 지금까지 용서하지 못했던 사람을 용서하는 아량이 당신 깊숙한 곳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상처는 치유될 것이며, 당신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자유로움과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가정에도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변화를 보고 당신의 가족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의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깊은 은혜의 바다로 들어가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껏 누리며 사시기를 진심으로 권유합니다. 이 글을 읽으시고 저의 권유를 받으신다면 아래의 글을 당신 마음의 중심에 깊이 고백함으로써 예수님을 영접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는 오늘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사, 나의 죄 값을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고백합니다. 지금부터 나의 삶을 하나님께 의뢰하오니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난 이후부터 나와 우리가족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니 하나님이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우리 가족을 인도하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10년 전, 내가 하나님을 만나기 훨씬 이전부터 하나님은 나의 인생을 계획하시고 보이지 않는 손길로 나의 삶을 인도해 오셨습니다. 오늘 내가 마음의 중심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기쁘게 고백하는 이 순간까지, 그리고 이후의 시간도 선하신 하나님이 절대로 나를 놓지 않으며 나의 삶을 인도하실 것을 나는 압니다.
나는 당신에게도 동일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다고 믿습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오늘 이 글을 읽고 예수님을 자기의 그리스도로 영접한 당신의 삶을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예수님의 사랑의 깊이를 아는 지혜에 자라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분량의 믿음까지 자라나서, 당신을 위해 예비하신 하늘의 축복을 마음껏 누리시고 그 은혜를 만민에게 자랑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믿음에 대하여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 이신가를 알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신말씀을 믿는 것이며, 나아가 예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 중의 한분인 성자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 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으며, 많은 증인들 앞에서 승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 분의 확실한 정체성을 알고 믿을 때, 그 분이 하신 일과 말씀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오늘 내가 아들 선표에게 말하기를, ‘일주일 후에 너를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보내주겠다’ 고 말한다면 선표가 내말을 잘 믿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업이 잘되어서 경제능력이 충분한 시점에 내가 말한다면 선표는 내말을 믿을 것입니다. 내가 자기 아빠이고, 또한 아빠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기꺼이 유학비용을 부담할 것이며, 또 충분히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경제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과, 우리를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시고 천국 백성이 되게 하신 것을 믿는다는 것은 그 분이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에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그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게 해주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이 증거를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기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자기 몸에 못이 박히는 상상을 해 본적이 있습니까? 작은 가시 하나만 박혀도 빼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이 일반의 모습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눈앞에서 자기 가족이 자동차에 치어 죽어가고 있어도, 자기발톱에 낀 가시를 빼고 나서야 달려가서 가족을 도울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런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중의 한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는데, 나는 그분을 믿을 수 있느니 없느니 하고 있었습니다. 그 분이 주신 증거는 어떤 것입니까? 이렇게 보면 사실인 것 같고, 저렇게 보면 아닌 것 같은, 알쏭달쏭한 것입니까? 인류 중에서 예수님 외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애매한 증거를 주고 믿음을 요구하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교회에 다닌 지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역사적인 인물입니다. 현대 교육은 예수님을 세계 4대 성인의 한사람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순신 장군처럼 역사 속에 존재하는 실존인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어떻습니까? 구전설화 속에 나오는 동화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가 인정하는 명백한 사실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부활하신 후의 행적에 대하여는 수다한 증인과 역사적 기록들이 남아있습니다.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고린도 전서 15장 4~6절)
믿음이란 나의 의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한 일들을 바라보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나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주인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믿음은 신념과는 다른 것입니다. 잘 믿어지지 않는 것을 믿으려고 자기 의지로 애써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면 된다고 다짐하거나, 할 수 있다고 자기 최면을 걸어서 믿는 것이 아니고, 역사적인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셨습니다. 이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마인드 컨트롤이 아닙니다.
작심삼일이란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뜻을 세우되, 삼일을 가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흔히 의지가 약한 사람을 빗대어 사용하는 말이지만, 이 말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드물지만 우리 중 어떤 신념가는 작심 일년쯤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년 후에 그 사람의 의지적 믿음이 떨어지면 예수님의 십자가사건도 효력이 없어진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휴지조각처럼 떨어져 날린다 해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약속은 변함없이 살아있는 역사적사실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애매한 증거를 주고 믿음을 요구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확실한 증거는 부활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만큼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오직 죽었다가 다시 사신분의 말씀만이 진리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 되십니다.
우리의 믿음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그들은 교묘해서, 어떤 경우에는 우리 스스로 예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착각하게 하는 방법으로 우리를 오도합니다. 또 어떤 경우는 세상의 과학이나 문화적 지식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영적인 공격은 우리의 눈을 흐리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합니다. 먼저 바른 믿음을 위해서 기도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모든 사실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나를 위한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아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구원의 원리를 이해하고 있는 것과, 내가 구원받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지식으로, 혹은 원리를 이해함으로써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믿을 때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믿을 때 내가 구원받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죽음이 나를 위한 것이라는 데에 믿음의 동의가 잘 오지 않으면,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합니다.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 가운데 보내셨고, 나를 위해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의 믿음을 위해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주신 증거를 보고, 그 증거의 역사적 객관성을 인정하고 믿음으로써, 내 감정의 기복에 영향을 받지 않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나보다 더 빨리 더 견고한 믿음위에 서시기를 바랍니다.
구원을 방해하는 몇 가지 오해
나는 교회에 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분 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내가 교회를 다니려면 술 담배도 끊고, 난잡한 생활도 정리하고, 좀 깨끗한 사람이 되어야지 이렇게 추한 모습으로 어떻게 하나님 앞에 갈 수 있을까 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니면 과거에 죄를 많이 지어서 자기는 죄인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 갈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틀린 생각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의인이 있습니까? 물론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 스스로 부끄러움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들은 교회에 갈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이 옳은 태도입니다. 만약에 죄가 많아서 하나님 앞에 갈 수 없다면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는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인임이 분명합니다. 당신이 어떤 죄를 지었고, 지금 어떤 형편 가운데 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단언 하건대, 당신의 죄가 나보다 더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내가 더 죄 많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죄도, 어떤 추악한 모습도, 우리의 비겁함과 간사함도 모두 용납해 주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나의 추악함을 털어놓고, 나의 열등감을 털어놓고 도움을 구하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은 반듯한 모습의 보기 좋은 신사를 찾지 않으시고, 그 마음이 가난하여 하나님을 만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나와 당신 같은 분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시는 겁니다. 당신의 그 마음이 하나님을 만날 복의 증거입니다.
꼭 교회에 가야만 구원을 받는가? 예수님만 믿으면 되지 않는가?
맞는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꼭 나가셔야합니다. 우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 믿음도 생기는 법입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에 대하여 배워야 하지만 모든 개인은 반드시 예수님을 직접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찾는 모든 사람을 만나주십니다. 누구의 설명을 듣고 아는 지식이나 정보와는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합니까? 물론 교회로 가야합니다. 예수님은 벽돌로 지은 교회 건물 안에 계시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며, 그분께 경배하는 사람들 사이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곧, 예배드리는 마음과 시간과 장소 속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로 가야합니다. 나이트클럽이나 당구장에 가서 예수님을 만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만 신앙의 성장이 가능합니다. 교회에 가야합니다.
일단 복잡한 문제가 정리되어야 교회에 갈 수 있다.
교회에 가야겠다는 생각은 있는데, 현재 상황이 너무 복잡하고 여유가 없어서 일단 정리가 좀 되면 나가려한다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을 잘 모르기 때문에 갖는 생각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지름길입니다. 우리는 항상 긴급한 문제에 쫓겨서 중요한 문제를 놓치곤 합니다. 지금 내게 있는 어떤 문제보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나면 왜 모든 문제보다 예수님 만나는 것이 중요하고 급한 것인지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문제가 당신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면 그것은 마귀가 준 것이 분명합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막는 존재가 분명히 있습니다. 마귀입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세력이 있습니다. 하나는 당신을 예수님께 인도하려는 세력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막는 세력입니다. 오늘, 문제가 그 길을 막고 있다면 뿌리치고 예수님께로 나오십시오.
교회에 다니면 휴일에도 쉬지 못하는데
가족과 함께 쉴 수 있는 황금 같은 휴일을 빼앗기는 것 같아서 교회에 갈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현대인에게 휴식은 양보하기 어려운 가치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가는 것이 휴가 가는 것 보다 더 기쁘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우리 교회의 예를 들겠습니다. 우리교회는 춘천에 있습니다. 그런데 토요일 저녁이면
타지 차량들로 주차장이 모자랍니다. 우리교회는 토요일 저녁에 찬양예배를 드립니다. 이 예배를 사모하여서 서울, 수원, 원주, 강릉, 심지어는 인천, 동해에서 온 가족이 함께 춘천으로 옵니다. 중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토요일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한 두 가정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렇게 와서 일요일 오후 예배까지 드리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왜 그럴까요? 누가 시킨다고 그렇게 하겠습니까?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휴식보다 영혼의 휴식이 훨씬 달콤하기 때문입니다. 더 좋은 것을 알면 덜 좋은 것을 쉽게 포기하게 되는 법입니다. 하나님과의 데이트는 어떤 휴식보다도 기쁘고, 넘치는 새 힘으로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헌금이 부담스러워서 교회에 가기가 어렵다.
어떤 교회든 성도에게 헌금의 부담을 준다면 잘못된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은 창조주인데, 무엇이 아쉬워서 우리들의 돈을 요구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다 그분이 주신 것이고, 그분의 것입니다. 다만, 우리의 재물과 시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신앙고백으로 우리는 교회에 시간과 재물을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것은 자기중심의 진정한 감사와 기쁨이 없이는 무의미한 것입니다. 혹시라도 신앙생활을 시작한 초기에 헌금의 부담을 주는 교회가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부터 무엇을 받고자 하는 분이 아닙니다. 오직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고백을 기다리십니다. 그 분을 향한 사랑이 커지고, 그 은혜에 감사가 커지면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의 시간이나 재물을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누구 눈치를 살펴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 마음중심의 신앙고백만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만약 교회생활 초기에 헌금의 부담이 생긴다면 헌금에 대한 마음에 동의가 생길 때 까지 일단 무시하고 계속 교회를 나가십시오. 그 부담감은 사람이 주는 것이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교회를 가지 않는 것은 마귀를 기쁘게 하는 것이며, 헌금 부담과는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한 가치를 놓치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를 믿어도 구원은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천하인간에 구원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준 적이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십니다. 어떤 종교를 믿어도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척 위험한 생각입니다. 진리는 양보하거나 타협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배타적이라느니,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느니 하는 것은 모두 사람의 생각입니다. 이러한 사람의 생각을 틈타고 들어와서 마귀는
구원의 길을 방해합니다. 상생을 명분으로 구원의 길을 봉쇄하려는 것입니다. 모든 세상종교는 사람이 자기 손으로 만든 신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어떤 것을 얻기 위해 어떤 수고와 헌신을 통해 복을 비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사람을 찾아오신 참 신을 믿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사람인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은 정체성 자체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사랑의 하나님만이 사람을 찾아 오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기도 전에 나를 아셨고, 내가 사랑하기도 전에 먼저 나를 사랑하신 분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면 주겠다는 분이 아니고 조건 없이 자기의 생명까지 모두 다 주심으로 우리에게 현세와 내세의 모든 문제를 은혜로 해결해 주신 분입니다. 기독교는 그 분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할 때,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유일한 생명의 길인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좋아 보이거나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그럴 수 있습니다. 교회는 병자들이 모이는 병원과 같은 곳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의 치료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서 완전히 새사람이 된 경우도 있고, 어떤 사람은 그렇게 되어가는 과정 중에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밖에서 보기에는 교회에 다닌다고 하니까 다 똑 같은 교인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물론 오랜 시간 교회에 다녀도 진짜 복음을 모르거나, 심지어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인간은 종교적인 속성이 있어서, 단순히 주일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한다는 사실만으로 액을 방지하거나, 복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고 교회를 다니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일부는 사업적 목적에서 교회를 다니거나, 세련된 현대인의 교양과목 정도로 생각하고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세상 복을 받기위해 교회를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잘못된 출발점에 서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지, 우리에게 복을 주는 수단으로 이용되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 복이란 하나님을 잘 섬길 때 주어지는 결과의 일부일 뿐 그것을 목적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에게서 참 크리스찬의 모습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 이런 사람들을 보고 예수님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인생이 달라진 예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그런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입니다.
가족이 반대하는데
당신을 예수님께 인도하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막는 사람이 있습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후자는 마귀에게 이용당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경우는 가족이 반대합니다. 어떤 경우는 연인이, 친구가 반대합니다. 집안에 종교가 두개면 영적 분쟁이 생겨서 안 된다고도 합니다. 우리나라 가정치고 옛날에 불교가정 아닌 집이 어디 있으며, 유교의 영향 속에서 제사 지내지 않았던 가정이 어디 있습니까. 이 문제는, 가족 모두가 함께 망할 것이냐 아니면 내가 먼저 구원받고 우리가족을 살릴 것이냐 하는 절박한 문제입니다. 관계의 평화나 가정의 평화에 발목이 묶여 포기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치는 절대적입니다. 전능자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나를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사람의 신세를 져도 갚아야하는 것이 세상의 도리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으로부터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은혜를 값없이 받으라 하십니다. 당신에게 어떤 대가도 요구 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당신의 결신을 말리는 사람은 무슨 이유로 그렇게 필사적으로 당신을 만류합니까? 당신은 마귀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마귀의 도구노릇을 하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보아도 안 됩니다. 먼저 당신이 결단하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셔야합니다. 어떤 세력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당신을 끊어낼 수 없습니다.
착하게 살면 된다고 생각한다.
위험할뿐더러 맞지도 않는 생각입니다. 사람이 자기 기준을 가지고 스스로를 착하다고 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선과 악을 판별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뿐입니다.
앞에서 밝혔듯이 우리 마음속에 한 사람을 미워하거나, 음심을 품는 마음만 가지고 있어도 우리는 살인한 자요, 간음한 자입니다. 그 대가로 목숨을 내 놓아야 하는 죄인인 것입니다. 사람의 윤리나 도덕적 행위가 우리를 심판으로부터 보호해 준다는 믿음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착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착하고 의롭다는 생각은 하나님 보실 때 심히 악하고 가증스러운 태도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추악한 죄인임을 인정하고 그분의 긍휼을 구해야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의지하는 것만이 우리를 죄의 심판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부족한 것이 없다는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물을 의지하는 부자는 하나님 앞에 구할 것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죽음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모든 것을 자기의 재주와 복으로 얻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물이 없어도 살 수 없고 공기가 없어도 살 수 없습니다. 이런 공동재화에 대한 출처를 거론하지 않고라도, 사람이 자기의 가진 조건으로 하나님의 필요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가소로운 일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당신에게 죽음이 찾아올 것입니다. 죽음은 당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당신을 분리해 낼 것입니다. 당신이 만족해하던 어떤 것들도 당신에게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재물이든, 지위이든, 명예이든, 가족이든, 당신의 뛰어난 능력이든 말입니다. 당신의 풍족함과 만족함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을 방해 한다면 그것들 모두를 버리고라도 당신은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것이 사는 길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며칠 전 친구 어머니의 영결식에 다녀오면서 본 광경입니다. 춘천 시립 화장장에 고급 리무진 장의차 한대가 들어왔습니다. 리무진에서 내려진 고급목관은 순서에 따라 화장로에 넣어졌습니다. 두 시간 후, 시신을 모셔 온 리무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그만 사각상자 하나가 유족의 손에 들려졌습니다. 그 상자는 리무진과는 아무 관계도 없어 보였습니다. 주차장 한구석에 세워진 리무진 장의차가 왠지 휑하게 보였습니다. 마치 우리 인생을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쓸쓸했습니다.
당신이 만약 부자라면 고민해야 합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만족이 재물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두어 지도록 당신은 하나님께로 마음의 중심을 돌이켜야합니다. 아직 하나님을 모르신다면, 당신은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얼마나 부족한지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마치면서
탈고 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이 새로워짐을 느낍니다. 새삼 저의 삶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확인할 수 있어서 오히려 제 심령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참 좋은 분이십니다. 속이 좁고, 비틀어지고, 자기 잘못에는 뻔뻔하면서 남의 잘못에 대하여는 민감하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많이 주고, 가난한 자를 착취하고, 성적으로 음란하고, 우상을 섬겼으며, 하나님을 원망하기까지 했던 나를 벌하지 아니하시고, 용서를 넘어 구원하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큽니다. 죄가 클수록 은혜가 크다고 하셨는데, 나 같은 경우를 두고 하신 말씀인가 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은 이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이 더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리십니다. 나는 이글이 당신의 결신에 도움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나의 행위가 어떤 결과로 나타나기를 원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시고, 당신이 구원의 은혜가운데로 돌아오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내가 알기 때문에 바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나하고 개인적 친분이 있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나와 당신을 만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나로 하여금 이 글을 쓰게 하시고, 당신이 이글을 읽도록 하신 이도 하나님이신 것을 고백합니다.
글쓰기를 마쳐놓고서 며칠간 인쇄를 망설였습니다. 혈연 중에 내가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마음을 정리한 후에 책을 인쇄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생각하다가, 마귀가 기뻐하는 생각인 것 같아서 그대로 인쇄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오늘 이글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한 당신에게 부탁합니다. 나의 마음에 하나님의 마음이 부은바 되어서, 내가 모든 영혼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사랑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또, 나의 행실을 보고 예수님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그분과 깊은 교제 가운데로 들어가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나도 당신의 신앙성장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좋으신 하나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글이 하나님의 사랑을 만분의 일이라도 전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이글을 읽기 시작한 자마다 끝까지 읽게 하시고, 그 영혼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하나님께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주실 것을 기도합니다. 돌아오는 자마다 하나님 사랑의 증인이 되게 하여주시고, 하나님의 높으신 덕을 널리 선전하는 일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신앙 상담을 원하시는 분은 연락을 주십시오.
좋은 상담자를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2005년 10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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