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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직자는 무엇이고, 평신도는 무엇인가?

 

역시 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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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는 학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사다]

오늘날 교회의 목사 자격은 어떻게 획득하는가?

중세 때 수도원 출신에 교황의 서품 여부였다면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신학교의 졸업과 안수 여부로 가름한다. 다시 말해서 신학교를 졸업해서 일정기간이 지나면 목사안수 받을 자격을 받게 되고 안수 후 그는 정식으로 목사가 된다. 그때부터 그는 소위 성직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엡 4:11-12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위의 성경에 의하면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는 사람들에 의해서 뽑히고 임명되는 직분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그 원하시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사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러한 은사를 신자들에게 주심은 신자들로 하여금 성도를 완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려 하심이다.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가 하나님의 은사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하나님의 은사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뜻인데 이것을 인간의 제도로 양산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예를 들어 어떤 기관에서 자기들이 만든 어떤 교육과정을 마쳤다고 해서 분별없이 사람들에게 '사도'자격을 수여한다면 나는 주저할 것도 없이 그 기관을 '사이비'이라고 부르겠다. 그것은 분명히 비성경적이다. 사도 바울도 항상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말했다.

갈 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바울은 자기가 사도가 된 것이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렇다! 하나님의 은사는 사람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마찬가지 원리를 목사나 교사나 복음전하는 자에게 다 적용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목사나 교사로 세울 때는 그가 어떤 과정을 마쳤는가보다는 그에게 그러한 은사가 있는가를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다. 신학교의 교육과정은 더 나은 질적 향상을 위해서 필요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오늘날의 신학대학이 목회자들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교육기관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다. 그것은 많은 유익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신학대학이 자격을 수여하는 기관이 되는 것에는 절대적으로 반대한다. 신학대학은 교육기관이지 자격을 주는 기관이 아니다. 결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세상사람들은 그러한 가시적인 제도가 필요하고 졸업장과 면허증들이 중요한 기준이 되나 교회마저 그러면 안 된다. 적어도 교회는 세상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무리들이 아닌가? 그런데 어찌 귀머거리, 장님처럼 인간적인 제도를 만들어 놓고 졸업장과 시험점수를 기준으로 자격증을 준 단 말인가? 자격은 스스로 갖추게 하라. 다시 말하면 그가 자신의 은사대로 봉사하다 보면 그의 봉사의 열매와 사역의 결과들이 그의 자격을 말해줄 것이다.

은사는 봉사의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후부터 그의 사역은 시작된다. 안수 받음으로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안수의 의미는 그러한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인준하는 것일 뿐이다. 다음 성경을 살펴보자.

행 13:1-3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안디옥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다고 했다. 안디옥 교회에서 바울은 선지자나 교사로 인정되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교회에서 드러난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성령께서 말씀하신 대로 따로 세우라는 것을 순종하기 위해서 안디옥교회의 형제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안수했다. 바울은 그때 사도직을 임직받았는가? 그렇지 않다. 안디옥 교회의 안수는 단지 따로 세우심에 대한 주님의 명령을 교회가 순종하고 파송하기 위한 절차인 것이다. 바울은 종종 사도직에 대한 도전을 받았는데 자신의 사도됨을 증명할 때 위의 안수 사건에서 근거를 찾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바울이 자신이 사도임을 어떻게 강변했는가를 살펴보자.

고전 9:1-2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이 말씀을 보면,

사도의 표로 그는 두 가지를 제시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자신이 예수님을 보았다는 것과 그리고 자신의 사역의 열매들이다.

그런데 이 주장에서 예수님을 보았다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서 사람들에게 증명할 길이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의 사역의 열매는 확실한 객관적 증거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주님께서 자신을 사도로 임명하셨음을 확신하고 있다. 어떤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 때문에 사도가 된 것이다. 사도의 자격의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주님으로부터 나왔느냐 아니냐이다. 그런데 그러한 사도 바울의 간증은 너무도 개인적인 것이라 다른 사람이 확인할 길이 없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의 표 된 것으로 그의 사역의 열매와 결과들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바울의 편지에서도 발견된다.

고후 12:11,12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내가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사도의 표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 - 다시 말하면 그의 사역의 결과와 열매를 사도의 표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고린도 교회 형제들에게 있어서 바울의 사역은 바로 사도의 사역이었다. 고린도교회를 개척하고 그들을 양육하고 감독을 세우는 일을 누가 했던가? 바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도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고린도 교회 형제들에게 있어서 바울은 분명히 사도였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고전 9:2)의 말씀이 우리에게 은사가 무엇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사람이 사도가 되려면 첫째 분명히 주님으로부터 위임받아야 하며 그것이 증명되기 위해서 그의 사역의 열매들을 보면 된다. 만일 사도가 되기 위해 당시 예루살렘교회에서 교육받은 증거나 베드로의 인증 같은 것을 요구하였다면 얼마나 우스웠을까? 그리고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4년간 교육받으면 자동으로 사도로 임명되는 제도를 만들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다면 교회는 급속히 성령의 역사가 멈추었을 것이다.

자, 이제 우리는 처음의 주제로 돌아가자. 사도가 주님으로부터 나온 것처럼 선지자도, 목사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된다. 절대적으로 그렇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목사의 은사를 주시는 것이고 그러한 은사를 받은 사람이 목사 노릇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진실로 하나님께로부터 목사의 은사를 받았는지 아닌지는 그의 사역의 열매가 나타내 줄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은사를 받았는지에 대해 생각도 안 해보고 단지 등록금을 착실히 내고 학교에 꾸준히 출석하고 신학시험에 낙제하지 않고 무사히 통과했다는 이유만으로 목사 자격을 주는 것이 과연 성서적이라고 생각하는가?

언젠가 극동방송에서 어느 조그마한 섬에서 사역하는 분의 간증을 듣게 되었다. 그 분은 원래 교회 장로였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께 헌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남들이 가기 꺼려하는 그 섬에 자원해서 가서 온갖 고생을 무릅쓰고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분은 안타깝게도 학력이 초등학교 중퇴였다. 그래서 그는 목사가 되지 못하고 항상 전도사로 불렸다. 그가 목사 자격을 따기가 얼마나 어려웠을는지는 짐작할 수 있다. 다행히도 우리나라에는 정규대학 코스가 아닌 무인가 군소 신학교가 많이 있어서 거기서 그것도 통신 강좌로 과정을 마쳐서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어려운 형편에 입학금, 등록금을 내면서 다녔을 것을 생각해보라. 나는 더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 자신이 비로소 목사 자격이 생겼다고 자만하는 것이다.

내가 확신하건대, 위의 섬에서 목회 하던 장로는 신학교 다니기 전에 이미 목사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그렇게 양들을 위해 헌신적인 사람이 어찌 목사라고 할 수 없겠는가?

만일 오늘날 신학대학이 순수한 교육기관으로 만족했더라면 교회는 훨씬 큰 유익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학대학이 자격을 수여하는 기관이 됨에 따라 신학대학을 못 간 사람은 사역할 길이 막혀버렸고 반대로 신학대학을 마친 사람은 은사에 관계없이 목사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이것은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학력이 낮은 사람은 목사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하게 되었고, 반대로 형편없는 인간도 목사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하게 되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한번 목사 안수를 받으면 그가 정치를 하든, 방송국 사장을 하든 계속 목사로 불리는 것이다. 그 이유는 오늘날 목사는 박사나 석사처럼 학위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이다.

종교 개혁자 루터의 말을 다시 인용해본다면,

그러므로 크리스천들 가운데서 한 사제는 하나의 관리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가 직무를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우위권을 가지나 파면되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농부나 시민이 된다. 따라서 의심 할 여지없이 한 사제가 파면을 당하면 그는 더 이상 사제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이 '지울 수 없는 성질'을 조작해 놓고 파면된 사제도 단순한 평신도와는 좀 다르다고 지껄인다. 사제는 결코 평신도가 될 수 없다거나, 혹은 사제는 사제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몽상까지 한다. 이런 모든 것은 단순히 공론이나 인간이 만든 규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 목회의 일을 멈추면 그는 더 이상 목사가 아니다. 양을 돌보는 일을 버리고 공장의 기계를 만지면 우리는 그를 더 이상 목동이라고 부르지 않고 엔지니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반면에 우리가 자식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아버지가 되듯이 돌보는 교회가 생기면 그는 목사가 되는 것이다. 목사는 하나님의 은사지만 그것에 걸맞는 사역이 이루어 질 때 그는 진정한 의미의 목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둘 중에 하나만 미비해도 그는 문제가 될 것이다. 즉 목사의 은사 없이 목회를 하는 사람이나 목사의 은사는 있지만 목회를 하지 않는 사람이나 둘 다 진정한 의미에서 '목사'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신학대학이 진정한 기능을 발휘하려면, 먼저 세상 제도권 대학이기를 포기하고 학위도 주지 말고 참으로 제자양육 기능을 가진 순수 교육기관이 되어야 한다. 졸업해도 목사 자격은 주지 말아야 한다. 생각해보라! 그가 졸업한 것에 대해서는 확실한 증명을 서줄 수 있지만 그가 목사의 은사가 있고 자격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증을 서줄 수 있단 말인가?

신학교는 더 이상 자격을 얻기 위해서나 직업을 갖기 위해서 들어가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된다.

목회 하다보면 자신이 지식이 없고 영적으로 빈약함을 느끼게 된다. 그런 사람들이 언제라도 들어가서 교육받을 수 있는 그런 곳이 되어야 한다.

만일 신학대학에서 목사 자격을 주지 않으면 어떤 일이 생길까? 아마 어떤 사람은 대 혼란이 생길 것을 상상한다. 아무 사람이나 목사가 될 것이고 교회는 어중이떠중이가 목사 입네 하고 설쳐 댈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그 상상은 틀린다. 결코 그럴 수 없다. 오히려 신학대학이라는 제도가 없으면 사람들은 자격을 보지 않고 열매만을 보게 될 것이다. 그에게서 은사가 발견되지 않으면 그의 사역은 자연스럽게 소멸되고 그는 다른 일을 찾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목사'가 되는 것이 돈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희생이 따르는 것임을 알게 될 때 거짓 목사는 더 이상 설 곳이 없어지는 것이다.

나는 직장에서 신우회 활동을 20년 가까이 하고 있다. 그런데 가끔 신학대학을 나온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이 신학대학을 나왔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신우회에서는 그를 성경공부 리더로 세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할 적이 있다. 아마도 직장에서 그러한 경험을 한 사람은 여럿 있으리라 본다. 신학대학을 나왔다는 것이 그가 목사나 교사의 은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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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와 성직자의 구분은 성경적이 아니다]

오늘날 교회 내에는 평신도와 성직자 두 계급이 있다. 이 두 계급은 결코 좁혀지려야 좁혀질 수 없는 간격으로 벌어져 있어 평신도들이 성직자의 사역들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성직자들은 특별한 위치의 상징으로 '하나님의 대리인' 또는 '하나님의 종'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성경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이 이것이 비성경적이기 때문에 그러한 구분을 철폐시켰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많은 사람들이 고등학교에서 세계사 시간에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배운 '만인사제론'과 같은 것 등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종류의 이야기를 새로운 것으로 느끼고 있다.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닌 아주 오래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새삼스럽게 주장하는 것은 이러한 진리를 우리가 망각해버렸기 때문이다.

종교 개혁자 루터의 말을 들어보자.

로마교도(천주교도)들은 퍽 교묘하게 자기들 주위에 세 가지 담을 쌓아놓고 그 뒤에서 이제가지 자신들을 방어해 왔다. 그리하여 아무도 그들을 개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것이 전 기독교계를 통하여 번진 무서운 부패의 원인이 되어 왔다.

먼저, 첫째 담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자.

교황, 주교들, 사제들 및 승려들을 '영적 계급'이라고 부르고 군주들, 영주들, 직공들 및 농부들을 '세속적 계급'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혀 조작적인 것이다. 실로 이것은 순전한 거짓과 위선이다. 아무도 여기에 놀라서는 안 된다. 이것은 말하자면 모든 크리스천은 참으로 '영적 계급'에 속하며 그들 가운데는 직무상의 차별 이외에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우리는 다 한 몸이나 모든 지체가 다른 지체를 섬기기 위하여 각기 자기대로의 임무를 가진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우리가 다 한 세례와 복음과 신앙만이 우리를 '영적'으로 되게 하고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교황이나 주교가, 기름을 붓고 체발하고 서품을 하고 봉헌례를 하거나 또는 평신도와는 다른 옷을 입는 일은 위선자와 조각물들을 만들 것이다. 이런 것은 그리스도인이나 '영적'인 인간을 만들지 못한다. 우리는 다 세례를 통하여 사제로서 성별을 받는다. 이것은 사도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2장에서 '너희는 왕같은 제사장이며 제사장 같은 나라이다'(9절)라고 말하고 또 계시록에 '당신은 당신의 피로써 저희를 제사장과 왕들이 되게 하셨나이다.(계5:9-10)라고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다.

.....중략 .....

그러므로 크리스천들 가운데서 한 사제는 하나의 관리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가 직무를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우위권을 가지나 파면되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농부나 시민이 된다. 따라서 의심 할 여지없이 한 사제가 파면을 당하면 그는 더 이상 사제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이 '지울 수 없는 성질'을 조작해 놓고 파면된 사제도 단순한 평신도와는 좀 다르다고 지껄인다. 사제는 결코 평신도가 될 수 없다거나, 혹은 사제는 사제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몽상까지 한다. 이런 모든 것은 단순히 공론이나 인간이 만든 규정에 지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에서 그들이 말하는 바 평신도와 사제, 군주와 주교,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사이에는 실제로 직무와 일에 관한 차이 이외에 아무 차이도 없다. 그들에게 '신분'에 관한 차이는 전혀 없다.

이것은 1520년도에 쓴 글임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자의 후예라고 자처하는 현대의 우리가 읽어도 충격이 된다. 위의 글에서 사제란 천주교의 신부를 가리키는 바 개신교에서는 성직자로 불리는 목사와 같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가 무엇을 주장하는가? 사제와 평신도와의 근본적 신분의 차이는 없다는 것이다.

목회직은 교회 내에서 그가 맡게된 독특한 역할일 뿐이지 특별히 다른 직업과 구분된 거룩한 직업이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칼빈은 노동은 신성한 것으로 모든 직업은 하나님께로 왔음을 주장하였다. 의사가 사람의 육체를 다루고 학교 교사가 사람의 정신을 다루고 있다면 목사는 영혼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다 이 사회에서 필요한 사람들이며 거룩한 직업들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목회직이 그들보다 영혼을 다룬다는 면에서 훨씬 더 보람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우리는 목사가 대제사장이고 평신도들은 백성에 불과하다는 사고방식이나 심지어 어떤 사람처럼 예배당이 성전이며 강대상이 지성소라는 엉터리 사고방식을 버려야 한다. 이제 우리는 교회 내에서 평신도와 성직자를 구별하는 것이 성경적이 아님을 잠깐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구약에서는 백성들과 제사장들 간의 정확한 구분이 존재했지만 신약에 와서는 그러한 구분은 폐지되었다.

사도 베드로는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선언하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왕같은 제사장들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 성구는 루터가 '만인 사제론'을 주장하게된 근거 구절이기도 하다.

사도행전을 보면 오늘날 평신도라고 불릴 수 있는 집사 빌립이 세례를 주기도 하고(행 8:12) 집사 스데반이 전도사 역할을 하기도 했다(행 6:10-7:60).

사도행전에 의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제자로 불렸다(행 6:1). 이제 막 예수님을 믿게된 사울이나 (행 9:26), 오래된 신자들도 제자라고 불렸다(행 9:28). 그리스도인들 중에 특별한 사람만 '제자'라고 불리질 않았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제자이며 마땅히 주님을 따라야 한다. 오늘날 일부 목회자들이 자신을 '주의 제자'라는 용어보다는 '주의 종'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목회자들이 스스로 '주의 종'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니며 비성경적인 것도 아니다. 매우 성경적이다. 바울도 많은 서신서에서 자신을 '예수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들이 스스로를 '주의 종'이라고 표현하는데 우리가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주의 종'이라는 용어가 평신도와 구분되는 특별하고도 존귀한 신분임을 나타내는 용어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성경에 의하면 '주의 종'이라는 용어를 스스로 자신이 사람에게 존경받을 만한 특별한 위치임을 표시하는데 사용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하나님의 종'이라는 용어는 단지 자기를 낮추고 스스로 주님께 복종의 삶을 살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이 즐겨 사용했을 뿐이다. 그런데 오늘날 어떤 평신도가 자신을 가리켜 '주의 종'이라고 한다면 그는 매우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교만한 자로 정죄될 것이다. '종'이라는 단어가 겸손의 표시가 아니라 특권의 표시가 된 것은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그만큼 '종'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왜곡되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주님(Lord)'이라고 부른다는 사실 자체가 자신이 '종'임을 스스로 자인하는 것이 아닌가? 자신이 종임을 자인하지 않고야 어찌 예수님을 '주님(Lord)'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만일 자신이 예수님의 종임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시인한다는 사람은 결코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종의 개념을 잘 설명하기 위해서 다음의 성구를 살펴보자.

롬 6:16-19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내가 누구에게 순종하기로 하느냐에 따라 누구의 종이 되는가가 결정되는 것이다. 내가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는 순간 나는 주님의 종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결심 없이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롬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예수님을 주(主)라고 시인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주의 종'이라고 하는 것이 마땅치 않는가? 오히려 주의 종이라는 말을 특별한 사람에게만 사용함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은 주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적당히 살아도 되는 사람으로 오해하지나 않는가? 더군다나 성경에 의하면

시 119:91
천지가 주의 규례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연고니이다

라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심지어 모든 만물이 주의 종이라고 선언한다.

모든 만물이 주님의 규례를 지킴으로 주의 종이라고 불린다면 더더욱 주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주님의 종'이라고 말하는 것이 어찌 이상한 일이란 말인가?

나는 그리스도인들이면 전부가 스스로를 '주님의 종'이라고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은 참으로 헌신된 사람이라는 자랑의 의미로써가 아니라 자신은 하나님을 거스를 수 없고 순종해야만 한다는 겸손의 의미로써 사용되어야 한다.

자신을 주님의 종이라고 부르는 자세는 주님을 경외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물론 우리는 전적으로 주님께 헌신된 사람을 가리켜 참된 의미로서의 종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성직자들은 주님의 종이며 평신도들은 주님의 종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주장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평신도들도 헌신된 사람들이 많이 있다.

나는 이러한 혼동이 다 평신도와 목회자의 구분이 처음부터 존재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생겼다고 믿는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은 교회 내에서 없어져야 한다.

다음의 글은 많은 참고가 될 것이다.

오늘날 평신도를 가리키는 lay(레이)라는 말이 '무식하다','학문분야에서 비판할 자격이 없는 자'란 뜻으로 안수 받은 교직자를 제외한 일반 신자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으나 이것은 본래 성경적인 의미와는 대단히 거리가 멀다.

본래 평신도라는 말 레이(lay)는 헬라어의 laikos(라이코스)에서 나와 라틴말의 라이쿠스(laikus)가 된 말인데 이것은 성경에 자주 사용되고 있는 라오스(laos)와 같은 뜻이다.

즉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뜻이다(벧전 2:9,10). 이것은 어떤 백성 안에 선택된 특권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 즉 하나님 백성의 총체인 믿는 자의 공동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적인 의도와는 다르게 교회가 조직화되고 체계화되면서 성직자와 일반신자를 구분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로마의 클레멘트는 벌써 A.D. 95년에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 속에서 그런 뜻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제 3세기 중엽으로 접어들면서부터는 구약적 제사장과 백성을 구분하는 계급적인 용어로 전락하게 되었다. 특히 로마교회의 지도 밑에서 성례전과 수도원 제도의 잘못된 발전에 따라 '그리스도인의 계급에는 둘이 있다'고 잘못 생각하게 되고 결국 더 나아가 저 유명한 익나티우스의 '교회는 감독과 그 성직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라고 하는 사상을 합법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본래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뜻하던 교회의 주체인 이 라이코스(laikos)들이 성직자들에 의해서 완전히 교회의 객체가 되어 교회 밖으로 쫓겨나서 '세속에 속한 무식한 무리'로 변질되어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었고 성직자들만이 교회요, 교회의 주체로서 거룩한 그룹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루터의 저 유명한 만인 사제론을 익히 알고 있다. 이를 통해 원리적으로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이 폐지된 것이다. 루터는 이를 그의 유명한 크리스챤 귀족에게라는 성명서 가운데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제사장들이며, 사무에 관한 일을 제외하고는 그들 사이에 하등의 구별이 없다'라고 선언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우리가 시인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러한 위대한 만인 사제론이 종교개혁 이후에도 교회 안에서 실제적, 구체적으로는 별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혁자들의 원리는 신학적인 강연의 주제로서는 대단한 힘을 발휘했었지만 여전히 교직자는 전체로서의 회중이 되기보다는 지배적인 통치적 위치를 차지했어야 했고 어쩔 수 없이 새로운 - 중세적은 아니나 원리대로 완전히 개혁되지 못한- 형태의 성직자 계급이 형성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었다.

헨트릭 크레머는 A Theology of the Laity라는 책에서 개혁자들의 원리가 개신교에서도 완전한 형태로 적용될 수 없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째, 이미 교회안에 중생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음으로 성도들 속에 참된 하나님의 제사장들(거듭난 자)과 아닌 자들을 구별한 수가 없었다는 점

둘째, 교인들의 영적인 미숙 때문에 평신도들이 그들이 되찾은 원리에 따라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는 점

셋째, 순수한 말씀을 전파하는 설교자를 길러야하고 현실적인 필요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계급인 설교자격자라는 특수 그룹을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

그리하여 그 후 발전한 교회 조직은 일반 성도들에게 적극적인 책임을 갖도록하는 위치를 여전히 줄 수가 없었고 평신도들은 비록 종교개혁 이전과는 다른 정황 속에 있다 할지라도 여전히 교회의 새로운 객체로서 목회와 통치(정치적인)의 대상으로 머물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한다.

이 긴 인용문을 반드시 꼼꼼히 읽어보기 바란다.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하고 성경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즉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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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가난한 우리 교회
부활의집에서 노숙자 형제들과 함께 살며 예배하며

 
▲ 부활의집에서 노숙자 형제들과 함께 드리는 예배. (사진제공 김홍술)
우리 교회

세상 많고 많은 교회 중 우리 교회

세상 많고 많은 교회 중 우리 교회의 이름은 애빈교회(愛貧敎會)
가난한 자를 사랑하는 교회인가
가난한 교회인가
아님, 둘 다인가

부산의 낙동강 자락이 내려다보이는 구포 산기슭 아담한 기와집 한 채
정원을 꽉 매운 나무들과 탱자나무 담장을 너머
잘 맞지 않는 찬송 소리가 산기슭을 타고 내려온다

주일날이 되면
부활의 집의 하루 변신
세상에 아무도 찾아주지 않고 찾아 갈 곳도 없는 20여명 남짓 형제들이
아침부터 부산을 떤다

마당도 쓸고
마루도 닦고, 방도 닦고
창문도 활짝 열어 퀴퀴한 냄새를 털어낸다

가로 세로 아홉 자 열 자, 방 두 칸을 터놓은 침실 겸 거실이
마침내
거룩한 예배실이 된다

방 중앙 20인치 텔레비전은 오늘은 쉰다
그리고 그 위에 보라색 휘장을 덮고 작은 십자가를 올려놓는다
그 앞 아래에 작은 밥상 위에는
떡 조각과 포도주 잔을 올려 모시고
흰 천으로 덮어놓았다

금곡동 영구임대주택에 나가 사는 한동호 전호성 형제님은
방안에 가족들 틈에 끼어 준비 찬송을 이끌어 본다
장전동에서 일찍 도착한 김순자 자매님은
물 아까운 줄 모르고 연방 걸레 빨고 또 닦으면서
가는귀가 먹어서인지 예배 준비 찬송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이윽고,
중풍 장애인 김태일 형제님이 목사와 손잡고 도착한다
그 뒤로 사모님과 목사님 모친 김영예 집사님이 따라오시지만
벌써 5주째 이덕순 할머니는 노환이 깊어져 오시지 못한다

예닐곱 평 방안 가득 빽빽한 사이사이를 헤집고
제 자리에 두루마기 차림으로 좌정한 목사는
고장난 찬송 반주기지만 정성스럽게 만지며
예배를 준비한다

예배 시작 알림의 징 소리 낮게 울리면
일제히 엎드려 경배를 하고
1984년 세계교회의 리마 예식서와 우리 식을 가미한 순서지에 따라
목사는 세례 여부를 막론하고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준다

예배가 끝나자마자
썰물처럼 뒷마당으로 나가는 부활의 집 가족들
일제히 연기를 뿜어댄다
거룩한 예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누렁이 '복실이'와 흰둥이 '풍아'는 그저 좋아 껑충거린다

부엌에서는 주방장 김영태 형제님이 바쁘다
뽐낼 수 있는 특별 요리로 기대가 된다
작은 방에서는 구장서 형제님이 사모님과 헌금을 계수한다
둔탁한 손으로 천 원짜리를 세며 돋보기 안경 너머 장부에 적는다

배추 잎도 제법 있는 모양이다
지난주간 보건복지부로부터 월급이 나왔으니
아마 몇 형제분은 십일조를 했나 보다

원불교 교당에서 법회에 참석하고 오신 최경원 할아버님이
식사 시간 맞춰 어김없이 올라 오셨고
우리는 함께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육이오 전쟁 때 만주에서 단신으로 내려와
54년을 일구고 지켜온 집을 내주고 단칸방에 홀로 나가 계신다
기쁨으로 한 가족처럼 한 식구가 된 여든 셋의 노신사는
부활의 집 한 분 한 분에 '공경'과 '정성'에 변함이 없다

차 한 잔도 끝나고
거실에는 다시 텔레비전 소리가 흐르기 시작한다
한 분 한 분 집을 나선다
한 봉지 한 봉지 싸주면서 인사를 나눈다
주일만은 목사도 빨리 떠나야 모두들 다리를 뻗고
자유(?)를 만끽하겠지

2004. 4. 4 고난주간 수행을 떠나며
가난공동체 www.homeless.name



2005-12-12 15:11:02
909 번 읽음
  총 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1. jtiger '05.12.12 9:13 PM 신고
    좋은 종교인분들도 많습니다. 좋은일도 많이하시구요.

    다만, 계중에 이상한 종자들이 있다는거죠.

    이 종자들의 짓꺼리때문에 도매급으로 넘어가는거죠.ㅡ;

    기독교의 참뜻이요.. 기독교 스스로도 바꿀껀 바꾸는 특단의 조취가

    같은 교인끼리, 같은 선생끼리, 같은 동료끼리...

    공동체의 꼭 필요한 덕목이지만 잘못된건 칼같이 파버리는 결단이 필요해요.

    안그럼 영원히..

    우리나라 발전을 기대하기 힘들겠죠.;ㅡ; ↓댓글에댓글
  2. 2. 송이아빠 '05.12.12 9:20 PM 신고
    저는 이말씀에
    정말 공감합니다. 저도 목회자를 준비하고 있지만 제가 신학을 배우고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보다 제 사역에 깊이를 더하고자 함이지 신학교를 나왔다고 자동으로 목사가 되는 지금의 제도는 분명 성경적으로 고쳐야 합니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보완하기 위해 지금의 강도사 제도(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안수받기 전까지 일정기간을 복음전파를 위해 훈련받는 기간)가 신설되었습니다만...여전히 군소신학교의 무분별한 목회자 안수는 전체 목회자의 자격과 자질을 저하시키고 삯군 목자들을 양산하는 온상이 되고 있습니다. 저도 이 문제는 너무나 심각하다고 생각합니다.

    님의 의견이 정말 교회지도자들에게 깊이 인식되기를 바랍니다. 저또한 그렇게 노력하고자 합니다. 목회자는 한 영혼을 사랑하여 한사람이라도 더 구원받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에 신경을 써야지 헌금이니 건축이니 다른 것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 이미 목자가 아닌 사업가나 장사꾼이 된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의 개혁의 적어도 80%이상은 참다운 목회자를 배출할 수 있는 제도적인 개혁에 달려 있다고 해도 저는 과언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이것을 정말 할 수 있다면 교회는 정말 말씀대로 대부분 회복될 거라고 믿습니다. 저도 이 두꺼운 기득권의 벽을 얼마나 허물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만... 적어도 성경적인 목회자상을 만들어나가는데 노력하려 합니다. ↓댓글에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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