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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집] 도올특강 - 역사를 말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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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폭도대토벌작전 南韓暴徒大討伐作戰 (호남의병대학살사건)

송강 정철

인백 정여립

 

 

일제의 만행과 소위「남한대토벌작전」

 

  군대 해산에 앞서 일제는 1개 여단의 병력과 6만정의 총기를 들여 왔다는 것은 전술한 바인데 그 막대한 병력을 하세가와(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가 총지휘하여 우선 북부수비관구(사령관 중장 오까사끼, 강기생삼(岡崎生三))와 남부수비관구(사령관 소장 쓰네요시, 항길충도(恒吉忠道)로 나누고 북부에는 경성(鏡城)·회령(會寧)·북청(北靑)·함흥(咸興)·원산(元山)·강릉(江陵)·서울·개성(開城)·평양(平壤)에 사단 또는 연대 및 대대 본부를 두고 소관 각처에 소대 또는 분대 단위로 병력을 배치하고 있었다. 또 남부는 대전(大田)·조치원(鳥致院)·대구(大邱)·전주(全州)에 주력 부대를 주둔시키고 관하 각처에 병력을 분산 배치하여 의병전쟁에 맞서고 있었다.


  그 외에도 권모술수에 능숙한 아까이시(명석원이랑(明石元二郞))가 거느린 헌병 조직이 있었다. 위의 배치는 1907년 12월말 현재의 것이다. 1908년 5월말 현재는 의병 전열에 따라 그들의 배치도 변경되고 있었다. 즉 북부는 다시 동부수비구(사령관 소장 마루이, 환정정아 (丸井政亞; 함흥주둔) 서부수비구(사령관 소장 오노, 소야사실(小野寺實; 평양) 김화수비구 (사령관 대좌 요꼬야마, 횡산신치(橫山新治; 김화) 경성위수구(사령관중장 오까사끼, 강기생 삼(岡崎生三; 서울) 충주수비구(사령관 대좌 하시모또. 교본삼랑(橋本三郞; 수원)로 구획 되 었으며 또 남부는 보병 제 47연대(대장 대좌 이꾸다, 생전목신(生田目新))가 안동(安東) 상 주(尙州) 대전(大田) 수비구로 나누어 그곳에 대대를 배치하였고 보병 제14연대(대장 대좌 기꾸찌, 국지주전(菊池主殿)가 대구(大邱) 진주(晋州)에 수비구를 두고 있었다.


  그리고 전주 (全州)에는 임시파견 기병대가 배치되어 있었는데(대장 소좌 가따노, 편야성태랑(片野誠太 郞)) 이는 대개 전라북도 지방을 담당하고 전라남도 지방은 진주(晋州) 수비구 관할로 되어 있었다. 즉 진주 수비대대는 구례(求禮)·남원(南原)·함양(咸陽)에 각 중대를 배치하고 순 천(順天)·광천점(廣川店)·옥과(玉果)·곡성(谷城)·탑촌(塔村)·하동(河東)·원전(院田)·덕 산(德山)·단성(丹城)·안의(安義)·도천장(道川場)·장수(長水)·임실(任實)·오수역( 驛)에 소대 또는 분대 병력을 두고 있었다. 이 당시 제14헌병대(대장 소장 아까이시, 명석원이랑(明石元二郞))는 위의 수비대와 별도 로 약 2천명의 헌병과 6천명의 보조원을 거느리고 전국에 493개소에 분견소를 두고 있었다. 여기의 보조원은 거의 일진회원 출신이며 후일 일제하의 경찰로 성장한 반민족 행위의 선두 부대인 것이다.


이와 같은 일본군의 배치는 기본적 편대에 불과했고 의병부대의 이동에 따라 그들도 변하 고 있었다. 또 이외에도 경찰 조직이 있어 그들의 군경이 동원된 것이 1907년 8월부터 12월 까지 5개월에 4만4천216명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의 앞잡이 10만 명의 일진회원들이 가 세하고 있었다. 특히 일진회원들의 망동적 활약은 의병 활동을 결정적으로 방해하였다. 당시 일제도 그들의 탐정활동에 크게 의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가 의병 탄압의 방략으로 간 추린 요목을 보면 다음과 같았다.

 

   (1) 경비전화를 증설하여 통보 연락을 긴밀히 할 것.
   (2) 밀고자의 장려 및 폭도 토벌 경찰에 대하여 공로가 있는 자에게 중한 상을 준다.
   (3) 매년 1·2회 각 기관의 연합 대수색 대토벌을 실행한다.
   (4) 수령주(首領株)의 체포에 관하여 큰상을 걸고 각 촌리에 광고한다.
   (5) 폭도에 동정을 한 촌리에 신통(辛痛)을 느낄 수 있는 공동책임을 질 수 있도록 한다.
   (6) 수령주(首領株)를 설복하여 사면을 조건으로 자수시켜 부하와 같이 철도 공사 등에 사역토록 한다. (내부 경무국,《한국경찰일반(韓國警察一班)》, 1910, 157면)

 

  위에서 탐정 활용이 강조되어 있음을 알 수 있고 1908년 1월부터 자수기간을 설치하여 일 진회원과 이동장(里洞長)을 앞세워 의병의 내부 혼란을 일으켜 자수시키는 술수를 구사하여 실제에 설복당한 의병의 숫자도 적지 않았다. 또 무서운 이야기는 제5항에 의병을 동정한 마을은「신통(辛痛)」을 느낄 수 있는 공동책임을 지도록 한 것이다. 과연 당시 일본군은 의 병이 숨었다고 하는 마을이나 의병에게 물자를 지원한 마을은 무참하게 불살라 버리는 만행 과 폭거를 일삼았으니 이 국가적 환난을 오늘에 사는 사람이 어찌 옛 이야기로만 기억할 것 인가. 이미 전기의병 때 일본군은 안동읍 1천 여호와 제천읍도 잿바닥으로 만들어 그의 야 수적 본성을 드러냈다.


  일제가 통계한 1907년 7월부터 1908년 말까지 그들이 불태운 집은 6,681호라고 한다. 그들 의 통계를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이것인들 적은 숫자인가 말이다. 당시 신문지상에 보도 된 1907년 8월부터 그해 12월까지 5개월간의 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것도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경향 파악은 될 것으로 안다.

 

보도일자
피 해 장 소
불에 탄 호수
8. 29
9.2
9. 9
9. 9
9. 11
9. 21
9. 21
9. 21
9. 21
9. 21
10. 1
10. 2
10. 2
10. 3
10. 3
10. 3
10. 4
10. 4
10. 5
10. 6
10. 6
10. 8
10. 9
10. 11
10. 11
10. 15
10. 22
10. 2
경기도 지평군 장수동
경북 성주군 천장동
충주읍 동문외 약리현
충주읍 고부군 점막
보은읍
홍천군 남십리 성전촌
홍천읍
천안군 죽계
천안군 대거리
충북 영동군
경기도 삭녕군
경기도 양근군
경기도 안성군
경기도 여주군 앙덕리
경기도 양주군 덕소
경기도 가평군
경기도 양주군
경기도 가평군
충남 문의군 동면 계산
충북 보은군 일대
경기도 양근 읍내
강원도 울진
강원도 안협군
경기도 양성군 금곡면
황해도 마산면 도평동
충북 보은군 산외면 장갑리
충북 회인군 계산리
강원도 홍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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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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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100호
100호
60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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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호
17호
47호
118호

 

  일제의 만행은 무엇보다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30일까지 두달 동안의 소위「남한대토 벌작전」때의 일이 참혹한 것이었다. 1909년에는 전라남도 지방이 다음 표와 같이 전 체 교전회수의 31.5퍼센트일 정도로 의병전쟁이 격렬하였다.

 

   각도별 교전회수와 교전의병수


 

 
교전 회수
교전의병수
교전회수 백분비 (%)
교전의병수 백분비 (%)
1908
1909
1908
1909
1908
1909
1908
1909
경기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남
경북
강원
황해
평남
평북
함남
함북
78
113
217
219
274
153
158
273
232
108
41
99
11
165
66
138
273
547
61
161
124
111
61
17
14

1,453
6,815
7,666
9,9960
10,544
3,328
5,702
18,599
7,998
1,391
2,590
6,438
283
3,453
832
1,003
5,576
17,579
934
3,667
2, 468
2, 148
540
123
270

4.0
5.7
11.0
11.1
13.9
7.7
7.9
13.8
11.7
5.5
2.1
5.0
0.6
9.5
3.8
7.9
15.8
31.5
3.6
9.3
7.2
6.4
3.6
0.5
0.9

1.8
8.0
9.2
12.0
12.7
4.0
6.9
22.5
9.7
1.7
3.1
7.8
0.3
9.0
2.2
2.5
14.5
45.6
2.4
9.5
6.4
5.5
1.4
0.3
0.7

합 계
1,976
1,738
82,767
38,593
100
100
100
100

  

일제는 그것을 임진왜란 때의 의병에 비유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일제는 「일본군의 엄숙 하고 용감한 무위(武威)에 경탄 전율케 하여……흉폭을 근절한다」는 목적으로 2,260명의 군 대로 반격해 왔는데 제1연대는 순창·광주·목포로 연결된 지대의 서북부를, 제2연대 는 그 동남부를 맡아 있었다. 그리고 3단계의 작전으로 반격해 왔는데 제1단계 작전은 남원 을 기점으로 고흥·광주·영광으로 이어지는 지대까지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고, 제2단계는 고흥·광주·영광 근방을 기점으로 서남해안에 이르기까지의 초토작전이었다. 그리고 도서 지방으로 탈출한 의병을 섬멸하기 위하여 제3단계 작전으로서 무인도의 섬까지 샅샅이 뒤져 갔는데 이때에 그들의 10개 지침 제8항을 보면 도망하는 자는 모두 죽이라는 것이니 무서움 에 떨며 피난하던 양민도 모두 학살당하였다. 그에 앞서 한복을 입은 경찰과 헌병이 밀정으 로 잠입하여 작전정보를 수집한 후 이리떼처럼 몰려와 밭고랑과 바위 밑까지 뒤집으며 만행 을 자행하였다. 그리하여 우리의 양민이 수없이 죽음을 당했다. 의병장만도 103명이 희생되 었는데 그 중에 23명은 그들에게 잡혔다가 형장에서 순국하였다. 일제는 그때의 의병장을 사진으로 찍어 오늘에 전해 오는데 그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전해산(全海山)·심남일(沈南一)·강무경(姜武景)·권택(權澤)·안계홍(安桂洪)·김공삼(金 公三)·박포대(朴砲大)·황두일(黃杜一)·양윤숙(楊允淑)·임순호(任洵鎬)·양상기(梁相基)· 양진여(梁鎭汝)·김원국(金元局)·나성화(羅成化)·박사화(朴士化)·강사문(姜士文)·이강산( 李江山)·오성술(吳聖述)·이영준(李永俊)·송병운(宋丙雲)·모천년(牟天年)·김병철(金丙喆) ·조규문(曺圭文) (이상 23명)


  이때 일본군에 포로로 잡힌 의병도 많았다. 일본군은 각처에서 잡은 의병을 모아 강제노 동을 시키기도 했는데 해남(海南)에서 장흥(長興)·보성(寶城)·낙안(樂安)·순천(順天)을 경 유하여 광양(光陽)·하동(河東)까지의 도로는 의병들의 강제노동으로 닦은 것이다. 일제는 이 도로를 폭도도로(暴徒道路)라고 했다. 오늘날 이 길을 오가는 사람들이 그 사실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정여립 [鄭汝立, 1546~1589]

 

조선 중기의 문신·사상가.

 

본관 동래
별칭 자 인백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전북 전주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자는 인백(仁伯)이다. 전라북도 전주에서 첨정(僉正)을 지낸 희증(希曾)의 아들로 태어났다. 통솔력이 있고 명석하였으며,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에 통달하였다.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1583년(선조 21) 예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수찬(修撰)이 되었다.

 

처음에는 이이와 성혼의 문하에 있으면서 서인(西人)에 속하였으나, 이이가 죽은 뒤 동인(東人)에 가담하여 이이를 비롯하여 서인의 영수인 박순·성혼을 비판하였다. 이로 인하여 왕의 미움을 사자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인망이 높아 낙향한 뒤에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이후 진안군의 죽도(竹島)에 서실(書室)을 세워 활쏘기 모임[射會]을 여는 등 사람들을 규합하여 대동계를 조직하고 무력을 길렀다. 이때 죽도와의 인연으로 죽도선생이라고도 불렀다.

 

1587년(선조 25)에는 전주부윤 남언경의 요청으로 대동계를 이끌고 손죽도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다. 이후 황해도 안악(安岳)의 변숭복, 해주(海州)의 지함두(池涵斗), 운봉의 승려 의연(義衍) 등의 세력을 끌어모아 대동계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였다.

 

1589년(선조 27) 황해도 관찰사 한준과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등이 연명하여 정여립 일당이 한강이 얼 때를 틈타 한양으로 진격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고발하였다.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혀가자 정여립은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죽도로 도망하였다가 관군에 포위되자 자살하였다.

 

이 사건의 처리를 주도한 것은 정철 등의 서인이었으며, 동인인 이발(李潑) ·이호(李浩) ·백유양 등이 정여립과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되는 등 동인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를 기축옥사라고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라도는 반역향(叛逆鄕)이라 불리게 되었고, 이후 호남인들의 등용이 제한되었다.

 

정여립에 대하여는 어릴 때부터 잔인하고 포악하였으며, '이씨는 망하고 정씨는 흥한다[木子亡尊邑興]'는 《정감록》류의 설을 퍼뜨려 왕조를 전복시키려 한 인물로 보기도 한다. 반면에 평소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는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 등 왕권체제하에서 용납될 수 없는 혁신적인 사상을 품은 사상가이기도 하였다.

또 그가 대동계를 조직하여 무력을 기른 것은 이이의 십만양병설에 호응하였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런 이유로 정여립은 서인과 동인 사이에 벌어진 당쟁의 희생자로서 그가 주도했다는 역모(逆謀)는 조작되었다는 설도 있다.



2006-01-16 02:5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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