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Samaria]
팔레스타인 중앙부, 예루살렘 북쪽 약 60㎞ 지점에 있는 고대 도시.
팔레스타인 중앙부, 예루살렘 북쪽 약 60㎞ 지점에 있는 고대 도시. 이스라엘왕국이 남북으로 분열된 뒤, BC 9세기 초부터 북쪽 이스라엘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간 후부터 북쪽의 갈릴리, 남쪽의 유대땅 사이의 구릉지대를 가리키는 지방명이 되었다. BC 722년 아시리아에 의한 점령 후에 이곳으로 이주한 이민족과 잔류 유대인과의 혼혈에 의해 생긴 사람들이 사마리아인이다. 이러한 혼혈과 이교와의 혼합 때문에 유대인으로부터 심한 배척을 받았고, 바빌론포수(捕囚)에서 돌아온 유대인이 신전을 재건할 때에도 신전재건에 참가하는 것을 거부당했다. 이 양자의 반목을 초월하려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신약성서》 <요한복음> 제 4 장에 기록되어 있다.
기원전 890년경부터 북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로 건설되었던 도시.
위치 : 고대 팔레스타인 중부
사마리아라는 도시 이름은 땅주인 이름 셰메르에서 유래되었고 히브리어로는 쇼므론으로 불렸다. 후에는 므나세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 지역 전체를 일컫던 북이스라엘 왕국과 동일시된 지역 이름이다. 북이스라엘의 오므리왕(기원전 876∼869)은 이 땅을 은 두 달란트를 주고 사서 요새 도시를 건설한 후 수도를 다르사에서 이 곳으로 옮겼다. 이 곳은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고, 주변의 평지보다 100여m 솟아오른 해발 430m의 천연적 요새로서 아시리아 군대의 포위를 3년 간이나 버틸 수 있었던 천혜의 요새 도시였다.
사마리아는 항상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와 세력 경쟁을 하였는데 초기에는 오므리왕이 패전하여 시리아 상인들에게 영업권을 내주기도 하였으나, 그의 아들 아함은 시리아의 공격을 물리친 대가로 다마스쿠스에서 무역시장을 개설하였다. 여로보암 2세(기원전 784∼748) 때에는 이스라엘이 다마스쿠스를 정복하여 사마리아는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고, 당시의 예언자 아모스가 사마리아 거주민의 사치를 비난할 정도로 번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원전 734∼733년 아시리아의 왕 디글랏 빌레셀의 침공으로 북이스라엘 영토의 많은 부분이 사마리아의 통치권을 벗어났으며, 기원전 721년에 그의 후계자 사르곤 2세는 도시를 함락하고 거주민들을 다른 지방으로 이주시켰다.
이후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정권의 한 식민지 구역의 수도로서 그들이 파견한 총독이 거주하였다. 기원전 332년에는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들이 이곳을 점령하였고, 기원전 108년에는 하스모네 왕조의 히르카누스가 도시를 파괴하고 시민들을 노예시장에 팔기도 하였다. 기원전 30년 로마의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사마리아를 하사받은 헤로데 대왕은 이를 기념하여 도시이름을 아우구스투스의 그리스 발음인 세바스테로 명명하였는데, 오늘날에도 근처의 아랍인 마을은 세바스티야로 불리고 있다. 고고학적 발굴 결과, 사마리아는 궁전과 신전 등이 있던 높은 지역의 아크로폴리스와 주거지역으로 이루어진 낮은 지대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구약시대의 유적들은 대부분 아크로폴리스에 위치한 것들이었다.
사마리안의 법
- 사전적 의미와 그 유래 그리고 입법예 -
▶ 사전적 의미와 그 유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 강도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상처를 입혀 거의 죽게 된 것을 버려두고 갔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 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 지나갔다. 그러나 레위 사람은 그 곳에 이르러 그 사람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감람유와 포도주를 붓고 싸맨 후에 자기 말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봐주었다. 다음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주인에게 주며 '이 사람을 돌봐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소‘ 라고 말했다“
(누가복음 10장 30-33절)
예루살렘 북쪽 약 67km 지점으로 사마리아 도와 사마리아 성이 있다.
사마리아 성은 세겜 북방 11km 지점 91km 높이의 언덕 위에 있는데 현재는 세바스티에 라는 곳으로 보장것 없는 동내가 되었다.
BC 30년에 헤롯은 사마리아 대건설 계획에 착수,새로 건설된 도시를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세바스티아로 개칭했다.도시의 출입문은 서편과 동편에 있었다.북편과 남편에도 성문이 하나씩 더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낙후된 아랍인의 마을에 불과하지만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가 여기였다.
그리심산이 있다. 이 산은 종교적으로 중요한 곳이었으며,산정에는 유적지가 있다."> 소수민족인, 전통적인 사마리아인은 4백명 뿐으로 그리심산에 살고 있다.사마리아 유적은 2차례 발굴되었는데 1965년 요르단의 고대문물성에 의해서,또 한번은 1968년 예루살렘의 영국고고학회에 의해서였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때문에 익숙한 도시이름이다.
(1) 사마리아 성읍은 이스라엘 북왕국의 수도이다.
(2) 디르사에 수도를 정하던 오므리 왕(아합 왕의 아버지)이 세멜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이 산을 사서 그 소유주의 이름을 따서 사마리아 라고 하였다 (왕상16:23-24).
(3) 사마리아도는 옛날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쳐서 취하여 12지파에게 분할해 줄 때 에브라임, 단, 므낫세, 반지파에게 준 땅이 곧 예수님 당시의 사마리아다.
4) 여호수아 때에는 솔로몬 왕 때까지 통일 국가를 이루었다.
솔로몬왕이 죽은 후에 남북 2국으로 분립되어 남에는 유다,베냐민의 두 지파가 솔로 몬의 아들 르호보암을 왕으로 삼은 유다국이 건설되고 북에는 기타 10지파가 느밧의 아들 여호보암으로 왕을 삼은 이스라엘 국이 건설되어 250 여년간 내려왔다.
(5) 앗수르왕 살만에셀이 이스라엘국을 쳐서 취하였다.
이때에 살만에셀은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로 다른 지방으로 옮기고 아수르 국민을 사마리아 에 옮겼다(왕하17:3-6,24).
(6) 그 다음에는 마게도냐,알렉산더 대왕이 점령하여 또 사마리아인을 축출 하고 자기 국민을 사마리아도에 이식하니 자연히 상홍홍혈이 되어버렸다.
(7) 그 때 부터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이방시하고 그 주민을 이족시 하게 되었다.
(8)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귀환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할 때 사마리아 인들이 협력하기 원하여도 거절 하였다.
사마리아인들은 이방시 하는 유대인들에게 원한을 품고 바사국의 인사들에게 뇌물을 주어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방해 하였고 일방으로는 그리심 산에 따로 성전을 건축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반대하게 되었다(스4:1-6).
(9) 이러한 두가지 원인으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간에는 피차 반목 질시하게 되고 유대인이 그 지역에 가지도 않고 그곳 주민과는 상종도 하지 않 으므로 갈릴리도를 갈때는 사마리아도를 통과 하지 않고 멀리 요단강으로돌아 다녔다.
(10) 예수님은 그것을 관계치 않으시고 통과하시다가 수가 성에 있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생수의 원리를 가르쳐 주셨다(요4:3- 14).
(11) 선한 사마리아인이 비유을 듣고(눅1:30-37).
(12) 문둥병자 10명을 고쳐 주셨을 때 다 가버리고 사마리아 사람 하나만 와서 감사함으로 그를 칭찬하셨다(눅17:11-19).
(13) 그래서 예수를 사마리아 인이라고 욕한 사람도 있다(요8:48).
(14) 스데반이 순교후 예루살렘 교회가 핍박을 만나 교인들이 사방에 흩어지는 중에 이 사마리아 도에 들어가서 교회 설립의 기초가 되었다(행8:1).
(15)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 850인과 엘리야 선지가 거짓 신과 참 하나님의 대결을 벌렸던 갈멜산이 있다(왕상12:19-40).
(16) 요셉이 팔린 도단 산(창37:17)과 축복하는 그리심산과 저주하는 에발산 이 있다(신11:20).
사마리아는 BC 876 년 오므리 (Omri) 왕에 의해 세워진 북 이스라엘의 수도였다 (왕상 16:24). 히브리어의 쇼므론 (Shomron) 이라는 이름은 사마리아의 산 주인이었던 세멜에게서 기인한 것이다. 그의 아들 아합왕은 두로의 공주 이세벨과 결혼하면서 사마리아를 페니키아의 지대한 영향을 받은 도시로 발전시켜 나갔고, 그곳에서 22년간 통치하였다. 그의 이방문화에 대한 치적에 관하여는 선지자 엘리야의 지적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왕상 16:29 ~ 34)
사마리아 왕궁의 화려함은 예언자 아모스와 호세아를 통해 반영된다. '겨울궁'과 '여름궁', 그리고 '상아궁'과 '큰 궁'등의 표현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암 3:15, 6:4, 왕상 22:39), 상아를 비롯하여 엄청난 규모의 아합의 도시는 고고학적인 발굴 결과 모두 사실로 확인되었다. (사진 : 사마리아 산지의 염소떼)
앗시리아가 사마리아를 치고 그곳에 군대를 주둔 시켰으며 (왕하 17:24), 페르시아는 영주의 수도로 삼았다. BC 108 년 헤스모니안의 존 힐카누스는 로마의 허락으로 재건하였으며, BC 30 년 헤롯 대왕은 옥타비아누스 황제를 위해 이 도시를 수축하여 그에게 헌정하면서 도시의 이름을 세바스티아 (Sebaste Augustus 의 헬라 이름)라 불렀다. 그가 대리석으로 세운 신전과 극장, 그리고 탑등은 제 1차 유대 반란 기간 동안 로마에 의해 무너졌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기독교 전승에 의하면 세례 요한이 헤롯에 의해 처형된 곳이 바로 사마리아며, 11세기에 요한 순교 기념교회가 세워졌다.
사마리아인 (The samaritans)
인구 400(나불루스에 240명, 홀론에 160명)의 사마리아인 들은 세계에서 가장 이상한 종족이면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종족이다. 한때 강력한 힘을 지녔던 사마리아인 들은 2,500년간 순수한 혈통을 간직하고 있다. 같은 핏줄이던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 들이 서로 분리된 것은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이후이다.
사마리아 주민들은 당시 추방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정복자인 앗시리아인들과 혈통적으로 혼합되었기 때문에 다른 유대인들이 그들을 유대인으로 인정하지 않게 된다. 이에 따라 사마리아인 들도 극도의 증오심을 가지게 되고 독자적으로 유대인들과는 상반되는 제단을 쌓게 되었다.
현재의 사마리아인 들은 그들의 옛 율법에 따라 예배하며 제사장이 통치하고 있다. 모세 5경만을 믿는 그들은 양피지에 적힌 모세 5경의 고사본을 소유하고 있다. 사마리아인 들은 이것이 손으로 기록한 것 중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3,600년 전에 모세의 형 아론에 의해 기록된 것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사마리아인 들은 가난하며 그들 집단 내에서만 결혼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도 병약하다. 매년 양을 잡아 그들의 성스러운 산인 그리심 산 위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지금도 유월절 제사는 정확히 구약 그대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