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와 사마리아인에 대하여
1. 사마리아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
눅 9:52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저희가 가서 예수를 위하여 예비하려고 사마리아 인의 한 촌에 들어갔더니 눅 9: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고로 저희가 받아들이지 아니한지라 우리는 성경에서 흔히 비유로 나오는 사마리아와 사마리아인에 대해 동정어린 눈으로 보면서도 사마리아의 죄악에 대해 상상하며 경계하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성경에 좀더 관심을 가지고 보다보면 구약에서 예언된 사마리아에 대한 기록을 통해 그러한 생각을 더욱 확고히 한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읽다가 문득 누가복음 9:52절을 읽으면 상당한 흥미가 생긴다. 왜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의 동네를 통과하는 것을 반대했을까? 예루살렘에 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길을 내어주지 않은 야박한 인심. 조금은 알듯하면서도 확실히 모르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 대해 알아보려면 먼저 오랜기간에 걸쳐 사마리아인들과 사마리아인이 아닌 유대인들 사이에 생긴 오랜 갈등의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 유독 사마리아에 대해 이렇게 혹독한 비판을 하고 있는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지나칠수 있는 물음 같지만, 사마리아인도 본래 유대민족이며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이러한 궁금증은 더욱 커질 것이다. 이 글에서는 사마리아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사마리아와 사마리아인에 대해 보다 사실적인 면을 볼수 있길 바란다. 사마리아에 대한 신약의 이해는 우리에게 보다 근접한 공감을 갖게 한다. 이는 대부분이 신약중심의 사마리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약세대들의 사마리아에 대한 이해는 상당히 부정적이다. 여기서 우리는 궁금증을 가지고 역사여행을 시작했으면 한다. 역사속에서 일어난 일들을 추리함으로써 그 해답을 보다 정확히 알아보자.
2. 사마리아의 기원
사마리아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74Km의 거리에 있다. 사마리아성을 포함하고 있는 중부산간지방 전체를 사마리아 지방이라고 부르고 있다.
사마리아라는 지명의 유래? 사마리아라는 지명에 대한 유래는 열왕기상 16:24절에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 아합왕의 아버지, 오므리왕은 즉위후 6년인 주전 9세기 초에 세겜 근방에 있던 디르사(Tirza)로부터 수도를 옮겨 왔다. 오므리왕이 세멜에게서 은 두 달란트로 이 산을 사서 성을 건축한 것으로 원래의 주인인 "세멜"의 이름을 따서 사마리아라 한 것이다. (왕상 16:24)
사마리아성은 오므리왕과 아합왕을 거쳐 여로보암 2세 때까지가 가장 전성기였고-여로보암은 벧엘과 사마리아에 산당을 쌓고 우상을 섬기는 죄악을 범하였다. 여로보암이 이러한 죄악을 저지른 이유는 르호보암이 통치하는 예루살렘으로 백성들이 절기를 지키기 위해 내려가면 분명히 자신을 배신하고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갈 것이라고 추측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벧엘과 단에 각각 금송아지 둘을 세워두게 된다.(왕상12장) 그런데 왜 그는 수도 사마리아에서 얼마 멀지 않은 그리심에 이것을 만들지 않았는가? 지리적으로 볼 때 계획도시인 세겜과 부느엘과 가까운 그리심이 오히려 더 왕의 입지를 굳히는 데에는 유리했을 것인데도 그는 그리심에 산당을 세우지는 않았다. 여기에는 두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첫째로 사마리아에도 경건한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에 의해 성지인 그리심산에 산당을 세우고 율법에서 금한 우상을 세우는 것이 반대되었을 것이다. 둘째로 추측할수 있는 것은 지리적인 편리함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한곳을 정하는 것보다 적당한 두 곳에 만들어 놓으면 백성들이 예배드리는 데에 더 편리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만들었을 수도 있다. 아뭏튼 사마리아는 북유다왕국의 주요한 수도로서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 그후 주전 721년 북유다가 앗수르에 명망될 때에 파괴되었다.(왕하 18:10-12)
3. 역사 살펴보기
열왕기하 17장에서는 북유다의 멸망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차별한 데에는 그들의 율법의식이 강하게 작용하였다는 것은 이미 보편화된 생각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같은 민족끼리 서로다른 율법적 기준을 갖고 서로에게 정죄하며 판단하게 되었는가? 그것을 알아보려면 먼저 구약에서부터 시작된 그들의 유배생활상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
1) 바빌론 점령기
북유다를 멸먕시킨 바빌론은 신바빌로니아또는 칼데아(갈대아)라고도 불리웠다. 후기 오리엔트 제국중 가장 큰 제국이었던 앗수르의 봉신(封臣)왕국중 하나였으나 봉신왕인 바빌로니아의 나보폴랏사르(Nabopolassar)와 메디아의 키악사레스(Cyaxares)가 BC612년에 니느웨를 포위하고 이를 파괴해 버릴 음모를 주도했으며, 이로서 강대국으로서의 앗수르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 일부의 잔존세력은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의 공격으로 BC605년 유프라테스 상부에서 있었던 칼케미쉬 전투에서 이집트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말살되고 말았다. 이로써 앗수르제국 이후 신바빌론제국이 오리엔트에서 약간의 패권을 잡게 된다. 바빌론은 앗수르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여러 제도나 문화면에 있어서 앗수르와 상당한 유사점을 보이고 있다. 바빌론의 식민정책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앗수르의 법률제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앗수르는 강력한 중앙 집권체제를 유지와 지방정부를 통제하기 위해 엄격한 위압정치와 의식적이고 계산된 폭력을 사용했다. 반란의 지도자들을 말뚝에 찔러 꿰는 형에 처하거나 산 채로 살가죽을 벗기거나 다른 야비한 방법으로 고문을 가했으며 권력앞에 반란자들을 잠재우기 위해 모든 형집행을 공개적으로 했다. 갈대아를 중심으로한 바빌로니아 인들은 앗수르의 제도를 따랐다. 권위를 중앙에 집중시키고 반란자들을 억압적으로 징벌하였다. 앗수르의 대표적인 법전인 함무라비법전은 바빌론의 왕 함무라비에 의해 완성된 것으로 앗수르제국과 바빌론제국의 통치법전이었다. 그 일부를 바빌론을 바빌론인보다 먼저 통치했던 수메르인의 그것과 비교해 보면 그 법이 얼마나 혹독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내 용 | 수 메 르 법 | 앗수르와 바빌로니아 법 |
도망한 노예를 숨겼을때 | 벌 금 형 | 사 형 |
노예에 대한 주인의 주권 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노예의 경우 | 팔 아 버 린 다 | 귀 를 자 른 다 |
간 통 죄 | 구체적인 법적 제재가 없음, 이혼사유에도 해당되지 않았음 | 사 형 |
이뿐만 아니라 분봉왕국중 최고의 권력을 유지하였던 바빌론의 법에는 강제적인 군복무, 왕에 의한 징세제도, 반국가적 범죄에 대한 범위의 확대가 드러난다. 재미있는 예로 부랑자나 선술집에서의 무질서한 행동도 사형에 처했다. 왜냐하면 이러한 범죄가 확대되어 결국 반역적인 행동을 낳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책이 효과가 있어서인지 느부갓네살왕때에는 왕비를 위해 정원을 만들만큼 권력이 쌓였다. 그 정원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공중정원(Hanging Garden)이다.
또한 이전 통치국이었던 앗수르는 분봉왕인 자신들에 의해 멸망했다. 따라서 바빌론제국은 지방분권적인 구제도의 모습을 없애버렸다. 이는 반란의 기미를 조기에 방지하는데에 큰 효과가 있었다. 이러한 방편의 하나가 바로 사마리아에 있는 유대인의 이주정책과 혼혈정책이었다. 일종의 인질이 되어서 바빌론의 여러곳에 흩어져 감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빌론 최후의 위대한 군주로 평가 받고 있는 나보니두스(Nabonidus)의 종교정책도 그러한 사마리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왕은 바빌론의 수호신 마르두크를 대신하여 달의 신인 Sin을 제국의 주신으로 받들려고 했다. 나보니두스의 어머니는 유트라테스 상부 하란에서 Sin신의 고위 여사제였던 관계로 왕은 그의 딸을 우르의 Sin신의 우두머리 여사제로 만들려고 했다. 그와 동시에 지구라트(Ziggurat)와 같은 신전을 재건하는 데 엄청난 돈을 썼다. 또한 하란에 엄청난 규모의 신전을 재건할 것을 공포했으나 자신들의 신인 마르두크를 등한시하고 Sin신에게 참배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은 바빌론인들에 의해 실행하지는 못했다. 고대사회에서는 해마다 우상을 숭배하는 곳에서 신년축제를 행했다. 나보니두스는 마르두크를 위한 신년축제를 행하지 않았다. 따라서 바빌로니아에서 그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다.
나보니두스의 이러한 종교정책은 단순히 혈연에 얽힌 것만은 아니다. 그의 제국이 바빌론중심인 것을 탈피하기에 가장 좋은 수단은 바로 종교정책이었다. 그러나 마르두크 신은 전제국을 위한 주신으로 숭배될 만큼 세계적인 신이 되지 못한다고 느꼈을 것이다. 이에 비해 Sin신은 적어도 달과 동일시되며 달은 전세계적인 보편성을 띠기 때문에 자신의 식민지 어디에서든 숭배가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어쨌든 바빌론이 페르시아에 의해 정복되는 과정에서 나보니두스이 종교정책에서의 실수가 크게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바빌로니아 시민들은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의 입성을 오히려 환대했다.
고레스는 자신이 마르두크에 의해 바빌로니아의 왕으로 세워진 것처럼 조심스럽게 행동했으며, 세심하고 신속하게 신년의 축제를 열었다. 또한 바빌론에 잡혀있던 유대인들도 고레스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이사야의 후반 장들을 썼던 저자는 고레스를 하나님의 선택자로 부르고 있다. 고레스의 첫 조처들 중의 하나는 유대인들을 그들의 본국으로 돌려보내도록 하는 칙령을 내린 것이다.
위의 내용을 알고서 사마리아를 생각해 본다면 보다 더 실감나는 상상을 할수 있다. 신학적인 조직과 체계를 구체적으로 갖춘 유대교의 역사는 바빌론 유배 시대에서 시작된다. 그 땅의 북부에 이주했던 이스라엘의 열 지파는 기원전 722년 앗시리아에 의해 사마리아가 멸망한 이후 몰락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바빌론의 정책은 강력했다. 사마리아는 멸망했지만 그 수난은 계속 이어졌다. 우선 사마리아에 있던 유대인들은 모두 바빌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 옮겨졌고 또한 그곳의 사람들이 사마리아로 이주되어졌다. 이는 정복정책의 일환으로 타민족에 배타적인 유대인들을 동화시키기 위한 강압적인 정책이었다. 이러한 앗시리아의 정책으로 사마리아지방은 유대인들로부터 격리되었고 또한 피의 혼혈과 종교의 혼혈 이유로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북유다멸망과 예루살렘 멸망시기의 시간적 차이속에서 사마리아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혼혈되어 버린 더러운 사람들로 규정되어 버렸다. 그들은 혼혈된 민족을 자신들의 동족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또한 율법에서도 엄격히 분별하여 잘라내도록 하였다.
유다 왕국은 기원전 587년 끝내 앗수르의 분봉국인 바빌론에 의하여 점령되었고, 이후 예루살렘은 파괴되었으며 민족의 지배층들은 바빌론으로 잡혀갔다. 이방 세계로 끌려간 유대인들은 바빌론에서 함께 살 수 있었고 거기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킬수 있었다. 성전 의식을 거행하는 일이 금지되었기 때문에-앗수르는 그들의 신들만을 세웠다. 정복지의 신들을 섬기는 것을 엄격히 제한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의 율법을 엄수하였으며 이스라엘이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선택받았다는 것을 언제나 의식하려는 표지로써 안식일 계명과 할례의 계명을 준수하였다. 그럼으로써 바빌론의 지배가 끝난 후 조상의 땅에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었던 정신적이고 영적인 전제들이 마련되었다. 예루살렘 성전 재건축의 역사정신이 나올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하다.
2) 바빌론 말기의 상황과 페르샤의 침공으로 나타난 변화
페르샤는 신바빌론 제국을 공격하여 승리를 이끌어 냈다. 페르샤 왕 고레스(Kyrus)의 승리로 이스라엘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고레스 대왕 당시의 페르시아는 48개주의 미국만큼이나 컸다. 그래서 바빌론처럼 많은 반대와 불만의 소지를 살 중앙집권제를 포기했다. 또한 페르샤는 자신들의 군사력의 절대우위를 믿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페르샤는 군사력과 포용력있는 지배정책으로 바빌론, 시리아, 팔레스틴을 지배하게 되었다.
페르샤는 자기들의 지배하에 들어온 이방 민족들에 대하여 자기들 이전에 앗시리아와 바빌론이 취했던 것과는 다른 정책을 추구하였다. 앗시리아와 바빌론은 나라들을 점령한 후 전 민족을 이주시키거나 혹은 적어도 지배층들을 유배시켰다. 그들은 또한 도처에서 그들의 의식을 국가 종교로서 거행하였다. 페르샤는 대대적인 이주를 강요하거나, 어디에서나 단 하나의 국가 종교만을 신봉하도록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때때로 주어진 지방적 상황에 따라서 그 민족의 독자성을 지킬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것이 잘 드러난 것이 바로 언어정책이다. 대부분의 통일 국가들은 자기들의 언어와 외래민족 언어, 이렇게 단 두가지 정도로 언어를 규정하였다. 그러나 페르샤 정부는 직무상의 거래를 위하여 그들 자신의 언어가 아니라 시리아와 팔레스틴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던 아람어를 사용하였다. 페르샤의 이러한 정책으로 유대인 사회는 정부의 명백한지지 아래 그들의 독자적인 생활을 가능하게 했다.
바빌론을 점령한 직후 고레스 왕은 포고를 내려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집을 재건하도록 했고 느부갓네살이 성전에서 탈취하여 왔던(스 6:3-5) 기물들을 다시 돌려 주도록 하였다. 그러나 유배지에서 살던 매우 많은 유대인들은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 갈수 있다는 허가를 이용하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팔레스틴에 남아서 살던 유대인들의 생활은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에스라중심의 성전 재건(제 1차성전재건역사)은 힘들고 오랜 과정을 거쳐야만 하였다. 또한 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성전재건 역사에 있어서 사마리아인들의 반대이다. 이는 매우 엄청난 것이다. 에스라 4:1-24절에는 매우 중요한 것이 드러난다. 성전을 재건하려는 자들 즉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들은 지역적 연고성을 갖지 못한 하찮은 존재일뿐이었다. 이미 기득권 계층이 되어버린 혼혈인으로 인식되는 사마리아인들과 그 지역인들은 외부인들이 들어와서 성전을 건축하는데에 언짢은 마음이 있었다. 성전건축을 반대한 자들은 유감스럽게도 갈대아인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성전을 세우도록 허가했다. 국법으로 율법을 세웠다. 그 방해자들은 10지파들 중 남은 자들과 또 그들과 연합한 이방인들이었고 열왕기하 17:33절 "그들은 여호와를 경외했으나 그들 자신의 신들도 역시 섬겼다"에서 그 내용을 볼수 있는 대로 혼합종교를 가진 자들이었다. 그들은 심지어 페르샤(바사) 왕 아하수에로에게 청원서를 보내어 성전건축을 맡은 자들을 헐뜯었다. 이들이 이렇게 한 이유는 무엇인가? 사마리아인들은 종교적 열심을 가지고 역사에 참여치 않았다. 그들은 성전건축이후 성소사역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굳히기 위해 성전건축역사에 동참하고자 하였고 뜻대로 되지 않자 오히려 방해세력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믿음이 자기의 유익을 따랐을 때 사마리아인들은 돌이킬수 없는 죄를 저지르고만 것이다.
에스라의 1차 성전재건역사의 시도가 어려움에 봉착하자 다시 2차로 느헤미아는 튼튼한 예루살렘 성벽을 쌓도록 하였으며, 이방 출신의 이웃 민족들과 결혼 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 약속을 유대인들에게 지키게 하였다. 에스라는 그의 시민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왕의 명령 위에 율법의 효력을 두었다. 이러한 율법은 모세의 다섯 책, 즉 이스라엘의 고대 전승들이 수집되어 정돈된 오경이라는 점이 의심없이 받아들여질 수있었다. 유대인들이 율법에 구속받고 왕의 포고가 율법을 보증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율법은 예루살렘과 유대에서 페르샤의 국법으로서의 효력이 있었다.
예루살렘의 이러한 발전은 주변의 이웃 사람, 즉 사마리아 주민들에게 있어서 시기와 악의를 불러일으켰다. 느헤미아와 에스라에 의하여 다른 민족들과의 어떠한 결합도 용납되지 않도록 되었던 예루살렘 공동체는 그들을 다른 민족들과 구별하였으며 그들과는 어떠한 교역이나 거래도 하지 않았다. 이러한 날카로운 구별과 고레스 대왕에 의하여 예루살렘에 강력한 특권이 부여됨으로써 사마리아 지역의 사람들 가운데서 반감이 일어났고, 이로써 북부와 남부 사이가 크게 벌어지게 되어 결국은 사마리아(북부)와 유대(남부)의 정치적인 분리를 초래하였다. 또한 사마리아는 유대교를 숭배하는 한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희생의 제물을 드리고 기도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야만 했다. 그래서 이러한 정치적 알력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으로부터 독립될수 있는 그들 자신의 성소를 만들고자 하는 소원을 싹트게 하였다. 또한 사마리아 사람들은 구약성서 정경의 다른 부분들, 즉 예언서와 시편은 성서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로써 오경이 확정된 이후, 그리고 구약성서의 나머지 부분들에 대한 정경의 한계가 최종적으로 확정되기 전에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의 분리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수 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사마리아인들이 알렉산더 대왕의 치하에서 비로소 가리짐에 성전을 건설하도록 재가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아마도 그들의 성소의 건축은 그 이전에 이루어진 것 같다. 사마리아인들은 매우 자랑스럽게 모세의 율법에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그들의 성산 가리짐이 명확하게 일컬어진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리심 산에 성소를 건축한 것은 예루살렘의 입장에서 보면 우상숭배의 죄악으로도 정죄될수 있었으며 예루살렘의 성소를 무시한 것으로서 결국 하나님에 대한 중대한 범죄행위로 간주될만한 것이었다. (신 11:29,27:12-13)
이로써 둘 사이에는 더욱 격렬한 적대감이 지배하게 되어 끝내 전쟁의 충돌이 일어났고 기원전 128년 요하네스 히르칸-요한 히르카누스라고도 불리우는 이 사람은 하스모니안 계열의 사람, 즉 마카비바란의 주도세력중 후에 남은 지도세력으로서 율법을 강하게 주장하며 바리새화 되어가고 있던 사람임이 분명하다-의 지도하에 유대인들은 가리짐의 성전을 파괴하여 버렸다. 이 성전이 사마리아 인들에 의하여 재건될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리짐을 주저하지 않고 그들의 성지로서 고수하였다. 오늘날에도 소수 사마리아 공동체는 이곳에서 매년 그들이 보존해 온 옛날의 관습에 따라서 유월절 축제를 지낸다.
4. 마치면서...
사마리아는 역사속에서 하나의 무대였다. 신앙의 불길이 뜨거웠던 곳이다. 그러나 그 뜨거운 열정이 잘못된 방향성을 갖고 자신들의 이기심에 부합되었을 때 결국 그릇된 열심이 나타났다. 이 글을 마치면서 역사에서 나타난 사마리아에 대한 평가는 하지 않기로 하겠다. 이 글을 읽은 여러분들의 냉철하고 말씀에 기초한 판단으로 사마리아에 대해 두리뭉실한 편견보다 사실에 근거한 평가를 할수 있었으면 한다. 이 글을 다 읽을 때쯤이면 처음에 문제제기된 사실, 즉 예수님이 왜 사마리아에서 배척받으셨는가를 이해할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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