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채성진기자, 허윤희기자]
"한국 사람 안 쳐다보고, 생각 안 하고 살아온 30년이었어. 내가 워드 데리고 한국 왔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그 놈 거지밖에 안 됐겠지? 여기선 누가 파출부라도 시켜줬을까?… 이제 와서 우리 워드가 유명해지니 관심을 참 많이 가져준다. 좀 그래. 부담스럽지 뭐. 세상 사는 게 다 그런거 아니겠어?"
5일 오후 아들 하인스 워드(30·피츠버그 스틸러스)와 함께 펄벅 재단 사무실을 찾은 김영희(59)씨는 20여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맞은편에는 흑인 혼혈 어린이 아름이의 엄마 안진희(30)씨와 유진이 엄마 배선주(45)씨가 상기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수퍼볼 스타’ 아들이 아이들을 안고 사진을 찍는 동안에도 김씨는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아름이 엄마 안씨가 김씨 곁에 다가왔다.
“너무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어요. 혼혈아를 키우는 엄마로서, 그리고 한 여자로서…. 지금이라도 한국을 떠날 기회가 있다면 주저없이 그렇게 하겠어요.” 말없이 눈물만 닦던 김씨가 안씨의 손을 꼭 잡았다. “그렇게 해요. 나도 그런 생각 참 많이 했었죠.”
김씨는 “한국 사람 안 쳐다보고, 생각 안 하고 살아온 30년이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애기 엄마, 그때 내가 워드 데리고 한국 왔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그 놈 거지밖에 안 됐겠지? 여기선 누가 파출부라도 시켜줬을까?”
“맞아요. 아이 있는 엄마가 취직하기 힘들죠. 더군다나 혼혈 자식을 두고 있는 엄마는….” 안씨가 김씨의 팔을 꽉 잡으며 말했다.
“한국 사람들은 말이야, 좀 그렇지. 미국에서도 한국 사람들끼리 사이가 별로 좋지 않잖아. 이민 온 사람이 우리들을 무시하고. 피부 색깔도 같은 한국 사람들끼리 인종을 더 차별하잖아. 근데 참 이상해. 우리 새끼들이 피부색 다른 것은 그렇게 싫어하는데, 왜들 그렇게 머리는 노랗고 빨갛게 물들이고 다니는지….”
김씨는 “내가 그렇게나 힘들 때는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더니, 이제 와서 우리 워드가 유명해지니 관심을 참 많이 가져준다”며 “좀 그래. 부담스럽지 뭐. 세상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니야”라고 했다. “그래도 아쉬움은 진짜 없다”고 김씨는 말했다.
4시50분. 펄벅 재단을 떠나는 길. 우리은행 소속 농구 선수인 장예은(19)양이 김씨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김씨는 갑자기 지갑을 열더니 지폐 한 장을 꺼내 장양의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100달러짜리였다. 당황해 하는 장양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김씨가 말했다. “워드 아줌마가 주는 것이니까 괜찮아. 공책 사라. 그리고 너 마음 독하게 먹고 꼭 성공해야 한다. 알겠지, 할 수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