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롭지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 체험적 평가 촉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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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반쪽 역사관’ 후유증 속 DJ 功過 균형평가 돋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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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의 3분의 1을 거의 넘기면서 노무현 대통령은 과거사 정리라는 掌風을 일으키고 있다. 그 장풍에 한국사회라는 바다는 거의 둘로 갈리면서 이념적 격랑 상황이다. 21세기의 벽두에 불어닥친 20세기의 장풍은 한국인에게 여러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한국의 현대사는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얼마나 옳고 얼마나 그른가. 무엇이 성취됐고 무엇이 좌절됐는가. 우리는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의 역대 대통령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포함한 지난 현대사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그들은 너무 過에 기울면서 功을 놓친 것은 아닌지 심층진단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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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진 중앙일보 정치전문기자
취임한 지 채 두 달도 되지 않은 1993년 4월19일 김영삼 대통령(YS)은 서울 수유리에 있는 4·19 학생의거 희생자 묘역을 참배했다.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이었다. 12·12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전임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으로서는 역사의 페이지에서 쿠데타의 반대쪽에 기록되어 있는 4·19를 기념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YS는 참배 후 “4·19혁명은 그동안 잘못 평가되어 왔다. 4·19는 3·1운동 다음으로 전국민이 참여한 운동으로 이제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군사정권에서 4·19가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YS는 “4·19의거의 목표와 정신은 새 정부가 계승해 완성하겠다”고 천명했다.
YS는 참배를 마친 후 차를 타고 청진동 해장국집으로 향했다. 그는 옆자리에 앉은 이경재 청와대 대변인(현 한나라당 의원)에게 말했다. “4·19 정신이 새 정부의 정신적 토대가 되어야 해. 그리고 묘역을 보니 잘 꾸미지 않았는데 이를 혁명공원으로 만들어야겠어.”
다음날 아침 이 대변인은 청와대 출입기자들에게 YS의 구상을 설명했다. 이 대변인은 “YS가 4·19를 대대적으로 새롭게 기념하려는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이순신 장군을 성웅으로 모시고 묘역을 성역화한 것과 비슷하다”고 비유했다. 이 대변인의 브리핑은 당시 석간신문이던 <중앙일보>가 가십으로 보도했는데, 이를 본 YS가 이 대변인을 호출했다. YS는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이봐, 대변인. 도대체 정신이 있어, 없어. 도대체 박 대통령이 뭔데 위대한 인물인 것처럼 묘사하면서 그렇게 말했어? 왜 내가 하는 일에 박 대통령을 갖다 붙인 거야?”
한국 역사상 최초의 민주정부를 세웠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YS는 자신이 평소 쿠데타 독재자로 비판해온 박 대통령과 자신을 비슷한 비유의 대열에 올린 것에 무척 기분이 상했던 것이다.
어쨌든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63년 조성된 4·19 묘역은 30년 만에 성대한 변신을 겪게 된다. 1만3,000평이던 묘역은 4만1,000평으로 커졌고 1995년 4월 국무회의는 4·19 묘역을 국립묘지로 승격시켰다.
YS정권의 ‘민주화 브랜드’ 작업은 계속됐다. YS는 1995년 특별법을 제정해 12·12 군사반란의 주역인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법정에 세웠다. 만약 박정희 대통령이 살아 있었다면 YS는 1961년에 일어난 5·16도 단죄하겠다고 나섰을지 모른다. YS는 칼국수를 먹으면서 그렇게 독하게 나름대로 역사를 정리했던 것이다.
YS의 실패는 역사관의 문제
‘민주화의 성인(聖人)’으로 불리고 싶었던 YS는 그러나 아들 현철 씨를 비롯한 측근들의 비리와 IMF 사태 등으로 권력의 초라한 황혼기를 걸었다. 권력에서 하산(下山)한 지 6년여가 지난 지금도 그는 자신의 안풍(安風)자금 의혹에 아들 현철 씨의 제2 구속까지 겪으면서 ‘불행의 동굴’ 속에서 누에고치처럼 웅크리고 있다. 참으로 안타깝고 처절한 추락이 아닐 수 없다.
YS의 몰락에는 여러 원인이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역사를 오만한 시선으로 바라봄으로써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 박정희 대통령의 공을 인정하는 데 무척 부정적이었다. 그가 독재·부정부패 같은 과(過)에서 반면교사를 찾으면서 동시에 측근 관리에 엄격하고 경제를 매섭게 챙겼던 공(功)을 냉철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였다면 조금이라도 국정의 부실을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통치의 생명이 지도자의 정신력이고, 건강한 정신은 자신의 역사적 좌표를 제대로 읽는 것과 관련이 깊으며, 좌표를 정확히 읽으려면 균형감각을 가지고 겸허하고 신중하게 역사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라면, YS의 실패는 역사관의 문제일 수 있다.
YS의 역사관은 ‘반쪽의 역사관’이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라는 장군 출신 대통령 3인에 대해 그는 한 번도 공식적으로 그들의 공을 평가한 적이 없다. 모든 정권이 나름대로 한국 역사에 공과 과가 있을진대, YS는 그늘만 까발리려고 했지 양지 쪽에는 아예 눈길을 주지 않았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는 그가 일방적으로 탄압만 받았다는 정상을 고려할 수 있지만 노태우 대통령은 자신이 ‘3당합당’이라는 정치적 동거를 결행한 대상 아니었던가.
특히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YS의 태도는 옹졸하고 비겁하기까지 하다. 그는 대선을 목전에 둔 1992년 11월 민자당 후보 자격으로 경북 구미 상모동에 있는 박 대통령 생가를 방문했다. 물론 대구·경북표를 의식한 선거용 행동이었다. 그리고 YS는 집권 후 마치 그런 일이 언제 있었느냐는 듯 박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 인색했다. 설사 선거용이었다고 해도 며칠 후 대통령이 될 사람이 전직 대통령의 생가에 발을 들여놓고 예를 갖추었다는 사실은 대통령이라면 쉽게 잊어버려서는 안될 일이었다.
집권기간 YS가 공식석상에서 박 대통령을 비난하고 깎아내린 적은 별로 없다. 그러나 청와대 참모를 지낸 사람들에 따르면 사석에서 그는 박 대통령의 5·16쿠데타와 인권탄압 그리고 자신이 핍박받았던 경험만 얘기했지 박 대통령이 이룬 역사적 성취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 현대사에 박정희는 깊은 선악(善惡)의 숨결을 남겼다. 역사에 그만큼 영향을 남긴 인물은 없을 것이다. 5·16에서 10·26까지 18년 동안 한국은 5,000년의 가난에서 벗어나는 민족사의 기적을 이뤘다. 한편으로는 유신체제 7년이라는 가혹한 독재와 권력의 부정부패를 겪었다. 1979년 10월26일 인간 박정희는 숨을 거두었지만 거미의 몸에서 빠져나오는 거미줄처럼 그 후의 역사는 그의 18년 집권과 관련이 깊었다.
박 대통령과 화해했다. 그러나…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은 박정희의 경호장교 출신이다. 전 대통령은 청와대 30경비단장 시절 박 대통령과 권투경기 TV중계를 같이 볼 정도로 가까웠다.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은 박정희의 역사 라이벌이었다. 박정희의 독재가 그들을 키웠다. 만약 박 대통령이 1969년 3선개헌을 하지 않고 1971년 퇴장했을 경우, 그리고 당연히 1972년 유신이 없었을 경우, YS·DJ가 대통령이 되었을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있기는 하지만 남북대치·경제빈곤·사회혼란 속에서 그들이 안정적 통치를 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을지 모른다.
두 사람은 1993∼2003년 그런대로 사회의 안정 속에서 개혁, 민주적 통치, 남북협상에 나름대로 매진할 수 있었다. 이는 박정희 정부를 비롯해 전임 군사정권들이 세계사에 기록될 경제성장으로 중산층의 성장이라는 민주주의의 토대를 만들어 놓은 데 힘입은 바 크다.
한국현대사에서 박정희가 차지하는 공간이 너무 크기 때문에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박정희에 대해 어떤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그 역사관이 그들의 행동 방식과 통치 방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 사후 그의 공과를 균형있게 보려고 시도한 최초의 지도자는 아이로니컬하게도 그에게 최대의 탄압을 받았던 DJ다. 박정희 평가와 관련해 DJ는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일련의 움직임을 보였다. DJ는 1992년 대선 때 국립묘지의 박 대통령 묘소를 참배했다. 1994년 아태재단 이사장 시절에는 박 대통령 15주기 추도위 고문직을 수락했고, 박 대통령 묘소에 처음 꽃을 보냈다. 그리고 1997년 12월 대선 때는 구미에 있는 박 대통령 생가를 찾았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은 6·25의 폐허 위에서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심어줬고 경제 건설로 오늘의 기반을 닦았다”고 말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국민 사이에는 “DJ의 본심이 과연 그럴까. 지역적으로는 대구·경북, 이념적으로는 보수층의 표를 끌어당기기 위한 선거용 제스처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사람이 많았다. DJ는 마치 이런 질문에 답하기라도 하는 듯 집권 후에도 이런 평가를 이어갔다.
우선 DJ는 1998년 8월 <조선일보>가 주최한 ‘대한민국 50년, 우리들의 이야기’ 전시회에 참석해 건국과 근대화·민주화를 거친 한국 현대사를 “잇따른 도전에 성공한 과정”으로 설명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처음으로 건국이후사(史)를 ‘성취의 역사’로 조명한 것이다.
‘박정희 기념관’ 위약
DJ는 1999년 5월13일 대구를 방문한 자리에서 박정희와의 역사적 화해를 선언했다. 박정희 기념사업 관련 인사 32명과 만찬을 함께 한 그는 “나는 맹세코 정치적으로 박 대통령을 반대했지만 인간 박 대통령을 미워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기념관 건립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그는 ‘공과 균형평가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밝혔다.
“박 대통령에 대한 찬반은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 공인에 대해서는 당연한 것이다. 공인은 전부 찬성 받을 수도 없고 전부 반대받을 수도 없다. 나는 박 대통령을 비난했지만 정치·경제 정책만 비판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국민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그런 공로는 참으로 지대했다. (중략) 그런 점에 대해 잘한 점을 높이 평가하고 돌아가신 분이 역사 속에서 재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그는 “기념사업을 진심으로 지원코자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에 대한 DJ의 화해와 역사적 평가는 공교롭게도 그가 언급한 ‘진심’의 문제에 귀착되고 말았다. 기념사업은 처음에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그해 7월에는 서울 상암동으로 부지까지 확정되었다. 그러나 임기 중반 들어 박 대통령에 대해 비판적인 시민단체들이 기념관 건립을 반대하고 나서자 DJ 정부는 자라처럼 목을 쑥 집어넣었다.
설계도까지 마련됐지만 기념관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DJ정부는 기념사업회의 국민모금이 부진하기 때문이라며 목줄을 쥐고 있는 정부지원금을 내놓지 않았다. 만약 DJ가 1999년 역사적 화해를 선언했을 때의 명분과 열정을 가지고 국민을 설득했더라면, 대구에서 지지자들에게 얘기했던 용기로 반대자들 앞에 나서서 기념관을 옹호했더라면, 일이 이렇게 망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DJ는 나서기는커녕 슬쩍 뒤로 빠졌다. 그의 약속이 기념관 부지의 잡초 속에서 나뒹굴고 있는 가운데 그는 집권을 끝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은 동교동에 번듯한 기념관을 가지고 있다. 대구의 약속대로라면, 그리고 진정하고 멋있는 역사적 화해라면 그는 박정희기념관이 지어질 때까지 자신의 기념관을 사양했어야 옳다. 그래서 DJ의 신뢰성이 계속 국민의 도마 에 오르는 것이다.
DJ의 위약에 대해서는 박정희 지지자뿐만 아니라 DJ 지지자까지도 의구심을 제기한다. 야당 시절과 집권 시절 DJ를 오랫동안 보좌했던 Q씨는 익명을 전제로 이렇게 말했다.
“DJ는 자신의 박정희 평가가 선거용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려면 집권 때 약속했던 기념관 건립을 지켜냈어야 했다. DJ가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집권 후반기에 들면서 추진력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아들들의 비리가 터지고 소장파 당내 세력이 정풍운동을 몰아붙이는 바람에 DJ는 코너에 몰렸다. 이들 소장파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인물들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DJ는 시민단체의 박정희 반대라는 물결에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DJ는 아주 이기적인 생각을 가지고 슬쩍 빠져버렸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본인이 생각하는 것이지만 자신은 이미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고 노벨평화상을 받은 지도자로 격상된 마당에 박정희가 추앙받는 지도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을지 모른다. 그는 지금도 만에 하나 자신만이 기념관을 지닌 유일한 전직 대통령으로 남기를 바라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박정희와 역사에 대한 DJ의 위약이 그런 의심을 부르는 것이다.”
박 대통령에 대한 DJ의 평가는 많은 정치인에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오랫동안 DJ 정책참모 역할을 맡았던 이해찬 국무총리가 그렇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의 초대 비서실장을 지낸 문희상 의원과 함께 노무현 정권 내에서 ‘박정희 공과 균형평가론’에 동의하는 대표적 인물이다.
세상을 바꾸려면 역사를 바꿔야”
이들과 반대로 박정희의 공을 인정하지 않고 과만 공격하는 대표적 인물은 열린우리당의 이부영·신기남 현·전 의장이다. 만약 DJ가 임기 내내 박정희 평가와 박정희기념관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지켜냈다면 그의 후계자가 된 노무현 대통령이 박정희와 한국현대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도 달라졌을지 모른다.
이제는 노 대통령에게 질문을 던질 차례다. 그는 한국 현대사의 중심 과제라고 할 수 있는 박정희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그는 박정희뿐만 아니라 이승만·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에 대해 ‘공과 병행평가론’을 견지하고 있는가. YS는 무식한 오만 때문에, DJ는 진심이 결여된 이중성 때문에 역사에 ‘반쪽의 역사관’을 남겨 놓았다. 노 대통령도 혹시 ‘반쪽의 역사관’으로 내달리는 것은 아닌가.
사실 과거사의 잘못된 부분을 교정하는 일은 노무현 정권이 처음은 아니다. 1987년 6·29선언으로 집권한 노태우 대통령은 취임 전 민주화합추진위 활동을 통해 일부 과거사에 대한 평가를 수술했다.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으로 부활한 것이 이때였다. 그리고 취임 후 비록 여소야대라는 타의에 의한 것이기는 하나 노태우 정권은 5공청산을 단행했다.
YS는 1995년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간판으로 12·12쿠데타를 법정에 세웠다. YS의 개혁은 나중에 측근비리와 안풍자금 의혹 등으로 크게 퇴색하기는 했지만 이때만 해도 이 작업은 YS 개혁의 하이라이트였다. DJ 때는 민주화운동에 대한 보상과 의문사 진상규명 작업이 진행됐다.
이렇듯 역사 정리는 노무현 정권 들어 나타난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작금의 역사 정리 작업이 요란하고 대(大)분열적인 것은 노 대통령의 인식과 의지가 색다르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의 역사성을 인정하는 모습을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놓고 부정해 버리는 양태는 아니지만 과는 많이 부각시키면서 공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 것을 보면 ‘공과 병행평가론’을 인정하지 않는 듯하다.
노 대통령은 자기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제대로 된 정통성을 가진 정권이 탄생했으며 이 정권이야말로 현대사 정리를 가장 정통적이고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의 현대사를 ‘왜’ 정리해야 하며 ‘누가’ 정리할 수 있는가에 관해 노 대통령의 생각을 보여주는 두 가지 사례가 있다.
하나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시절인 2002년 9월11일 영남대에서 강연한 것이다. 이 시점을 들어 지금 청와대와 열린우리당은 노 대통령의 과거사 정리가 집권 전부터 계획된 것이며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등 경쟁자를 겨냥한 정치적 의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노 대통령은 그때 이렇게 강조했다.
“우리 역사 속에서 정의의 깃발을 들었던 사람 중 승리하고 그 승리 결과를 자손에게 물려준 역사가 있나? 훌륭했다는 사람 중에는 현실정치에서 성공한 적이 없다는 것이 우리의 역사다. 어떻든 세상을 바꾸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고, 우리의 생각은 역사에서 비롯된다. 세상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려면 역사를 바꾸는 수밖에 없다. 지난 역사를 새로 해석하고 앞으로 만들 역사에 대해 새로운 계획을 세워야 한다. 과거 역사가 지속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의식적으로 과거 역사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고 앞으로의 역사를 잘 준비해야 한다. 역사를 다시 쓰자. 그래서 역사를 다시 만들자고 말하고 싶다.”
그는 과거사를 ‘정의가 왜곡되고 앞으로 지속되어서는 안 될 잘못된 역사’로 규정했다. 노 대통령은 최근 청와대 회의에서 왜 자신의 정부가 역사 정리의 적격자인지를 이렇게 역설했다고 한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이 야당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던 시절 나는 상도동·동교동이 함께 정치의 주류가 돼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염원했다. 6월항쟁 때문에 나는 정치를 시작했다. 그러나 3당합당으로 역사는 다시 왜곡됐다. 제대로 된 역사라면 어떻게 김종필(JP) 씨가 YS 정부의 권력 전면에 나설 수 있었겠느냐. 민주화의 많은 진전을 가져온 DJ 정부도 DJP 연합으로 근본적 문제 제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참여정부는 그런 조건에서 자유로워졌다. 국가 기관들도 이제 고백할 수 있게 된 것 아니냐?”
YS·DJ는 역사 정리에 한계
행정수도 건설에 대한 노 대통령의 구상은 1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가, 그가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운영하던 1993∼94년께부터 무르익었다. 과거사 정리는 정확히 언제부터 노 대통령의 마음속에 잉태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취임하기 꽤 오래전부터 구상을 가다듬었던 것 같다.
그는 지난 8월17일 국무회의에서 “대통령 취임 전후부터 많은 학자·전문가들과 논의를 거쳐 과거 국가권력이 불법적 행위로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고 사회 가치를 무너뜨린 일에 대해 역사적 평가를 어떻게 바로잡을까 깊이 고민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노 대통령이 만난 대표적 역사학자가 진보적 성향의 강만길(전 고려대 교수) 상지대 총장이다. 그는 노무현 당선자와 점심을 같이 했다고 한다. 강 총장은 그 자리에서 “노 당선자는 현대사에 청산되지 않은 부분이 상당히 많이 있으며, 자신의 집권 시기에 이것들을 청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친일, 국군의 민간인 학살, 군사독재 정권 시절에 발생한 각종 인권사고 등이었다”고 전했다.
강 총장은 “노 당선자와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우리 사회가 지나간 역사에 대해 한번 총체적 반성을 해야 하는 때가 드디어 왔으며 그 작업은 노 당선자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노 당선자는 정치생활 내내 기득권 세력과 아무런 연계를 맺지 않아 그들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있으며 무엇보다 나이가 젊어 그런 작업에 적합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했다.
어떤 지도자의 현대사 역사관을 들여다보려면 그가 이승만(건국·반공)·박정희(근대화·산업화) 그리고 김영삼·김대중(민주화) 대통령을 어떻게 해석하는가를 읽어야 할 것이다.
“김구는 ‘패배한 정의’, 링컨은 ‘정의+승리’”
노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이나 김대중 대통령처럼 ‘역사’라는 문제에 대해 독서량을 쌓고 생각을 많이 남기지는 않았다. 노 대통령은 학구적 연구보다 인권변호사와 야당 의원으로서 응축한 체험을 바탕으로 역사를 읽는 것 같다. 노무현 역사관을 연구할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그래도 노 대통령이 남긴 몇 마디 언급이 그의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이 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일제시대는 물론 해방 직후부터 ‘대한민국의 정의롭지 못한 시절’이 시작됐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가 대표적으로 꼽는 ‘패배한 정의’는 김구 선생이다. 그는 2001년 11월 자신이 지은 ‘노무현이 만난 링컨’의 서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으면 나의 답은 김구 선생이었다. 그는 생을 마칠 때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지조를 지킨 지사다. 우리 한민족에게 벗어나기 힘든 운명처럼 다가온 분단에 끝까지 맞선 분이 김구 선생 아닌가. 그러나 그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존경할 만한 사람은 왜 패배자밖에 없는가’라는 의문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런 질문은 ‘우리 역사에서는 정의가 패배한다’는 역설적 당위로 귀착되었고 나는 그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김구에게서 역사의 갈증을 느낀 노무현은 링컨에게서 이를 해결한다. 그에게 링컨은 ‘정의+승리’의 대표작이다. 그는 적었다.
‘정의는 항상 패배한다는 것이 가당찮은 역설에 지나지 않도록 만들면서 진리를 대하는 사람들의 이중성을 깨끗이 씻어준 본보기는 김구 선생이 아니라 링컨이었다. 나는 훌륭한 역사를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과 용기를 링컨에게서 얻는다. 해방 이후의 한국사는 현실주의의 미명 아래 여러 가지 왜곡된 타협을 강요해 왔다. 이상이 현실에 굴복하고, 현실이 이상을 구박하는 시대를 극복하자면 김구 선생을 뛰어넘는 대안이 나와야 한다.’
노 대통령의 분석대로라면 해방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현실주의라는 미명’ 아래 친일파를 중용하고 반민특위를 해체했으며 남한만의 단독정부로 분단을 초래한 역사 왜곡자가 된다. 그는 이 대통령의 건국과 반공이라는 현실적 성취는 정의의 범주에서 제외한다. 끝까지 남북 협상과 통일 국가 그리고 친일파 척결을 고집했던 김구 선생이 정의가 되는 것이다.
해방공간에 대한 노 대통령의 이러한 이해는 자연히 지금 전개되고 있는 친일 행위 규명 작업의 토대가 되고 있다. 그는 지난 1월14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친일 행위 진상규명은 언젠가는 반드시 한번 해야 하는 역사적 과제”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지난 8월11일 군 사령관급 주요 지휘관과의 오찬에서는 “역사는 한 번씩 정리하고 넘어가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해방을 맞으면서 그 이전 역사가 말끔하게 정리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한국전쟁에 대해서도 노 대통령은 부정적 언급을 남긴 것이 눈에 띈다. 국군이 자유세계의 연합군과 목숨을 걸고 많은 희생을 거쳐 국가의 생존을 지켜낸 양지의 측면보다 전쟁중 자행된 국군의 민간인 학살 의혹 사건에 노 대통령은 더 많은 눈길을 보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는 2004년 3월3일 제주 언론사와의 합동 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해 제주 4·3사건에 관한 1차 보고서가 나왔을 때 제가 제주 4·3사건이 일단락되면 해방 이후 6·25전쟁을 전후해 국가의 권력에 의해 합법적 절차 없이-전쟁 와중에는 절차를 밟기가 어렵지만- 또 전쟁이라는 그런 상황에서 정당성 없이 학살된 많은 사람에 대한 조사를 전반적으로 하자고 했는데 아직 구체적으로 진행은 안 되고 있다.”
盧, 유신헌법에 자주 ‘모멸감’ 표출
군의 민간인 학살 의혹에 대한 노 대통령의 생각은 지금 군 당국이 자체적으로 진행하려는 과거사 진상규명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는 지난 8월11일 군 사령관급 주요 지휘관과의 오찬에서 “우리 군은 오히려 과거 문제가 됐던 일들을 스스로 밝히는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정리해 나가는 결단이 필요하다고 본다. 군 조직으로서는 이 과정을 거치면서 국민의 신뢰를 얻게 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취임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통치에 대해 별로 언급한 것이 없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의 악용에 대해 증오감을 표출하거나 유신 시절에 일어난 의문사에 대한 진상조사위의 활동은 격려하면서도 유신 시절 이룩된 놀라운 경제성장에 대해서는 별다른 의사를 표명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는 박 대통령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민주당 경선 주자였던 2002년 2월 당시 ‘시사평론가’로 활동하던 유시민(열린우리당 국회의원) 씨와 가진 인터뷰에서 유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절에서 고시공부를 하는데 10월유신(1972년)이 났다. 학생 몇 사람이 술 먹고 울고 그러더라. 나도 심정이 비슷했다. 10월유신은 나에게 헌법책을 새로 사야 한다는 것, 공부를 새로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책을 읽고 공부하면서 모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시험을 위해 책에 있는 이론을 외우기는 외우는데 이론이 억지였으니 모멸감이 쌓일 수밖에….”
노 대통령은 1975년 사시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을 거쳐 1977년 판사가 됐다. 그는 “모멸감이 많이 쌓였다”고 했는데 별다른 저항 없이 9개월 정도 판사를 하다 부산에서 변호사를 개업한다. 그는 연수원 시절에 대해서는 이런 회고를 남겼다.
“연수원 강당에 태극기와 박정희 대통령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천장이 낮아 더 올라갈 데도 없었지만 박 대통령의 사진이 태극기보다 약간 높은 것처럼 보였다. 그것을 가지고 한 연수생이 왜 태극기보다 대통령의 사진이 더 높으냐고 지적했다. 지금 로펌 김&장에 가 있는 친구다. 그러자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전체가 수런수런 하는데 다른 친구가 일어나 ‘각자 알아서 몸조심하라’고 했다. 그런 저런 시절들이 다 우리에게는 모멸감이 축적되는 과정이었다.”
유신 때 대학 시절을 보낸 사람, 특히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던 사람에게 이 ‘모멸감’이라는 단어는 매우 익숙할 것이다. 그리고 ‘태극기와 대통령 사진’ 같은 케이스는 더러 있었는데 한나라당 이재오 의원도 비슷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는 당내에서 박근혜 대표를 ‘유신의 퍼스트레이디’라고 몰아세우며 칼을 던지고 있다. 지난달 전남 구례에서 열린 한나라당 연찬회에서 박 대표가 단상 밑 맨 앞줄에 앉아 있는 가운데 이의원은 단상에 올라 ‘유신의 폭력’을 규탄하면서 자신의 이런 경험을 얘기한 적이 있다.
그는 유신의 마지막 해인 1979년 여름 자신의 고향인 경북 영양에서 터진 ‘농민운동가 오원춘 탄압 사건’을 조사하러 내려간 적이 있다.
“안동댐에 들렀다. 그런데 댐을 건설할 때 죽은 인부들의 추모비는 조그맣게 뒤에 있는데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양이 물고기를 방생했다는 송덕비는 커다랗게 앞에 있었다. 그래서 어떤 자리에서 이게 말이 되느냐고 비판했더니 긴급조치 위반으로 나를 감옥에 넣더라.”
盧, 이승만·박정희 부정적 평가
‘모멸감’이 가슴에 차곡차곡 쌓여갔지만 노 대통령은 5공의 등장을 포함해 1980년의 전후를 평범하게 보낸다. 1979년 자신의 근거지인 부산에서 부마항쟁이라는 대규모 저항 사태가 터져도, 1980년 5월 광주에서 대규모 유혈탄압이 자행돼도 그는 그저 조세 전문 변호사 일에 몰두했다. 그리고 잘 알려진 대로 1981년 여름 부림(釜林) 사건의 학생 피고인들을 변호하면서 인권변호사로 인생의 방향을 확 바꾸게 된다.
이승만·박정희에 대한 노 대통령의 인식을 들여다보면 그가 김대중 대통령 집권 이전의 한국 현대사에 대해 매우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다. 그는 그 이전의 역사가 ‘했어야 할 일을 하지 못했던 역사, 건국·성장 같은 현실 밑에 통일·일제청산·민주 같은 진정한 가치가 눌렸던 역사’로 보는 것이다.
그는 2002년 2월의 인터뷰에서 이를 압축해 놓았다. “해방 후 우리에게는 매시기에 맞았던 큼직큼직한 과제들이 있었다. 통합된 민족국가를 세우고, 일제 잔재를 청산해 나가고,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는 것…. 이런 것들이 그 시기에 가장 중요했는데 정치인들이 그걸 가지고 판단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기를 놓치고 넘어왔던 것이다. 그 이후 개발의 와중에 민주주의와 인간적 가치가 다 훼손되고 그래서 국민이 엄청난 고통을 겪고 사회적 낭비가 일어났는데 이런 본질적 문제에 국민이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 우리의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저(低)신뢰’ 사회라는 것이다. 사회의 물질적 생산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서로 믿으면서 살아가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노 대통령이 ‘반쪽의 역사관’으로 달리는 것 아니냐는 시각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노 대통령은 이승만의 건국과 박정희의 근대화 성취를 나름대로 인정하는 균형적 시각을 가지고 있지만 과거사 정리라는 작금의 상황 속에서 이를 의식적으로 얘기할 만한 상황이 없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노 대통령의 핵심 측근으로 ‘정치적 풍향계’ ‘노심 바로미터’라는 평가를 받는 Q의원은 익명을 요구하며 이렇게 말했다.
“DJ는 야당 총재 시절 초선들에게 역사와 정치에 대해 강연하고는 했다. 그는 정치인은 상인적 현실감각과 서생적 문제의식을 고루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이승만 대통령은 전자에 강하고, 김구 선생은 후자에 몰두했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매우 실용적인 사람이다. DJ가 언급한 두 가지 측면을 다 추구하고 있다. 1988년 정치권에 들어온 이후 노 대통령으로서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말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노 대통령은 만약 기회가 생기면 독재·인권탄압이라는 과뿐 아니라 경제적 성취라는 공도 언급할 것이다. 그는 실제로 박정희에게는 그런 양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마오쩌둥의 過보다 功을 취한 덩샤오핑
대통령의 반열에 오른 정치 지도자가 대한민국의 과거 역사를 어떻게 평가하고 언급하느냐는 국민과 국가의 진로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특히 자라나는 세대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때문에 지도자는 평가에 균형을 잡는 것이 필요하다. 반드시 50 대 50이라는 산술적 균형이 아니라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있는 그대로 병행해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식 속에서는 공과를 동시에 평가하는데 바깥으로 드러난 말에서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면 이는 대통령의 역사 평가가 갖는 중요성과 파괴력을 간과하는 무책임이 될 것이다. 의식에 균형이 있다면 말이나 글로도 균형을 보여야 한다.
Q의원의 얘기대로 그가 실용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밝힐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라면 더욱 궁금증이 남는다. 그는 자신이 밀어붙이는 과거사 정리의 완승(完勝)만을 위해, 그리고 정권 재창출에 걸림돌이 될지도 모르는 ‘유신의 딸’을 견제하기 위해, 공과 균형평가론을 일부러 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전임 지도자, 특히 자신을 박해했던 인물을 매도하지 않고 ‘공과 병행평가론’을 적용함으로써 국가의 도약을 모색하고 자신 스스로 역사의 위대한 인물로 커버린 대표적인 경우가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이다. 중국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광기의 역사였던 문화대혁명을 역사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정리의 주체에는 덩을 비롯해 문화대혁명의 피해자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문화대혁명의 주역이었던 마오쩌둥(毛澤東)을 격하하지만은 않았다. 덩은 역사 문제에 대해 세 가지 기본 지침을 내렸다. 마오 주석의 과오를 인정하면서도 기본적으로 그의 공적을 평가할 것, 마오 사상을 확실히 계승할 것, 그리고 현대화의 추진과 단결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할 것이었다. 결국 중국공산당은 마오가 문화대혁명으로 중국에 저지른 죄보다 공산혁명을 주도함으로써 오늘의 중국을 탄생시킨 공을 더 인정하는 것으로 역사를 정리했다.
DJ의 핵심 측근인 모 전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박정희를 껴안음으로써 DJ의 역사적 그릇은 몇 배로 커졌다. 그런데 그 포옹을 지키지 못해 그릇은 깨졌다.”
박 대통령에게 노 대통령은 전두환·노태우 같은 후배 장군도 아니고 김영삼·김대중 같은 사생적(死生的) 라이벌도 아니었다. 노 대통령은 박정희에 대한 애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첫번째 대통령이다. 그가 국민적 화합을 위해 박정희를 비롯한 전임 대통령들의 공과를 균형있게 평가할 때 자신과 한국인의 역사의식은 한 단계 성숙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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