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적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들은 아버지를 혐오한다. 그리고 다짐한다. 난 커서 저 인간처럼 살진 않는다. 그런데 그 아들이 아버지가 되면 거의 폭력적 아버지가 된다. 폭력적이 되지 않기 위해선 적지 않은 노력이 요구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폭력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며 아버지와 똑같은 행동을 한다.
폭력은 유전이다. 습관과 관습은 핏줄을 타고 내려온다. 그래서 가문을 따지고 핏줄을 따지고 종자를 따지는 게다. 바람 피운 부모를 둔 자식은 신기하게도 대를 이어 바람을 핀다. 핏줄은 못 속인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전통적으로 범죄가 많은 동네도 그만한 이유가 있는거다. 유달리 충신이 많은 고장, 인재가 많이 나오는 가문도 있다. 자라온 환경과 여건과 피의 흐름은 곧 그에 맞는 인격이 되고 행동이 된다.
이 흐름을 끊는다는 건 대단한 도전과 용기가 필요하다. 조상의 불의한 유산을 끊고 정의의 삶을 살기는 힘들다. 피의 습성을 바꾸고 불의의 행위로 물려 받은 혜택도 거부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조기숙 청와대 수석의 삶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고장이나 나라나 가문이나, 그 전통과 문화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던 인물들이 있다. 좋은 사람이 나타나 결단을 하고 안좋은 유전을 끊고 옥토를 가꾸면 그 밭은 계속 옥토가 된다. 뭘 심든지 아름답게 자란다. 반대로 안좋은 사람이 나타나 좋은 밭을 다 망칠 수가 있다. 누군가 힘들게 밭을 개선시키지 않으면 그 밭은 계속 안좋은 밭이다.
좋게 만들긴 힘들고 말아먹기는 쉽다. 좋게 만들기 위해서는 걸리적거리고 저항하는 게 너무 많다. 안좋은 토양을 바꾸려면 양분을 빨아 먹으며 배를 불린 잡초들을 제거하고 돌덩이들을 제거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들은 결코 호락호락하게 제거당하지 않는다. 많은 저항에 부딪힌다.
박정희- 밭을 망치다
현대사에서 박정희라는 인간이 세대를 넘어 논란거리다. 잘했느니 못했느니 말이 많다. 그러나 전체주의를 혐오하는 열린사회주의자 관점에서 보면 그는 나오지 말았어야 할 인물이다. 왕조시대, 일제 식민지시대가 가고 새로운 민주 사회를 맞는 한국은 남북 분단이라는 암초를 만난다. 그리고 전쟁.. 한반도는 또 꼬이기 시작했다.
비록 가난은 했지만 순박하고 인정 많고 착한 한국이었다. 그러나 친일파와 이념대립을 이용해 득세를 한 수구들이 기득권을 쥐고 한국의 양분을 빨아 먹으며 토양을 망가트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박정희라는 인간이 나타나 폭력으로 정권을 잡더니 거의 20년동안 절대군주로 지배했다. 이 적지 않은 기간동안 한국의 토양은 황폐화가 됐다.
수구들은 곳곳에서 더욱 기승을 부리고 이념의 일방통행으로 한국사회는 숨을 자유롭게 쉴 수가 없었다. 오직 정권의 농간에 의해 전라도 경상도 따지지 않았던 백성들이 편을 갈라 싸우기 시작했고, 목적을 위해선 수단방법 가리지 않아도 되는 습성이 고착화됐다. 황폐화된 땅에서 그나마 싹을 키우는 민주화 목소리는 철저히 밟혀지고 정권은 우상화되고 이 사회 곳곳엔 경직된 군사문화가 자리잡았다.
박정희에 의해 황폐화된 토양은 전두환 노태우로 내려오면서 더욱 고착화 됐다. 북쪽의 김일성처럼 신격화된 박정희는, 추접한 현장에서 비명횡사 했음에도 수구 기득권들이 더욱 신격화시켜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다. 수구들에 의해 박정희는 부활되어 여전히 이 땅을 망가트리고 있다.
오랫동안 이 사회는 박정희를 중심으로 형성된 수구스러운 사고를 갖지 못하면 사회 부적격자로 찍히거나 빨갱이로 취급받아 왔다. 수구에게 양분을 다 빨리며 살면서도, 수구 기득권을 유지시키는 백성들...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그렇게 황폐한 땅에서 황폐한 사고를 강요받고 살아온 것이다.
노무현 - 황폐한 땅을 갈다
노무현이라는 사람이 정권을 쥔 것은 한국 현대사에서 이해하기가 불가능한 사건이다. 많은 분석이 있지만 이건 기적 그 자체라고 밖에 완전한 해석은 없다. 국민정부라는 조정기를 거쳤지만 그 기간이 너무 짧았고 아직 이 땅은 수구잡초 돌덩이들이 왕성한 황무지였기 때문이다.
어쨋든 기적이 발생해 노무현이라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유형의 지도자가 한국 통치자가 됐다. 그리고 4년이 흘렀다. 이 기간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우선 수구 잡초 돌덩이들의 끈질긴 저항이 있었다. 노무현이 쟁기를 잡고 밭을 갈려고 했기 때문이다. 취임 때부터 지금까지 4년간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대통령 욕이다. 이 땅의 모든 수구가 대통령 한 사람만 보고 가열차게 욕만 했다. 그 결과 지지율이 많이 떨어지고 정권은 힘을 어느정도 잃었다. 그래서 노무현은 과연 밭을 못갈았을까.
노무현은 권력을 잡았으면서도 박정희처럼 휘두르지 않았다. 박정희는 휘두르면서 밭을 망쳤는데 노무현 전혀 다른 스타일로 밭을 간다. 정권을 백성들의 눈높이에 맞추고 백성들과 대화하면서 그들 속에 내재된 민주적 본능을 조금씩 꺼냈다. 대통령을 욕해도 괜찮은 세상, 권력은 당신들과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백성들은 스스로 경험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체질을 바꾼다.
밭을 가는 건 단지 쟁기질만 해서 되는 건 아니다. 토양의 성질을 바꿔야 한다. 한국사회의 토양을 바꾸기 위해선 군사정권에서 오랫동안 고착화된 근성을 깨트려야 한다. 백성들에게 내재된 수구스러운 가치관을 바꿔야 한다. 강한 자에겐 비굴하고 약한 자를 짓밝는 의식구조, 지역주의 패거리 의식, 특권층을 중심으로 한 계급구조, 목적을 위해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문화, 군사독재의 잔재들...
이런 것들을 깨기 위해선 최고 권력이 먼저 아래도 내려와야 한다.덕분에 욕도 무지 먹지만 어느새 우리 사회는 권력과 동질감을 느끼는 사고방식이 만연되어 있다. 오랜 박정희 우상화 작업으로 아직도 그 인간을 존경하고, 그 인간의 딸을 대통령 만들고 싶다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람들은 이제 박정희 같은 절대 권력은 원하지 않는다. 이율배반의 구조이지만 이것은 과도기적 구도이기도 하다.
이것은 땅의 체질이 바뀌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제 백성들은 이후의 정권이 말을 조금만 강제해도 불편함을 느끼게 될 거다. 사회 구석구석에서 경직된 군사문화가 사라지고 망국적 지역주의도 상당히 희석되고 있다. 양극화 문제는 의식의 양극화 해소가 선결되어야 제대로다. 우리 사회 의식의 양극화는 이미 많은 부분이 무너졌다고 해도 무방하다.
누군가 욕을 무진장 먹으면서도, 거센 저항을 받으면서도 일관성을 가지고 땅을 부지런히 갈았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어느새 확 바뀌었다. 이 상태에서 어떤 세력이 정권을 잡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전체주의 회귀를 꿈꾸는 세력이 잡느냐 민주세력이 잡느냐는, 땅이 또 황폐될건가 아니면 더욱 박차를 가해 옥토가 될 건가의 가늠길이다.
다시 전체주의 시대를 만들려고 하면 땅은 강하게 저항한다. 그 체질이 이제 박정희같은 독재자가 활개칠만한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세력이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할 것 같나. 천만의 말씀이다. 정체성이 바뀌지 않는데 처음엔 가면을 쓰고 부드럽게 해도 어떤 순간에 본모습이 나올지 아무도 장담 못한다. 그러면 그 혼란과 갈등은 어떻게 감당할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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