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강재섭 의원의 성희롱 발언이 화제가 되고 있다. 이 사건은 정확하게 최연희 의원의 여기자 추행 사건, 그리고 한나라당 당직자의 강간 시도 사건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앞의 두 사건은 구체적인 인격체를 대상으로 저질러진 실제적 행동이며, 후자는 말의 문제에 불과하며, 추행이나 희롱의 특정 대상은 없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사건들, 그 중에서도 두 사람의 국회의원이 저지른 행동은 구조적으로 완전히 똑같은 맥락 위에 놓여 있으며, 윤리적으로 똑같이 유해하다. 두 사건은 똑같은 맥락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저질러진 폭력이다. 많은 사람들은 두 의원이 각기 저지른 성추행과 성희롱만을 문제삼는다. 그러나 정작 더 큰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복기해 보자. 최연희 의원의 성추행 사건은 당시 한나라당 당대표였던 박근혜 의원이 직접 주재한 술자리에서 벌어졌다. 이른바 언론과의 상견례 자리에서 벌어진 일이다. 강재섭 의원의 성희롱도 똑같이 언론과의 술자리에서 벌어졌다. 최연희 의원의 성추행은 신임 당직자들과 언론사 상견례를 하자는 박근혜 전대표 측의 요청에 따라 마련되었고, 강재섭 의원의 사건은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언론과 한나라당의 관계를 확인하기 위한 자리에서 벌어졌다.
즉, 두 가지 사건이 벌어진 맥락은 표면적으로는 둘다 <공적>이다. 공당이 공적 기관인 언론과 만나는 자리인 것이다. 그러나 한번 더 들여다보면 이 공적인 맥락이 완전히 가짜 기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공당의 의원들이 공적인 임무로 기자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상견례>를 해야 할 필요가 없다. 서로가 해야 할 일을 특별한 개인에 대한 사전 지식, 또는 정서적 편견 없이 객관적으로 수행하면 그만이다. <상견례>란, 이러한 공적 만남을 사적 만남으로 바꾸기 위한 시도이다. 상견례는 서로 마주보기(相見)를 전제로 한다.
즉, 눈길 마주치기, 상대방이 공적 지평 안에서 보편적으로 만나게 되는 무덤덤한 불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살갑게 특별히 아는, 정서적으로 특별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개인으로 만들기. 얼굴을 맞댄다는 것은 개인성의 가장 대표적 지표인 상대방의 <얼굴>의 정보를 그 개인의 특수성으로 인식 안에 각인시킨다는 뜻이다.
공당의 대표인 박근혜 전대표와 강재섭 현대표는 대표의 직함으로 공적인 가면을 쓰고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자리를 주재한 것이다. 이러한 자리에 술은 빠질 수 없다. 술은 죄의식을 감추는 역할을 한다. 술은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뒤섞고, 분별하는 이성을 마비시킨다.
한나라당과 언론의 술자리가 어떤 성격을 지니는가는 언론과의 술자리, 또는 공적인 자리라는 이름을 가진 사적 이익 추구의 제의를 집전하면서 한 정당의 대표라는 분이 입을 열어 말한 모두 발언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기사를 인용하면, 강재섭 대표는 인사말에서 "금년은 언론과 한나라당이 뒹굴면서 선거를 치러야 하는데 뒹구는 연습도 해야 하고 해 자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이 말은 강재섭 대표가 언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너무나 솔직하게 보여준다. 강재섭 대표에게 언론은 “함께 뒹구는” 사이이다. 언론은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을 그 기본 소명으로 한다. 조선 중앙 동아를 위시한 우리 나라 언론은(이번에 문제가 된 문화일보를 포함해서) 대통령에 대한 가혹한 비판이 문제될 때마다 “비판은 언론의 고유 역할”이라는 말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해 왔다.
그러나 그 <비판>은 특정 세력만을 겨냥한다. 우리 나라 거대 언론은 한나라당에 대해서는 “언론의 고유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한나라당과는 껴안고 “뒹구는” 사이이다.
성적인 환기력이 강한 “뒹구는”이라는 용어는 우연히 선택된 것일까? 그리고 강재섭 대표의 민망스럽기 그지없는 마초적 발언을 끌어낸, 저급한 마초적 판타지 덩어리인 문화일보의 ‘강안남자’는 우연히 선택된 화제였을까? 왜 하필 언론사와의 자리에서 이런 성적 문제들이 빈번히 불거져 나오는 것일까? 그리고 그런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왜 하필 언제나 한나라당일까?
나는 이 <성적 사건>은 한나라당과 언론의 권력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즉, 한나라당이 언론과의 관계에서 심리적으로 스스로를 <남성>, 즉 <강자>로 설정했기 때문에 벌어진 사건이라고 보는 것이다.
권력 관계의 가장 기초적인 양태는 <여성>과 <남성>의 관계로 나타난다. 남녀 상징은 생물학적 사실과 관계없이 권력의 그물망에서 상대적인 권력 구조를 형성할 때 흔히 사용된다. 예를 들면, 버림받은 신하는 애절한 마음으로 임금을 부르는 시를 쓸 때, 자신의 생물학적 성과 관계없이 자신을 여성의 자리에 가져다놓는다. 사랑하는 신을 갈구하는 신비주의자 남성은 여성의 목소리로 애타게 신을 부른다. 박상륭은 “모든 有情은 신 앞에서 암컷이다”라는 구절로 이런 권력 관계를 요약한다. 물론, 이런 형이상학적 시도에서 신과 인간 영혼의 권력 관계란 훨씬 더 심오한 뜻을 가지기는 하지만 말이다.
한나라당과 언론과의 관계에서 권력관계는 남성과 여성으로 자리매김된다. 저급한 남성성의 소유자들은 <음담패설>을 늘어놓는 것이 남성다움의 지표라고 착각한다. 최연희 의원과 강재섭 의원은 언론-여성 앞에서 스스로를 힘있는 권력자로 자리매김하고, 그리고 그 남성다움을 과시하기 위해서 매우 <수컷다운> 태도와 표현으로 자리를 주도한 것이다.
언론은 한나라당 앞에서 약자인 여성, 말 잘 듣는, 즉 상하 권력관계를 수긍하는 주체성 없는 연인의 위치로 전락한다. 따라서 한나라당과 언론과의 술자리에서 성적인 사건이 벌어지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한나라당은 언론을 사랑스럽고 의존적인 자신의 연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의 관계는 “껴안고 뒹구는 사이”, 언론은 한나라당에는 자신이 <수컷다움>으로 충만한 권력자임을 확인시켜주는 말 잘 듣는 연약한 수동적 여성일 뿐이다.
|
 |
|
|
|
▲ 김정란 상지대 교수 |
|
| 똑같은 자리를 마련해서 똑같은 행동을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이 한번 시험삼아 해봤으면 좋겠다. 언론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꼭 한번 보고 싶다. 이런 저급한 멘털리티의 소유자들이 대통령을 향해 막말을 했다고 비난을 쏟아낸다.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한나라당과 언론과의 술자리에서 터져나오는 성적인 사건들은 매우 상징적이다. 한나라당은 앞으로는 언론의 공정성을 주문하면서, 뒤로는 언론과의 비정상적인 유착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그 유착관계 안에서 성적인 사건들은 마치 스스로의 거짓을 견딜 수 없다는 듯 터져나온다. 이 거짓 게임의 끝은 어디로 이르는 것일까?
한쪽에서는 대통령이 언론에게 얻어맞아 피를 흘리고 있고, 한쪽에서는 언론과 껴안고 “뒹군다.” 2007년 대한민국 정치는 다시 코메디로 그 장을 연다. 2007년 1월, 내 삶은 벌써 흥미진진하다. 이런 정당이 50%에 육박하는 지지율을 자랑하는 나라. 이런 정당과 껴안고 “뒹구는” 언론이 입만 벌리면 자신의 공정성을 자랑하는 나라. 그보다 더 흥미진진한 코메디를 어디에 가서 또 구경하겠는가? 잘 보아두었다가 증언하리라. 어떤 결론이 나더라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 땅에서의 삶은 놀라운 발견과 깨달음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