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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세 고승:性徹

 

동산 문하로 출가 전설적 수행일화 남겨
‘가야산 한 소리’들려오면 중생계 ‘움찔’

뚜렷한 깨달음(圓覺) 널리 비치니
고요함(寂)과 없어짐(滅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萬物)은 관음(觀音)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妙音)이라.
보고 듣는 이것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아아 여기 모인 대중(詩會大衆)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그것은 충격이었다. 세속에 찌든 일상을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산승(山僧) 성철(性徹)의 한 소리(一喝)는 우주를 뒤흔들 만큼 큰 고함(一喝)으로 다가왔다. 저자거리에서, 전방에서, 대폿집에서, 가정에서 ‘산은 산 물은 물’은 화제거리이자 화두(話頭)였다. 그는 그렇게 우리 대중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중생들은 조계종 종정 성철을 통해 비로소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삶의 진정한 가치를 되돌아보려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 가히 ‘성철 현상’이라 부를 만했다.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넘친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지니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도다.
둥근 수레바퀴 붉은 해를 토하며 푸른산에 걸렸다.
生年欺 男女郡
彌天罪業過須彌
活焰阿鼻恨萬端
一輪吐紅掛碧山

역시 세상에 화제가 된 열반송(涅槃頌)을 남기고 마침내 그가 이생과의 인연을 접던 날에도 수십 수백만의 인파가 그의 떠남을 조문(弔問)하기 위해 가야산으로 몰려들었다. 대구에서 해인사까지의 결코 짧지 않은 도로는 사람과 차량들로 메워진 채 북새통을 이루었다. 해인사가 창건된 이래, 아니 가야산이 생긴 이래 초유의 일이었다. 거기에는 불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종교를 가진 이도 있었고, 신분이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있었다. 모두가 오로지 이 시대 한 위대한 정신적 지도자가 중생들의 곁을 떠나갔다는 아쉬움으로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한 위대한 스승의 죽음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의미를 던져줄 수 있는지의 한계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방송과 신문 등 각종매체가 몰려들었고, 국내는 물론 외신기자들의 취재경쟁도 식을 줄 몰랐다.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언론들이 성철의 열반을 다투어 대서특필했다. 가야산에 묻혀 있다가 홀연히 그 육신의 굴레을 벗은 성철은 그의 마지막 해탈법문을 통해 세계 수 십억 중생들의 가슴에 진한 감동과 여운을 남기는 사자후를 설파한 셈이었다. 그의 입적과 함께 열풍처럼 불어닥친 ‘성철 현상’은 이렇듯 국경을 훌쩍 뛰어넘어 세계로 번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최고의 진리를 일생을 걸쳐 일관되게 추구했던 수행자. 영원한 진리를 위해 일체를 희생한 도인. 오직 절대의 진리에 부합하는 일관된 삶을 살아갈 것이라는 출가당시 자신과의 약속을 평생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지켰던 주인공. 그리고 털끝만치도 자신의 양심을 속이지 않은 채 일생을 마친 위대한 스승.”

성철(性徹)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정리해 평가한다. 실제로 그의 일생은 오직 진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는 것(爲法忘軀)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성철이라는 한 인물을 제대로 평가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를, 그리고 그가 보여준 일생을 간단히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성철은 한국불교사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큰 족적을 남긴 거목이었다.

성철의 속명은 이영주. 그는 1912년 지리산 산봉우리가 아스라이 보이는 경남 산청에서 태어났다. 서당에서 〈자치통감〉을 배우고 진주공립중학교를 졸업한 후 청년시절 방황의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하이네의 시집을 통독하고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몰두하면서 영원한 자유를 갈망하게 되었다. 스무살에 결혼을 하여 두 딸을 낳을 때까지도 청년 이영주에게는 불연(佛緣)이 찾아오지 않았다. 〈사서삼경〉이나 〈노자〉, 〈장자〉, 〈행복론〉이나 기독교의 신구약 〈성서〉, 〈자본론〉, 〈유물론〉 등 100여 권에 가까운 책을 독파하고 있었지만 불교서적과는 인연이 닿질 않았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운명처럼 다가온 탁발승이 있었으니, 이 무명의 탁발승으로부터 건네 받은 영가대사의 〈증도가(證道歌)〉 한 권이 청년 이영주를 한국불교현대사의 거목으로 자리매김시키는 단초가 될 줄이야! 이영주는 〈증도가〉를 읽고는 대자유를 향한 구도의 마음을 냈으니 그의 새 인생을 향한 위대한 출발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그는 가까운 대원사로 갔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의 선지(禪旨)를 밝혀줄 스승을 만나지 못했다. 마침 백련암에 있던 동산 화상이 성철의 그릇을 알아보고 삭발을 권유했으니 이 때가 1935년 그의 나이 23세 되던 해였다.

동산은 청년 이영주를 자신의 제자로 출가시킨 것을 매우 흐뭇하게 여겼다. 그래서 법명도 다른 제자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서원을 담은 성철로 지었다. 성철이라는 법명은 자성(自性)을 확철(確徹)하게 깨쳐 부처를 이루하는 뜻을 담은 것이었다. 동산은 성철이 정진하던 퇴설당을 자주 기웃거리곤 했다. 성철이 자신의 기대대로 공부를 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성철의 그릇을 단박에 알아본 당대의 선지식 동산 화상과의 만남은 그에게 있어서 순풍에 돛을 단 격이었다.

우리시대 생불로 추앙받던 고승, 절집에서는 ‘철 수좌’ ‘가야산 호랑이’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던 퇴옹 성철의 성불을 향한 치열한 구도행은 이렇게 시작됐다. 천성이 근면한지라 수행에 있어서도 성철은 비범한 면이 많았다. 그는 본격적인 출가수행을 시작하며 ‘상(相), 그러니까 집착하고 머무는 마음을 끊어낸 바위’로 해인사 대중들에게 알려전 절상대(絶相臺)로 올라가 이른바 출가수행에 임하는 굳은 마음가짐을 표현한 시를 읊었으니, 이러하다.

하늘에 넘치는 큰 일들은
붉은 화롯불에 한 점 눈송이요.
바다를 덮는 큰 기틀이라도
밝은 햇볕에 한 방울 이슬일세.
그 누가 잠깐의 꿈속 세상에
꿈을 꾸며 살다가 죽어가랴.
만고의 진리를 향해 모든 것 다 버리고
초연히 내 홀로 걸어가노라.
彌天大業紅爐雪
跨海雄基赫日露
誰人甘死片時夢
超然獨步萬古眞

성철은 이처럼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는 길을 향한 출발점에 서서 진리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릴 각오를 세웠다. 그렇기에 정진에 임하는 자세가 남달랐다. 더구나 해인사의 분위기가 수행을 하는데는 제격이어서 이른바 ‘중노릇’을 익히는데는 더할 수 없이 좋았다.

오로지 진리를 위한 수행에 철저하기를 목숨 바쳐 서원한 성철이었기에 그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는 얼음장처럼 비정했다. 그는 특히 자기 자신에게 무섭도록 가혹했다. 속가 가족이 찾아올라치면 냉정히 돌아서거나 자리를 피했다. 훗날 출가하여 스님이 된 어린 딸(불필 스님)이 월례 묘관음사로 찾아왔을 때도 주위 사람들이 무안할 정도로 쌀쌀하게 대했다.

그러나 성철의 진면목이 매정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성전암에서 수행을 할 때 일명 ‘구구보살’로 불렸던 산비둘기와의 일화는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넘어선 성철의 친화력을 보여주고 있다.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미처 눈을 뜨지 못한 산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지고 내려오던 마을 사람들에게 비둘기를 달라고 해서 성철이 직접 기른 이야기인데, 이 비둘기가 나중에는 방에서 함께 지낼 정도로 한 가족이 되어 살았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다. 성철이 성전암에서의 수행을 마치고 부산으로 떠나는 날 이 산비둘기가 파계사까지 따라오다가 “구구보살, 니 집은 성전암이 아니가. 어서 돌아가그래이. 바람이 찹다.”는 성철의 말을 듣고는 성전암으로 날아 올라갔다는 것이다.

해인사와 범어사, 통도사, 팔공산 운부암, 묘관음사, 성전암, 금강산 마하연 등 내로라하는 수행처를 돌며 용맹정진을 거듭한 성철은 동화사 선방인 금당에서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참선삼매에 빠져들었다. 그때가 출가한지 3년째였는데, 꿈속에서도 화두가 확연히 들리는 몽중일여(夢中一如)의 경지를 넘어 숙면일여(熟眠一如)의 경지로 나아가는 경계에 이른 것이었다. 미세한 번뇌 한 점 없는 맑은 거울자리에서 자신의 마음자리를 확연히 본 성철은 순간, 좌복을 박차고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흰 구름이 드문드문 걸려있는 팔공산 자락을 바라보던 성철이 이윽고 그윽한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은 자신의 이름대로 자성을 확철하게 본 기쁨에서 터져 나오는 법열(法悅)의 미소였다. 성철의 입가가 마치 꽃망울이 터져 활짝 피어나듯 벌어졌다. 그리고는 한 편의 시가 흘러 나왔으니, 다름 아닌 깨달음의 노래였다.

곤륜산 정상에 치솟아 올랐으니
해와 달은 빛을 잃고 땅은 꺼져 내리도다.
문득 한번 웃고 머리를 돌려 서니
청산은 예이로대 흰 구름 속에 섰네.
黃河西流崑崙山
日月無光大地沈
遽然一笑回首立
靑山依舊白雲中

봉암사에서 청담 자운 월산 등과 함께 한국불교를 바로세우는 대결사를 주도한 성철은 후학들을 지도하는 것에서도 남다른 면이 많았다. 봉암사에서 수행하던 납자들 중에는 성철의 혹독한 수행지도에 불만을 품고 떠나는 사람도 있었지만 눈 한번 꿈쩍이는 법이 없었다.

어느 날, 선방에서 한 바탕 소란이 일었다. 성철이 갑작이 선방의 문을 확 열어젖히고 들어오더니 참선 중이던 납자들에게 ‘밥값 내 놓으라’고 고함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누구도 대답을 못하자 이번에는 닥치는대로 멱살을 잡고 향로를 던지고 다기상을 뒤엎는 등 선방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공짜로 먹은 밥값을 내놓거라. 이 곰새끼들아.’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미친 듯이 손찌검과 멱살잡이를 계속하자 수좌들은 혼비백산 선방 바깥으로 쫓겨나왔다. 모두가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고 시간과 밥만 축내고 있는 것을 경계하려는 뜻이었다. 하기야 성철은 자신의 평생 도반이자 연장자이기도 했던 청담조차도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며 계곡으로 끌고 가 물 속에 빠뜨리기도 했을 정도였으니 후학과 도반을 깨달음의 세계로 이끌려는 그의 열정은 사람의 경지를 넘어선 것이었다.

수많은 일화와 화제를 남겼기에 성철이 보여준 살림살이는 얼핏 화려하고 도드라졌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실제 성철의 일생은 의외로 다른 선사들에 비교해도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그의 삶의 모습 자체가 운수(雲水)의 질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철은 자기개오(自己開悟)에만 열중했을 뿐 한번도 다른 일에 관심을 기울이거나 기웃거린 적이 없었다. 어느 곳에 가든 그는 바위처럼 눌러앉아 스스로 자연이 되었다. 물이 되었고, 바람이 되었고, 또 나무와 그 나무에 걸친 구름이 되었다. 우주와 하나가 되어 그 근원을 확연히 꿰뚫어 보고 그 속에서 무한한 생명력을 분출시키며, 마침내 그 스스로 우주가 되었던 것이다.

봉암사 결사나, 성전암의 철조망 수행, 장좌불와 정진이나 친견을 원하는 신도들에게 3000배를 시키는 원칙 등 이른바 ‘성철 불교’로 일컬어지는 것들은 모두가 내심자증(內心自證)에 무섭도록 철저했던 그만의 원칙이 만들어낸 부수물에 지나지 않았다.

세연(世緣)이 다했음을 직감한 성철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열반송을 남긴 후, 자신과의 이별을 슬퍼하며 모여든 제자들에 둘러싸인 채 하나하나 이승의 인연을 접어가고 있었다. 혜암, 법전, 원융, 원택, 불필 등이 밤을 밝혀 지켜보는 가운데 원택의 어깨에 기대어 있던 성철은 이미 가늘어진 숨결을 가다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마지막 유훈(遺訓)을 남겼다.

“참선 잘하그래이 … .”


■연보
1912년 4월 10일 경남 산청 출생
1935년 3월 해인사에서 동산 화상을 은사로 득도
1937년 7월 해인사 대교과 졸업
1935년 4월 범어사에서 수선안거 이래 35하안거 성취
1950년 7월 대덕법계 품수
1967년 해인총림 초대방장 취임
1981년 1월 조계종 제7대 종정 취임
1993년 11월 4일 해인사 퇴설당에서 열반

돈오돈수·보우 종조설 등 독특한 ‘가풍’ 일궈
뭇중생엔 ‘위대한 스승 가졌다는 행복감’ 선물

‘경허 선사로부터 발원한 근대 한국 선불교의 물줄기는 만공, 용성, 한암, 만해, 효봉, 동산, 금오, 경봉, 전강, 구산 등으로 이어오다가 마침내 성철에 이르러 그 흐름의 깊이와 넓이를 더해 장강(長江)을 이루었다.’

성철은 역대 선사들의 지향을 한 구비 마무리짓고, 하나의 큰 흐름을 이루면서 ‘한국 선’의 독특한 개성을 일군 장본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 선은 성철로 인해 비로소 그 맛과 깊이를 달리할 수 있었음이다.

그의 칼날 같은 원칙주의, 종교적 허상에 대한 과감한 혁파, 엉터리 수행생활에 대한 타협없는 배척 등은 당시에도 절집 안에 상존하고 있던 대충 중노릇을 하며 살아가려던 사람들에게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성철은 일생을 철저히 선승으로 일관했다. 말년에 조계종 종정에 추대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스스로 원해서 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종정에 올랐든 산승으로 머물러 있든 그의 일상은 손톱만큼의 변화도 없었다. 젊어서 수행을 하는 동안이나 견성을 한 이후의 보임행을 하는 동안에도 성철은 그 흔한 주지자리 한번 앉은 적이 없었다. 좌선을 풀고 저자거리를 내려오거나 종정직에 추대되었다고 해서 종단행정의 중심지인 서울 땅을 단 한 차례도 밟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중은 중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초지일관한 신조였고, 그는 이를 지켰다.

성철은 한국불교에 엄존하던 잘못된 사상이나 관념을 송두리째 뒤엎어 버리는 일을 거침없이 주창하고 실행에 옮겼다. 그 대표적인 것이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배격하고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창한 것이었는데, 그는 절집에 돈오점수가 팽배한 것은 옛부터 흘러내려온 조계종의 선지(禪旨)가 왜곡돼 있으며, 이를 바로잡는 것이 자신의 책무라고 생각했다. 또 조계종의 종조(宗祖) 논쟁과 같은 미묘한 사안에 대해서도 조계종조는 보조지눌이 아니고 임제의 법맥을 계승한 태고보우 국사가 종조라는 학설을 설파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가장 가까운 도반 청담이 주도했던 정화불사에도 성철은 자신의 입장을 견지하며 동참을 거부했다. 진정한 정화는 물리적 수단이 아닌 치열한 수행정진으로 가능한 것이라는 신념으로 오히려 성전암에 철조망을 치고 8년 장좌불와에 들어갔던 것이다. ‘청담이 외형적 정화를 하고 내면적 정화는 성철이 이끌었다’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성철이 입적하자 많은 사람들은 우리 시대 큰 스승을 떠나보냈다는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나갔다는 소식을 접하고서야 그의 그늘이 얼마나 컸던가를 깨우쳐 아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성철의 입적에 대한 국민적 슬픔은 계층과 지역과 신앙의 차이를 훌쩍 넘어 선 것이었다. 한 사람의 죽음이 이토록 엄청난 반향을 일으킬 수 있다는데 사람들은 적잖이 놀랐다. 사람들은 성철을 일러 한 세상을 풍미하고 간 위대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아끼지 않았다. 이는 비록 가야산 중에서 칩거하며 세간에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으나 그의 법력은 시공을 뛰어넘어 낱낱의 중생들에게 미치고 있었다는 반증이 아닐 수 없었다.

해가 바뀔 때마다, 부처님 오신날이 다가올 때마다 국민들은 성철 종정의 법어(法語)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때마다 들려오던 청량법음에 속진의 잔재를 씻어내곤 했다. 성철이 입적에 들자 ‘이제는 큰스님의 법음을 들을 수 없게 되었다’는 탄식이 곳곳에서 들려왔을 정도로 성철은 만중생의 스승으로 모른 새 우뚝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장과 공자가 손을 잡고 석가와 예수가 발을 맞추어 뒷동산과 앞뜰에서 태평가를 합창하니 성인, 악마가 사라지고 천당, 지옥이 흔적조차 없습니다. 장엄한 법당에는 아멘 소리 진동하고 화려한 교회에는 염불 소리 요란하니 검다 희다 싸움이 꿈속입니다.”

86년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마침 종교간 분쟁과 갈등이 심화되던 때에 터져나온 성철의 이 법어는 뭇 중생들에게 뜨거운 여름날 퍼붓는 한 줄기 얼음 우박 같은 것이었다. 올바른 종교인이란 자신이 믿는 교주조차도 뛰어 넘을 수 있어야 한다고, 그곳에 안주하고 집착하다 보면 종교의 진수를 잃어버리게 된다고, 또 석가나 예수는 법당이나 교회, 성당에만 거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어느 곳이든 항상 충만해 계시다는 성철의 법어는 종교적 편견이나 도그마에 빠져 또 하나의 구속을 자초하던 이 땅의 종교인들에게 큰 깨우침이 되었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성철의 당시 법어는 가히 일반인의 고정관념을 송두리째 깨뜨리는 것이었으니, 모르는 사이에 틀에 박힌 생활을 하던 국민들에겐 한 마디 한 마디가 정문일침(頂門一鍼)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교도소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술집에서 웃음을 파는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모든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성품이 있고(一切衆生 悉有佛性), 따라서 중생은 아직 깨닫지 못한 부처요, 부처는 깨달은 중생일진대 어느 것 하나 부처가 아닐 수 있겠는가마는 부처님 오신날 성철이 종정 법어에서 죄수와 술집 창부를 부처님이라고 지칭한 것은 당시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수행 깊은 선사라면 누구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一草一木)이 부처님 법신 아님이 없고 우주만물이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을 다 했을 것이고, 누누이 이 점을 강조했을 것이지만 유독 성철의 입을 통해서 나온 말이 큰 반향을 일으키는 것은 줄탁동기를 꿰뚫는 성철의 탁월한 안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따금씩 법문을 통해 성철이 보내는 메시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절집 안에서도 많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만큼 그의 가풍이 독특했다는 것인데, 사실 따지고 보면 그의 가풍이란 진리에 무섭도록 철저했던 살림살이가 만들어낸 불가피한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었다.

어떤 도적놈이
나의 가사장삼을 빌어 입고
부처를 팔아
자꾸 죄만 짓는다.
云何賊人
假我衣服
裨販如來
造種種業

어느 날 성철은 법상에 올라 이 게송을 읊었다. 승려가 되어 가사장삼을 입고 도를 닦아 중생을 제도하지 않고 부처를 팔아먹고 사는 사람은 모두가 도적놈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만일 이런 자가 절에 있다면 그 절은 절이 아니라 도적의 소굴, 즉 적굴(賊窟)일 뿐이라며 해이해진 승풍을 신랄하게 질타했다. 성철이 아니면 감히 들을 수가 없는 일침이었다.

성철의 일반 불자들을 상대로 한 법문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6·25 한국전쟁 이전 문경 봉암사에서 수행을 할 때 도반 향곡으로부터 부산 신도들에게 법문을 한 번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는 법문을 한 적이 있었다. 법당 안에 빼곡이 들어찬 신도들을 향해 성철이 입을 열었다.

“불공이란 남을 도와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절에서 목탁 두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절이란 불공을 하는 곳이 아니라 불공하는 법을 가르치는 곳이니 불공은 절이 아니라 절 바깥에서 하는 것이라 이 말입니다.”

이 일로 각 절과 도종무원, 심지어 중앙의 총무원에서까지 “성철의 요상한 법문 때문에 앞으로 절은 모두 쪽박을 차게 생겼다”며 긴급 대책회의를 갖는 등 부산을 떨었다. 성철을 찾아가 항의를 하고, 싫은 소리를 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럼, 어떻게 말할까. 당신들 말대로라면 부처님은 영험하고 도력이 있으니 누구든지 돈과 재물을 많이 갖다 놓으면 놓을수록 복이 많이 들어온다고, 절에 돈벌이 많이 되도록 그렇게 선전할까.

 

한토마 펌



▒ 마왕 ▒
2007-01-06 22:4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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