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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와 노무현

 

저는 바둑을 좋아합니다. 기력은 기원에서 5급 수준이지만 바둑고수들에 관한 여러 가지 일화, 상식에는 제게 4점을 접어주고 두는 1급의 고수들도 제 의견에 한 수 접습니다. 보통 제 수준 정도의 기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화려한 공격수의 유창혁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고, 요즘은 이세돌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차피 바둑무림고수들의 전투를 다 이해할 수준도 아니지만 이왕이면 화려하고, 날카롭게 맥점을 짚어 가는 현란한 수를 보면서 경탄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서봉수와 이창호를 좋아합니다. 자꾸 누군가를 연상시킨답니다. ^^ 특히 이창호를 좋아합니다. 그의 어눌함이 좋고, 그의 뭉툭함이 좋습니다. 그냥 좋습니다. 결국엔 이기거든요.^^ 바둑용어에 전에 없었던 새로운 용어가 있습니다. 이른바 '이창호의 꼬부림'이죠. 바둑판은 넓고 큰 곳은 엄청 많은데 느려 터지고, 한가한 수를 둡니다. 그게 꼬부림입니다. 사람들은 '이창호는 끝내기가 최고'라고 얘기하지만 제 생각은 틀립니다. 이미 초중반에 두었던 느려 터지게 답답한 수들이 결국 종반에는 대세를 장악하고 역전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요.

이창호가 나타나서 성적을 내기 시작했을 때, 프로들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약한 데가 많은데 잘 이긴다.", "이창호는 다만 기다릴 뿐인데 왜 다른 기사들이 지레 무너지는 줄 모르겠다." 막상 자기들은 이겨내지 못하면서도 '약한 데가 많은데...왜?'라며 의문을 나타내곤 했습니다. 만약에 바둑이 승패가 명확한 게임이 아니고, 이창호가 10여 년 이상 세계를 제패하지 않았다면 이창호에 대한 평가는 그렇게... 기존의 고수들이 평가한 바로 그 수준으로 끝났을 겁니다.

이창호가 나타나자마자 "이창호가 나보다 상수"라고 일찌감치 인정해 버린 인물이 있는데 그가 바로 서봉수입니다. 서봉수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일본유학을 하고 와야만 엘리트코스를 밟는 수순이었지만, 서봉수는 15세에 뒤늦게 스스로 바둑을 배운 순수 국내파입니다. 그래서 서봉수의 바둑을 '된장바둑'이라고도 하고 '잡초류'라고도 합니다. '잡초류'... 엘리트들이 은근히 무시하며 부르는 듯한 '잡초류'. 그래도 저는 그 별명을 좋아합니다. 밟아도 밟아도 무너지지 않는 자생력, 밟고 또 밟아서 이제는 죽었거니 싶었는데 슬며시 일어나는 불굴의 의지가 있다는 뜻도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창호에 대해 가장 많은 글을 쓴 사람이 있는데 박치문 바둑평론가입니다. 그가 얘기하는 이창호론에 대해서 대부분 공감하고 좋아하지만 전혀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이창호 '흑도(黑道)론'입니다. 처음엔 소설가 김성동 씨가 얘기했지만 나쁜 뜻으로 평가한 건 아닙니다. " 화려하고도 밝게 빛나는 수의 조훈현, 유창혁은 분명 백도다. 이창호는 둔중하고 둔탁하므로 그 반대다. 백도의 반대는 흑도다." 라고 했지요. 그 후에 흑도라는 말을 많이 인용하는 사람이 박치문입니다. 그가 이창호를 압축해서 표현한 말이 '뭉툭한 선'인데... '약해 보이는데 전혀 약하지 않은 실력'때문에 흑도라고 표현하는지 모르지만 이창호를 흑도라고 규정하는 것은 이창호가 도달한 경지, 그 심오한 경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나온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무협에서 말하는 흑도는 역천(逆天)의 무공으로 속성으로 연마가 가능하며 파괴를 추구하고 그 무공초식이 음독하고 궤의(軌異)하고 악랄한 특징이 있습니다. 백도는 정종무공이고 오래도록 연마해야 상승의 경지에 달하며 광명정대한 초식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렇다면 바둑에 흑도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궤의한 초식으로 상대방을 희롱하고, 꼼수나 변칙수를 두는 아마추어에나 해당된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이러한 바둑은 대성하기가 힘들고, 일정부분의 실력에 달하면 더 이상은 실력이 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프로수준의 바둑기사라면 누구나 그 내공이 충실한 정종무공을 바탕으로 한 백도라고 얘기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중 단연 백미는 이창호입니다. 부드럽고 느리며 무거운 정종무공을 대성했기 때문에 하수들은 알아보지 못할 뿐입니다.

대지(大智)는 약우(若愚)라고 합니다. 크게 지혜로운 자가 오히려 어리석어 보인다는 말입니다. 이 시대의 절대강자 이창호와 노무현... 바로 그들을 가리키는 말인가 봅니다.

"어릴 적 목수가 집을 짓는 것을 보았는데 오전 내내 연장만 벼리고 있다고 타박 받는 목수를 봤다. 그런데 해질 무렵 보니 집을 훨씬 빨리 짓더라. 연장을 잘 벼릴 줄 알아야 최고의 목수다." - 노무현 대통령 발언록 중에서 -



ⓒ 애체



2007-01-18 08:33:45
652 번 읽음
  총 1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1. 데이스토리 '07.1.18 8:36 AM 신고
    "어릴 적 목수가 집을 짓는 것을 보았는데 오전 내내 연장만 벼리고 있다고 타박 받는 목수를 봤다. 그런데 해질 무렵 보니 집을 훨씬 빨리 짓더라. 연장을 잘 벼릴 줄 알아야 최고의 목수다." - 노무현 대통령 발언록 중에서 - ↓댓글에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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