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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사건에 대한 이해

 
인혁당사건에 대한 이해




인혁당사건과 비슷한 사건이 미국의 로젠버그사건이다. 로젠버그 부부는 미국에서 반공분위기가 심할 때 즉 1953년 소련간첩죄로 처형되었는데 이렇다할 증거는 없었고 로젠버그 처남의 증언이 증거로는 유일하였다. 당시 미국대통령 아이젠하워는 완고하였다. 그는 공산주의를 "죽음의 세균"으로 여기고 있었다.




많은 지식인들이 로젠버그 구명운동을 했고 이 사건을 현대판 마녀사냥이라고 불렀다. 미국변호사협회는 1992년 이 사건을 다시 재판에 붙여 결국 무죄판결을 받아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미국정부는 반세기동안 비밀에 붙여온 문서를 1995년 공개했는데 그것은 1급 비밀정보로서 베노나프로젝트에 관한 문서였다. 이는 소련의 암호교신을 해독한 문서였는데 이 문서에 의해 로젠버그부부는 소련의 간첩임이 확인되었던 것이다. 결국 로젠버그는 /유죄->무죄->다시 유죄/로 판명난 것이다.




인혁당관련자들이 무죄판결을 받았다고 언론에서 많이 보도하는데 이것을 보면 흡사 로젠버그 사건을 보는 것 같다. 인혁당에 대해 바른 판단을 할려면 좀더 많은 자료와 정보가 필요하다. 북한의 대남공작부 출신 탈북자가 있다면 좀더 정확한 정보를 얻을수 있을 것이다. 또는 70년대 당시의 북한 대남공작부의 암호교신 내용을 해독할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인혁당사건은 1차인혁당사건(64년)과 인혁당재건위사건(74년)으로 나눌수 있다. 우선 이들 사건은 당시의 우리나라 사법부가 당시의 (극한적 남북대치) 안보상황에서 당시의 법에 의해 재판한 사건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재판도 없이 수천만명을 학살한 당시 공산권국가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70년대 중반은 남한의 1인당 국민소득이 500불에 불과했고 지구의 절반이 공산권국가였던 시대로 월남이 공산화되는 등 공산주의가 잘나가던 시대여서 공산주의를 믿는 사람들이 남한에 많았습니다. 이런 상황을 이용해 북한은 간첩을 수시로 남파하여 지하활동,무장봉기 등으로 남한사회를 교란시켰습니다.




70년대 시절에는 무장공비사건이 사회를 지배했고 뉴스도 주로 남침땅굴, 간첩 얘기였고 학교에서도 선생님은 간첩식별법을 지도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학교에 가면서도 으슥한 산길을 갈 때에는 무장공비가 나타날까 걱정을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1968년 북한은 무장간첩을 연이어 남파시켜 1.21사태와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사건을 일으켰으나 무장공비 113명이 사살되는 등 한계를 보이자 이후 요인암살, 지하땅굴 침투작전을 본격화하게 됩니다. 74년8월에는 조총련계간첩(친북좌익 간첩)에 의해 육영수여사가 암살되었고 74년11월에는 고랑포에서 북괴의 제1남침땅굴이 발견되었고 75년 4월에는 철원에서 북괴의 제2남침땅굴이 발견되었습니다.




1975년 4월30일에는 월남이 공산화되어 자유월남시민들 수백만이 학살당했는데, 당시 북베트남 공산월맹은 땅굴을 통한 신속한 작전으로 월남군에 치명적 타격을 주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당시 월맹과 북한은 비슷한 시기에 서로 비슷하게 땅굴작전을 펼쳤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만일 당시 박정희정부가 북괴의 남침땅굴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74년에 체포된 인혁당관련자들이 죽은 것은 1975년4월인데 그 시기는 월남이 공산화되기 바로 직전의 시기입니다. 1975년 3월부터 공산월맹은 평화협정을 어기고 탱크를 몰고 월남을 향해 진격했고 1975년4월30일 월남은 패망합니다. 75년4월은 이렇게 국내외로 절체절명의 안보위기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남한내 대학가 등에서 활동하던 종김주사파 공산주의자들이 사상전향을 하는 것은 90년대초반 이후입니다. 1991년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이 붕괴된 이후 많은 사람들이 사상전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70년대중반은 월남,캄보디아,라오스가 공산화되는 등 공산주의가 잘나가던 시대였습니다. 당시에는 공산주의를 믿는 사람들이 남한에 많았습니다. 공산주의에 대한 환상은 마약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자유,종교,사유재산,상업행위를 모두 부정하고 변증법적 유물론을 믿던 당시 공산권국가들은 종교인,자유시민,반공인사 등을 재판도 없이 수천만명을 학살하고 죽였습니다. 모택동은 1천만명을 학살하고 4천만명을 굶겨죽였고 스탈린은 2천만명을 학살했고 김일성은 9백만명을 학살하거나 굶겨죽였습니다. 월남이 공산화되고 공산당은 자유월남사람들 3백만명을 학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북한의 남침땅굴이 계속 발견되고 우방국가 월남이 공산화되는 이런 상황에서는 반공분위기가 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혁당 관련자들이 북한방송 청취하고 그것을 노트까지 해놓고 활동했다는 것은 숨길수 없는 사실입니다. 인혁당관련자들이 단지 좌익이념을 연구하는 좌익써클이었을까요? 단지 이론적 공산주의자들이었을까요?




김형욱은 역대 중앙정보부장(안기부장, 국정원장 포함)중 최장기 재임기록을 세웠지만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해임당한 후 미국에서 반정부활동을 해왔던 인물이다. 그런 인물인만큼 그의 회고록에는 박 전대통령에 대한 부정적인 내용들이 많이 들어 있지만 이 인혁당 사건에 대해서 조작됐다는 말은 없고 다만 그의 표현대로라면 '심증은 뚜렷하지만 물증은 없었던 까닭'에 자신이 중앙정보부장으로 재직하던 7년 동안 가장 다루기 어려웠던 사건이라고 털어 놓고 있다.




김형욱 회고록에 따르면 1964년 1차 인혁당사건 당시 주범인 金培永(김배영)은 체포된 후 일단 무혐의로 풀려난 틈을 타서 또 다른 공범인 미체포된 禹東邑(우동읍)과 이북으로 도주하였고 지령을 받고 다시 남하하였다가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았다. 당시 그는 공작금과 난수표, 권총을 소지하고 있었고 북괴로부터 지령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1차 인혁당사건 당시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로 풀려났던 자들이 그후 몰래 북한에 들어가 지령을 받고 다시 남한으로 내려와 간첩활동을 하다 체포된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인혁당이 북한과 연결된 조직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당시 검찰은 중앙정보부가 수사한 이 사건에 대하여 증거가 불충분하거나 혐의를 부인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기소를 거부하는 등 공소를 엄격히 하였다. 당시 이 사건의 기소를 거부하였던 이용훈,여운상(여운형의 친척) 검사가 물러나는 등 진통을 거듭한 끝에 처음에 구속기소 되었던 26명중 13명은 검찰이 공소취하, 공소장변경등으로 석방되었고 기소되었던 13명 중에서도 副責(부책) 도예종에게 징역 3년, 양춘우에게 징역 2년을 선고한 것 외에 나머지 11명에게 모두 무죄판결을 내렸던 것이다. 이것으로써 당시 빠져나갈 사람들은 모두 빠져나갔고 최소한의 인원만이 처벌을 받은 것이다.




도예종은 10년 후 다시 인혁당을 재건하려다가 체포당해 기어이 사형을 당한 것이다. 그리고 1974년 2차 인혁당 사건 당시에 이들의 구명운동을 하다가 추방당했던 시노트신부는 2005년 4월 3일 방영된 MBC TV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자신은 "인혁당이 무고하다고 주장한 적은 없으며 다만 형이 너무 무겁다고 말하였을 뿐"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즉 당시 인혁당 구성원들의 구명운동을 했던 외국인 신부조차도 인혁당의 무죄여부에 대해서는 분명한 확답을 피하고 있는 것이다.



2차인혁당 사건 발생 시기가 월맹의 재침공시기와 비슷하고 육여사 암살, 북한의 남침땅굴 본격화 시기와 비슷하다는 것이 단지 우연일까? 비슷한 사건들이 1974년부터 1975년 사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2차 인혁당사건 당시 함께 체포되었던 이철,유인태 등 민청학련 구성원들은 중형을 선고받았음에도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고 석방되었던 점을 감안하면 인혁당은 북괴와의 연결고리가 있었다는 조사결과에 상당한 신빙성이 있었을 것이란 점이다. 이 두 사건이 모두 정권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면 굳이 민청학련은 풀어주고 인혁당은 사형을 집행한 이유가 무엇인지도 밝혀내야 하는 것이다. 왜 똑같은 국사범이라면 한 쪽만 봐 줄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좌익에서 우익으로 전향한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면 인혁당 사건을 이해하기 쉽다. 월간조선에 나온 서울대 불꽃회 출신 김정강 인터뷰 기사에 의하면 그는 교도소 안에서 인혁당 주동자 여정남을 만나 친해졌는데 여정남이 지나가면서 "동지! 그렇지만 우리의 당은 영원하오! " 하더란 겁니다. 인혁당의 실체를 강하게 암시하는 증언이 아니겠습니까? 여정남,도예종,서도원 등은 2차인혁당 사건으로 처형된 사람들임.




좌파에서 우파로 전향한 또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 보자. 이후는 그의 글이다. 인혁당이란 인민혁명당의 약자다. 한일협정반대 데모와 유신헌법철회 데모가 가열되었던 1974년 계엄령 선포 하에서 발생된 두 차례의 용공 사건을 인혁당 사건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1차 사건의 경우 당시 한일회담반대투쟁을 주도했던 서울대의 “불꽃회”와 고려대의 “구국투쟁위원회” 등 학생운동을 배후 조종한 공산혁명세력을 적발한 사건이다.




2차 인혁당사건은 민청학련 사건이라고 불리우는데, 유신독재반대투쟁을 주도했던 배후세력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라는 북과 내통하는 공산혁명세력으로 적발된 사건이다. 진실위의 발표는 이들이 공산혁명을 추구하는 용공세력이라는 박정권 시절의 판결이 조작된 것이며, 북한의 방송을 몇 번 청취하기는 했지만, 이들은 공산혁명세력은 아니고 단지 한일협정과 유신체제에 반대한 민주세력이라는 것이라고 주장을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진실위의 판단은 좌파들이 그토록 수구언론으로 매도하는 신동아나 월간중앙에 80년대 게재되었던 수준의 내용일 뿐이다. 사실 인혁당사건은 그리 많은 자료가 남아있지 않고, 또한 인혁당 사건에 대한 그간의 담론이 조작의 여부에 초점이 맞추어져 본질과는 다소 괴리가 있었다. 신동아나 월간중앙의 기사 역시 그런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피상적으로 접근한 기사에 불과할 뿐이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인혁당 사태에 대해 가장 깊은 수준의 연구를 했던 것이 80년대 NL(주사파)과 PD(맑스파)로 나누어지는 당시 학생운동 세력이었다. 그들은 당시 남한사회의 좌파세력의 상황을 정확하게 분석을 한다. 60년대 이전 북한의 노동당을 전위정당으로 규정하는 “민주 기지론”에 의거 활동하던 남한의 좌익들은, 60년 이후의 상황변화에 따라 남한 내의 독자적인 지하당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민주기지노선 하에서 지역혁명론”을 제기했다.




즉 “남한 인민들의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에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맑스-레닌주의를 지침으로 하는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광범한 근로대중의 이익을 대표하는 혁명적 당을 독자적으로 꾸려야 하며, 이 당을 중심으로 하여 지역혁명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인혁당사건이나 통혁당사건 같은 박정희 시절의 공안사건을 남한 내에 전위조직을 건설하는 혁명과업의 과정으로 판단을 한다.




또한 인혁당 사건에 연루된 부산의 암장(마그마)그룹은 1954년 고교학습서클로 태동하였지만, 4.19 당시 또 다른 인혁당 사건의 연루자들인 도예종, 서도원 등을 만나 전위그룹을 형성하며 맑스레닌선집, 스탈린선집, 도이치이데올로기, 반듀링론, 공산당사 등 각종의 이론서와 월북작가, 역사학자들의 책을 섭렵하며 공산혁명운동을 수행하였다. 그 중에는 인혁당을 80년대 학생운동 양대세력 중 맑스파인 PD세력의 원조로, 통혁당은 NL세력의 원조로 보는 자들까지도 있었다.




또한 좌파역사학자들은 인민혁명당이라는 이름이 베트남의 인민혁명당에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주장을 한다. 이들이 이러한 이름을 정한 이유는 베트남이 분단되어 있는 상황에서 북베트남의 노동당을 형제당으로 생각했던 남베트남내 공산세력과 같이, 북한 노동당을 형제당으로 생각하는 남한 노동당의 입장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까지 주장을 한다. 좌파역사학자들의 이러한 자료는 다 인용할 수 없을 만큼 많다.




즉, 인혁당사건은 당시 남한 내의 공산혁명세력이 북한 노동당과 형제의 관계를 유지하며 남한 내의 공산혁명을 주도했던 전위조직임은 좌파역사학자들이 이미 밝힌 내용이다. 그런데도 진실위는 뻔뻔하기 그지 없게 이들을 공산혁명세력이 아닌 민주세력으로 둔갑을 시키며 대국민 기만을 하고 있다. 흘러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이들을 복권시키고 국가에서 보상금도 주며, 민주투사로 둔갑을 시킬 모양이다.




나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인혁당 사건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처리가 절차나 과정상 여러 가지 문제가 있으며 유감으로 생각을 한다. 형량도 심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고 해서, 인혁당 사건에 연루된 공산주의자들이 민주투사로 둔갑을 한다는 것은 또 한번의 기만이며 조작이고 대국민 사기극이 아니겠는가? 물론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정말 솔직히 까놓고 이야기를 해 보자.




쉬쉬하지만 우리사회에 모두 다 알고 있는 비밀이 있다. 지금 현정권의 주축이 된 80년대 학생운동권 세력들의 정체가 뭐냐는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민주투사를 참칭하고 있지만, 그들이 김일성 주체사상이나 맑시즘을 추종하며 남한 내의 공산혁명을 꿈꾸던 자들이 아닌가? 부디 아니라고 하지 말기 바란다. 나 역시 그 조직의 한 부분에 속해 있었고 경험한 사실이니 말이다. 위에 인용한 자료도 원한다면 출처를 다 알려줄 수 있다.




그런 자들이 정권을 잡고 스스로 민주투사를 참칭하고 있으니, 인혁당 사건에 연루된 공산혁명분자들 역시 민주투사로 둔갑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자신들이 구린 것이 있으면 차라리 하지를 말던지, 도대체 이 기만적이고 비열한 정권을 어찌 평가해야 할까! 예측은 했지만, 너무도 뻔뻔한 그들의 기만에 치가 떨릴 정도다. 부디 해도 해도 정도껏 하기를 바란다.



김서방
2007-01-27 22:12:44
644 번 읽음
  총 4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1. lamune '07.1.27 11:08 PM 신고
    혹시 한나라당 당사에서 접속 하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만약 맞다면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나라당 하는 일...변한게 없군요... ↓댓글에댓글
    • 1. 김서방 '07.1.28 1:34 AM 신고
      놀지마라 노빠야..한나라당이여기서 왜튀어나오냐.. 자나깨나 한나라당 아님 조선일보냐.
      본인은 한나라당하고조선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다...
      생각하는 거라고는 쯔쯔...
  2. 2. 브랜단 '07.1.27 11:45 PM 신고
    저희 아버님도 매스컴에 세뇌되어 박정희 죽이기에 찬성하고 계시더군요.
    어머님은 관심도없으시네요.
    두분다 황우석 박사 이야기는 아무것도 모르세요.
    정말 이리도 정세에 어두운 분들이 많다는 것에 놀라울 따름입니다.
    노무현의 박정희 죽이기는 결국 성공하려나 봅니다.
    한국 역대 최고의 대통령을 죽여서 얻으려는게 무엇일지.. ↓댓글에댓글
  3. 3. ▒ 마왕 ▒ '07.1.28 3:39 PM 신고
    이제는 한나라당이 집권을 하면 다시는 좌파정권이 득세하기 힘들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유야 너무나도 많은 관계로 생략합니다.

    알고싶으시분은 김서방님 한테 물어보세요..ㅎㅎㅎㅎㅎㅎㅎ 설명하기도 귀찮으니.. ↓댓글에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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