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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이 제왕입니다...

 
 
매우 힘든 시기입니다. 때로는 앞을 잘 가늠하기조차 힘들고, 때로는 곤혹스럽기까지 한 어려운 선택들이 매일같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수사적 원칙주의, 감상적 허무주의, 과도한 패배주의는 아무런 도움이 못 되겠지요. '호시우행(虎視牛行)', 호랑이처럼 보고 소처럼 나아갈 것입니다.
 
 
지난 연말 민주평통 연설 이후 뚜벅뚜벅 할 말도 하고 할 일도 하고 계시는 대통령, 연초 청와대브리핑에서 '소비자주권의 시대를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전문을 소개해주었던 정책기획위원회 오찬연설(12/28)을 기억하시지요. '신년특별연설'(1/23)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시더니 '국정과제위원회 특강'(1/31)에서 또 한번 같은 이야기를 하셨네요.
 
한번 요약해 보고 싶은 '명 어록'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거듭 피력하시는 대통령의 민주주의관에 대한 이해에 더하여, 요즈음 우리들 앞을 지나가고 있는 힘든 상황 그리고 보나마나 계속해서 닥쳐올 더 힘든 선택들을 준비하는 의미에서, 무척 뒷북이겠으나 그 날 대통령의 연설을 잠시 요약해보려 합니다. 신년연설도 곁들이면서 그 날의 오찬연설을 중심으로 요약하겠습니다.
 
시작은 대통령의 역사관이었습니다.
 
"저는 '되돌아가지 않는 역사'를 진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의 진보란 '제왕이 가진 풍요와 권력과 영광이 보통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지는 과정'입니다. 가장 획기적인 진보의 동력은 '민주주의'입니다."
 
이어지는 화두는 당연히 한국의 민주주의입니다.
 
먼저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를 두 단계로 나누어 정리하신 후 향후 과제를 다섯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삶 속에서 스스로의 체험으로 학습하며 쌓아다진 철학이기에, 늘 그렇듯 설명이 쉽고 알아듣기에도 아주 쉽고 명쾌합니다.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 1단계는
 
1) 다시는 군사독재권력으로 역류할 수 없는 수준으로 밀고 온 것이며 '완료형'입니다.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 2단계는 2) 구체제로부터 내려온 '특권'과 특권끼리의 '유착', 그리고 그 특권과 유착이 부당한 이득을 취하기 위하여 사용할 수 밖에 없는 '반칙'과 '부정부패'의 해체입니다. 마무리 단계이지만 '진행형'입니다.
 
특권의 또 다른 표현은 '기득권'이고 정치의 기득권은 '권위주의'와 '지역주의'입니다. 마무리 단계인 것은 권위주의이고 진행형인 것은 지역주의라고 하는 정치적 특권입니다. 그러하기에 '특권과 유착의 해체'는 '말이 통하고 상식이 통하는 사회'로 가기 위한 한국 민주주의의 두번째 역사이면서 동시에 진행형의 과제입니다.
 
이제 한국 민주주의의 향후 과제 5개입니다.
 
그 처음은 3) '다양성을 존중하고 나누어서 통합하는' 기술, '대화와 타협으로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제도와 문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4) 신뢰와 원칙과 투명성의 진보, 그 사회적 자본을 축적하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5) '소통'입니다. '말'이 통해야 하고 서로 말로써 토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왕은 말이 필요 없다고 말이 안 되는 이야기하면 안됩니다. ^)^ 대통령은 그래서 온몸으로 소통을 합니다.
 
 
신년연설에서는 보다 구체적인 예로 설명하십니다.
 
1)의 완료시점은 87년 6월 항쟁입니다. 2)의 권위주의 해체는 '국민인 대통령입니다.'라는 참여정부의 구호에서 시작했습니다. 4대 권력기관, 국정원·국세청·검찰·경찰을 제 자리로 돌려보냈고, 더 이상 당도 국회도 지배하지 않습니다. 마무리되었습니다. '더 이상 대권은 없습니다.'
 
대선자금 수사, 투명 선거문화, 정경유착 해체, 권력형 비리 해소는 특권과 반칙 해체의 뚜렷한 성과이지만 진행형도 있습니다. '언론특권의 횡포'입니다. 언론권력이 스스로를 위한 정치권력이 아니라 시민권력으로 돌아갈 때까지 굴복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지역주의'라는 정치특권을 해체하지 못했습니다. 지역주의 청산을 통한 국민통합, 못했습니다. 열린우리당의 창당은 분당이 아니라 87년 지역구도 탄생 이전의 여야구도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는데, 청산하지 못한 지역주의의 원심력 때문에 다시 열린우리당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3)은 정책을 중심으로 토론, 타협할 수 있는 '연정'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수준의 민주주의입니다. 대화와 타협의 민주주의, '대연정', 시대를 앞선 성급한 제안이었고 다음 시대의 과제입니다.
 
 
네번째 과제는 6) '소비자가 주권자가 되는' 민주주의입니다.
 
소비자가 시장을 지배하고 정치를 지배하게 됐을 때 그때 복지도 자연스럽게 해결되며, 우리 민주주의 최고도의 상태입니다.
 
절대로 그냥 되지 않습니다.
 
어느 정치인도 어느 언론도 그냥 국민에게 주지 않으며, 상호작용을 통해 시민들의 역량이 그만큼 성숙했을 때 '소비자 주권'이 가능해 집니다. 시민들이 정치를 정치인 수준으로 전략적으로 사고할 수 있을 때, 미래를 역사가들의 철학적 통찰력 수준으로 통찰할 수 있을 때, 정치인 수준의 전략을 가지고, 정책하는 사람만큼의 전략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소비자 권력'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한국 민주주의의 마지막 과제입니다.
 
6)의 토대 위에서 7) 시민의 역량이 '상향식 민주주의'를 해낼 수 있을 만큼 단련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복지도, 윤리도, 통일도 그냥 따라옵니다.
 
전 국민이 정치를 통해, 시장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지배의 메커니즘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개인 인자들이 사회적으로 통제하려는 노력들을 할 수 있는 시기가 옵니다. 인터넷도 그 중에 아주 중요한 기능을 할 것입니다.
 
저는 그런 사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미래 사회에 대하여 낙관하는 사람만이 책임을 맡을 수 있습니다. 소비자가 주권자가 되는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이 세상을 보는 눈이고, 저의 비전입니다."
 
대통령의 역사관을 시작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와 과제에 대한 대통령의 철학, 그리고 미래에 대한 그의 낙관과 비전까지, 그날의 연설에 대한 요약이 끝났습니다.
 

1/29일의 우리당 중앙위원회의가 기간당원제 당헌을 폐지하였습니다.
 
기간당원이 선출한 대의원, 그리고 그 대의원들이 선출한 우리당 중앙위원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기간당원제의 폐지에 찬성하였습니다. 비대위에서 한 번, 중앙위에서 또 한 번. 얼마나 기구한 팔자를 타고 태어났길래 기간당원제는 이렇게 두 번에 걸쳐 죽어야 했을까요.
 
1) 비대위의 칼부림 - 정동영계의 행동대장 이강래가 불러주고 김근태계의 얼빵참모 이목희가 받아적은 기간당원 출당명령서 → 2) 당헌개정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 - 깊이 생각할 틈도 말릴 틈도 없이 이어진 기간당원의 생존본능적 비명 → 3) 정동영(및 그와 '통'한 압도적 다수)의 자해 공갈협박 → 4) 참정연의 결정과 중앙위의 퇴각
 
사무라이 할복자살이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 분들이 아직도 있습니다.
 
얻어지는 것에 비해서 잃어버린 것이 너무 크다고 하십니다. 유연함이 아니라 정략적인 것이고 심각한 '원칙'의 손상이었다고 하십니다. 다시 '그날'을 기약하는 것이 무척이나 아득해 보인다고도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비대위로 상징되는 당권파는 죽이려 했습니다.
 
단지 기간당원만이 아니라 기간당원의 믿음과 희망이 다시는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그 싹을 잘라버리려 했고, 농부가 돌아와서 다시는 씨를 뿌리지도 못하도록 그가 돌아올 땅까지 모조리 없애버리려 했습니다. '함께 가려면 무장해제하고 와라!'가 절대 아니고, '그냥 너희들은 나가라!'는 거고 '당신은 돌아올 꿈도 꾸지 마라!', 그거였죠.
 
익숙한 그들의 땅으로 되돌아가기 위하여 그동안 힘들게 일궈놓은 간척지를 도로 수장시키려 했습니다. 신대륙이라도 찾고 있는 것처럼 포장하지만, 그들이 가려고 하는 곳은 실은 그들에게 아주 익숙한 땅덩어리입니다. 모두를 배불릴 수 있을 것처럼 말하지만 그저 몇몇의 배를 채워 줄 뿐이고요. 덕분에 요즘 그 곳 인디언들의 몸값이 연일 상한가에 최고가를 경신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 주지 않은 겁니다.
 
적이 원하는데로 하면 지고 만다는 전쟁의 원칙, 전투의 법칙을 소처럼 묵묵히 따랐습니다. 아울러 다시 믿음의 씨앗을 뿌리고 희망의 뿌리를 내려야 할 우리의 이 간척지를 지켜냈습니다. 우리당을 지켜냈고 참정연을 지켜냈습니다. 이 간척지를 눈 뜨고 수장시킨 후에 다시 바닷물을 막아 이만큼의 땅이라도 일구어내려면 또 얼마만큼의 세월과 참여와 희생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뜻밖에도 발목잡힌 그들이 짜증을 내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버벅댑니다. 하지만 핑계를 잃었다고 오래 발목잡혀 있기야 하겠습니까. 허를 찔렸으니 잠시 당황도 되겠지만 이미 보따리 챙겨놓은 사람들이라면 결국 가겠지요. 끝내 명분은 얻지 못했기에 '왜?' 라는 말에는 그저 입맛만 다시면서.
 
그저 소작농이나 부리려 했던 가짜 농부들, 그 봉건 지주들이 다 떠나고 나면, 그 자리에 진짜 농부가 돌아오겠지요.
 
 
대통령의 어록으로 돌아갑니다.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세종이 되고 싶었으나 태종이 되어야 했던 대통령.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에서 새시대의 첫차가 아니라 구시대의 막차를 마다하지 않은 대통령이었지만, 끝내 다 해내지 못하고 다음으로 넘겨 줄 수 밖에 없는 것이 있다 하십니다.
 
'언론특권', 참여정부의 마지막 날까지 굴복하지 않고 싸우겠지만 그 싸움은 참여정부 이후에도 계속될 것 같답니다. '권위주의'라고 하는 정치특권, 그리고 특권끼리의 유착이 저지를 수 밖에 없었던 '정경유착'과 '부정부패'의 반칙은 거의 마무리되었지만, 또 다른 정치특권, '지역주의' 청산을 통한 국민통합, 못했답니다.
 
그러했기에 다시 열린우리당이 그 지역주의 원심력에 흔들리고 있고, '대연정'의 좌절이 상징하듯, 대화와 타협의 민주주의, 이루지 못했답니다. 대통령의 회한이지요.
 
한가지가 더 있습니다.
 
바로 민주주의 최고의 상태, '소비자가 주권자가 되는' 민주주의로 가기 위한 시민의 민주적 역량입니다. 아직 상향식 민주주의를 해낼 만큼 단련돼 있지 않습니다. 그러하기에 열린우리당의 기간당원제도는 가장 고통스러운 실험일 수 밖에 없답니다. 우리의 회한입니다.
 
그런데 이건 대통령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대통령은 할 수 없고 따라서 해줄 수도 없습니다. 시민 스스로 해야 합니다. 참여하고 실천하면서 시민이 스스로 성숙되어야 합니다. 제왕의 풍요와 권력과 영광이 시민에게 나누어지는 것은 결코 제왕이 나누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상 어떤 정치인도 언론도 그들의 권력을 시민에게 호락호락 내어주지 않습니다. 돌려 받아내야 합니다. 뺏아야 합니다.
 
'제왕의 권력'에 맞서는 정치의 '소비자 권력'으로서의 '시민주권', 누구의 힘도 빌지 않고 시민이 직접 그들에게서 가져오는 것이고, 그래서 시작은 '참여'고 과정은 '쟁취'입니다.
 

우리당의 창당정신이라는 상향식 민주주의.
 
자신의 돈과 몸과 시간을 들여 당원으로 참여하는 국민이 당의 주인 되어, 당의 가치와 정책에 대한 결정권력은 물론 당직자와 공직후보자에 대한 선출권력을 보장받는 상향식 민주주의. '기간당원제'.
 
우리당에 기간당원으로 참여한 참여시민, 참여네티즌들은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싸워왔고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죽어나갔습니다.
 
기간당원이라는 이름이 자랑스럽기에는 사실은 정말 초라한 최소한의 당헌 당규를 얻어내기 위해 천신만고를 다 했던 때가 2003년의 창당과정이었고, 정동영을 정점으로 하는 당권파의 무차별 전략공천에 의해 무자비하게 칼부림을 당하며 무더기로 죽어나갔던 때가 바로 2004년의 4.15 총선이었습니다.
 
의회권력 쟁취를 위로로 삼을 틈도 주지 않고, 끊임없이 기간당원제를 상처 투성이로 만들면서 아예 없애버리고자 하는 '길고 길었던 내홍의 기간'이 이어졌습니다. 선거 때마다 도입하는 경과규정과 예외규정으로 종이당원, 동원당원이 판을 쳤고, 그걸로도 모자라는 당권파들의 원칙 없는 기획공천, 전략공천이 변함 없이 춤을 추었습니다.
 
기간당원이 권한을 행사하기 위한 선거일 전 입당만료일, 8개월은 한 번도 지켜진 적이 없고, 기간당원이 제대로 권한을 행사하는 상향식 공천은 아무리 눈을 씻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당에서 상향식 민주주의의 현실은 계속해서 '봉건적 정치질서로의 회귀'라고 하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그리고 몇일 전, 또 한번의 격렬한 내홍을 거치면서 벼랑 끝까지 몰린 기간당원들은, 그들의 알 카에다식 자해 테러로부터 이 뻘밭의 간척지를 지켜내기 위해, 피눈물을 흘리면서 그예 기간당원제 폐지의 굴욕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왜 그렇게 됐을까요.
 
어쩌면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여기까지였던 걸까요. 혹시 처음부터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처음부터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어쩔 수 없었던 선택', '가지 않을 수 없던 길'에 다름 아니었을까요. 장탄식이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끊임 없는 성명과 단식과 농성이 이어지면서, 패배감과 무력감에 굴복하는 기간당원들이 하나 둘 죽어나가면, 그 자리를 또 다른 기간당원의 참여로 채워넣곤 했지만, 대통령의 말씀처럼 우리의 참여 역량도 그들을 이겨내기에 여전히 모자랐던 것 또한 현실이었습니다.
 
힘들었습니다.
 
물론 힘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참여의 뿌리를 내리기에 이 곳은 너무나 척박한 뻘밭이었고, 기간당원제를 숙성시키기에는 온갖 위협과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어둠의 진흙수렁이었습니다. 전국의 우리당 어느 곳을 살펴봐도 온전한 상향식 공천을 할 수 있는 진성당원의 절대숫자를 확보하고 있는 지역은 한 손가락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기간당원제의 현실이었습니다.
 
당원권력의 임계점이 끊어오르려 할 때마다 그들은 페퍼포그를 동원하여 구태권력의 직격탄을 쏟아부었고 그 때마다 우리는 해산당했고 스스로도 해산했습니다. 전투가 끝날 때마다 간신히 주력군의 명맥을 지탱해 왔을 뿐입니다.
 
정말로 어이없었던 것은 내부에서 터져버린 배신의 지랄탄이었습니다.
 
한 때 우리의 지휘관이었던 사람이 정치 모리배의 식객이 되어있는 장면을 지켜봐야 하는 것은 굴욕이었습니다. 참여의 승리, 그 감격의 환호를 온 몸으로 함께 했던 동지들이 정치 브로커들의 몸빵이 되어있는 모습을 쳐다봐야 하는 것은 망연자실이었습니다. 마치 내 몸 구석구석에도 그 벌레 수십마리가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것 같은 끔찍함이었습니다.
 
살아남은 자들이 감내해야 할 몫은 그들의 적반하장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지랄탄에 힘 입은 기득권 정치 자영업자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우리를 무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눈에 더 이상 우리는 2002년처럼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허망함과 굴욕감을 이기지 못해 등을 돌리는 사람들이 늘어만 갔고, 그럴수록 그들은 그것 봐라 별거 아닌 거 맞구나 하며 마음껏 그들의 헌 칼을 휘둘러 왔습니다.
 
그 점입가경이 지금의 열린우리당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을 하고 있어야 합니까.
 
5년이 지났습니다. 그날과 놀랍게도 같아져버린 오늘을 보며 그저 헛웃음을 지을 수도 있습니다. 참여하는 당원이 주인이 된다는 건 일장춘몽이었구나 그저 헛헛해하며 발길을 돌릴 수도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그렇게 했던 것처럼 때로 정치를 안주 삼아 술잔이나 비우며 지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입니다.
 
하나 둘 도망가는 그들을 보며 이상하게 손아귀에 힘이 주어집니다. 입만 열면 정통과 평화와 민생을 말하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도 지금까지 느껴오던 난공불락의 오만함보다는 그저 비굴함과 초라함만이 보입니다. 단지 안쓰러울 뿐입니다. 정말로 우스워 보입니다.
 
자수하듯 차례차례 그들의 비겁한 커밍아웃의 고별사가 이어지고 있는데, 오히려 우리에게는 척추를 곧추세우게 하는 기분 좋은 팽팽함과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좀처럼 보이지 않더니 흐릿했던 시야를 넘어 드디어 또렷하게 적군이 보이고 아군이 보입니다.
 
대통령은 소비자가 주권자가 되는 시대의 도래를 낙관하고 있다 하셨습니다.
 
그것이 대통령이 세상을 보는 눈이고 당신의 비전이라고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대통령의 말씀처럼 어느새 우리도 이렇게 단련되어 있던 것일까요. 이대로 모든 것을 넘겨주고 호락호락 패배의 쓴잔을 받아 마시고 일어서기에는, 우리가 쌓아올렸던 영광과 굴욕의 유산들이 지금 고스란히 우리 안에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시작입니다.
 
이제서야 시작이고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하지만 처음이 아닙니다. 또 한번의 익숙한 시작일 뿐입니다. 이미 우리는 이기는 법을 알고 있고 지는 법도 알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승리의 영광도 패배의 굴욕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끊임 없이 집결하고 해산하기가 반복되었던 것은 어쩌면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임계점까지 끓어올리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뱀같이 교활하고 여우같이 영리합니다.
 
전쟁입니다.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난 후, 또 한번 영광의 승리를 거둔다고 해도, 전쟁에 참여했던 '시민'들에게 제왕의 권력과 풍요가 온전히 다 쥐어져 있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어느새 또 한 발자욱 우리 앞에 성큼 다가와 있겠지요.
 
이 전쟁이 결국 또 한번 '시민주권'의 임계점으로 우리를 끓어올릴 것임을 두렵게 예감합니다. 마침내 우리 손에 '시민주권'을 거머쥐는 그 날이 오고야 말 때까지, 아마도 우리 스스로 그렇게 하고야 말 겁니다.
 
젊은 날의 시민을 지탱해주었던 삶의 힘은 슬픔과 노여움, 그리고 부끄러움이었기 때문이지요.


ⓒ 새벽편지



2007-02-03 11:3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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